소설리스트

이계네토기-30화 (30/238)

〈 30화 〉 소피아(29)

* * *

며칠 뒤 랄크는 기레스를 호출했다.

"자 요구한 물건이다."

랄크는 기레스에게 부탁받아 준비해 온 물건을 건네 주었다.

"와. 감사합니다."

기레스는 물건을 받으며 활짝 함박웃음을 보이며 좋아라 했다. 그런 모습을 보면 기레스는 영락없는 어린애처럼 보인다.

"그런데 그게 뭐냐? 요즘 어린애들은 그런 걸 가지고 노는 거냐?"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책에 나오는 사람이 즐겨쓰는 무긴데 꼭 가지고 싶었거든요. 나중에 크면 주문제작해서 소장하는 게 꿈이었어요. 정말 손에 넣게 될 줄은 몰랐는데 헤헤."

'별 이상한 꿈을 꾸는 어린애도 다 있네.'

"그딴 걸 무기로 쓰는 사람도 있나?"

랄크는 기레스에게 준 선물을 생각하면서 고개를 갸웃 거렸다.

"아저씨는 잘 모를거에요. 희귀한 소설책이라서.."

"그러냐. 뭐 그딴 건 아무래도 상관 없지만.."

'아무래도 신경 쓰인단 말야.'

확실히 기레스가 이야기한대로 랄크는 소설책 따위에는 관심이 없고 아무래도 좋았지만 기레스가 요구했던 물건에 대해서는 상당히 신경 쓰였다. 기레스는 상세하게 수치까지 말해가면서 랄크에게 자신이 원하는 것을 수제로 대장장이에게 만들어다 줄 것을 요구했다.

랄크 정도의 위치에 있으면 그런 물건을 구하는 거야 시간만 있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고, 요구하는 물건이 가치가 높으면 높을수록 기레스에게 좋은 빚을 만들어 주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는 성실히 기레스의 요구를 들어다 주었다.

'설마.. 아니겠지.'

문득 랄크는 기레스에게 준 물건과 비슷하게 생긴 무언가를 생각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단순히 취향이 괴팍한 꼬맹이인 거겠지.'

'좋아.'

기레스는 물건을 잘 챙겨들고 집으로 돌아와서 안전한 장소에 숨겨 두었다.

'그나저나 상당히 잘 만들어 졌구만. 나같은 어린애의 말인데도 일처리는 확실하군.'

얼마 전 까지 마을 내에서 왕따를 당해온 아이의 요구 따위는 대충 구하거나 적당히 구슬려도 될텐데도 랄크는 기레스가 요구한대로 완벽하게 물건을 가져와 주었다.

'집에서 사용하기는 이르겠지.'

그는 기껏 공수해 온 만큼 물건을 적재적소에 사용하여 최고의 효율을 뽑아내고 싶었다. 기레스는 웃으며 다음 계획을 생각했다.

랄크에게 물건을 건네 받은 이후 기레스는 젤가나 주로 아이들이 있을 때 소피아를 요구해 왔다.

사실 별다른 일정의 조율이 없어도 학교는 여름방학을 맞이했기에 필연적으로 아이들은 집에 머무는 시간이 많아졌고, 자연히 소피아도 기레스와의 관계를 더 조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마당에 기레스는구태여 아이들이 있을 때 호출해대니 소피아의 불만은 풍선에 바람을 불어 넣은 것처럼 차곡차곡 쌓여 팽팽하게 부풀어 올랐다.

"흐윽."

소피아는 고운 미간에 인상을 찌푸리며 기레스에게서 살짝 떨어져 거리를 벌렸다.

"또 누가 왔어요?"

이제는 기레스도 그녀의 그런 행동에 나름 익숙해 졌다.유페르 가문의 집은 작지는 않았지만 궁궐처럼 넓은 것도 아니어서 소피아는 시도 때도 없이 정사를 방해 받아야만 했다.

소피아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불만스럽게 말했다.

"티나인 것 같아."

이제 발자국 소리만 들어도 누구인지 알 수 있을 정도로 소피아의 감각은 예민해 졌다. 최근 젤가는 집 안에 있는다 해도 소피아가 기레스를 만나는 것을 다소 용인해주며 별다른 신경을 기울이지 않았지만, 아이들은 달랐다.

하일즈와 티나는 기레스는 되고 자신들은 안된다는 것에 상대적인 박탈감을 느끼고 있었다.

소피아가 아이들에게 냉랭하게 대하는 것은 아니다. 하일즈와 티나에 대한 마음은 상당히 식어 버렸다지만 기레스가 원하고 있기에 소피아는 이전과 다를 바 없이 아이들을 잘 챙겨주고 있었다.

분명 전과 다를 바 없는 어머니의 모습이었지만 그럼에도 더 사랑받는 기레스가 존재한다는 것 하나만으로 아이들에게는 이미 같은 사랑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자신들도 기레스처럼 소피아에게 더 애정을 받고 싶다는 생각은 점점 더 부풀어 올라 하일즈와 티나는 소피아를 찾아다니기까지 하면서 은근히 자신들을 어필했다. 하지만 어필을 하면 할수록 소피아는 기레스와의 시간을 '방해 받았다는' 생각에 점점 더 자신의 자식들에 대한 정은 떨어져만 갔다.

인정 받고 싶으면 인정 받고 싶을수록 그나마 소피아의 마음 속에 존재했던 사랑이 점점 식어만 간다는 현실은 그야말로 아이러니하기 짝이 없었다.

티나의 발소리가 지나가자 기레스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응?"

이렇게 누군가가 찾아올 때면 언제나 소피아가 먼저 한숨을 쉬었지만 오늘은 그녀가 한숨을 쉬기도 전에 기레스가 먼저 선수를 쳤다.

"방학이 되니까 오히려 엄마랑 이렇게 있을 수 있는 시간이 더 줄어든 것만 같네요."

"그러게... 하으읏.."

티나가 근처에 있기에 대놓고 살을 섞을 수는 없었지만 이야기를 하는 척 하며 본방에 들어가지 않고 살짝 애무해대는 것은 가능하다.

"그래서 말인데요. 저 부탁이 하나 있는데.."

"부탁?"

'기레스가 어쩐 일이지?'

"뭔데?"

"예전에 아버지가 하일즈와 티나를 데리고 바다라는 곳에 놀러 간 적이 있었잖아요?"

"그랬지. 응­­­ 아흐응­­­"

기레스의 손이 그녀의 젖무덤을 조물거리자 소피아는의 입에서는 행복한 교성이 새어나왔다.

"저도 엄마와 바닷가를 가보고 싶어요."

그 말에 소피아의 가슴은 주체할 수 없이 두근 거렸다. 달리 별다른 말을 붙힌 것이 아님에도, 그녀는 기레스가 '가족끼리'가 아닌 '자신과' 여행을 가고 싶다고 말한 것이 너무도 행복했다.

'기레스와 단 둘이서 여행을?'

누구에게도 방해 받을 일 없이 하루 종일을 기레스와 함께 있을 수 있다는 상상만으로 그녀의 뇌는 기대감으로 저릿거린다.

1년 전, 젤가는 몸이 허약한 기레스를 빼놓고 하일즈와 티나를 데리고 바다에 놀러 갔다 온 일이 있었다. 당시 기레스는 여름감기의 후유증으로 상당히 몸이 약해진 상태였기에 소피아는 기레스는 데려갈 수 없다는 젤가의 의견에 별다른 의심을 하지 않았었다.

'지금와 생각해 보면 아마 기레스가 아픈 걸 노린 것이었겠지.'

그런 생각이 떠오르자 소피아의 가슴에는 불같은 분노가 피어 올랐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녀는 그 분노조차도 자신이 써먹기 좋은 변명에 이용해 먹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요염함이 감도는 사랑스러운 미소를 짓고 기레스에게 말했다.

"그렇네. 기레스 그럼 같이 여행 갈까?"

"둘이서만이어도 괜찮아요?"

"물론이지. 젤가도 '그렇게' 했으니까.."

'거기에 둘이서가 아니면 의미가 없잖아..'

소피아는 자신이 나서서 자연스럽게 기레스와 입을 맞추고 혀를 섞었다. 대부분 기레스의 응석에 기대 애욕의 행위를 즐기는 소피아로서는 이색적인 일이다. 기레스는 그런 그녀에게 포상이라도 주는 듯 정성스레 혀를 뒤섞어 주었다.

입 만으로도 섹스를 하고 있는 것만 같은 미칠듯한 쾌감에 소피아의 여행에 대한 기대감은 넘쳐 쏟아질 정도로 가득 차올랐다.

"뭐?"

"기레스와 여행을 다녀오겠다구요."

"어디를?"

"예전에 당신. 하일즈와 티나를 데리고 [히벨리에]에 다녀온 적이 있었죠?"

"그 그랬지. 작년이었던가?"

젤가에게 기레스를 괴롭히던 시절의 일은 이제 흑역사나 다름 없었다. 본인이 주절 거리면서 불평하는 것은 상관 없지만 가급적 소피아의 입에서 만큼은 듣고 싶지 않은 일들인 것이다.

"그때는 몰랐는데.. 고의적으로 기레스를 따돌리기 위해 기레스가 아플 때를 노린거죠?"

날카롭게 쏘아 붙이는 소피아의 말에 젤가는 한마디 대꾸도 못하고 꼬리를 내렸다.

"미 미안해."

"잘잘못을 따지려고 꺼낸 말은 아니에요. 거기에 저한테 미안해 봐야 의미가 없고 말이죠."

"기레스한테도 사과하고 올게."

소피아는 손가락으로 젤가의 움직임을 가볍게 막으며 말했다.

"사과보다도 기레스에게 필요한 건, 그에 상응하는 추억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이번에야말로 내가.."

"무슨 소릴 하는 거에요. 아무리 기레스가 당신이 변했다고 생각한다지만 그 끔찍한 일들을 한 주제에 이제와 갑작스럽게 아버지가 바닷가에 데려가 주면 기레스가 좋아할 것 같아요? 오히려 부담스럽게만 느껴질 게 뻔하잖아요."

소피아는 답답하다는 듯 책망하는 투로 말했다.

"그것도 일리가 없는 건 아니지만.."

"그러니 여기선 '제가' 기레스에게 소중한 추억을 만들어 주고 올게요."

'덤으로 저도 말이죠~'

소피아는 요염한 미소를 띄우며 생각했다.

"아니. 그럴거라면 모두가 함께 가는 게 좋지 않을까?"

"모두가 함께?"

달콤한 상상에 찬물을 끼얹는 젤가의 제안에 소피아의 눈은 싸늘하게 식어갔다.

"그게 그렇잖아? 그 지금까지의 일들을 잊는 화해의 차원에서 모두가 함께 여행을 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지 않아? 가족 여행의 추억이라는 식으로 가면.."

젤가는 어떻게든 자신도 그 자리에 끼고 싶었다. 최근 젤가는 달콤한 첫사랑에 빠진 청소년마냥 소피아에게 흠뻑 빠져 있었다.

'오랜만에 소피아의 수영복을 보고 싶어!'

이전에도 예쁜 그녀였지만 지금은 그야말로 사람을 홀리는 마성을 물신 풍겨대서, 소피아의 수영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그는 끓어오르는 욕정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한명은 마을 단위로 괴롭히게 만든 주체고, 한명은 하루에도 수차례 폭행을 가한 동생. 그리고 오물을 먹여가면서 괴롭힌 여동생과 함께 하하호호 여행을 간다고요?"

"아 아니 그건.."

"물론 저도 기레스와 모두가 화해했으면 좋겠어요. 하지만 아직 시기상조가 아닐까요?"

"하지만.."

다소 냉랭한 반응이었음에도 포기하지 못하고 질척이는 젤가에게 소피아는 부드럽게 접근해 속삭였다.

"돌아오면 봉사해 줄테니까.."

젤가는 소피아의 교태스런 속삭임에 오싹오싹할 정도의 흥분을 느꼈다.

"저 정말이지?"

"물론이죠."

"저기.. 기레스와 여행 가는데 뭐 필요한 게 있으면 말만 해! 무엇이든지 구해다 줄테니까!"

젤가는 흥분에 콧김까지 내뿜으며 좋아라 했다. 평소의 근엄한 모습은 전혀 찾아 볼 수 없는 발정난 짐승 같은 모습이다.

"고마워요. 젤가."

"뭘! 아내가 원한다면 남편으로서 이정도는 기본이지. 즐거운 여행이 될 수 있도록 도와줄게! 나만 믿어!"

"네. 정말로.. 기대되네요."

그녀는 여러가지의 의미가 담긴, 남자의 혼을 쏙 빼놓는 야릇한 미소를 띄우며 화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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