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화 〉 소피아(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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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이후 기레스를 대하는 젤가의 태도는 완전히 달라져 버렸다. 이전에는 소피아의 눈치를 봐야 하기 때문에 마지 못한 느낌이 있었다면 지금은 기레스를 진심으로 잘 대해 주려고 하는 것 '같은' 행동이 도드라지게 나타났다. 물론 십 수년간 싫어했던 감정이 갑자기 좋아질리는 없으니 진심인 것처럼 보여도 진심일 리는 없다.
"하핫 기레스 이것도 더 먹거라."
'도대체 어떻게 조교를 해버린 건지..'
부자연스러움을 넘어서 다소 부담스럽기까지 한 젤가의 변모에 조교할 것을 알고 있었던 기레스는 물론이거니와 하일즈와 티나마저도 그 변화에 당황해 했다.
"앞으로 곤란한 일이 있거든 이 아버지에게 뭐든 말하거라."
기레스는 실소가 터져 나오려 하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마을 내에서 자신을 가장 열심히 괴롭힌 사람에게서 튀어나온 발언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웃음밖에 나오지 않는 것이다.
젤가가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싹 바뀌기는 했지만 기레스는 그에 대해서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앞으로 조금 더 편해지는 정도려나.'
변모한 젤가에 대한 기레스의 감상은 딱 그정도에 불과했다. 그가 소피아를 젤가에게 다시 붙혀준 이유는 좀 더 소피아를 지독한 여자로 만들기 위한 광대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금방은 소피아의 음탕한 봉사에 일견 젤가의 입장에서는 좋아 보일지 모르지만, 실제로 젤가는 파멸의 길로 향하는 지옥행 열차 티켓을 뽑아든 것이나 다름 없다.
"어이~ 기레스."
'뭐지?'
쾌활하면서도 걸걸한 목소리가 기레스를 불렀다. 괴롭힘은 사라졌다고 하지만 이런 식으로 친숙하게 기레스를 부르는 사람은 없었다. 기레스는 목소리가 향하는 방향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랄크 아저씨?"
"하하 오랜만이구나 기레스. 혈색이 아주 좋아졌는데?"
"네. 안녕하세요."
기레스는 노예 시절의 기분을 끌어 올려 고개를 90도로 꺽어가면서 깍듯이 인사했다.
"흐음."
랄크는 기레스를 곁눈질 해보았다. 랄크는 겁을 먹은 듯 몸을 움츠린 채로 불안한 듯 좌우로 눈을 굴리는 기레스를 보고 생각했다.
'저런 모습을 보면 전과 별 다를 바 없어 보이는데 말이지.'
"그런데 여기는 무슨 일이세요?"
기레스와 랄크가 만난 곳은 등하굣길이었다. 평소라면 이시간에 랄크를 만날 일은 없는 장소다.
'하지만 저런 모습이 연기라면?'
랄크는 멍해 보이는 기레스를 보며 그런 의문을 품어 보았다. 매사에 경박한 '연기'를 하면서 분위기를 살피는 랄크기에 더더욱 그 심연의 두려움을 느낄 수 있었다. 타인에게 가면을 쓰는 자는 그 만큼 그 이면의 어둠과 대면하며 살고 있는 것이다.
'뭐 저게 연기일 때의 일이지만, 아무래도 그럴 일은 없겠지.'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면 기레스가 연기를 하고 있을 가능성은 0에 가까웠다.
"아. 사실 너를 만나러 이곳에 온 거야."
"저 저를요?"
"그래. 지난 일에 대한 사과라도 할까 해서 말이지."
랄크에게 기레스의 저 모습이 연기인지 아닌지 사실 여부 따위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만에 하나 저 순박한 모습이 연기라면 더더욱 이 사과가 필요할 것이고, 저 얼빠진 모습이 연기가 아니라면 그건 그것 나름대로 기레스를 이용해서 소피아의 눈도장을 찍을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아 네. 감사합니다."
랄크가 속으로 기레스를 가늠해 보듯 기레스도 기레스 나름대로 랄크라는 남자를 어느 정도는 알고 있다.
기레스가 판단하기로 그는 마을 내에서 제일가는 수완가였다. 겉으로 보기에는 경박한 듯 보이지만 실제로 그를 진심으로 싫어하는 이는 그다지 많지 않았다.
젤가는 능력은 있어도 그 특유의 고지식하고 거만한 성격으로 적을 많이 만드는 데에 비해, 랄크는 특유의 유들유들한 사고로 적을 만들지 않는다.
'나를 괴롭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랄크는 겉으로 보기와는 다르게 굉장히 영리한 남자다. 그는 젤가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는 기레스를 괴롭힐 필요가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랄크는 젤가가 이 마을의 진정한 실세가 아니라는 것 또한 제대로 숙지하고 있었다. 그런 그가 선택한 것은 괴롭히면서 괴롭히지 않는 방법이었다.
'어이 기레스 거기서 밍기적 거리지 말고 담배가 다 떨어졌으니 얼른 가서 담배나 빨리 사와라.'
기레스는 자신을 괴롭히던 랄크의 모습을 떠올렸다. 분명 랄크가 그에게 했던 행동은 노예를 부리는 모습 그 자체라 할 수 있었지만, 그 상황은 보통 기레스가 심하디 심한 '짐승 이하의 취급'을 받고 있을 때였다. 차라리 잔 심부름을 하면서 조롱 당하는게 몇배는 편할 정도로 비참할 때 랄크는 주로 기레스를 불러 잔 심부름을 시키곤 했었다.
기레스를 괴롭히는 조건을 충족시켜서 젤가를 만족시키면서도 소피아에게 혐오까지는 가게 하지 않을 미묘한 선을 지켜가며 랄크는 줄다리기를 해온 것이다.
그렇다고 랄크가 사람과의 관계에만 치중하는 간신배 같기만한 인간이냐 하면 그런 것도 아니다.
마을의 발전에 젤가 못지 않게 기여할 수 있을 정도로본인의 능력또한 나름대로 출중해서 별다른 뒷배 없이 본인의 수완 하나만으로 마을 유력자의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것이랄크라는 인간이었다.
"그럼 전 이만.."
"뭘 그리 서두르는 거냐? 어차피 할 일도 없으면서."
기레스는 랄크를 어려워하는 것처럼 머뭇거렸다. 실제로도 그다지 가까워 지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젤가와는 다르게 랄크는 그다지 쉽게 주무를 수 있을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좋아. 기레스 혹시 가지고 싶은 건 없냐?"
랄크는 젤가와는 다르게 기레스의 반응도 십분 이해하고 있었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분명 며칠 전까지만 해도 자신은 기레스를 괴롭혀 온 가해자에 불과했던 것이다. 갑자기 툭 하고 튀어나와서 친한 척을 하는 것만으로 앙금이 풀릴 리는 없다는 사실을 그는 제대로 인지하고 있었다.
'이런 건 급하면 안되지.'
"가지고 싶은거라니.. 왜 그런걸..?"
"이전에 아저씨가 괴롭혔던게 미안해서 그래. 원하는 게 있다면 한번 말해봐라."
어린아이들은 선물에 약하다. 기레스는 어린아이가 아니기에 딱히 선물같은 것에 연연하지는 않았지만 랄크의 그 말에는 조금 솔깃해 졌다.
기레스는 속내야 어떻든 형식적으로는 어린아이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어린아이가 구할 수 있는 물건에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었다. 돈도 없었지만 설사 있다고 해도 이세계의 꼬맹이가 구할 수 있는 물건이래봐야 먹거리 정도에 불과했다.
'여기선 조금 호의를 받아둘까?'
어차피 소피아에게 잘 보이기 위해 선심을 쓰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 기레스는 나중에 소피아에게 랄크에 대한 이야기를 잘 전달해 주도록 하고 그 호의를 적당히 이용해 먹기로 결정했다.
잠시 심각한 고민이라도 하는 척 끙끙 거리던 기레스는 욕망에 져버린 듯 우물쭈물 거리며 물었다.
"정말 뭐든지 구해다 줄 수 있어요?"
"그래. 내가 구할 수 있는 수준이라면 뭐든 구해다 주마."
"그러면..."
기레스는 슬금슬금 눈치를 살피면서 조심스럽게 자신이 바라는 바를 랄크에게 말했다.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난 어느 날, 집에서 소피아는 홀로 불만스러운 얼굴로 기레스의 방을 정리하고 있었다. 젤가의 태도가 변한만큼 기레스와 보낼 수 있는 시간이 더욱 늘어날 것을 기대했지만, 실제로는 기레스와 보내는 시간이 줄어들어 버렸기 때문이다.
딱히 젤가 때문은 아니고 한여름이 되어 젤가와 아이들이 집에 머무는 시간이 늘어난 까닭이다.
'곧 방학이 될텐데.'
그렇게 되면 더더욱 기레스와 집에서 몸을 섞는 행동을 하는 것은 힘들어 진다. 그녀는 고운 미간을 찌푸리면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또 그렇게 만져주면 좋을텐데.'
소피아는 일전 하일즈가 가위를 찾으러 기레스의 방에 들어왔을 때를 떠올렸다. 하일즈가 가위를 찾는 사이 자신은 기레스와 질펀하게 쾌락을 탐닉했던 일을 떠올리고 그녀는 살짝 젖은 자신의 가랑이를 손으로 흝어 빨아 먹었다.
'그때는 뭐였을까?'
그 날 이후 기레스는 어지간해서는 가족들의 시선이 있는 장소에서는 장난을 치지 않았다. 소피아가 아무리 기레스에게 흠뻑 빠져들었다고 해도 스스로가 기레스에게 그런 짓을 요구할 성격은 아니었기에 그녀는 언제고 기레스가 먼저 자신을 유혹해 주기를 기다렸다.
'어제도 방해를 받아버려서 끝까지 가지 못했는데.'
한창 물이 올라 있었을 때, 티나의 난입으로 소피아는 하루 종일을 미칠듯한 욕구불만으로 지새워야 했다. 그런 그녀의 시선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그녀는 책상 구석에 '보기 좋게' 숨겨져 있는 티슈 뭉치를 발견했다.
'응? 저건..'
꾸깃꾸깃 접혀져 있는 티슈를 발견하고 소피아는 얼굴을 붉혔다.
'이건 혹시..'
바짝 말라 비틀어져 있기는 했지만 그 안의 비릿한 내음은 틀림없는 정액의 냄새였다. 몇번이고 소피아의 뇌리게 각인되어 있는 기레스의 냄새다.
[꿀꺽]
소피아는 맛있는 음식이라도 발견한 것처럼 입 안에 가득히 고인 군침을 삼켰다. 기레스의 정욕의 증거에 소피아는 괜히 기분이 들떠 버렸다.
'기레스도 나를 생각했으려나?'
그리고는 그녀는 살짝 문 밖을 나가 기척을 살폈다. 두리번 거리면서 집 안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소피아는 기레스의 침대 안으로 들어갔다.
"후웁 하아."
그리고는 들고 있던 티슈를 자신의 얼굴에 파묻으며 기레스의 정액을 맛보았다. 보통 사람들에게는 악취나 다름 없지만 이미 이성이 마비된, 아니 이성이 마비되지 않았어도 소피아에게는 그보다 더한 향기는 없었다.
한여름이니만큼 땀에 절은 기레스의 이불에서 느껴지는 기레스의 체취를 맡으며 그녀는 아리따운 손가락을 자신의 음부에 가져가 기레스의 손가락을 떠올리면서 정신없이 후비기 시작했다.
"응.. 하앗."
[찌걱 찌걱]
이미 닿기도 전에 흠뻑 젖은 가랑이 사이에서 나는 추잡한 소리는 기레스의 방안을 가득 메웠다.
"아아.. 좋아. 흐읍. 스읍"
그녀는 기레스의 침대에서 몸을 비비 꼬면서 자신의 사타구니를 끊임없이 문질렀다. 아무리 손놀림이 능숙해지고, 기레스의 손놀림을 상상하며 자위한다 한들 소피아는 자신의 손가락만으로는 만족해 본 적이 없었지만, 이 날만은 전혀 달랐다.
"아 아흐으읏..! 온다..."
소피아는 경련을 일으키는 것처럼 신체를 꼿꼿히 펴면서 기레스의 침대를 애액으로 흠뻑 적셔 버렸다. 기레스에 비하면 아직도 미숙한 기술이었지만 그녀는 기레스의 체취에 둘러 쌓여 있다는 정신적인 포만감만으로 기레스가 애무해 준 것만 같은 아찔한 절정을 만끽할 수 있었다.
"스읍. 아... 헤헷."
마치 마약이라도 흡입하는 것처럼 황홀한 표정으로 티슈의 냄새를 맡으며 소피아는 절정의 여운에 몸을 맡겼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