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계네토기-26화 (26/238)

〈 26화 〉 소피아(25)

* * *

소피아의 마을에서는 다달이 한번씩 월례회의를 하곤 한다. 참석자는 자유지만 대부분은 마을의 유력자들이 참가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소피아라는 인물 하나로 국가에서 지원되는 금액은 상상을 초월했기 때문에 이 회의에서 영향력 있는 발언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자체만으로도 마을 내에서는 상당한 힘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영향력 있는 발언을 할 수 없는 사람들은 저절로 도태되어 갔다는 게 올바른 표현일 것이다.

그 수많은 마을 사람들 중에서도 가장 영향력이 있는 사람을 꼽으라고 한다면 당연히 마을의 상징 그 자체인 소피아의 남편 젤가를 꼽을 수 있었다.

"어라 젤가. 그 발은 어떻게 된 건가?"

"하하.. 아직 못 들으셨군요. 얼마 전에 집 2층에서 삐끗 해버렸거든요."

"젤가 자네도 많이 늙었나 보구만. 고작 그정도로 다리가 망가지다니 말일세. 전장터에서 맹아라고 불리우던 별명이 울겠네 그려."

'쳇. 주책없는 늙은이같으니라고.'

젤가는 항상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완벽한 사람으로 보이길 바랬다. 소피아와는 비교할 수 없지만 젤가도 일반인의 범주에서 보면 이세계에서도 천재라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는 남자였다. 그렇지 않았다면 아무리 그가 소피아의 남편이었다고해도 마을 최고의 권력을 가지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건 그렇고.. 오늘은 소피아와 함께 온 모양이구먼?"

"네. 중요한 이야기가 있는지라."

"중요한 이야기?"

"곧 아시게 될 겁니다. 하하."

입꼬리는 올라가 있었지만 눈은 썩은 동태눈을 하며 젤가는 그렇게 말하고 넘어갔다.

[꿀꺽]

마을의 유력자들은 소피아의 자태에 넋을 잃었다. 평소에도 마을 최고의 천하일색으로 소문이 자자한 소피아였지만 최근 그녀의 외모는 그 훌륭했던 이전과 비교해도 훨씬 더 색기가 넘치고 아름다워졌다.

"소피아!"

"에루스."

"상당히 오랜만이네. 요즘은 통 얼굴 볼 기회도 없고.."

"그렇네."

원래 소피아는 밖으로 그다지 나돌아 다니는 편은 아니었지만 최근에는 더더욱 타인을 만나는 일이 드물었다.

'보통은 집에서 노니까 말이지♥'

기레스를 상상하면서 소피아는 눈웃음 짓고 살짝 자신의 입술을 핥았다. 은근히 아닌 척 하면서 소피아를 바라보고 있던 남성들은 발기를 참지 못하고 주머니에 손을 집어 넣어야 했다.

"그런데 오랜만에 봤는데 어떻게 그렇게 예뻐진 거야?"

"응? 예뻐졌다고?"

"혹시 수도에 가서 뭔가 관리라도 받아온 거 아냐? 황실 특제 화장품이라던가."

에루스는 소피아의 가는 허리를 콕콕 찌르면서 넉살 좋게 물었다. 그녀도 마을 내에서는 어여쁘다고 소문이 자자한 여성이었지만 소피아의 앞에서는 그 색이 바래 보인다.

"그런 건 없는데."

"거짓말하지 말고.. 좋은 건 나눠 쓰자는 말이 있잖아."

에루스의 그 말을 듣고 소피아는 살짝 기레스가 에루스를 안는 것을 상상했다. 이전이었다면 그런 생각을 하는 자신을 스스로 질책해 버릴 정도의 추잡한 망상이었지만 소피아는 질투와 흥분을 동시에 느끼며 가볍게 말했다.

"정말 그런 건 없어. 음.. 심리적으로는 조금 변했을지도 모르겠네."

소피아는 그렇게 말하면서 요염하게 웃었다.

"자 그리고.. 오늘은 크흠. 다들 아시겠지만, 우리 마을의 명물이자 유페르 가문의 당주인 소피아가 참석하셨습니다. 모두 박수로 환영해 주세요."

"오오오!"

월례회의라고는 해도 사실 큼직한 안건에 대한 논의를 제외하면 가진 사람들의 친목파티나 다름 없는 자리였기에 한창 분위기는 무르익어 가고 있었다. 그렇게 달아오른 와중에 소피아가 단상에 올라 서자 주로 남자들에게서 격한 환호성과 장내를 때리는 듯한 박수 갈채가 터져 나왔다.

"오랜만이네요. 여러분. 사실 아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저는 이런 회의자리를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아요."

"에이 그러지 말고 자주 나오시죠~"

술에 취해 주책없이 추임새를 넣는 남성을 소피아는 차가운 눈으로 내려다 보았다.

"그럼에도 오늘 제가 이 자리에 나온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소피아의 말에 장내는 살짝 술렁이기 시작했다. 그녀에게서 풍기는 분위기에서 무언가 심상찮음을 모두가 느꼈기 때문이었다.

"다들 제 아들인 기레스를 아시죠?"

그녀의 목소리는 나긋나긋했지만 누구 하나 잘못 듣는 이 없이 귀의 깊숙한 곳까지 생생히 전달되었다. 장내는 삽시간에 분위기가 싸해지며 작은 소리 하나 새어나오지 않게 되어 버렸다.

"그 반응을 보아하니 다들 아시는 모양이네요. 보기에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사실 저는 정말.. 정말로 실망을 많이 했답니다."

얼핏 겉으로 보기에 소피아의 표정은 온화해 보였지만 그 자리에 있는 일동은 피부로 소피아의 분노를 몸소 체감하고 있었다.

"저는 사실 나라에서 지원해 주는 것 따위에는 그다지 관심은 없었어요. 우리 마을이라면 지원받아도 좋다. 그렇게는 생각하고 있었지만 사실 지원자체에는 회의적이었거든요. 하지만 받지 않아야 될 이유는 없었고, 저기 있는 우리 그이도 저를 많이 설득했기에 저는 마을을 믿고 나라에서 보내주는 지원금을 받기로 했답니다. 제 입으로 말하기는 뭣하지만 우리 마을이 이렇게 성장한 것은 나라의 지원 덕인 것은 말할 것도 없겠죠. 그리고 저는 그것을 이제 받지 않으려고 합니다."

소피아의 보고에 장내의 사람들은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혹시 제게 할 말은 있는지요?"

입을 살짝 올린 평소와 변함 없어 보이는 미소에는 마치 귀기가 서려 있는 듯싶었다.

"자 잠깐만.. 분명 우리가 기레스를 어느 정도 괴롭힌 것은 사실이지만.. 그건 소피아 네 남편인 젤가가.."

"그래서 저렇게 되었잖아요?"

젤가에게 좌중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젤가는 이런 식의 불명예를 얻는 것은 원치 않았지만, 자신이 해둔 일이 있기에 잠자코 소피아의 벌을 얌전히 받기로 했다.

"하지만 소피아. 지금 우리 마을에 나라의 지원이 사라지면 우리 모두가 폭삭 망하고 말게 될걸세."

허연 수염을 기른 마을의 촌장인 스보우가 지팡이를 들고 나서면서 말했다.

"그래서요?"

평소 밑바닥의 인생을 사는 거지들에게도 저자세를 취하는 소피아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할 냉랭한 반응이었다.

"으음.."

"기레스의 인생은 망해도 되고, 자신들은 망하면 안된다 이건가요?"

"그 그것은 아니네만. 애초에 자네에게 나라의 지원을 막을 권한이 있기는 한겐가?"

소피아는 싱긋 웃으며 도발하듯 답했다.

"확인해 보실래요?"

"으음.."

스보우는 눈썹을 꿈틀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 말을 하는 것을 보니 원하는 바가 있기는 한가 보구먼. 정말 마을의 지원을 막고자 했다면 확인 따위는 필요 없을테니 말일세."

"이야기가 빨라서 좋네요. 제가 원하는 건 한가지입니다. 앞으로 기레스를 괴롭히지 마세요."

"그 그것뿐인가?"

"네 그것뿐이에요."

싱긋 웃는 소피아의 말을 듣고 주변 사람들은 피식 거리면서 웃기 시작했다.

'순진한 년.'

'힘만 없었어도 백번은 더 따먹었겠다.'

그런 분위기에 소피아는 차갑게 조소를 흘리고는 그대로 바닥을 밟았다. 거대한 굉음과 함께 건물 전체가 무너질 듯이 흔들 거려 순식간에 장내는 삽시간에 아수라장이 되어 버렸다.

"기레스를 괴롭히지 않는 건 간단해 보이겠죠. 하지만 다음 기회는 없다는 걸 잊지 마세요."

"그 그건 무슨 뜻인가?"

"이제부터 아주 자그마한 괴롭힘이라도 제 눈에 발각된다면 그 즉시 마을의 지원은 없습니다. 여러분 뿐만이 아니에요. 이 자리에 없는 사람이든, 이 마을 사람이 아니든, 혹은 자식들이든 앞으로 기레스가 괴롭힘을 당한다면 이 마을의 지원은 없다는 걸 명심해 두세요."

괴롭히지 않는 것은 그다지 큰 일은 아니지만,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마을 사람 전체의 의사를 하나로 모으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 특히 철없는 아이들이라면 더더욱 그러했다.

한 여성이 소피아의 앞을 나서면서 말했다.

"아이들은 조금 싸우면서 크기도 하잖아요? 거기까지는 조금 과잉 보호가 아닐까요?"

"괴롭힌다면 제 자식을 패서라도 고치세요. 그게 불가능하다면 지원을 받지 않으면 그뿐입니다. 여기 계신 모두는 지원금의 혜택을 아주 많이 맛보고 계신 분들이잖아요?"

"으읏..!"

'지금까지는 가만히 있다가 왜 이제와서 저지랄인거야?'

"그런데 괴롭힘을 당하는지 마는지는 누가 판단하는 겐가?"

더 이야기 해봐야 소피아의 뜻은 확고하다는 것을 눈치 챈 스보우는 눈을 뒤덮는 눈썹을 까딱거리며 말했다.

"제가 판단할 거에요. 즉, 제 눈을 속여 가면서 괴롭힐 수 있다면 괴롭혀도 좋다는 이야기랍니다. 하지만 아마 여러분들에게는 무리겠죠. 지난 수십일 동안 제가 기레스를 감시하면서 여러분도 관찰했다는 것을 누구 하나 알아차리지 못했으니까요."

"뭐 뭣?"

소피아는 특히 기레스를 많이 괴롭혔던 사람들을 노려 보면서 이야기 했다. 시선을 사로 잡을 정도로 아름다운 소피아였지만 단 한명도 그녀와 시선을 마주할 수 있는 이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기레스가 괴롭힘을 당했다고 제게 보고를 해도 지원은 없을거에요."

"아 아니 그러면 기레스가 제 마음에 안들어서 모함이라도 하면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거야?"

"그렇게 되고 싶지 않다면 기레스가 그런 마음이 들지 않을 정도로 개처럼 알랑거리세요. 그정도의 잘못은 했잖아요? 그게 싫다면.. 아시죠? 포기하면 되는 거에요. 나라에서 내려오는 지원을.."

"으읏..."

자신들이 한 행동은 생각하지 않고, 마음 같아서는 시원하게 그깟 지원 필요없다며 나가고 싶은 사람은 많았지만, 어느 누구도 그런 말을 꺼낼 수는 없었다. 그정도로 소피아에게 내려오는 지원은 막대했던 것이다.

"그렇군. 뭐 요컨대 기레스를 괴롭히지 말라는 것인데. 소피아 자네의 제안은 마을 사람들을 너무 적으로 만드는 것 같구먼. 화난 것은 알겠지만 여기서는 절충하는 것이 어떤가?"

"절충?"

"나같은 노인네는 뭐 아무래도 상관 없네. 소피아 자네도 감시했다면 알겠지만 나는 기레스를 괴롭힌 적도 없었고 말이지. 거기에 마을 단위로 기레스가 괴롭힘을 당한 것은 사실이네만, 마을 사람들 전부가 괴롭힌 것도 아닌데 모든 사람들이 연대책임을 받는 것은 조금 과하다고는 생각되지 않는가?"

"으음.."

아무리 독한 마음을 먹었어도 사람의 본질이란 쉽게 바뀌는 것이 아니기에 소피아는 스보우의 말에 살짝 망설임이 일었다.

"거기에 그런 방식을 취해서야 마을 사람들이 기레스를 고깝게 보지 않을 수 없겠지. 자네도 마을사람들이 겉으로는 알랑거려도 속으로는 기레스를 미워하는 그런 상황을 원하는 건 아니겠지?"

"네에 뭐."

기레스를 걸고 넘어지자 지금까지의 표독스러웠던 소피아의 말투는 금새 온순한 양이 되어 버렸다. 거기에 확실히 촌장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그래서 여기선 촌장으로서 제안을 하나 하도록 하지."

"제안이요?"

"앞으로 기레스를 괴롭히는 이가 있다면 그 사람은 마을에서 추방하는 법을 만드는 건 어떠한가? 이거라면 괴롭히지 않은 마을 사람들이 고통을 받을 필요는 없을테고, 또 자신들이 지은 죄에 대한 죗값을 치르는 것이니 유페르 가문을 고깝게 여길리도 없을테지. 물론 그 판단은 소피아 자네에게 일임하도록 하겠네."

"초 촌장. 그런 건! 단순히 소피아의 아들이라는 것 하나 만으로 그런 특혜를 준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아직도 할 말이 있나? 데브람"

기레스를 가장 집요하게 가족단위로 괴롭혔던 마을 사람이 따지듯 물었지만 허여멀건한 수염을 가진 노인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위엄이 넘치는 촌장의 말에 그는 더 따지지도 못하고 쭈그러 들었다.

'촌장님 대단하시네.'

소피아는 독기가 풀린 눈으로 스보우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마을의 실권의 대부분은 젤가가 쥐고 있었음에도 아직까지 현역으로 촌장을 하고 있는 이유를 그제서야 알 수 있을것만 같았다. 거기에 스보우 촌장은 정말로 기레스에게 괴롭힘을 가한 적이 없었다는 점도 그녀에게 있어서는 호감 포인트라 할 수 있었다.

"아직도 분위기 파악을 하지 못하는 이들이 있는 것 같으니 이 늙은이가 한마디 해주지. 지금 소피아는 우리에게 기회를 주고 있는 걸세. 기레스를 괴롭히지 않을 지 아니면 마을이 망하는 꼴을 보고서라도 기레스를 괴롭힐지. 다소 과격하기는 하다지만 나는 촌장으로서 마을이 망하는 꼴을 두고 볼 수가 없다네. 망할거라면 혼자 망하시게나. 소피아에게 이런 이야기를 듣고서도 정히 괴롭히고 싶다면 자기 가족, 자기 자신을 걸고 혼자 괴롭히다 사라지시게."

"그래! 사실 나도 그 어린애를 그렇게까지 개 취급 하는 것은 조금 역겨웠다고.. 집에 있는 아이도 생각났고.."

"저도 차마 주장은 하지 못했지만.."

"그 어린애가 무슨 잘못이 있다고.. 우리 애가 그렇게 되었을 걸 생각하면.. 소피아가 저렇게 나오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나같은 사람이라면 모를까 소피아가 우리 마을에 해주는 게 얼만데.."

지금까지 기레스를 돕지는 않았지만 딱히 괴롭히지도 않았던 다소 열외된 마을 사람들이 조심스럽게 하나 둘 이야기를 꺼내 나갔다. 그리고 그 작은 변화는 전염이라도 되는 것처럼 삽시간에 장내에 널리 퍼져나갔다.

인간승리 같은 멋진 일은 결코 아니다. 그들은 그저 이 자리, 이 마을에서 가장 힘 있는 자가 누구인지 승냥이처럼 냄새를 맡았을 뿐이다. 기레스를 괴롭히기는 했지만 단순한 장난식으로 괴롭혔던 이들도 하나 둘 목소리를 높혀 촌장의 말에 찬성하기 시작했다.

"뭐 까놓고 기레스를 괴롭히지만 않으면 되는거 아뇨. 아주 쉬운 일이구만. 내 아들 놈이 괴롭힌다면 그냥 비오는 날에 먼지가 날때까지 매타작 한번 해버리지 뭐. 그래도 괴롭힌다면 그게 짐승 새끼지 사람이겠수?"

"그래요. 기레스를 괴롭힌다고 돈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못할 건 또 뭐람?"

"걸리지 않았다면 몰라도, 적나라하게 까발려 진데다 그 장본인인 소피아가 저렇게 나온다면 순응하는 것이 마땅한 도리겠지."

나라에서 내려오는 압도적인 지원과 기레스를 괴롭히는 것은 동일 선상에 놓일 수준조차 되지 않는 일이었다. 전자에 비해 후자는 너무나도 간단한 일이었으니까... 지금까지 기레스를 인간 이하의 대접을 해온 이들만이 좌불안석으로 초조해 할 뿐이었다.

"소피아에게는 이런 말을 할 자격도, 능력도, 그리고 권력도 충분하네. 도리어 지금까지 마을의 일에 간섭하지 않은 것이 신기할 정도가 아니었는가? 이견이 있다면 소피아가 가져오는 것 이상의 지원을 가지고 오거나 혹은 이 마을에서 사라지시게. 이것은 소피아가 아니라 이 촌장의 이름을 걸고 하는 말이네."

"역시 촌장이시라니까. 시원하게 말도 잘하는 구만."

"이러니 촌장님을 모시지 않을 수 없다니까요."

마을 내에서도 한가닥 권력을 가진 유력자들마저 아예 대놓고 촌장의 편을 들기 시작하자, 곧 소피아의 의견에 반기를 들 수 있는 이는 단 한명도 남지 않게 되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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