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계네토기-18화 (18/238)

〈 18화 〉 소피아(17)

* * *

소피아는 기레스의 방까지 살금살금 걸어왔다. 기레스의 살짝 열린 방문의 틈새 사이로 그녀는 초롱초롱하게 빛나는 눈을 가져갔다.

기레스는 침대 위에 앉아 얼굴을 찡그리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자신의 바지를 걷어 올리고 조심스럽게 자신의 무릎을 살폈다.

'저 저건..'

기레스의 다리에는 시뻘겋게 찢어진 상처가 있었다. 저번에 이마가 찢긴 상처만큼은 아니었지만, 멀리서 봐도 선명하게 보일 정도의 외상이 그의 무릎에 새겨져 있었다.

"으 아프다."

기레스는 상처 부위를 천으로 싸매면서 작은 몸을 움켜쥐었다. 소피아는 자신의 몸을 웅크리며 괴로워 하는 기레스를 보고 금방이라도 방 안으로 들어가 무슨 일이냐고 묻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엄마가 없어서 다행이다."

기레스를 보듬어 주고 위로하고 싶은 충동에 기레스의 방문을 열려는 순간 들린 독백에 소피아의 가는 손이 멈칫거린다.

'무슨 소리지?'

"엄마가 있으면 어떻게 할까 싶었는데. 이 상처를 아시면 걱정하시겠지."

'기레스..'

그런 아들의 혼잣말을 듣고 소피아는 살짝 분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걱정하는 것보다 자신의 상처를 더 걱정해야할 나이에 저 아이는.. 참.'

소피아는 뺨을 부풀리면서 기레스가 좀 더 자신을 의지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때처럼 응석 부리면 좋을텐데.'

이제와 생각해 보면 같이 가족으로 십여 년을 넘게 같이 살아오면서 기레스가 그렇게 응석을 부린 것은 서로 목욕을 하던 그 시기 뿐이었다. 마치 수년은 된 것 같은 향수를 느끼면서 그녀의 아랫도리는 또다시 촉촉히 젖기 시작했다.

'기레스가 조금만 더 늦게 섹스를 요구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자각하지 못한 채, 소피아는 멍한 활홍감을 느끼면서 기레스와의 목욕을 회상했다. 기레스가 자신을 요구한 이상. 그를 거절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지만, 그녀의 본심은 조금만 더 그 서로가 서로를 속이는 그 시간을 길게 보내고 싶었다.

'이미 지나간 일이야. 그것보다 지금은 기레스의 상처를 돌봐줘야...'

그렇게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소피아가 기레스의 방문을 두드리려 한 순간.

"이 일은 엄마에게 들켜서는 안되니까.."

기레스는 그렇게 독백했다.

'이 일..?'

"그래.. 나만 비밀로 하면 엄마는 행복하실 수 있으니까."

기레스의 금방이라도 울어버릴 것 같은 울먹거리는 얼굴에는 비장감이 서려 있었다.

'지금.. 저게 무슨 소리지?'

"힘내자 나."

기레스는 울먹거리면서 이불 안으로 들어가 돌돌 말아서 몸을 두르고는 몸을 쪼그렸다. 평소라면 그 애처로운 모습을 보았다면 바로 문을 박차고 들어가 기레스를 위로했을 소피아였지만, 그녀는 방금 전 기레스의 말이 신경쓰여 문을 열 수가 없었다.

'기레스가 내게 숨겨야 할 일이 있다고?'

소피아는 가슴 시리는 불안함을 느끼고 있었다. 단순하게 실수로 다쳤다면 자신에게 상처를 숨겨야 할 필요는 전혀 없었다.

'설마 괴롭힘을 당하는 건 아니겠지?'

지금까지 소피아는 기레스의 학급생활에 대해 의심을 해본 적이 거의 없었다. 기본적으로 기레스는 언제나 소피아의 앞에서는 밝은 아이였고, 고양이한테 생선을 맡긴 꼬라지지만 기레스의 뒤에는 하일즈와 티나도 있었기에 그녀는 기레스에 대해 큰 걱정 없이 살아오고 있었다.

성적이 좋지 않기는 했지만, 선생은 물론 하일즈와 티나도 그리고 주변의 친구들은 한결같이 기레스는 잘 지낸다고 말하기 일쑤였고, 마을 사람들 중 어느 누구도 소피아의 앞에서 기레스를 나쁘게 말하는 이도 없었으며, 심지어 기레스 본인조차도 단 한번의 불평을 소피아에게 내보인 적이 없었다.

그랬기에 그녀는 지금까지 기레스가 성적은 못 받아올지라도 행복한 학창시절을 보내고 있다는 것에 단 한번도 의심을 해본 적이 없었다.

'기레스의 성격 상 내가 지금 들어가도 분명히 아무 일 없었다고 둘러댈 거야.'

그녀는 기레스의 '연기하는 모습'을 잘 알고 있다. 설사 정말 다른 일이 있더라도 기레스의 입에서 진실이 튀어나오지는 않을 것이다.

'좋아.'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기레스의 방을 뒤로했다.

기레스의 하루는 여느 때와 다름 없는 지옥이었다. 학교에서는 선생부터 시작해 동급생부터 형 동생에 이르기까지 조롱과 멸시를 당하며 괴롭힘 당한다. 기레스의 학교에서의 취급은 '모두의 장난감' 그 자체였다.

그나마도 학교에서의 괴롭힘은 편하다. 소피아라는 억제제가 있었기 때문에 외상이 날 법한 눈에 띄는 괴롭힘은 거의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기레스의 진정한 지옥은 그 뒤에 시작된다.

"쿠헉 허으윽."

"자 오늘도 교육시작이야."

젤가에게 비기를 익히고 있는 하일즈와 티나는 인정사정이 없었다. 오늘도 하일즈는 주먹을 까딱이며 샌드백이나 다름 없는 기레스를 신나게 후려 패고 있었다.

"하 하일즈님. 제발 용서해주세요!"

그에 기레스는 호응이라도 하는 것처럼 비굴하게 자신의 동생에게 매달린다.

"네가 내게 빌어야 할 건 용서가 아니라 뭘 잘못했는지 답을 말하는 거라고!"

하일즈의 주먹이 기레스의 머리를 정면으로 가격했다. 목이 뒤로 꺽이고 나서 뒤늦게 고통이 몰려 온다.

"으아아아악."

눈이 핑 돌아갈 정도로 아픈데도 그 흔한 코피하나 나지 않는다.

"아아.. 또 기분 나쁜 울음을 내고 있네? 그 소음을 듣는 내 심정도 좀 생각을 해줬으면 좋겠는데.. 알아 들어? 돼지새끼야?"

재빨리 고개를 조아리면서 기레스는 티나에게 아부를 떨었다.

"네 넷."

"그러니까 앞으로 그 멱따는 소리가 한번 들릴 때마다 벌을 한번씩 줄거야."

"네엣?"

기레스는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돼지 주제에 뭘 거부하고 있는거야!"

하일즈의 주먹이 기레스의 아랫배를 가격했다.

"우 우웁.. 구억."

"벌을 준다고 했을텐데?"

차가운 눈으로 티나는 아랫배를 움켜쥐고 바닥에 고개를 쳐박은 기레스를 매도했다.

"하 하지만.. 이걸 참는 건.."

"아 그것도 그렇네. 그러면 음 그래."

티나는 손벽을 치며 산뜻한 웃음으로 말했다.

"지금부터 오빠가 널 열번 때릴 거야. 그 안에 오빠가 만족할 만한 대답을 내놓거나 아니면 한번이라도 소리를 내지 않으면 용서해 줄게."

"아 아니.. 그러면 열번이나.."

"싫어?"

그녀는 슬쩍 잘 빠진 다리를 앞으로 내밀면서 기레스를 노려보았다.

"아 알겠습니다."

"한번만 참아도 용서해 줄테니까 노력해? 돼지군? 자 오빠 마음껏 가지고 놀아."

"하하 티나도 참. 자 그럼 첫발 간다."

열번째 주먹이 기레스의 갈비뼈를 강타한다. 가루가 되어도 이상하지 않을 충격이었지만 당연히 금 하나 가지 않고 뼈에 울리는 고통만이 기레스의 몸을 잔뜩 메운다.

"읍 읍.... 커흐헉."

"열번은커녕 단 한번도 참지 못하는 거야? 짐승도 이정도 맞으면 학습하게 될텐데 이런 놈한테 비교 당하는 돼지 쪽이 불쌍하려나?"

'니가 맞아 봐라.'

비명을 내게 하기로 작정을 한 모양인지 하일즈의 주먹은 평소보다 훨씬 매서웠다. 물론 기레스는 비명을 안낸다거나, 하일즈가 원하는 답을 말할 생각은 전혀 없었지만 몸을 휘감는 고통에 두 남매에게의 적의는 더더욱 쌓여만 갔다.

"으히힉. 티나님 제발 용서해 주세요. 참아 보려고 노력 했지만 너무 아파서.."

티나의 다리에 매달리면서 기레스는 바닥에 고개를 세번이나 박으면서 조아렸다. 누가봐도 비굴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다.

"그래도 돼지의 자세는 잘 배운 모양이네? 흐음."

티나의 표정은 만족스럽다는 듯한 온화하게 풀어졌다.

"그 그러면."

"바보~ 용서할 리가 없잖아?"

"어어엇? 우웁."

그대로 티나는 자신에게 매달린 기레스의 얼굴을 짓밟았다. 기레스보다 어리고 전체적으로 왜소한 체격에 어머니인 소피아를 닮아 가냘픈 다리였지만 기레스는 아무리 발버둥 쳐도 그 다리를 뿌리칠 수가 없었다. 물론 뿌리칠 수 있었다 해도 힘을 아꼈겠지만 전력을 다해 발버둥쳐도 미동조차 하지 않는 티나의 발은 기레스와 이세계 사람들과의 현격한 차이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할 수 있었다.

"한심하기 짝이 없어. 두살이나 어린 동생한테 짓밟혀서 못나오는 기분은 어때?"

"제발... 요 용서해 주세요."

"안돼. 말했지? 소리를 내지 않으면 용서해 주겠다고. 돼지인 너는 모를지도 모르겠지만 말야. 사실 그냥 때려도 상관 없는데도 나는 기회를 준거라고? 혹시나 정말 참을 수 있다면 그래도 인간다운 면도 있겠구나 싶어서 '오늘은' 넘어가 줄까도 생각했었어. 하지만 이로서 증명되었네. 네가 돼지만도 못한 쓰레기라는 사실이 말야."

'개소리 하고 있네.'

말 하나하나가 억지나 다름 없는 궤변이었지만 기레스는 겁 먹은 척을 하면서 몸을 바둥거렸다.

"으히익."

"그러니 돼지새끼인 우리 기레스에게는 돼지다운 취급을 해주기로 했어."

티나는 소악마 같은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뭐야 저건.'

그녀가 손에 들고 있는 병 안에는 황색의 액체가 들어 있었다.

"자 돼지새끼야. 밥 먹자?"

"그 그건?"

"아 이거? 특별히 반 아이들에게 부탁해서 모아온 오줌이야."

그대로 그녀는 그 액체를 기레스의 자신이 밟고 있는 기레스의 코앞까지 가져가 입가에 들이 부었다.

"우붑."

시큼한 오줌이 기레스의 입가에 들이부어지기 시작했다. 기레스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돌리려 했지만 이내 티나에게 제지당했다.

"마셔."

듣기만 해도 등골이 오싹해져 오는 티나의 차가운 말에 기레스는 마시는 척을 하다가 토를 해댔다.

"우웩."

"정말 한심하다니까. 이런 간단한 것도 못 지키는 거야?"

그렇게 말하면서 티나가 기레스의 머리 위에 고정된 발을 비틀자 기레스의 얼굴은 오줌으로 축축히 젖은 바닥에 더욱 깊숙히 박혀 나갔다.

'마 말도 안돼.'

기레스가 괴롭힘을 당하는 현장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나무 위에서 소피아는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그 광경을 지켜보아야만 했다.

아무리 소피아가 순진하다고 해도, 그녀도 전쟁과 사회를 살았던 여성, 차별이나 멸시등을 겪어보지 못했을 리는 없었다. 그렇기에 상대적으로 다른 사람들에 비해 부족한 기레스는 언젠가 괴롭힘을 당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도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설마하니 자신의 아들과 딸이 가장 앞장서서 저렇게 잔학무도하게 괴롭히고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녀는 주변 사람들의 선의를 믿고 있었다. 기레스는 모자란 아이라고 사람들이 생각하더라도 '자신의 아이'인 만큼 마을 사람들만큼은 괴롭히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십 수년을 믿어왔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믿음과 기대는 가장 최악의 형태로 배신을 맞이했다.

뜨거운 눈물이 그녀의 뺨을 타고 흘렀다.

그녀는 이제야 기레스가 스스로의 상처를 자신에게 말하지 않았던 이유를 알게 되었다. 마음이 찢어질 듯이 괴롭고, 세상에 자신 하나만 남은 것 같은 고독감을 느낀다. 지금까지 마음을 잔뜩 메웠던 따뜻한 행복감은 영구동토의 혹한처럼 차갑게 얼어갔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자신의 친자식들의 저정도로 잔혹하게 혈육을 괴롭히는 모습을 본 것이다. 다른 누구보다 상냥하고 자상한 소피아의 마음은 이미 갈기갈기 찢어져 버렸다.

주섬주섬 옷을 챙기면서 어깨를 움츠린 기레스를 보니 그녀는 저도 모르게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기레스.'

소피아는 천천히 기레스를 따라 미행을 이어나갔다.

소피아의 재능은 마을따위는 진작에 넘은 나라의 단위로 생각해 봐도 손을 꼽을 정도의 천재중의 천재다. 기레스뿐 아니라, 마음만 먹으면 마을 누구도 그녀의 미행을 알아 차릴 수는 없었다.

단 하루만 봤을 뿐인데도 기레스는 어느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하고 미움을 받고 있었다.

마치 그것이 당연한 것처럼, 일상인 것처럼 기레스가 수긍해 나가는 모습을 보고 소피아는 죄책감에 몸둘 바를 모르고 있었다. 지난 십수년 간 누구보다 행복하다고 생각해 왔던 자신의 삶 안에서 기레스는 누구보다도 지옥같은 삶을 살아왔던 것이다.

자신의 앞에서는 그렇게 밝게 어리광 부리던 기레스의 모습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누구를 만나든 고개를 숙이고 굽신 거린다. 아직 앳된 어린아이가 그렇게까지 저자세로 나오는데도 돌아오는 것은 비웃음과 모욕과 멸시 뿐이었다.

'그 어린 아이가.'

어린아이가 감당할 수 있는 괴롭힘은 이미 옛적에 넘어서 있었다. 소피아는 기레스가 몸 관리를 다시 하고 조심스럽게 집에 들어간 것을 보고 목 놓아 흐느껴 울었다.

감당할 수 없는 괴롭힘인데도 기레스는 지금까지 소피아에게만은 그런 내색을 전혀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내가 상처를 받을 까봐..'

소피아의 심장이 두근 거렸다. 기레스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그녀의 배신으로 차갑게 얼어붙었던 마음은 태양처럼 뜨겁게 달아올랐다.

'아아.. 기레스.'

물론 그것은 소피아의 웅장한 착각이었지만 소피아가 그렇게 속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소피아가 '그렇게 생각하도록' 기레스는 자신의 영혼을 깍아가면서 지난 십 수년이라는 시간동안 고역을 참고 또 참아 온 것이다. 설마 '어린아이'가 그만한 설계를 할 것이라고 그 누가 상상할 수 있을까.

소피아는 자신의 반짝이는 얼굴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소매로 닦고 집으로 들어갔다.

* *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