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화 〉 소피아(2)
* * *
[끼익]
"어멋?"
창고의 문이 열리자 소피아는 놀란 듯 뒤를 돌아 보았다.
"기레스?"
기레스는 얼굴을 빼꼼 내밀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어머니 일을 조금 도와드리고 싶어서 왔어요."
"돕지 않아도 괜찮은데, 나가서 하일즈나 티나와 함께 놀고 오는 게 어떠니?"
'속 편한 소리 하고 앉았군.'
이 세계의 아이들은 나이에 비해 영리하다. 보통은 평범하게 어린애 같지만, 자신들에게 필요한 부분에 대해서는 성인이라고 해도 혀를 내두를 정도로 영리하고, 그렇기에 영악하다. 그들은 소피아의 눈앞에서는 과하긴 해도 선을 넘지는 않는다. 다소 버릇없는 동생이 형을 무시하는 정도의 형제를 연기한다.
하지만 소피아가 없어지면 그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선을 넘는다. 마치 쇼를 벌이는 것마냥 그들은 기레스를 이용해 자신의 위치를 과시한다. 어린아이임에도 타인을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는, 그리고 휘둘러도 문제될 게 없다는 그 작은 권력은 너무나도 달콤했기에 소피아의 눈 밖에서, 기레스는 언제나 동네북 신세가 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기레스는 그런 현실이 되려 형편이 좋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그에게 속 편한 명분이 되어 주기 때문이다. 기레스는 젤가와 하일즈, 티나의 따돌림을 곧 자신의 명분에 먹이로 이용해 스스로의 목을 조르게 만들어 줄 것이라고 다짐했다.
"저는 아버지의 말처럼 둔하니까... 역시.. 도울 일은 없는 건가요?"
어깨를 축 늘어 뜨린 채, 기레스는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나서면 소피아는 절대로 거절할 수 없다는 것을 그는 수년 간의 관찰로 잘 알고 있었다.
"음.. 그러면.. 그래. 물을 좀 길러다 줄래?"
그에 기레스는 밝게 웃으면서 화답하고 물을 가지러 나갔다.
여자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소피아는 요령 좋게 일을 처리해 나갔다. 기레스는 생전의 건장한 성인이었던 자신이었어도 그녀가 한 일의 10분의 1도 채 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얼핏 보기에도 장정 몇명이 모여 하루는 꼬박 걸릴 법한 일을 소피아는 두어시간도 채 쓰지 않고 대부분을 청소했다.
그야말로 초인적인 능력이었지만, 역시 그녀도 힘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었는지 일을 거의 끝마칠 무렵이 되자 전신은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마치 이슬비라도 맞은 것마냥 촉촉히 젖어 몸에 착 달라 붙어 뽀얀 속살을 비추며 반들거리는 옷은 너무나도 고혹적이었다. 뭇 남성이라면 누구든 한번쯤 본능적으로 시선을 돌릴 수밖에 없는 진풍경으로 기레스는 비틀린 웃음으로 그 멋진 광경을 감상했다.
아들이라고는 해도 기레스가 성인이었다면 소피아도 나름대로 대처했겠지만, 지금의 기레스는 아직 어린데다 또래들보다 척 보기에도 왜소한지라 그녀에게 남성으로 생각될 여지는 전혀 없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기레스가 노리는 바였다. 그가 전생이라는 이점을 가장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시기는 바로 지금 이때 뿐이었다.
"끙.. 끙."
기레스는 안간힘을 쓰는 척을 하며 소피아를 도왔다. 사실 그녀의 동정심을 유발하기 위해 연기가 필요하다면 연기라도 발 벗고 해야 할 처지였지만, 애초에 신체능력이 떨어지는 어린아이인 기레스에게 축사 정리는 연기가 필요하지 않을 정도로 너무나도 힘든 고역이었다.
'이딴 걸 나한테 시키려 했단 말이지?'
소피아의 축사정리는 사실상 어린 기레스 혼자 어떻게 해볼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아마 소피아의 만류가 없었더라면 끝내 끝마지치 못해 만신창이가 된 기레스를 신나게 갈구었으리라.
"후우 이걸로 끝. 나도 조금 늙었으려나? 꽤나 지치는걸?"
찰랑이는 금발을 뒤로 젖히고, 반짝이는 이마의 땀을 닦아내며 소피아가 말했다. 말은 그렇게 해도 그녀는 아직도 상당히 여유로워 보였다.
"허억 허억."
반면 기레스는 숨을 헐떡이며 가쁜 숨을 고르고 있었다. 그런 그의 머리를 고운 손이 쓰다듬었다.
"설마 기레스가 끝까지 나를 도와줄 줄이야.. 장하다 장해."
"도움이 되었어요..?"
"물론 엄청난 도움이 되었지."
소피아는 해맑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물론 기레스는 그녀의 말이 예의상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도움이 되지 않은 것은 아니었겠지만 주관을 팍팍 섞어 최대한 기레스가 한 일을 부풀려도 기레스가 한 일은 소피아에 비해 새발의 피나 다름 없었다.
새하얀 얼굴에는 어디서 묻었는지 검댕이가 묻어 있었지만 그녀의 외모는 전혀 가시지 않았다. 검댕이가 묻었다면 묻은 대로 갭이 생겨서 아름다움이 더 살아날 정도였다.
"가 감사합니다."
"정말. 젤가도 이런 일을 너한테 시키려 하다니..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니까.."
"아버지는.."
기레스는 가슴 속에 있는 서러움을 한껏 끌어 올리면서 말했다.
"저를 싫어하시니까요."
"엑? 아냐 젤가가 조금 난폭하긴 하지만,"
"하일즈나 티나에게도 저처럼 대하는 것을 보신 적이 있으세요?"
"그건.."
아무리 머리 속이 꽃밭으로 가득한 소피아라도 젤가의 기레스에 대한 차별을 모를 리가 없었다. 알면서도 모른 척 하고 있을 뿐, 알면서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을 뿐이다.
왜냐하면 기레스는 친자식이 아니었으니까.
"저는.. 흐흑.."
기레스는 참지 못하고 눈물을 왈칵 흘리는 척을 했다. 쌓인 게 쌓인 것인 만큼 감정이 벅차 올라 울음을 터트리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누가봐도 서럽기 짝이 없는 울음 소리가 축사 안을 메웠다.
"기 기레스."
"제게 재능이 없기 때문인가요?"
"그 그건.."
"어머니도 아버지는 제가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계시겠죠.."
"아 아냐. 나는 아니, 젤가도 그렇지는.."
소피아는 손을 휘저으며 당황해 했다. 좋은 게 좋은 것. 하일즈나 티나는 똑똑한 아이에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만큼 소피아의 속을 썩힐 일은 거의 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녀는 이런 불규칙적인 상황. 기레스의 깊은 상처를 마주하는 데에 익숙치 않았다.
"알고 있어요. 훌쩍. 제가 못난 아들이라는 것 쯤은.. 훌쩍. 그래서 훌쩍 오늘도 어머니의 도움이 되고 싶었던 거에요."
코를 훌쩍이면서 기레스는 감정 조절을 하지 못하는 것마냥 연신 울음을 터트렸다. 그런 기레스를 소피아는 자신의 품속으로 꼭 안아 주었다. 땀으로 촉촉히 젖었음에도 어째선지 달콤한 내음이 기레스의 코를 찔렀다.
겉보기에는 아들을 위로해 주는 엄마의 멋진 모습이었지만 그 이면에는 소피아의 부드러운 맨살의 단내에 흥분한 동상이몽의 기레스가 있었다.
"없었으면 좋겠다니 그럴 리 없잖아. 나는 너의 엄마야."
"흐흑.. 흐흑."
소피아의 부드러운 살결을 맛보며 기레스는 보란 듯이 서럽게 울었다. 아무리 속이 검기 짝이 없고, 이미 태어날 때부터 성인이나 다름 없는 정신연령이라 해도 서러운 것은 서러운 것으로 기레스 본인도 스스로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것에 놀랄 정도였다.
"나는 젤가가 네가 더 잘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호되게 기른 것이라 생각했지만 설마 기레스 네가 그정도로 상처를 받았다고는 생각하지 못했어. 엄마가 미안해."
'하긴 아직 어린아이인걸.. 젤가가 이 아이에게 과한 건 사실이고..'
"한가지..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요."
"부탁?"
"어머니와 같이 목욕이란 걸 해보고 싶어요."
기레스는 머뭇머뭇 거리면서 조심스레 물었다.
"뭐어?"
"얼마 전에 옆 강둑 근처에 사는 베론드가 저에게 그런 이야기를 자랑스럽게 한 적이 있었어요."
물론 기레스의 새빨간 거짓말이다. 강둑 근처에 사는 베론드라는 아이가 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베론드는 부모와 목욕을 한 일이 없으며, 설사 목욕을 같이 했다고 해도 애초에 그것을 기레스에게 말해줄 정도의 관계는 더더욱 아니었다. 하지만 그 말의 진위는 여기서 확인할 수도 없으며 소피아의 성격상 따로 그 진상을 알아볼 리 없다는 것을 기레스는 잘 알고 있었다.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기레스는 몸을 움츠리며 조심스레 말했다.
"전 그게 너무 부러워서.. 한번쯤 부모님과 목욕 했으면 좋겠다 생각해서.. 흐흑. 하지만 아버지는 저를 싫어하시니까.."
소피아도 바보는 아니다. 젤가 나름대로는 잘 되라고 기레스에게 채찍을 들었다고 형식적으로는 말한다 해도, 기본적으로는 [열등한 양자]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기레스를 못살게 군다는 것 정도는 아무리 순진한 그녀라도 모를 리 없다. 잘 되라고 하는 질책이라지만, 그것은 반대로 말하면 못났기에 예쁜 소리를 해줄 수 없다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다.
결국 무능을 고치지 않는 한, 젤가의 질책은 계속될 것이라는 것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다 아들이 잘 되라고 하는 소리라고 보기 좋게 포장하곤 있지만 개인이 무능한 것을 어찌 쉽게 고친단 말인가?
그렇기에 소피아는 어린 기레스의 저 소박한 꿈이 그리는 것만큼 좋게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설사 젤가가 같이 목욕을 해준다고 해도 분명 기레스에게 좋은 추억은 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은 누가봐도 명백했다.
'......'
그녀는 아직은 어리다면 어린 나이로 볼 수 있는 나이에 한껏 자신에게 눈치를 보면서 저런 부탁을 하는 기레스가 안쓰럽기 짝이 없었다.
"좋아. 기레스 그럼 엄마와 함께 몸을 씻자꾸나."
자신의 말이 어떤 결과로 이어지게 되는지 이때의 소피아는 전혀 알 수 없었다.
[스륵 스륵]
소피아는 축축히 젖은 옷가짐을 천천히 벗었다. 몸에서 흘러내리듯 속옷은 그녀의 몸에서 떨어져 내렸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그녀는 자신의 투명한 순백의 나신을 기레스가 늑대 같은 음흉한 눈으로 보고 있으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유페르 가문의 가장을 맡을 정도로 뛰어난 재능을 가진 여인에 걸맞게 그녀는 매우 아름다웠다. 30대 초반에 불과한 나이임에도 20대 초반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 것은 물론이요, 청순한 외모와 유부녀의 농익은 신체의 절묘한 조화는 여체를 지긋지긋하게 접해온 기레스의 애간장을 녹일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녀의 숨막히는 뒷태를 정신없이 감상하던 기레스는 이내 순수한 어린아이를 연기하며 그녀를 따라 옷을 벗기 시작했다.
소피아로서도 아들의 맨 몸을 보는 것은 상당히 오랜만이었다. 기레스는 다 자랐다고는 볼 수 없는 어린나이지만, 갓난아이처럼 맨살을 자주 볼 수 있는 나이는 아닌 것이다.
왜소한 체구에 기레스보다 어린 하일즈보다도 확연하게 차이를 느낄 정도의 작은 육봉을 보고 그녀는 혹여 기레스가 상처라도 받을까 내색하지 않고 상냥하게 말했다.
"그럼 들어갈까?"
기레스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소피아에게는 보이지 않게 비틀린 웃음을 짓고 목욕탕 안으로 들어갔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