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화 〉 소피아(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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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공오빈은 다시 태어났다.
그가 다시 태어난 곳은 그레이브라고 불리우는 세계의 어느 변방에 위치한 한 마을이었다. 그의 부모는 그에게 기레스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의사를 전하기는커녕 아직 언어의 기초조차도 학습하지 못했지만 현생의 부모는 기레스의 전생과는 달리 어디서나 볼 수 있을 법한 화목한 가정이었다.
기레스가 이세계로 전생한 지 1년쯤 지난 해에 전쟁이 발발했고, 그의 부모는 전쟁에 휘말려 사망하게 된다. 아직 제대로 입을 떼기도 전의 일이지만, 환생자인 기레스는 그 모든 일을 기억했다.
기억을 가지고 환생했다고는 하나 전란의 시기. 아직 제대로 걷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갓난아이에 불과한 기레스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저 부모가 죽는 것을 뇌리에 박아 넣는 것만이 갓난이인 그에게 허락된 유일한 행동이었다.
친부모라고는 하나 환생자인 기레스는 그들을 그다지 가족처럼 생각하지는 않았으나 부모가 죽을 때, 자신을 감싸며 죽는 그 순간 만큼은 타고난 악인인 그조차도 그다지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다.
하지만 단지 그뿐으로 부모가 죽을 때, 그는 슬프다는 감정보다도 자신은 틀리지 않았다는 비뚤어진 확신만을 얻을 수 있었다.
눈앞에서 부모가 사망하고 졸지에 고아가 된 기레스였으나 운이 좋다고 해야 할 지, 좋지 않다고 해야 할 지, 그는 자신의 부모를 죽인 군인 부부, 유페르 가의 양자로 거두어 지게 된다. 유페르 가의 양자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길게 이어져 오던 전쟁은 거짓말처럼 끝이 났다.
그리고 십 수년의 세월이 흘렀다.
"기레스! 여길 청소해 두라고 이야기 했을텐데!"
기레스에게 호통을 치는 사내의 이름은 젤가 유페르. 전쟁 통에 그의 부모를 죽이고 기레스를 양자로 데려 온, 기레스에게 있어서는 현실적으로든 행실적으로든 원수나 다름 없는 남자였다.
"죄 죄송합니다."
한없이 비굴하게 고개를 숙이며 불쌍한 표정을 지어 보이는 기레스를 보고 젤가는 들고 있던 곰방대를 기레스에게 던졌다. 기레스는 피하는 시늉조차 하지 못하고 그대로 곰방대를 맞고 쓰러지며 굴렀다.
"여보 뭐하는 짓이에요!"
그런 젤가를 말리는 것은 젤가의 아내이자 이 집의 가장인 소피아 유페르였다.
허리춤까지 내려오는 긴 금발 생머리와 에메랄드 빛이 감도는 벽안에 눈물점을 가지고 있는 가진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그녀는 기레스의 부모를 죽인 죄책감 때문인지, 기레스가 양자라는 사실 조차도 숨기고 자신의 친자식 마냥 정을 다해 기레스를 키워 주었다.
물론 그 뒷사정을 아는 기레스의 입장에서는 가식으로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적어도 그녀는 기레스를 진심으로 아들이라 생각하면서 살아왔다.
"형이 둔한 게 한 두번 이라야죠."
이목구비가 뚜렷한 훤칠한 외모로 자신의 푸른 머리를 찰랑이며 소피아의 아들인 하일즈가 빈정거리며 말했다.
"정말. 어떻게 우리 가문에서 저런 둔한 녀석이 태어났는지 모르겠다니까요."
그에 유페르의 딸 티나는 하일즈의 말을 한 술 거드며 키득거린다.
"너희들 오빠에게 무슨 말버릇이니!"
"하지만 사실인 걸요."
티나는 혀를 삐죽이며 대꾸했지만, 소피아의 단호한 표정을 보고 이내 이를 악 물며 말했다.
"미안해. 오빠."
"나도 미안해 형. 조금 말이 심했던 것 같네."
금방이라도 면상을 시원하게 쳐주고 싶었지만 기레스는 그 울분을 삼키고 헤실헤실 비굴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 아냐. 사실인데 뭐.."
불한당들의 무덤이라고 불리우는 이세계에 떨어진지 십 수년. 기레스는 어째서 이곳이 불한당들의 무덤인지 몸으로 직접 체감하고 있었다. 이세계 그레이브는 기레스가 살았던 지구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마법이라는 개념이 존재하며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수많은 종족이 존재하는 그야말로 소설이나 영화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라 할 수 있었다. 누군가는 오기를 간절히 소망할 법도 한 이 세계가 불한당들의 무덤이라고 불리우는 이유는 간단하다.
이세계에 사는 사람들과 지구에 사는 사람들은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분명 같은 인간이지만, 종이 다르다고 해도 전혀 과언이 아닐 정도로 이세계에 사는 현지인들은 근본적인 능력이 지구의 사람들과 달랐다.
가령 예를 들자면, 기레스가 살았던 전생의 지구에서 인간이 100m를 7초 이내에 끊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본래 인간으로서 불가능한 행위지만, 이곳에서는 성인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어야 정상인 것이다. 마치 현실에서 100m를 20초에 주파하는 것 정도로 당연히 할 수 있어야 되는 것처럼 100m를 7초 이내로 주파하는 것은 이 세계의 평범한 성인에게는 기본적인 소양이었다.
비단 100m뿐 아니라 현실의 총기를 가지고 온다고 해도 눈으로 보고 막아낼 수 있을 것이며, 단순한 계산능력이나 암기도 지구의 평균 수준을 아득히 뛰어넘는 둥, 같은 사람으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불한당으로서 전생한 사람들은 적나라하게 열등한 인간으로 다시 태어났다.
이세계 에서는 여자도 남자도 같은 재능이라면 육체적으로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그레이브의 평범한 여성과 비교한다면 기레스의 힘은 현실의 성인 남성과 유치원생보다도 더한 차이를 지닌다 할 수 있었다.
돌려 말하면 그레이브라는 이세계에서 기레스라는 존재는 아주 단순한 노동조차도 맡길 수 없는 하등 쓸모 없는 존재라는 것을 의미했다.
여성을 힘으로 제압하기는커녕 단순한 육체노동조차도 전혀 따라갈 수가 없다는 현실은 환생자들의 마음을 깍아내린다. 극단적으로는 범죄조차도 그들에겐 물리적으로 허용되지 않는 것이다.
그것 뿐 아니라 이 세계에서 재능이란 단순하게 능력만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니었다. 단순한 능력 뿐 아니라, 신체나 외모에도 재능이 우선적으로 영향을 주었다.
재능이 없어도 예쁜 사람이 존재할 수는 있지만, 재능이 있다면 있는 만큼, 대부분 아름답고 멋진 외모를 가지고 있는 세상. 당연히 열등하기 짝이 없는 기레스의 외모는 현지인들에게는 추함 그 자체나 다름없었다.
가진 사람은 더더욱 많은 것을 가지고 가지지 못한 사람은 더더욱 가지지 못하는 극단적인 부익부 빈익빈의 불합리한 세계에서 기레스는 평범 이하의 지구인의 극빈의 능력을 지닌 채로 환생하게 된 것이다. 기레스 뿐이 아니라 이곳에 전생의 기억을 가지고 환생하게 된 소위 불한당이라고 불리우는 죄업을 지닌 악한들은 예외 없이 기레스가 받은 페널티를 가지고 환생하게 된다. 악행을 저지르려고 해도 그럴 재주도 형편도 안되며 평범하게 사는 것 조차도 허용되지 않기에 이곳 그레이브는 불한당들의 무덤이라 칭해졌을 것이다.
자신이 남들과 다르다는 것을 직접적으로 체감한 것은 기레스가 8살이 되던 해의 일이다. 본래 이세계 그레이브에 환생하기 전부터 공부와는 담을 쌓았다고는 하나 환생으로 다른 어린아이들보다 머리가 수십 년은 굵은 기레스임에도 아이들의 기본적인 수업을 전혀 따라갈 수 없었고, 검술이나 격투, 운동 등 몸을 움직이는 일은 더더욱 따라갈 수 없었다.
8살이 되던 해. 다른 아이들과 목욕을 하게 된 기레스는 환생 이후 처음으로 현지인에게 열등감이라는 감정을 느꼈다. 공부나 운동에 밀렸을 때와는 전혀 다른 적나라한 신체의 차이에 그는 속으로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8살이면 아직 꼬마아이 당연히 성기의 크기는 보잘것 없어야 정상이었지만 기레스를 제외한 다른 모든 아이들은 이미 현실의 성인 저리 가라할 정도의 크기를 가지고 있었다. 당연히 이곳에서의 '평범한' 크기와 다른 기레스는 한동안 두고 두고 놀림을 받아야 했다.
공부야 전생에서도 관심이 없었고, 운동 또한 스포츠 선수가 될 정도의 역량은 없었던 그였기에 뒤떨어진다 해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던 기레스도 적나라한 성기의 크기차이만큼은 한동안 큰 충격을 먹어야 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전공은 여자를 후리는 것으로 그것 하나만이 전생에서 허락된 그의 유일한 특기였기 때문이었다. 전생에서는 무쌍을 찍었던 그의 성검은 이곳에서는 그저 녹슨 단검에 불과했다.
11살이 되던 해. 마을 사람들과 자신의 양아버지인 젤가의 태도가 서서히 변화하기 시작했다. 현실에서 돈과 권력이 지위를 만들듯이 이곳 이세계에서는 지위의 기본 단위이자 가장 중요시 여기는 가치는 바로 개개인의 능력이다. 아무리 재능이 중요하다 해도 사람이 사는 곳이니 만큼 이곳도 백퍼센트 순수하게 능력 위주의 사회로 돌아가는 것은 아니나, 지구와는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능력을 중요시 여기기에 재능의 선천적인 부족은 자연스럽게 모욕과 멸시로 이어져 나갔다.
그렇게 핍박의 수 년의 시간이 지난 후, 호적상으로는 유페르 가의 아들로 기입되어 있었지만, 마을 내 기레스의 입지는 노예 아닌 노예 취급이 되어 있었다. 그 입지에 가장 커다란 공을 세운 것이 바로 그의 양아버지인 젤가였다. 아주 어린아이는 아니지만 아직 머리에 피가 말랐다고는 보기 힘든 어린 나이였음에도 언제부턴가 기레스는 자연스럽게 마을 내의 이물질로 취급되고 있었다.
"청소가 끝나면 오전 내로 축사정리를 해두거라."
"축사 정리라니? 어째서 기레스에게 그런 일을 시키는 거죠?"
소피아가 젤가를 향해 날카롭게 쏘아 붙이자 젤가는 머뭇거리며 말했다.
"이녀석은 뭘 해도 시원 찮으니 이런 단순하게 할 수 있는 것이라도 시켜야 되지 않겠어?"
"단순하다니 성인도 힘을 모아서 하는 일인데 기레스 혼자 축사정리라뇨. 제정신이에요?"
마을 내에서 상당한 입지를 가지고 있는 젤가였지만 그런 그에게 유일하게 이길 수 없는 존재가 있다면 바로 그의 아내인 소피아일 것이다. 사랑하는 것도 사랑하는 것이지만, 그녀의 재기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유페르 가문의 가장이 그녀인 이유도 그녀의 재기에 있었다.
물론 젤가는 소피아보다 강하지 않았더라도 지금처럼 공처가를 자처했을 정도로 그의 소피아에 대한 애정은 각별했다.
"그래 내가 조금 심했던 것 같네. 나도 이녀석이 한 사람 몫을 해서 제 앞길을 잘 헤쳐나갈 수 있길 바라는 마음에 조금 조급했던 것 같아. 내 바램대로 되지 않는다고 이녀석이 나쁜 건 아닌데도 말이지."
젤가는 마을 내의 기레스의 취급을 엉망으로 만든 장본인이었지만, 소피아의 앞에서는 양아들의 미래를 생각하는 근엄한 남편을 연기했다. 비단 젤가 뿐 아니라 마을 사람들 대부분은 소피아가 없을 때는 기레스를 하인 부리듯 부리지만 소피아가 있을 때는 제대로 아이 대접을 해주었다.
보잘 것 없는 마을을 부흥시킨 유페르 가의 가장인 소피아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지만, 겉으로만 눈치는 볼 뿐, 보이지 않는 곳이면 어디에서든 기레스는 마을 단위로 집단 따돌림을 당하고 있었다.
'웃기고 있군.'
기레스가 정말 어린아이였다면 아들이 잘되라고 엄하게 대한다는 젤가의 말에 혹했을지도 모르지만, 이미 산전수전 다 겪으며 인생 1회차를 살아 온 기레스에게 젤가의 그런 가식이 통할 리 없었다. 하지만 소피아 쪽은 아니었는지 그녀는 온화한 어조로 말했다.
"기레스는 잘 자랄거에요. 그러니 너무 조급해 하지 말아요. 당신이 그렇게 기레스에게 엄하니까 하일즈나 티나의 태도도 나빠지잖아요."
"알았어 미안해. 소피아."
"축사의 정리는 내가 할테니 기레스는 나가서 친구들이랑 놀고 오도록 하렴."
"네."
소피아의 말을 따라 나오기는 했지만 기레스에게 친구 따위가 있을 리가 없다. 아니 오히려 동년배나 마을 사람들의 눈에는 띄지 않는 게 마음은 물론이고 육체적으로도 편했다.
[팍]
눈알이 빠질 것 같은 충격과 함께 기레스의 몸이 휘청였다. 어질거리면서 머리를 부여잡고 일어나자 그의 눈에는 하일즈가 들어왔다.
"하일즈.."
"내가 어머니가 없는 앞에서는 님짜를 붙이랬지!"
"으헉."
마을 내에서 기레스의 편은 사실상 소피아 외엔 없었다. 기레스를 괴롭히지 않는 사람들은 있더라도 적극적으로 기레스를 염려하는 사람은 이 마을 내에서는 소피아 외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 마을에서 하일즈는 언제나 소피아가 없는 장소에서 기레스가 젤가와 영향력 있는 마을사람들의 경멸의 대상이 되는 것을 보아왔기에 자연스럽게 기레스를 무시하고 괴롭히는 아이로 자라났다. 머리는 물론이거니와 육체적인 완력으로도 기레스가 하일즈의 상대가 될 리 없었기에, 나이 상으로는 기레스가 위였음에도 형으로의 대우는 커녕 둘이 만났을 때에는 짓밟히지만 않아도 다행인 것이었다.
"하일즈.. 님."
"쳇. 어머니는 이런 병신이 뭐가 좋다고 항상 감싸는지 모르겠단 말야."
'나를 감싼 소피아의 행동에 질투한 건가?'
기레스는 속으로 조소했다. 선천적으로 자신보다 뛰어난 종이든, 우월한 능력을 지니고 있든 결국에는 조금 더 힘을 가진 인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레이브는 그가 살아왔던 세계와는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것이 다른 세계였지만 근본적으로는 무엇 하나 바뀌지 않았다.
밑바닥의 밑바닥으로 태어났다고 해도 어찌되었든 '사람이 사는 곳'이라는 부분은 불한당의 무덤이라고 불리우는 이세계 를 찌를 수 있는 유일한 맹점이었다.
"뭐야 웃어?"
"끄헉.."
기레스의 웃음을 보았는지 하일즈는 한참이나 기레스를 짓밟아 속이 풀릴때까지 분풀이를 한 뒤, 바닥에 엎어진 기레스를 두고 어디론가로 사라졌다.
"으 씨발. 인정 사정 없네."
기레스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혼자 언덕에 앉아 욱신 거리는 몸을 부여잡았다. 어떻게 패는 건지 그렇게 열심히 밟혔음에도 겉으로 눈에 띄는 외상은 전혀 없었다. 바닥을 구를 때 묻은 먼지와 속까지 시큰 거리는 고통만이 그의 전신을 엄습했다.
"읏."
밟힐 때, 입 안이 조금 헐었는지 피비린내가 입을 타고 코를 때린다. 그 피를 맛보면서 기레스는 미소를 지으며 생각했다.
소피아는 매우 긍정적인 여인이었다. 너무 밝은 삶을 살아왔기에 어둠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인간. 세상의 겉면을 보면서도 그 인간의 악의가 어느정도나 밑바닥까지 떨어질 수 있는지 그녀는 알지 못한다.
좋게 말하면 긍정적이지만 나쁘게 말하면 순진하다 할 수 있었다. 내숭이 아닌 빛나는 순수함. 그런 여자를 자신의 색으로 물들이는 것이야 말로 기레스가 가장 좋아하는 행위 중 하나였다.
'불한당들의 무덤이라고?'
기레스는 홀로 비틀린 웃음을 띠며 음흉하게 웃으며 생각했다.
"크흐흐 하하하."
'어설프구만.. 고작해야 이정도로 무덤을 운운하다니..'
찬란하게 빛나는 금발에 투명하게 빛나는 피부, 봉긋 솟은 거유를 가지고 있음에도 슬렌더를 연상케 하는 굴곡 어린 아름다운 소피아의 육체를 상상하며 기레스는 자신의 왜소한 물건을 꼿꼿히 세웠다.
정상적인 삶이라는 것이 눈앞에 보이기에 더더욱 극렬하게 비교되는 결핍, 사실상 미래를 박탈 당했다 해도 과언이 아닌 사면초가의 상황이나 다름없음에도 불구하고, 기레스의 검은 야심은 조금도 꺾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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