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카데미 경비원으로 빙의당했다-265화 (266/266)

〈 265화 〉 264. 암살

* * *

싸늘하다.

누가 봐도 자신을 찾고 있는 수배전단을 보았을 때, 안수호는 오싹한 소름을 느꼈다. 허나 필사적으로 표정을 다잡으며 이를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

지예원의 예감은 거짓이 아니었다. 수배전단에서 찾고 있는 인물의 정체는 안수호가 맞았다.

다만, 왜 슬럼의 3대 세력 중 하나인 블랙스미스가 안수호를 찾는가.

‘박지현.’

답은 수배전단 안에 있었다. 인상착의 항목에 적힌, 은색의 금속질 가면으로 얼굴을 감추었다는 부분.

안수호가 박지현을 죽였을 때, 그는 갑작스레 난입한 목격자에게서 얼굴을 가리기 위해 태초의 은으로 가면을 만들었다. 딱 지금 수배전단에 그려진 몽타주처럼 생긴.

‘박지현을 죽인 나를 블랙스미스가 수배하고 있다. 둘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었다는 건가?’

여명단 지부 간부와 슬럼의 범죄조직. 연관이 있다면 있을 수도 있는 사이였지만 진실을 알아내기는 어려울 것이다. 박지현은 이미 죽어버렸으니까. 그렇다고 블랙스미스에 쳐들어가 관계를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고.

즉 당장 취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리고 당장 해결할 수 없는 일로 괜히 지예원이나 강하늘을 불안하게 할 필요도 없다.

그렇기에.

“안수호. 이거 역시 너 맞지?”

“글쎄, 아마 아닌 것 같은데.”

안수호는 이 일을 묻기로 결정했다. 이른바 긁어 부스럼이란 녀석이었다.

“정말 너 아니야? 인상착의 같은 거 완전 너인데?”

“인상착의라 해봤자 옷도 체격도 평범하잖아. 금속질 가면이라 해서 꼭 나라는 법도 없고. 애초에 난 이번 일로 슬럼에 처음 왔는걸. 근데 블랙스미스에서 왜 날 수배하고 있겠어?”

“그 말, 정말이죠?”

강하늘이 불안한 표정으로 그렇게 묻는다. 그녀는 지금 성숙한 인상의 아바타 상태였기에 평소와 그 느낌이 사뭇 달랐으나, 그럼에도 그녀가 적잖이 안수호를 걱정하고 있음을 여실히 느껴졌다.

“그럼……요. 정말이고말고. 전 이 수배전단에 대해 짚이는 게 하나도 없습니다. 아마 다른 사람이겠죠. 그러니 걱정하지 마세요.”

어색하게 그녀를 존대하며 안수호가 싱긋 웃었다. 걱정하지 말라는 말만으로 걱정이 덜어질 순 없었지만, 강하늘은 일단 안수호를 믿어보기로 했다.

“……아무튼. 수호 네 계획은 그 극비 작전인지 뭔지에 태현이가 차출되기 전에 돈을 내고 내뺀다. 그거지? 그러니까 일단은 그녀석들 밑에서 일하면서 돈을 벌어야 하고.”

“그런 셈이죠. 아까 말씀드렸듯 얼마 안 걸릴 겁니다.”

“마음 같아선 나도 돕고 싶은데­”

“괜찮아요. 선배. 의도가 뭐든 간에 어쨌든 범죄잖아요. 무리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류태현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다소의 범죄는 가능하다는 입장의 안수호.

반면 조유리는 안수호의 범법을 묵인하는 건 몰라도 직접 용병짓을 하는 건 내키지 않았다. 안수호의 말에 조유리가 우물쭈물 하면서도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야…….’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럼 내가 도와줄까?”

그때 지예원이 슬쩍 손을 들며 물었다.

“난 저 사람이랑 달리 이미 범죄자니까. 여기에 성철파 밑에서 용병질 했단 사실이 추가된들 뭘 거리낄 게 있겠어? 너희가 신고하려는 것도 아닌데.”

“……물론 신고는 안 할 테지만요. 그래도 제 눈앞에서 뻔뻔히 범죄를 저지르겠다 말하는 건 좀 기분이 그러네요.”

조유리가 살짝 아니꼬운 태도로 묻자 지예원이 어깨를 으쓱였다.

“딱히 단 둘이 있을 때 비밀스럽게 할 이야기는 아닌 것 같아서요. 아무튼, 손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거니까. 이참에 나도 성철파에 용병으로 들어가서 푼돈이라도 벌어서 보탤게.”

“위험할 것 같은데…….”

“위험하다 싶으면 알아서 내뺄 거니까 걱정 마셔. 게다가 내가 너처럼 무지막지하게 센 건 아니어도, 어디 가서 꿀릴 정도도 또 아니잖아?”

일리 있는 말이었으나 안수호는 내심 지예원이 안전한 곳에서 그저 기다려줬으면 했다.

그러나 지예원은 안수호가 목숨을 내놓고 있는 마당에 자신만 한가롭게 쉬고 싶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그에게 보탬이 되고 싶었다.

“……필요하다면 저도 도와줄 수 있어요.”

그리고 그건 강하늘도 마찬가지. 두 사람의 말에 안수호가 ‘끄응…….’하고 앓는 소리를 냈다.

거듭 말하지만 그의 본심은 두 사람이 괜한 위험에 달려들지 않았으면 했다. 그러나 여기서 자신이 반대한다한들, 왜 너는 되는데 자기들은 안 되냐며 나올 게 뻔하다. 애초에 두 사람이 이렇게 나선 것부터가 안수호를 걱정하고, 또 보탬이 되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으니까.

‘그래도 기왕이면 두 사람 다 안전하게 기다려줬으면 하는데……. 차라리 내가 쏨밧을 죽일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걸 좀 이따가 넌지시 말할까? 굳이 상납금을 모을 필요가 없다는 걸 말해주면 두 사람이 위험하게 용병일을 할 이유도 없어지니까…….’

잠깐 그렇게 생각했으나 그 생각은 곧바로 기각했다. 지예원은 몰라도, 강하늘은 류태현처럼 자신의 살인행위에 반대하고 나설지도 몰랐다. 꼭 도덕적인 이유가 아니더라도 조직 보스를 홀몸으로 암살한다는 무모한 계획에 두 사람이 반대하고 나설 수도 있는 거고.

결국 이 또한 긁어 부스럼이었다. 쏨밧 암살 계획은 그 혼자만의 가슴 속에 고이 담아두는 편이 여러모로 이로울 것 같았다.

“……그래. 두 사람이 도와준다면 태현이를 더 빨리 빼낼 수 있겠지. 염치없지만 부탁할게.”

그렇기에 안수호는 일단 표면상으론 두 사람의 도움을 받는 척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시간을 끄는 사이 쏨밧을 죽이면, 두 사람이 위태로운 용병 일에 뛰어들 이유도 자연스레 없어질 테니까.

‘이거, 한시라도 빨리 녀석을 죽여야겠는데.’

기회만 된다면 당장 내일이라도.

그렇게 생각한 안수호였으나, 일이 그처럼 쉽게 흘러가지는 않았다.

그날 이후 안수호는 호시탐탐 쏨밧을 죽일 기회를 물색했다.

쏨밧이 혼자 있는 시간……은 당연히 없었다. 그런 빈틈이 있었다면 그가 계획하기 전에 이미 용문이나 블랙스미스가 쏨밧의 목을 잘랐겠지.

그렇기에 안수호는 좀처럼 그를 암살할 기회를 잡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 어느새 열흘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열흘.

그 열흘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가.

일단 안수호의 경우 그 기간 동안 두 번의 전투에 불려나갔다.

두 번 다 성철파가 일방적으로 밀리는 패전에 가까운 전투 현장. 그러나 안수호는 그 기량을 십분 발휘해, 다행히 두 번의 전투 모두 무승부에 가깝게 마무리할 수 있었다.

초인 조직원들 사이에서도 인간병기 취급을 받는 그의 활약으로도 무승부가 한계였으니, 두 전투가 얼마나 불리한 형국이었는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되리라.

다만 한 가지 이상한 점이라고 하면, 그 두 번의 전투에서 암살팀이 (적어도 안수호가 이름과 능력을 아는 자에 한해서)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

러스티네일, 혹은 그녀를 포함한 복수의 암살팀이 용문과 얽혀있는 걸 안 이상. 안수호는 당장 눈앞의 전투뿐 아니라 그들의 동향도 주시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의 시선을 알아차린 건지 그날 이후 암살팀은 전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한편 안수호가 두 번의 전투를 겪는 동안 류태현은 무려 11번의 전투를 거쳤다.

2번과 11번.

그 횟수의 차이가 곧 안수호와 류태현의 취급 차이였다. 강하지만 비싼 용병인 안수호와 달리, 고아원을 빌미로 사실상 두 달 동안 무급봉사를 저당잡힌 류태현은 그야말로 노예처럼 혹사당했다.

그리고 그 혹사의 배경에는 성철파의 암울한 현상황이 있었다.

막말로 성철파는 온갖 곳에서 생겨나는 구멍을 안수호와 류태현, 그리고 다른 용병들로 겨우겨우 막아내는 형국이었다.

기껏 막대한 손해를 입어가면서 블랙스미스와 휴전을 했으니 숨통이 트일 만도 한데. 성철파는 용문과의 전투에서 거듭 패배의 고배를 마셨다.

다만 이는 성철파의 잘못보다는 용문이 기이할 정도로 잘 싸운 탓이 컸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들은 성철파가 필사적으로 숨긴 그들의 빈틈을 이상하리만치 잘 찾아내 찔러들어왔다.

가령 경계 인원의 주의가 산만해지는 교대 시간에 맞춰 습격을 걸어온다거나. 혹은 병력 부족으로 일시적으로 방어가 얇아진 곳을 노려 집중 타격한다거나.

꼭 성철파의 사정을 죄 꿰뚫고 있듯 움직이는 용문의 행태에 성철파 조직원들은 자기네들 사이에 스파이라도 있는 것 아니냐며 불평했다. 안수호 또한 같은 생각이었다.

그러나 스파이 따위 그가 알 바 아니다.

그의 목적은 오직 류태현을 안전하게 빼내, 무사히 이 슬럼을 떠나게 하는 것.

그렇기에 안수호는 전투에 불려나가는 시간 외에 모든 시간을 쏨밧 암살 준비에 할애했다. 그의 행적을 살피고, 거주지를 알아내고, 행동 패턴을 파악해 어떻게든 그를 죽일 수 있을만한 빈틈을 모색한다.

그런 식으로 흘러간 열흘이었다.

그 열흘 내내 성과라곤 전혀 없었다.

그나마 성과가 있었다면 성철파의 거듭된 패전을 이유로 지예원과 강하늘의 참전을 막을 수 있었다는 것.

두 사람의 안전을 확보한 건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었으나, 그런 그의 심정을 비웃듯 11일째가 되던 날 쏨밧이 안수호에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전해왔다.

“내일……이라고?”

“그래. 일전에 말했던 소수 정예에 의한 용문의 본거지 습격. 그 극비 작전의 결행일이 내일로 정해졌다. 그러니 준비하고 있도록.”

“그게 갑자기 뭔 뚱딴지 같은…. 그런 걸 결정할 거면 적어도 며칠 전에는 말해줬어야 하는 것 아닌가?”

“이 작전은 보안이 생명이니까. 작전 인원이라 해도 정보 공개는 최대한 늦출수록 좋다. 내일 저녁에 작전에 대한 브리핑을 마친 뒤 곧바로 용문 구역으로 향할 거다.”

습격 예정 시각은 아마 익일 자정에서 새벽 1시 전후.

용문의 본거지를 급습해 용문의 수뇌부를 빠르게 해치운 뒤 야음을 틈타 도망친다. 그것이 작전의 골자였다.

“……이런 작전을 네 부하들이라면 몰라도. 나같은 용병들이 동의할 거라 생각했나?”

결국 눈앞에 들이밀어진 무모한 작전에 안수호가 그렇게 되물었다. 그러자 쏨밧이 훗, 하고 웃으며 답했다.

“확실히. 당초 습격 작전에 대해 알려주었을 때 참가 의사를 보인 건 너와 블랙 도베르만 둘뿐이었다. 나머지는 죄 미친 작전이라며 자긴 절대로 참가하지 않겠다 거절했지.”

“나도 참가한다 한 적은 없어. 생각해보겠다고만 했지.”

“그럼 참가하지 않을 건가?”

마치 안수호라면 반드시 참가할 거라 생각하는 듯한 말투.

안수호는 그 말투에서 기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쏨밧은 투구를 쓴 자신을 보고 있었지만 꼭 그가 투구 안쪽의 맨얼굴을 꿰뚫어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 순간 불현듯 스친 우려.

설마 쏨밧은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는 거 아닐까.

‘……착각이겠지. 놈이 내 정체를 알 리가 없어.’

그가 안수호의 정체를 알고 있다면. 그리고 안수호와 류태현의 관계에 대해 파악했다면 안수호가 류태현을 지키기 위해 작전에 참여하리라 곧바로 알 수 있을 터.

허나 그럴 리는 없다. 안수호는 그의 앞은 물론이고, 성철파 조직원 그 누구의 앞에서도 투구를 벗지 않았음은 물론이요, 신원 특정을 경계해 초능력조차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쏨밧을 포함한 성철파가 그의 정체를 알아낼 방법은 없다 봐도 무방했다.

“그래서, 대답은?”

쏨밧의 재촉에 안수호가 고민하다 결국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가 살며시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줄 알았다. 어중간하게 힘만 휘두를 줄 아는 놈들은 결정적인 순간에 위험을 피하려 하지만, 진정으로 강한 자들은 그런 순간에도 자신의 강함을 믿고 뛰어들지. 빌헬름. 너는 강한 자다. 블랙 도베르만도 그렇고.”

쏨밧이 안수호를 진정한 강자라며 치켜세웠지만 안수호는 그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은 오로지 쏨밧의 암살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있었다.

이대로 가다간 류태현은 내일 작전에 끌려가게 된다. 그리고 적진 한복판에서 무모한 습격 작전을 벌이다 다치거나, 어쩌면 죽을 지도 모른다.

즉, 더 이상의 여유는 없다.

그러므로.

‘죽든 까무러치든, 오늘 밤 놈을 죽여야 해.’

류태현의 정체를 유일하게 알고 있는, 그를 성철파라는 침몰하는 배에 묶어둔 단 하나뿐인 족쇄.

그 쏨밧을 바로 오늘 밤 죽이겠노라고.

그렇게 다짐한 안수호가 빠르게 구체적인 계획을 수립해나갔다.

기실 계획이랄 것도 없긴 했다. 쏨밧은 지난 열흘 내내 자신의 집무실이 있는 건물에서 거의 나오지 않았다. 듣자하니 침실도 집무실 안쪽에 마련된 방에 있다는 모양.

즉 쏨밧은 오늘 밤도 그곳에서 잠을 청할 것이다. 안수호가 노릴 틈이라곤 그때밖에 없었다.

‘조직원 수십 명이 득실대는 사무실에 잠입해서 놈을 암살……. 쉬운 일은 아니지만 불가능한 일도 아니야. 몇 번의 전투 덕에 성철파는 용병 빌헬름을 신뢰하고 있으니까. 적어도 밤중에 사무실 건물에 들어가는 것 정도는 충분히 가능할 거야.’

그 뒤는 잠입이든 정면돌파든 쏨밧이 있는 집무실까지 도달해 그를 죽이는 것뿐.

그를 죽이는 데에 성공만 한다면 이후 도망치는 건 어렵지 않다. 온 사방에 연막을 뿌려 시야를 가린 사이, 태초의 은으로 날개를 만들러 하늘로 도망치면 될 테니까.

성철파는 자신들의 두목을 죽인 안수호를 쫓겠지만, 그들이 아는 거라곤 빌헬름이라는 이름과 기묘한 취향의 투구뿐이었다. 그들이 ‘아카데미 경비원 안수호’라는 정체에 이를 일은 결코 없겠지.

고로 안수호는 혼란에 빠진 성철파를 뒤로 하고 유유히 류태현을 빼내 바깥으로 돌아가기만 하면 된다. 모든 일이 잘만 풀린다면, 이론상 그 계획에 장해물은 없을 것이다.

물론, 갑작스런 쏨밧의 죽음으로 자신이 풀려났을 때. 류태현은 곧바로 안수호를 의심할 테지만.

‘변명은 나중에 하면 돼.’

그건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고. 안수호는 우선 당장 오늘 밤에 있을 암살에 집중하기로 했다.

그리하여.

그날 밤.

안수호는 두 연인이나 조유리 몰래 쏨밧이 기거하고 있는 사무소 건물로 향했다.

따로 챙긴 장비는 없었다. 그저 평소 입고 다니던 디펜시브 코트만 걸친 채 인적이 없는 거리를 조용히 걸어갔다.

요 근래 전쟁이 격화된 탓에 유흥가임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기껏해야 술에 취한 취객이나 집이 없는 부랑자들 정도.

목격자가 적다면 잘 된 일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안수호가 슬쩍 골목으로 들어갔다. 이 골목만 가로지르면 곧바로 성철파의 사무소 건물이 나올 터였다.

­…….

듬성듬성 불이 꺼진 가로등이 주욱 이어진 골목. 대로에서도 드물던 행인은 이곳에선 아예 보이지도 않았다. 안수호는 거리낌없이 골목을 나아갔다.

그러나 다음 순간, 모퉁이를 돈 안수호의 발걸음이 우뚝 멈췄다.

“…….”

경계심으로 물든 그의 시선이 전방으로 향했다.

약 30미터 전방. 흐릿한 가로등 아래 주저앉아 있는 여성 한 명.

어두운 밤이었지만 그의 시력은 그 여성의 행색을 곧바로 식별해냈다.

제대로 손질되지 않은 길고 까만 머리카락에 잠옷 같은 흰색 원피스. 눈가는 앞머리로 가려져 잘 보이지 않았지만, 전봇대에 기댄 채 주저앉은 모양새를 보니 곤히 자고 있는 것 같았다.

아마 취객이나 약쟁이겠지.

안수호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그쪽으로 걸어갔다. 가까이 다가가고 있음에도 여성은 미동도 하지 않은 채, 그저 규칙적으로 조용한 숨을 내뱉고 있을 뿐이었다. 반응할 기미는 없었다.

­스윽.

그렇기에 안수호는 그 앞을 별 생각 없이 지나쳤다. 그 순간까지도 여성은 전혀 반응이 없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두근!

안수호의 본능이 순간 경종을 울렸다. 온몸에 털이 바짝 곤두서며 입안의 침이 순식간에 마른다.

그가 슬쩍 고개를 뒤로 돌렸다.

분명 그가 지나칠 때까지도 가만히 앉아 졸고 있던 여성이, 어째서인지 지금은 일어서 있다. 일어선 채로, 다만 눈가는 여전히 긴 앞머리로 가린 채 안수호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여름 공포 영화 따위에 나오는 귀신처럼.

­스윽.

그렇게 생각한 순간 여성이 슬쩍 앞머리를 치웠다. 그 너머에서 드러난 눈은 피보다도 더욱 진한 붉은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지잉.

분명 그늘진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시뻘건 안광을 흩뿌리는 동공.

­두근!!

“허억…!”

그 눈빛과 마주친 순간 안수호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았다. 동시에 몸의 중심축이 탁 풀리며 시야가 아득해지기 시작한다.

명백한 이상징후.

안수호는 필사적으로 생각한다.

이 현상이 무엇인지는 알지 못한다.

다만 예측하기를 아마도 자신에게 행해진 정신 공격이나 그 비슷한 무언가.

그리고 범인은 바로…….

­스파앙!!

안수호의 손에서 날카로운 채찍이 뻗어졌다. 극한으로 압축된 연기의 채찍이 여성이 선 곳에서 조금 떨어진 지면을 날카롭게 훑고 지나갔다.

“……어라아? 왜 안 쓰러지는 거지? 이상하네에…?”

중심축이 흔들려 빗나갔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여성이 고개를 갸웃하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동시에 그녀의 눈에서 발해지고 있던 안광이 더욱 그 빛을 더한다.

­지잉.

“커헉!”

그러자 안 그래도 흔들리던 시야가 더욱 진동했다. 이내 시야의 끝자락부터 차츰 어둠으로 물들어가기 시작한다. 그러나 안수호는 필사적으로, 아직 어둠에 물들지 않은 가운데 부분을 통해 여성의 모습을 두 눈에 담는다.

“이걸 버텨…? 있는 힘껏, 최대 화력으로 발사한 건데에…. 벌써 내성이 있을 리도 없고, 너 정말 러스티 말대로 어어어엄청 성가신 녀석이구나? 대단한 거얼…….”

“……너 이 자식, 뭐하는 녀석…….”

“그렇지만 안타깝게도, 이제는 잘 시간이야.”

­지잉!

이제는 더 보탤 수 없을 정도로 빨갛게 물든 안광.

그 안광을 직시한 안수호가 털썩 지면에 무릎 꿇었다. 갑작스레 몰려오는 수마에 어떻게든 저항해보려 하지만, 그는 채 10초를 버티지 못하고 결국 의식을 잃었다.

­쿵.

이윽고 안수호가 지면에 엎드려 눕는다. 고통으로 일그러졌던 표정도 차츰 풀어지고, 이내 그 어깨가 규칙적인 페이스로 작게 오르내렸다.

­뚜벅. 뚜벅.

그런 그에게 천천히 다가가는 흰색 원피스의 여성, 히프노스.

­스릉.

이윽고 그녀가 허벅지의 홀스터에서 날카로운 나이프를 하나 꺼내들었다. 안수호의 곁에 털썩 주저앉은 히프노스가 그의 고개를 돌려 힘없이 늘어진 목에 나이프를 들이밀었다.

­싱긋.

줄곧 무기력한 무표정이던 그 얼굴에 이내 아주 옅은 미소가 떠오르고.

“……그럼, 잘 자.”

다음 순간, 히프노스가 나이프를 있는 힘껏 안수호의 목에 박아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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