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3화 〉 262. 작전들(1)
* * *
“그래서? 내가 누굴 죽여줘야 하는데?”
히프노스의 질문에 러스티네일이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히프노스는 분명 강했지만 암살팀 안에서도 유독 의욕이 떨어지는 멤버였다. 귀찮다며 러스티의 부탁을 거절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히프노스. 너도 기억하고 있을 거야. 태초의 은을 가로챘던 그린하우스 경비대원.”
“기억하고 있어……. 응……. 그땐 단장도 엄청 화냈으니까……. 분명 이름이…….”
“안수호.”
입에 담기만 해도 부아가 치미는 그 이름을 러스티네일이 짧게 읊조렸다.
“맞아, 그런 이름이었지…. 근데 그 경비대원이 슬럼에는 왜? 방해꾼이라며…?”
“방금 전에 싸우다 마주쳤어. 어찌된 영문인지 성철파 밑에서 용병일을 하고 있더라고.”
“부업일까? 아니면 다른 목적이…? 으음…. 잘 모르겠네에…….”
“어느 쪽이든 안수호가 성철파에 붙으면 일이 귀찮아져. 녀석의 전력은 S급 수준. 그런 놈이 떡하니 성철파에 버티고 있으면 용문의 슬럼 통일에 방해가 될 거야. 필히 제거해야 해.”
용문이 다른 두 조직을 치워버리고 슬럼의 유일한 지배자가 되도록 돕는 것.
그것이 그들의 유일한 상관인 여명단 단장이 그들에게 내린 명령이었다. 러스티네일과 또 다른 한 사람은 용병으로서 용문을 직접 돕고, 히프노스는 지금처럼 상정 외의 사태가 나타났을 때를 대비한 조커로서.
“그래, 알겠어. 내가 죽여줄게. 조만간…….”
“조만간이 아니라, 가능한 한 빨리야. 히프노스.”
“일은 느긋하게 해야 하는 거야 러스티……. 무슨 일이든 서두르면 망치는 법이니까아…….”
졸린 눈으로 싱긋 웃으며 그렇게 말하는 히프노스.
일견 믿음직하지 못해 보이는 모습이었지만 러스티네일은 그게 그녀의 약점이 아닌 개성임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잭은 어디 갔어?”
보이지 않는 남은 한 동료의 행방을 묻자 히프노스가 소파에 풀썩 누우며 대답했다.
“블랙스미스. 그쪽 리더인 마사장의 행적을 알아냈대……. 그래서, 지금 죽이러 갔어…….”
“혼자서? 나랑 같이 가는 편이 더 성공할 확률이 높을 텐데?”
“으응. 그렇긴 하지만 잭은 늘 자기 순위에 불만이었으니까아…. 이 기회에 공적을 세워 올라가고 싶은 걸지도……. 마침 큐브 자리였던 9위도 공석이고…….”
“하여튼 그 칼잡이 녀석…….”
러스티네일이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 모습에 히프노스가 넌지시 그녀에게 묻는다.
“러스티는, 잭이 실패할 거라 생각해?”
“……어지간하면 성공하겠지. 순위는 꼴등이어도 암살은 녀석 전문이니까.”
암살팀 안에서 암살이 전문이 아닌 이가 어디 있겠냐만은, 잭과 다른 멤버들을 비교할 때에 한해선 그런 표현이 충분히 통용될 수 있었다.
코드네임 잭. 이미 죽은 큐브를 더해 10명뿐인 암살팀에서 10위라는, 말석을 차지하고 있는 멤버.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야말로 암살팀 안에서도 가장 ‘암살자’라는 표현이 걸맞는 인물이었다. 그의 초능력 은신은 아무리 삼엄한 경비가 있는 곳도 제 집 드나들듯 침투할 수 있었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휘둘러진 그의 나이프엔 어떠한 상대라도 단번에 명을 달리했으니.
“그럼 된 거 아니야? 잭이 성공하면 블랙스미스는 와해될 거야. 거긴 다른 두 조직보다 훨씬 리더에게 의존하는 조직이니까…….”
“그렇게 좋게만 흘러간다면 더할나위 없지. 그렇지만 세상 일이라는 건 늘 변수가 생기는 법이야. 그 빌어먹을 경비대원이 갑자기 성철파에 붙은 것처럼, 무슨 변수가 생길지는 막상 닥칠 때까지 알 수 없는 거고.”
러스티네일은 이번 슬럼에서의 임무가 그들 조직에 있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모든 일에 만전을 기하며 신중하게 추진하고자 했다.
그런 맥락에서 잭의 돌발 행동은 아니꼬울 수밖에 없었다. 만에 하나 잭이 실패하기라도 하면 그것은 비단 잭 혼자만의 실패로 끝나지 않고, 이후 그들의 계획 수행에도 차질을 주게 될 테니까.
‘모처럼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는데 갑자기 방해꾼이 나타나질 않나 동료란 녀석은 돌발행동을 하지 않나……. 짜증나 진짜.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다.’
짜증 섞인 한숨을 푹 내쉬는 러스티네일.
“러스티…….”
그런 그녀를 히프노스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봤다. 이내 그녀가 두 팔을 살며시 벌리며 러스티네일에게 말했다.
“나랑 같이 한숨 잘래? 많이 피곤해 보여…….”
“피곤한 게 아니라 다쳐서 그래. 그 안수호라는 녀석에게 좀 호되게 당했거든.”
임시로 지혈해둔 피투성이 옆구리를 가리키며 러스티네일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히프노스는 완강했다.
“으응……. 그럴수록 더 잠을 자야지. 잠을 자야 회복도 빨리 되고……, 또 피곤이 가셔야 일을 더 능률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걸. 잠은 중요한 거야 러스티.”
“지금은 자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최고로 편안한 잠을 선물해줄게. 그러니 이리 와. 러스티.”
나긋나긋한 어조 사이에 낀 묘하게 강압적인 감정.
풀썩.
결국 러스티네일은 단념할 수밖에 없었다. 소파 위에 그녀가 눕자 히프노스가 등 뒤에서 그녀를 껴안으며 함께 풀썩 드러누웠다.
두 사람이 자기엔 다소 좁았지만, 그렇기에 히프노스는 러스티네일을 더욱 꽈악 안았다. 따스함이 감도는 이불을 함께 덮으며 그녀가 러스티의 귓가에 속삭였다.
“우리 사랑스러운 러스티……. 언제나 열심히 노력하고 있지만 아주 잠깐만 다 내려놓자…. 지금은 그저 편안하게……. 기분 좋은 잠을 자는 데에만 집중하는 거야…….”
“……1시간 안에 깨워줘.”
“딱 1분 남기고 깨워줄게.”
“…….”
진한 한숨과 함께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러스티네일이 눈을 감았다. 부정하곤 있었지만 피곤이 쌓인 것은 사실이었는지, 상처의 아픔에도 불구하고 러스티는 금방 잠의 세계로 빠져들어갔다.
“잘 자. 러스티.”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히프노스 또한 그녀를 따라 수마에게 몸을 맡겼다.
***
한편 안수호는 쏨밧의 호출을 받고 곧장 성철파의 본거지로 향했다. 언제 한 번 얼굴이나 보자고 했으나 마침 시간이 서로 맞아 곧장 만남이 성사된 것이었다.
류태현을 밖에 기다리게 둔 채 그가 들어선 곳은 고급스럽게 꾸며진 집무실.
영화에서 보던 조폭 사무실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장식을 하되 절제된 분위기를 풍기는 그곳은 범죄조직 리더보다는 견실한 기업가의 집무실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의외라면 의외였다.
“네가 빌헬름인가.”
그리고 그 집무실 제일 안쪽, 의자에 앉은 채 그를 기다리고 있던 성철파의 임시 두목. 쏨밧.
“내 소개는 하지 않아도 되겠지. 다른 두 조직을 제쳐두고 굳이 우리 쪽에 자원한 자가 날 모를 리는 없을 테니.”
“…….”
“한국말이 서툰 건가? 빌헬름……. 독일어는 못하지만 영어라면 꽤 한다만.”
“……아니. 한국어로 부탁하지.”
“Well. 그게 편하다면야.”
쏨밧이 앞쪽 테이블에 있는 소파를 권했다. 자신은 여전히 사무용 의자에 앉은 채로.
이야기를 나눈다면 응당 서로 마주 앉는 게 정석이건만, 꽤 기묘한 자리 배치였다.
“그래서, 날 보자고 한 용건은?”
“우선 빌헬름. 네 활약에 대한 감사를 표하기 위해서다.”
러스티네일을 패주시킨 안수호의 활약은 과장 좀 보태 성철파 그 자체를 구해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렇기에 조직의 수장이라는 자가 이렇게 직접 감사를 표하기 위한 자리를 마련한 것이었다.
“이렇게 실력 있는 용병이 우리 조직을 선택해주다니, 아직 내 운이 다하진 않은 것 같군. 듣자하니 아직 금액 관련 협상이 다 끝나지 않았다고 하던데. 전례가 없는 최고의 대우를 약속하도록 하지.”
“말만 번지르르해선 쉽게 와닿질 않는군. 구체적으로 어느 정도의 대우를 생각하고 있지?”
“천만.”
쏨밧이 손가락 하나를 세우며 안수호에게 말했다.
“전투 참여 1회 당 천만원. 거기에 전투가 길어질 경우 하루당 500만을 추가로, 현찰로 즉시 지급하지. 그 외 추가금은 별도로 정산하고. 필요한 무기나 장비가 있다면 그 또한 최대한으로 지원하는 걸 약속하겠다.”
“호오.”
안수호는 용병 행세를 하기 전 지예원으로부터 대략적인 용병의 시세를 전해들었다. 그때 들었던 시세와 비교해보면 쏨밧의 ‘전례가 없는 최고의 대우’라는 말은 확실히 사실이었다.
‘전투 두세 번만 참여해도 3000 가까이……. 정말 그만한 돈을 현찰로 준다면 고아원의 상납금을 마련하는 것도 금방이겠어. 잘만 하면 이번 주 내로 태현이를 빼낼 수 있을 것 같은데.’
다만, 어디까지나 그 돈을 정말 준다는 전제 하에.
“확실히 최고의 대우라 할만하군. 그런데 내가 알기로 지금 성철파에 그만한 자금 여유가 있는 것 같진 않던데.”
“물론. 우리라고 돈이 썩어 넘치는 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빌헬름, 너는 정말 필요할 때에만 불리게 될 거다.”
“한 번에 돈을 많이 주는 대신 횟수를 줄인다. 그래서야 조삼모사인데.”
“허나 최소한의 리스크로 최대의 리턴이 보장되지. 너도 적게 싸우고 많이 버는 편이 좋지 않나?”
최소한의 리스크라.
쏨밧의 말은 얼핏 그럴듯하게 들리지만 결국 말장난에 지나지 않았다. 회당 천만 원이나 드는 비싼 용병을 부른다는 건 즉 그만큼 위험한 전투란 뜻이니까.
리스크와 리턴을 저울질한다면 오히려 자잘한 전투에 자주 나가서 돈을 받는 편이 더 낫겠지.
그러나.
“확실히, 나도 그 편이 더 편하긴 하지.”
평소 전투에 불릴 일이 없다는 건 즉 다른 행동을 취할 수 있는 자유 시간이 늘어난다는 것.
류태현과 접촉한다는 당초의 목표를 달성한 이상, 안수호로선 최대한 성철파에 묶여있는 시간이 적은 편이 여러모로 좋았다. 그런 맥락에서 쏨밧의 제안은 아이러니하게도 안수호의 사정에 딱 맞았다.
“만족스러운 표정이니 다행이군. 구체적인 부분은 추후 강태수와 협상하면 될 거다.”
“그렇게 하지. 그럼 용건은 이걸로 끝인가?”
“설마. 방금 건 그저 에피타이저다.”
본격적인 이야기는 지금부터.
천 단위의 돈이 오가는 보수 협상이 그저 에피타이저라면 메인은 뭐란 말인가. 안수호가 곰곰이 생각하던 그때 쏨밧이 입을 열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묻지. 너는 블랙 도베르만과 아는 사이인가?”
그 순간 안수호는 투구를 쓰고 있어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이런 자리에서 표정을 감추는 거야 이젠 익숙했지만, 투구 덕에 아주 살짝 드러난 당황의 기색마저 감출 수 있었으니.
‘류태현이랑 아는 사이냐고? 갑자기 그건 왜?’
이 타이밍에 왜 쏨밧이 그걸 물어보는가.
가장 먼저 떠오른 건 몇 시간 전, 류태현과 안수호의 밀회를 이 자에게 들켰을 경우였다. 그러나 그럴 가능성은 한없이 낮았다. 안수호나 류태현이나 뭣 모르고 미행을 허용할 자는 아니었으니까.
“……전혀. 그 용병과는 오늘 처음 보는 사이다. 헌데 그건 왜 묻는 거지?”
우선 시치미를 떼며 떠볼까. 그렇게 생각하며 안수호가 역으로 물었다.
그러자.
“강태수에게서 들었다. 네가 자신의 실력을 검증할 상대로 블랙 도베르만을 지목했다고.”
“아아, 그 일 때문인가.”
투구 속 안수호의 얼굴에 일순 화색이 돌았다.
“별 의미는 없었다. 그저 놈이 성철파에 있는 용병 중 제일 강하다는 소문을 들었기에, 실력을 검증하기에 딱 좋은 상대다 싶어 말한 것뿐이야. 나와 놈은 일면식도 없는 남이다.”
“그런가. 결과적으로 실력은 증명되었으니 그럼 이제 볼일은 없겠군.”
“그런 셈이지.”
묘하게 의미심장한 말에 안수호가 쏨밧의 표정을 살폈다. 그러나 마네킹처럼 무표정한 얼굴에선 조금의 정보도 얻어낼 수 없었다.
“……다만, 난 강한 놈이랑은 친하게 지내자는 주의라서. 게다가 마침 함께 일하는 사이니 앞으로는 종종 마주치게 될지도 모르지.”
그렇다면 한 번 더 떠볼까.
그렇게 생각하며 안수호가 그 말을 던진 순간, 쏨밧이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
“…………하긴. 그 편이 좋을 지도 모르겠군.”
“무슨 의미지?”
“말 그대로의 의미다. 너와 도베르만은 우리 조직에서 일하는 용병들 중 1, 2위를 다투는 자들이고. 아마 앞으로도 같은 전장에서 싸우게 될 일이 많겠지. 그렇다면 서로 친해져서 나쁠 건 없을 것 아닌가.”
안수호가 한 말을 그대로 뒤집은 듯한 말.
액면 그대로 저렇게 생각하는 것인지 아니면 숨기고 있는 꿍꿍이가 있는 것인지. 안수호가 고민하던 찰나 쏨밧이 이어서 말했다.
“…………아니지. 생각해보니 친해질 시간이 없을지도 모르겠군. 너희 용병들이 우리 조직에서 일하는 날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그건 금시초문인데. 어째서지?”
“비밀스럽게 추진하고 있는 작전이 하나 있다. 그 작전이 성공한다면 전쟁은 끝난다. 그럼 용병들과의 관계도 그걸로 끝이지.”
전쟁이 끝난다. 류태현을 한시라도 빠르게 빼내고 싶은 안수호로선 환영해야 할 일.
“그런가. 돈을 벌 기회가 사라진다니 그거 참 아쉽지만, 그렇게 말하니 궁금하군. 그 작전이란 게 도대체 뭔지.”
혹시 조금의 정보라도 얻어낼 수 있을까 안수호가 그렇게 물었다. 그 물음에 쏨밧이 피식 웃으며 답했다.
“비밀 작전이기에 용병들에겐 밝히지 않으려 했지만……. 뭐, 너나 도베르만에겐 말해줘도 되겠지. 작전의 당사자가 될 자들이니까.”
“그렇게 말하니 더 궁금하군. 그래서 그 작전이란 게 뭔데?”
“핵심전력만 추린 소수 인원으로 용문의 본부를 기습한다.”
“뭐?”
쏨밧의 입에서 나온 말에 안수호가 순간 당황을 금치 못했다.
소수 인원을 통한 적 본거지의 기습.
그야 성공만 한다면 전쟁을 끝낼 수도 있겠지.
성공만 한다면 말이다.
애초에 그런 일이 가능했다면 진즉에 전쟁이 끝났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대 세력의 전쟁이 6개월이나 지지부진하게 이어진 건 어째서인가.
‘서로 자기네 구역의 수비가 철통같기 때문이지. 세 조직 모두 상대 조직의 본거지엔 아직 발도 걸쳐보지 못했어. 그런 와중에 소수 인원으로 본부 기습이라니. 그런 게 가능할 리가…….’
가능할 리가 없다. 그런 표정으로 안수호가 쏨밧을 바라봤다. 물론 투구를 쓰고 있었기에 그 표정이 전해지진 않았을 터다.
그러나.
“불가능할 거라 생각하나?”
쏨밧은 마치 그 표정을 읽은 것처럼 안수호에게 물었다. 이에 안수호가 되묻는다.
“그럼, 가능하다고?”
“그거야…….”
다음 순간, 쏨밧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떠올랐다.
“당연히 가능하지. 가능하지 않으면 내가 왜 이 이야길 하겠나?”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