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카데미 경비원으로 빙의당했다-262화 (263/266)

〈 262화 〉 261. 재회(2)

* * *

“……안수호.”

들켰다.

러스티네일의 입에서 자신의 이름이 나온 순간, 안수호의 뇌리에 자연스레 든 생각.

그러나 안수호는 곧바로 평정을 되찾았다. 러스티네일은 이미 그와 한 번 싸워본 상대. 암살팀에 걸맞은 안목을 가진 그녀를 상대로 언제까지고 정체를 숨길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진 않았으니.

고로 당황할 건 없다. 중요한 건 그녀가 자신의 정체를 알아차렸다는 게 아닌, 어떻게 그녀를 상대해야할지였다.

즉 분석.

시뻘건 녹가루가 휘날리는 주위를 바라보며 안수호가 러스티네일의 능력에 대해 유추했다.

초인끼리의 싸움이 꼭 초능력만으로 행해지는 건 아니다. C급 이상 초인의 신체능력은 탈인간급이고, 그쯤 되면 초능력뿐 아니라 평범하게 내지르는 주먹과 발길질 하나하나가 흉기가 되니까.

허나 그건 서로가 마찬가지.

이쪽도 저쪽도 엇비슷하게 인간흉기급 신체능력을 지녔다면, 결국 전투의 향방을 결정하는 것은 초능력의 종류와 그 활용능력에 달리게 된다. 초인의 싸움이 초능력이 전부는 아니라지만, 그것이 승패의 한 축을 담당하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

고로 초인과 싸우기 앞서 가장 중요한 건 그 초인의 초능력을 알고 분석하는 것이다. 세상에 무적의 능력이란 존재하지 않고, 그렇다면 반드시 파고들 틈이 있을 테니까.

‘일단 기본 전제. 러스티네일의 능력은 물질을 녹슬게 만드는 것……. 저번 싸움을 생각하면 그게 꼭 금속성 물질에만 한정되는 건 아니야. 즉 녹 그 자체라기보다는 부패나 부식 같은, 좀 더 광범위한 능력이겠지.’

능력의 본질을 알았으면 그 다음은 활용 범위다. 대부분의 물질을 부식시키는 초능력을 러스티네일은 어떤 식으로 사용하는가. 어떤 식으로‘밖에’ 사용할 수 없는가.

‘저번 싸움에선 손으로 만진 물질만 부식시켰다. 그렇지만 지금은 아니야. 직경 5~6미터 정도. 주위에 모든 물질이 순식간에 녹슬어 문드러졌다. 범위가 늘어났어. 원리가 뭐지? 만지지 않아도 능력을 적용시킬 수 있게 된 건가? 아니면 손이나 발 같은 접촉면을 기준으로 한 번에 능력을 적용시킬 수 있는 범위가 늘어난 건가?’

능력 활용에 대해 가설을 세웠다면 그 다음은 하나하나 검증하는 게 도리. 바닥에 굴러다니던 콘크리트 파편을 집어든 안수호가 있는 힘껏 그것을 던졌다.

­퍼석!

그리고 그건 러스티네일의 3미터 앞 정도에서 완전히 녹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안수호의 입가에 초조한 웃음이 떠오른다.

‘공중에 있던 파편이 부식됐다. 즉, 접촉면 기준으로 범위가 늘어난 게 아니야. 그냥 만지지 않고도 능력을 적용시킬 수 있게 된 거다. 그나마 다행인 건 사정거리가 아주 길지는 않다는 점. 적어도 저 위치에서 곧장 나나 태현이에게 능력을 사용할 수는 없는 것 같다.’

사정거리는 최소 3미터. 그렇다면 넉넉하게 그 세 배 남짓인 10미터를 상정한다. 러스티네일이 그 이상 다가오지 못하게 한다면 적어도 놈의 능력에 당할 걱정은 없다.

그렇다면.

‘닿지도 않고 물질을 부식시켜 가루로 만든다니. 더럽게 사기적인 능력이야. 고작 한 달 사이에 능력이 그만큼 성장했을 리는 없어. 아마 무언가 편법을 썼겠지.’

그 편법이 무엇인지 지금 알아낼 수는 없다. 다만 중요한 건, 제아무리 사기적인 능력이라 한들 공략한 실마리가 존재한다는 것.

‘요는 접근만 저지하면 된다. 즉…….’

­키이이이잉!!

탈리스만이 맹렬히 빛을 발하며 안수호의 양손에 시꺼먼 연기가 모여들었다. 러스티네일이 자세를 낮추며 그에게 물었다.

“네 능력에 내가 저번처럼 무력하게 당할 줄 알아?”

“응. 쉽게 이길 수 있을 것 같은데?”

“…….”

안수호의 도발에 러스티네일이 입술을 잘근 씹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형형한 살기를 띤 그녀가 예고도 없이 안수호에게 달려들었다.

­타앙!!

단 한 번의 도약으로 빠르게 거리를 좁히는 러스티네일.

‘지금!’

허나 안수호는 발걸음과 발걸음 사이의 빈틈을 놓치지 않았다. 빠르게 오른손을 앞으로 뻗은 그가 축적하고 있던 연기를 단숨에 해방했다.

­투콰아아아아아!!

검은 파도가 러스티네일을 덮쳤다. 압축하고 압축하여 날카롭게 벼린 칼날이 아닌, 넓은 면적을 단번에 쓸어버리는 면 형태의 공격.

“크읏?!”

그 파도 같은 폭풍에 지면을 박차 공중에 떠올랐던 그녀의 몸이 속절없이 밀려났다.

제아무리 초인이라 한들 공기를 딛고 버틸 순 없는 법.

고작해야 50kg가 조금 넘는 그녀의 몸은 어느새 출발지점보다 더욱 뒤로 밀려나 있었다. 물론 그녀는 지면을 딛자마자 곧바로 다시 도약했지만…….

­투콰아아아아아아아!!!!

이번에는 안수호의 왼손에서 폭풍이 뿜어져 나왔다. 오른발을 박차고 왼발을 딛기까지의 아주 짧은 순간, 안수호는 그 순간을 정확하게 노려 그녀의 몸을 밀어냈다.

“무력하게 당하진 않는다면서? 공격은커녕 다가오지도 못할 것 같은데?”

“이 새끼가!!”

분노에 차 그렇게 외쳤지만 뾰족한 수가 없었다. 자세를 낮추고 발걸음 사이의 시간차를 줄여보려 해도 안수호는 0.2초도 안 되는 그 순간을 정확하게 파고들었다.

그것도 아주 여유로운 표정으로.

‘공중에 뜨면 바람에 곧바로 밀려나. 그렇다면…….’

­콰앙!!

러스티네일이 반쯤 문드러진 지면을 있는 힘껏 찍었다. 거의 발을 땅에 박아넣을 기세로.

­콰앙! 쾅! 콰앙!!

마치 진각이라도 밟듯 그녀가 둔중하게 뛰었다. 속도가 느려지긴 했으나 범인의 뜀박질보단 빨랐고, 단 한 순간도 지면에서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저런 식이라면 안수호가 쏘아낸 폭풍도 능히 버텨낼 것이다.

“뭐 그러시든가.”

허나 안수호는 비웃을 뿐이었다. 폭풍에 날아가지 않겠다고 땅바닥에 발을 박아넣다시피 하는 그녀의 꼴이 우습기도 했고, 기껏 그녀가 생각해낸 타개책조차 파훼할 방법이 있었으니.

­스팡!!

안수호의 손에서 날카로운 칼날이 튀어나갔다. 조금 전과 달리 극한으로 압축한 고압의 기체 커터였다.

“!!”

바뀐 공격 방식에 러스티네일이 급하게 몸을 피했다. 그러나 발을 지면에 박아넣으며 뛰어온 탓에 반응이 늦을 수밖에 없었다.

­피슛!

러스티네일의 어깨에 스치듯 베인 상처가 생겨났다.

일순 따끔한 아픔이 밀려왔지만 경상 축에도 못 끼는 작은 상처. 움직임에 제약은 없었다.

그러나.

­스팡! 스팡! 스파앙!!

“크윽?!”

안수호의 공격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러스티네일은 그에게 접근하면서 어떻게든 몸을 비틀어 그 공격들을 피해냈지만, 처음과 마찬가지로 완벽하게 피할 순 없었다. 온몸에 생겨난 자잘한 상처에 가뜩이나 느린 그녀의 뜀박질이 더욱 늦춰졌다.

“아깐 세상 누구든 다 이길 것처럼 말하더니 영 신통찮네? 좀 제대로 해봐. 응? 이래서 언제 나한테 접근하려고?”

안수호가 도발적으로 이죽거리며 뚜벅뚜벅 거리를 벌렸다. 둘 사이의 거리가 벌어졌다는 건 그녀가 달려야 할 거리가 늘어났다는 소리.

즉 그녀가 안수호의 공격을 버텨내야 할 거리가 늘어났다는 뜻이었다. 러스티네일이 분한 표정으로 안수호를 노려봤다.

죽인다.

감히 자신을 얕잡아보고, 비웃고, 짜증나게 이죽거린 저 남자를 기필코 죽여버리겠다.

분노를 태우며 러스티네일이 자세를 낮췄다. 동시에 상시 발동 중이던 초능력을 풀었다. 초능력에 할애하고 있던 집중력을 회피로 돌려, 재빠르게 안수호에게 접근할 심산이었다.

­쾅! 쾅! 쾅! 콰앙!!

거센 울림과 함께 돌진하는 러스티네일. 안수호는 여전히 그녀에게 공격을 쏘아댔지만 전과 달리 러스티네일은 이를 아슬아슬하게 전부 회피해냈다. 모든 집중력을 회피에 치중한 덕분이었다.

‘빙고.’

허나 거기까지도 안수호의 노림수였다는 걸, 과연 러스티네일은 알기나 할까.

러스티네일이 밟는 지면이 더 이상 문드러지지 않는다. 즉 그녀가 초능력의 사용을 멈췄다.

그걸 안 순간 안수호는 코트 자락 안쪽에서 몰래 두 가닥의 총열을 만들었다. 그 안에 날카롭게 벼려낸 총알을 장전하고, 이내 약실 가득 압축한 연기를 해방하며 그것을 쏘아냈다.

­투웅!!

둔중한 총성과 함께 날아가는 총알 두 발.

찰나의 순간 러스티네일은 자신에게 쏘아진 총알의 존재를 인식했다. 그러나 발사의 사전동작을 읽고 피하는 거라면 모를까, 문자 그대로 총알 같은 스피드로 날아오는 공격을 피할 운동능력이 그녀에겐 없었다.

­퍼, 퍼억!!

“끄…!”

신음과 함께 그 몸이 앞으로 고꾸라진다. 착탄 직전 능력을 발동해 총알을 부식시키려 했지만, 그것은 평범한 총알이 아닌 태초의 은으로 이루어진 탄환. 찰나의 순간에 전부 가루로 만들 수는 없었다.

­철퍽! 철퍼억!!

힘겹게 지면을 짚자 시뻘건 혈액이 울컥울컥 쏟아져나왔다. 착탄 지점은 왼쪽 옆구리와 허벅지. 관통은 안 되었다지만 그렇다고 경상도 아니었다.

‘총을 쏜 건가…? 아냐, 총은 가지고 있지 않았어. 그럼 능력으로 쇠구슬 같은 걸 날린 건가?’

제법 그럴싸하게 경위를 유추한 러스티네일이 입술을 잘근 씹었다. 본래라면 통하지 않았을 공격이었지만 허를 찔린 탓에 당해버리고 말았다며.

­투웅! 투웅!

그러는 사이 안수호가 재차 사격을 가했지만 이번엔 제 때 초능력을 발동해 탄환을 지워버렸다. 그러나 안수호의 입가엔 진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여기까지는 예상한 대로.

그가 전투 직전 그렸던 그림대로, 안수호는 러스티네일에게 중상을 입히는 데에 성공했다. 반면 러스티네일은 아직 그에게 공격다운 공격조차 해보지 못했고.

‘이대로 싸우다간 진다.’

러스티네일은 분했지만 그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상성이 안 좋아도 너무 안 좋았다.

개량형 도니체티로 무적의 능력을 손에 넣은 그녀였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접근전 한정. 안수호처럼 멀리서 히트 앤 런으로 치고 빠지는 적에겐 힘을 쓸 수 없었다.

“도망치게?”

기회를 엿보며 내빼려는 러스티네일을 보며 안수호가 이죽거렸다. 그러나 결코 추격을 위해 접근하진 않는다. 대신 두 손 가득 연기를 그러모으며 언제든 대응할 수 있도록 신중에 신중을 기했다.

‘분하지만 어쩔 수 없어. 녀석이랑 정면으로 싸우는 건 불리해. 게다가 약효도 슬슬 떨어져가고. 일단은 후퇴하는 수밖에…….’

러스티네일이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안수호를 노려봤다. 살벌한 살기를 뿜어대며 그녀가 작게 읊조렸다.

“……다음번엔 기필코 죽일 거야.”

“미안하지만 다음은 없어.”

그 말과 함께 안수호가 공격을 쏘아내려 했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러스티네일이 반 박자 빨랐다.

­파스스스스슥!!!

일순 그녀의 주위 일대가 단숨에 녹슬며 문드러졌다. 뒷생각을 하지 않고 최대 위력으로 초능력을 발동했다. 그 결과 부식의 여파는 그녀가 선 지면만이 아닌, 양쪽에 위치한 건물의 기반부까지 미쳤다.

­퍼석! 퍼서서석!

건물의 벽을 이루는 콘크리트도, 그 안에 박힌 철근도 순식간에 문드러져 흩날렸다. 순식간에 기저부의 절반이 날아간 건물이 우지끈, 하며 도로 쪽으로 기울기 시작한다.

“이런!”

안수호는 곧바로 러스티네일의 노림수를 알아차렸다. 그가 재빨리 양손에 모으고 있던 연기를 해방했다.

­스팡! 스파아앙!!

두 갈래의 칼날이 러스티네일에게 뻗어졌다. 그러나 그것보다 먼저 무너진 건물이 두 사람 사이를 갈랐다. 콰르르릉 소리와 함께 대지가 흔들리고, 자욱한 흙먼지와 녹가루가 그의 시야를 가렸다.

“빌어먹을!!”

­투콰아아아아!!

곧바로 안수호가 바람을 일으켜 흙먼지를 날려보냈지만 시야는 여전히 건물 잔해로 가로막혀 있었다. 입술을 잘근 씹으며 그가 잔해 위로 뛰어올라갔다.

­휘오오오오.

그러나 그 너머엔 아무도 없었다. 러스티네일이 있던 자리에는 붉은 녹가루만이 흩날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 짧은 찰나에 몸을 내뺀 것이었다.

­빠드득.

안수호가 분한 표정으로 어금니를 깨물었다. 줄곧 그의 예상대로 진행되던 상황이 막판에 어그러졌으니 짜증이 치솟을 만도 했다.

잘만 하면 암살팀 멤버를 생포해 여명단 본부의 위치를 알아낼 수도 있는 기회였는데, 그 기회를 눈앞에서 놓쳐버렸으니.

물론 안수호는 제 능력껏 러스티네일을 잘 상대했다. 오히려 갑작스런 전투에도 그녀를 거의 압도하다시피 했으니 선방했다 할 수 있겠지.

“……씨발.”

허나 그래봤자 결국 손에 거의 다 들어온 승리를 눈앞에서 놓쳤다는 사실엔 변함이 없었다. 잔해 더미에서 내려온 그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

한편 그런 안수호를 류태현은 줄곧 지켜보고 있었다.

전투가 시작되고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단 한 번도 눈을 떼지 않은 채.

기실 류태현은 적잖이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자신은 별다른 저항도 해보지 못한 적을 상대로 안수호는 압도적으로 승리했다. 물론 상성의 차이가 있다곤 하지만, 그런 요소는 그에게 있어서 부차적인 문제였다.

요는 자신이 이기지 못한 상대에게 안수호가 이겼다는 것.

‘역시 형은 나보다…….’

겨우 잊고 있었던 열등감이 그의 안에서 조용히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동시에 자신을 구해준 안수호를 상대로 그런 감정이나 품는 스스로가 꼴사납고 부끄럽기도 했다.

­지이이이잉.

그때 류태현의 주머니에 있던 핸드폰이 울렸다. 쏨밧으로부터 온 문자에는 연락 가능한 대로 곧바로 전화를 주라는 메시지가 적혀 있었다.

그는 곧바로 쏨밧에게 전화했고 곧 전화를 받은 쏨밧이 류태현에게 물었다.

­현장에는 도착했나?

그랬다. 현장에 도착하자마자 전투가 시작되고, 또 순식간에 끝났기 때문에 아직 시간이 별로 흐르지 않은 상태였다. 쏨밧은 류태현이 지금쯤 현장에 막 도착했을 거라 생각했고, 이에 류태현은 씁쓸한 표정으로 그에게 답했다.

“적은 처리했어. 중상을 입고 도망쳤다.”

­그런가. 내 부하들이 속수무책으로 당한 적조차 손쉽게 처리하다니. 4년 사이에 실력이 많이 늘긴 했나보군.

“……아니. 내가 한 게 아니야.”

­네가 한 게 아니라고?

류태현은 속에서 끓어오르는 복잡한 감정을 한숨과 함께 삼켰다.

“적을 쓰러뜨린 건 다른 용병이야. 까만 코트에 은색 투구를 쓴 용병. 당신도 알고 있을 텐데.”

­까만 코트에 투구……. 아, 그 녀석인가. 강태수 말로는 아직 실력 검증이 안 되었다 그랬는데……. 이거 검증해볼 필요도 없겠군.

실력 있는 용병이 들어온 건 분명 성철파에 있어 좋은 일일 터였다. 그러나 전화기 너머의 쏨밧에게선 기뻐하는 기색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갑작스런 실력자의 등장에 당황했달까, 불편해 하는 기색마저 느껴졌다.

­태현. 혹시 그 용병이 지금도 옆에 있나? 그렇다면 내 말 좀 전해줬으면 하는데.

“뭔데?”

­한 번 얼굴 좀 보고 싶으니 조만간 시간을 내달라고. 이쪽에서 연락하겠다고 전해줘라.

쏨밧의 말은 즉 안수호의 실력이 성철파에게 인정받았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류태현은 마냥 기뻐할 수 없었다. 그 이유가 비단 성철파가 범죄조직이기 때문만은 아니리라.

“……그러지. 바로 전해줄게.”

­고맙다. 너도 고생했다.

전화를 끊은 류태현은 한숨과 함께 조용히 안수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여전히 투구를 쓰고 있던 그는 말없이 땅바닥을 내려다보며 사색에 잠겨 있었다. 기실 그는 방금 전 싸움에서 있었던 스스로의 실책을 자책하는 중이었지만, 그런 사정을 류태현이 알 수 있을 리가 없다. 때문에 그의 눈에는 안수호가 자신의 시선을 피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

그런 안수호를 류태현이 의미심장한 눈으로 바라봤다.

가면을 쓴 사내와 투구를 쓴 사내. 두 사람은 그렇게 어색한 침묵 속에서 망연자실하게 서있었다.

그리고.

두 사람으로부터, 정확히는 안수호로부터 도망친 러스티네일은.

“후우….”

간단한 지혈만 한 채 중상을 입은 몸으로 그녀가 도망쳐온 곳은 용문 구역에 있는 어느 낡은 건물이었다. 지하로 내려간 그녀가 벌컥 문을 열자 이미 옛저녁에 망한 술집의 풍경이 그녀를 반겨주었다.

러스티네일은 신경질적으로 그 안을 살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찾고자 하였던 인물을 발견했다.

“쿠울…….”

술집 구석. 먼지가 켜켜이 쌓인 소파 위에서 자고 있는 흑발의 여인.

러스티네일은 성큼성큼 그녀에게 다가가 그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깊은 잠에 빠져있던 여인은 러스티네일이 어깨를 수십 번은 두드린 다음에야 겨우 눈을 떴다.

“으음, 누구…? 러스티야…? 아니면 잭……?”

“나야. 히프노스. 중요한 일이 있어서 깨웠어.”

러스티네일의 대답에 여인이 몸을 일으키며 기지개를 켰다. 눈가를 가릴 정도로 내려온 앞머리 사이로 진한 다크서클이 언뜻언뜻 보였다.

“중요한 일이라니, 뭔데……?”

“…….”

용건을 말하려던 러스티네일의 입이 흠칫 굳었다. 그녀의 얼굴에 진한 망설임이 떠오른다.

‘되도록이면 내 손으로 죽이고 싶지만…….’

그러나 그 망설임은 오래가지 않았다.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결심을 굳힌 러스티네일이 흑발의 여인에게 말했다.

“방해꾼이 나타났어. 내 실력으론 이길 수 없는 상대야. 히프노스, 네 힘이 필요해.”

여인의 이름은 히프노스.

러스티네일과 마찬가지로 여명단 암살팀 멤버였으며, 그 서열은 자그마치 2위.

“러스티가 나한테 부탁이라…….”

허나 그 강함에 비해 여인의 인상은 병약하기 그지없었다. 빼빼마른 몸에 창백한 피부. 진하게 내려앉은 다크서클 위로 드러난 눈동자는 흐리멍텅하게 그지없다.

그렇지만.

“흐음, 어떡할까…….”

그녀의 강함을 아는 자라면 결코 그녀의 인상만 보고 그녀를 얕잡아보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건 러스티네일 또한 마찬가지였다.

러스티네일은 암살팀 안에서도 특히나 향상심과 호승심이 강한 인물. 그녀에게 있어 자신보다 서열이 높은 암살팀 멤버는 동료라기보다는 언젠가 반드시 넘어서야 할 경쟁 상대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단 한 명 예외가 있었으니, 바로 눈앞에 있는 히프노스였다.

그녀만큼은 무슨 수를 써도 이길 수 없다고.

서열 1위조차 언젠가 뛰어넘겠다 호언장담하는 러스티네일이었지만, 그녀 앞에선 차마 그런 태도를 보일 수 없었다. 그 정도로 그녀는 강했다.

아니, ‘강함’이라는 개념 자체가 통용되지 않는 상대라는 표현이 더 옳겠지.

“으음, 마음 같아선 좀 더 자고 싶지만……. 응, 들어줄게. 러스티의 부탁인걸. 난 러스티를 좋아하니까.”

히프노스가 나긋나긋한 웃음을 지으며 러스티를 올려다보았다. 가늘게 뜨인 눈꺼풀 사이로 보이는 끝을 알 수 없는 어둠에 러스티네일이 마른 침을 삼켰다.

“그래서? 내가 누굴 죽여줘야 하는데?”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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