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1화 〉 260. 재회(1)
* * *
류태현과 안수호. 성철파에서 용병으로 일하는 두 사람에게 동시에 지원 요청이 온 것은, 기실 상당히 특이한 경우라 할 수 있었다.
기본적으로 용병들은 보수를 ‘건당’으로 받는다. 즉 전투에 참여한 횟수에 따라, 일한 만큼의 돈을 받는다는 소리였다.
그도 그럴 것이 섣불리 기한에 따라 보수를 지급했다간 시도 때도 없이 전투에 불려나가 박봉으로 봉사하다시피 일하게 되는 경우가 생길 수 있으니까. 류태현의 경우엔 기한에 따른 보수를 받긴 하나, 그건 그가 불리한 위치에서 어쩔 수 없이 일하고 있음을 감안해야 하는 부분이었다.
하여튼.
거의 모든 용병은 전투 참여 횟수에 따라 보수를 받으므로, 고용주인 성철파 입장에선 용병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기용할 필요가 있었다. 공격이든 수비든 딱 필요한 만큼의 인원만 기용하여 자금 손실을 최소화하는 방침.
허나 그 방침에서 류태현만은 예외였다. 두 달에 5천이라는 보수가 정해진 류태현은 쓰면 쓸수록 이득이었으므로, 성철파는 자연스레 그를 착취하다시피 굴리게 되었다.
하루 건너 하루 싸움에 참여하는 건 일상이요, 이따금 하루에도 두세 번씩 전투에 불려나갈 때도 있었다. 그렇기에 조금 전 류태현에게 도착한 아닌 밤중의 호출도, 그에게 있어선 지극히 익숙한 일이었다.
그러나 안수호가 함께 호출당한 건 어째서인가.
안수호. 빌헬름이라 자칭한 그는 아직 성철파에 제 실력을 제대로 증명하지 못했다. 보수에 대한 논의도 대략적으로만 나누었을 뿐이다. 본래는 다음날 중으로 그의 근접전 능력을 보고 적절한 보수를 정할 생각이었다.
헌데 그런 그에게까지 지원 요청이 도착했다는 것은 즉.
실력이 검증되지 않은 용병마저 기용해야 할 정도로, 무언가 심각한 상황이 발생했다는 뜻 아니겠는가.
“허억…! 허억…! 허억…!”
성철파 말단 조직원 석현은 가쁜 호흡을 몰아쉬고 있었다. 이마에는 식은땀이 줄줄 흐르고 방아쇠에 걸친 손가락은 파들파들 떨렸다.
이는 주위에 있는 동료들 대부분이 마찬가지였으며, 그들은 전원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목격한 눈으로 전방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 차례 총격전이 오간 전투 현장.
사방에 피를 흘리는 시체와 부서진 건물 잔해들, 망가진 자동차 따위가 즐비하게 늘어선 가운데, 한가롭게 그 풍경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여성이 있었다.
뚜벅. 뚜버억. 뚜, 버억.
여성의 걸음걸이는 불안정했다. 꼭 술에 취한 사람 같았다. 그러나 그녀의 손에 들린 주사기를 보았다면 누구나 술보다는 마약에 취한 사람을 떠올릴 것이다. 실제로 그녀가 약물에 취한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다만 그 약물은 마약 따위가 아니었다.
개량형 ‘도니체티’
여일 그룹에서 나주용 소장을 시켜 비밀리에 만들었던 초인용 불법 강화제. 얼마 전 완성된 그것에 새로이 개량을 가한, 이른바 또 하나의 시작품.
“하아…….”
그 약물에 취한 여성이 진한 한숨을 내쉬었다. 혹은 잔뜩 달아오른 신음 같기도 하였다. 짝 달라붙는 면티에 청바지로 요염함 자태를 과시하는 여성.
그러나 보고 있는 남자들 중 그 누구도 그녀에게 욕정을 품지 않았다. 욕정보다 앞서는 본능이, 공포가 그들의 머릿속을 가득 적시고 있었다.
타앙!!
그때 새된 총성이 거리에 울려 퍼졌다. 공포를 이기지 못하고 성철파 조직원 중 한 명이 발작적으로 방아쇠를 당긴 것이었다.
그러나.
파스스….
날아간 총알은 여성의 몸에 닿지 못했다. 닿기 직전 시뻘건 녹가루로 변해 바람에 바스라져 흩날렸다.
허나 날아가던 총알의 소실을 눈치 챌 정도로 눈이 좋은 이는 그 자리에 몇 없었다. 대부분은 그저 총을 쏜 녀석이 잘못 조준했겠거니 생각했고, 귓가를 때린 총성에 뒤늦게 정신을 차렸을 뿐이었다.
“쏴, 쏴라!!”
떨리는 목소리로 명령을 내린 건 누구였을까. 조직원들은 생각도 하지 않은 채 방아쇠를 당겼다. 수십에 달하는 총성이 거리 가득 울려 퍼지며 총알들이 여성을 벌집으로 만들기 위해 날아든다.
파슷.
파스슷.
파스스슷.
그러나 단 하나조차 그 몸에 닿지 못한다. 족히 수백 발의 총알이 붉은 녹가루로 변해 흩날리는 광경에 누군가 무심코 이렇게 중얼거린다.
“괴, 괴물….”
그것은 이 자리에 있던 성철파 조직원들 전원의 공통 인식이었다.
수 차례의 전쟁을 걸치며 강력한 초인이야 몇 명이든 보았지만, 그들도 결국 총에 맞으면 신음하고 쓰러지는 인간일 뿐이었다. 이따금 총알을 피하거나 버티는 초인도 있기야 했다만 그건 어디까지나 소수였으니.
허나 그들 중 누구도 날아온 총알을 손짓 한 번 없이 소멸시키는 자는 없었다.
괴물이라기보다는 불가사의.
그야말로 불가해의 존재였다. 이해할 수 없는 존재는 사람으로 하여금 공포를 품게 만들고, 여성은 자신으로부터 비롯된 공포에 절은 조직원들을 보며 씨익 웃었다.
“쓸만한 약을 만들었다고 써보라기에 써봤는데. 진짜 효과 쩌네. 그냥 강화제 수준이 아닌데? 손으로 만지지 않아도 능력이 적용되잖아?”
여성의 초능력은 본래 그녀의 신체로부터 비롯된다. 즉 신체에 닿은 물질만 부식시킬 수 있다.
그러나 개량형 도니체티의 강화 효과는 그 족쇄로부터 그녀를 자유롭게 했다. 생전 처음 느껴보는 감각을 무어라 형언하기 어려웠지만, 그녀는 마치 자신의 몸에서 보이지 않는 손 수십 개가 돋아난 것 같은 전능감을 느꼈다.
이에 그녀가 생각했다.
파슷.
그렇다면 ‘이런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파스스스스슷!!!
그녀를 중심으로 직경 5미터의 모든 것이 문자 그대로 바스라졌다. 벌집이 되어 연기를 뿜어대는 차량도, 주위에 굴러다니던 콘크리트 파편도, 지면을 덮고 있던 아스팔트 포장재까지.
애초에 녹이란 건 그저 금속 부식의 결과물 내지는 부산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녀의 능력은 부식이지 녹 생성이 아니었으며, 따라서 금속 외의 다른 물질을 부식시키는 것 또한 얼마든지 가능한 일.
허나 그 강도로 보나 범위로 보나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모습이었다. 하물며 부식의 범위는 지금도 빠르게 몸집을 키우고 있었다. 자신들을 향해 다가오는 무형의 죽음에 조직원들이 혼비백산 도망치기 시작한다.
파슷!
“끄, 으아아아아아!”
그러다 한 사람, 미처 빠르게 도망치지 못한 자가 부식의 범위에 발을 들였다. 그가 신고 있던 신발, 양말, 그리고 그의 발을 이루는 피부와 근육 뼈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부식되고, 부패되고, 썩어 순식간에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털썩!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남성이 무릎을 꿇었다. 그야말로 잘못된 선택이었다. 보이지 않는 부식파는 남자의 몸을 게걸스럽게 집어삼켰고, 그 몸을 이루는 물질 무엇 하나 남기지 않고 소화시켰다. 실시간으로 몸이 썩어 들어가는 남자의 모습에 남은 조직원들은 전의를 상실한 채 도망치기 바빴다.
말 그대로 아비규환.
도망치는 성철파나, 뒤에서 지켜보는 용문이나 공포에 절은 눈으로 그 광경을 목도했다.
“와아….”
그 자리에서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 자는 오직 단 한 사람.
“……진짜 대박이네, 이거.”
그 참상을 만들어낸 장본인, 러스티네일뿐이었다.
***
현장에 도착했을 때 그가 처음으로 본 것은 비명을 지르며 후퇴하는 조직원들이었다.
류태현은 이제껏 적지 않은 싸움에 불려나갔다. 그 싸움들 중에는 유리한 싸움도 있었고 불리한 싸움도 있었다.
그러나 이처럼 조직원들이 공포에 질린 채 도망치기 바쁜 경우는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도베르만의 형상을 한 가면 속에서 그가 긴장감에 마른 침을 삼켰다.
‘도대체 상황이 어떤 상황이길래…….’
자세한 내막은 몰라도 필시 극도로 불리한 상황일 것이다. 류태현은 단번에 이를 알아차렸지만 그들처럼 곧바로 꽁무니를 뺄 수는 없었다. 그의 행동 하나하나에 고아원의 존망이 걸려 있기 때문에.
다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성철파를 위해 목숨을 걸어야 하는 것 또한 아니었다. 그의 능력으로도 타파가 불가능한 상황 앞에선 후퇴할 수밖에 없었고, 쏨밧도 그런 상황은 이해를 해줄 터였다. 애초에 그게 당연한 거다.
요는 싸울 의지를 보였느냐 아니냐로 귀결된다. 결과적으론 후퇴했다 하더라도 최소한 상황을 해결해보려던 의지가 있었는가. 그것이 중요했다.
“도베르만!!”
그때 후퇴하던 조직원 중 한 명이 그를 알아보았다. 간부는 아니지만 나름 위치가 있는 중견 조직원이었다.
“무슨 상황이지?”
“적 중에 웬 괴물 같은 년이 있어! 신체능력만 봐도 A급 수준인데 총알이고 무기고 죄다 가루로 변해버리는 통에 아예 싸움 자체가 불가능해! 그래서 일단 전선을 물리고 있다!”
“물질을 가루로……?”
“아무리 너라도 이건 어쩔 도리가 없다! 방출계 능력자가 올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그렇게 말한 조직원은 분한 기색을 보이며 다른 조직원들을 데리고 사라졌다. 일시적으로 후퇴한 뒤 방비를 굳혀 다른 지원이 오기를 기다리려는 심산.
류태현 또한 그 흐름에 몸을 맡기고자 하였으나, 그는 후퇴하지 않고 전방으로 나아갔다.
‘후퇴할 땐 후퇴하더라도 일단 적을 확인해야…….’
그것은 류태현 특유의 호승심에서 비롯된 호기심이었다. ‘너조차도 어쩔 도리가 없다’는 말을 들어버려선, 오히려 어떻게든 쓰러뜨리고 싶은 마음이 샘솟는 것이다.
하물며 그는 조금 전 안수호에게 스스로 감추고 있던 열등감을 적나라하게 지적당한 상태.
가뜩이나 분한 상태에서 저런 말을 들어버리니 오기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이에 류태현이 그 자리에 멈춰선 채 가만히 정면을 바라봤다.
쭉 뻗은 대로. 그 끝에서 천천히 다가오고 있는 인영.
어두운 밤이라 먼 거리는 식별이 어려웠지만 류태현의 시력은 남달랐다. 그는 단번에 상대가 여성이라는 걸 알아차렸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인상착의 또한 확인할 수 있었다.
“……어?”
그 순간 그의 뇌리를 스친 기시감.
어디선가 본 적이 있다고. 그렇게 생각하며 류태현이 여성의 모습을 살폈다.
탁한 느낌의 금발에 만지면 베일 것처럼 날카롭게 찢어진 눈매.
입은 마스크로 가리고 있었지만 어째서인지 류태현은 그녀가 뱀 같은 미소를 짓고 있노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음험한 눈동자가 이리저리 굴러다니며 전장을 살피다, 이내 자신을 마주보고 있는 류태현을 정면으로 노려봤다.
“아.”
그 순간 류태현은 마침내 떠올렸다.
러스티네일. 그녀의 코드명에 대해선 비록 알지 못하나 류태현은 그녀와 한 번 만난 적이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야말로 바로 4년 전 용문의 사주로 고아원을 습격했던 장본인이었으니.
“저 자식이 어째서…….”
류태현에게 원수가 있다면 첫째가 강진윤이요, 둘째는 바로 저 여자일 것이다. 그녀는 고아원을 습격해 아이들을 죽이고, 권은하를 다치게 했으며, 간접적으로 오은수가 죽음에 이르게 될 단초를 제공했으니까.
“음?”
반면 러스티네일은 류태현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었다. 피해자와 달리 가해자는 자신이 한 일을 기억하지 못한다. 하물며 지금 류태현은 가면 뒤에 얼굴을 숨기고 있었으니.
“아아, 기억났다. 그러고 보니 도베르만인가 뭔가 하는 용병이 다시 나타났댔지? 4년 전에는 결국 못 만나보고 슬럼을 떠났는데, 이걸 이렇게 만나게 되네?”
그렇기에 러스티네일은 그를 류태현이 아닌 용병 ‘블랙 도베르만’으로서 대했다. 그건 지극히 당연한 반응이었으나, 류태현이 느끼기엔 꼭 고아원에서 있던 일을 아무것도 아니라고 무시하는 것처럼 느껴져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꽈악.
류태현이 주먹을 꽉 말아쥔 채 걸음을 내딛었다.
그토록 찾아 헤매던 원수……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녀에겐 받아낼 빚이 있었다. 분노로 가득 차오른 그의 두 눈동자에 더 이상 후퇴해야 한다는 생각 따위는 한 점도 찾아볼 수 없었다.
“싸우게? 배짱 좋네?”
그 기세를 러스티네일도 느꼈는지 피식 웃으며 손을 뻗었다. 조금 전의 참상 이후 성철파 조직원들은 하나같이 도망치기 바빴는데, 자신에게 덤비는 류태현이 그녀로선 각별하게 느껴졌다.
“어디, 넌 나를 상대로 얼마나 버틸까? 그래도 1분은 버텨줬음 하는데.”
“허튼 소리 집어 치워…!”
러스티네일이 던진 도발에 류태현이 이를 갈며, 마침내 그가 지면을 박찼다.
터억!
그러나 그 직후 뒤에서 튀어나온 팔이 류태현의 몸을 붙잡았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린 그가 깜짝 놀란 표정을 짓는다.
“……형?”
“섣불리 달려들지 마. 저녀석 능력은 너랑 상성이 안 좋으니까.”
안수호의 말에 류태현은 복잡한 심정이었다. 당장 조금 전 거의 싸우다시피 한 채로 헤어졌는데 이렇게 곧장 만나게 될 줄은 몰랐으니까. 게다가 안수호의 태도는 마치 둘 사이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자연스러웠다.
“하고 싶은 말이야 서로 많겠지만 나중으로 미루자. 일단 눈앞의 적한테 집중하자고. 알겠지?”
“……그래. 그래야지.”
안수호의 말에 류태현이 흥분된 머리를 진정시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러스티네일이 아쉽게 됐다며 입맛을 다셨다.
‘근데 저녀석은 왜 여기 있는 거야?’
한편 안수호는 안수호대로 러스티네일을 알아보며 의문을 표했다. 여명단 암살팀인 그녀가 어째서 용문 밑에서 용병 노릇을 한단 말인가.
“얼굴 가린 사람이 한 명 더 왔네? 이번에는 투구야? 가면에 투구에 너희 진짜 가지가지한다. 얼굴 들키는 게 그렇게 무서우면서 어떻게 용병 일을 한담?”
“지도 마스크로 다 가리고 있으면서…….”
값싼 도발을 적당히 흘리며 안수호가 생각했다.
‘안전을 생각하면 도망치는 게 맞다. 그렇지만 암살팀이 왜 용문 밑에서 일하고 있는지 궁금하기도 해. 개인적으론 어떻게든 저녀석을 생포해서 심문하고 싶다. 그렇지만…….’
문제는 암살팀의 생포가 과연 가능할 것인가.
그가 일찍이 성유진을 상대로 승리를 따내었다 해도, 그건 온갖 사람들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한씨 자매가 없는 것은 차치하더라도, 당장 지금 그는 강하늘의 스킬 효과조차 받지 못한 상태. 성유진전 때와 비교하면 상당히 약했다.
물론 그 전력으로도 러스티네일을 상대하는 데엔 무리가 없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조금 전 조직원이 한 말. 묘하단 말이지. 총알이 닿기도 전에 사라지다니. 러스티네일의 능력은 그런 게 아닐 텐데.’
그 사이 능력이 성장하기라도 했다는 건가. 그렇다면 무턱대고 덤비기엔 다소 부담이 따른다. 아무리 그가 강해졌다 한들, 그의 기본적인 스탠스는 불리한 싸움은 피하자는 것이었으니.
“당장 달려들 것처럼 하더니 왜 가만히 있어? 안 올 거면 내가 간다?”
싸울 것이냐 말 것이냐. 그 사이에서 고민하던 안수호가 이내 류태현에게 작게 속삭였다.
“태현이 넌 뒤로 물러나 있어. 놈의 능력을 정확히 알아보는 데엔 너보다 내가 적합하니까. 일단 녀석의 초능력을 확실히 안 뒤에 싸울지 후퇴할지 결정해야”
“아니, 나도 싸울 거야. 형 멋대로 그렇게 정하지 마.”
류태현의 대답에 안수호가 미간을 찌푸리며 그를 바라봤다. 설마 이런 상황에도 또 자존심을 챙기려 하는 거냐며.
그러나.
“저 여자는 내 원수 같은 녀석이야. 원수를 앞에 두고 가만히 뒤에서 사리고 있으라니. 절대 그렇게는 못해.”
류태현이 비단 열등감이나 자존심만으로 그렇게 답한 건 아니었다. 자신도 모르는 사정이 있음을 짐작한 안수호가 이내 급박한 상황에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대로 해. 대신 알아서 잘 사려. 위험해지면 바로 도망치는 거야.”
“…….”
타앙!!
류태현은 대답하지 않고 지면을 박찼다. 안수호가 혀를 쯧 차면서 곧바로 그 뒤를 따랐다.
“기다리다 지치는 줄 알았네.”
삽시간에 거리를 좁혀오는 두 사람을 보며 러스티네일이 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파스스스슷!
그녀의 정면에 있던 모든 물체가 방사형으로 바스라지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안수호가 경악했다.
‘닿지도 않았는데 녹이 슨다고?’
저번에는 분명 팔이든 다리든 닿은 물체만 녹이 슬게 만들지 않았던가. 게다가 부식의 속도 또한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빨랐다.
“류태현!!”
본능적으로 위기를 직감한 그가 소리쳤으나 류태현은 이미 부식의 영역에 발을 들인 뒤였다.
파슷.
지면을 딛은 그의 신발이 검붉은 가루로 썩어 문드러졌다. 그 다음은 그의 피부였다. 다리 전체에 엄습한 따끔한 아픔에 류태현이 급하게 돌진을 멈췄다.
타앗!!
황급히 뒤로 도약하는 류태현.
그러나 그의 왼다리는 발목 근처까지 피부가 거의 벗겨지다시피 한 상태였다. 따끔한 고통에 그가 눈살을 찌푸리며 러스티네일을 노려다봤다.
“너 꽤 튼튼하네? 보통은 닿은 순간 곧바로 뼈까지 썩어 문드러져야 하는데.”
그녀의 주위 5미터의 모든 것이 가루가 되어 흩날렸다. 그곳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지만, 류태현은 보이지 않는 살기 덩어리들이 그녀의 주위에 떠다니고 있는 것을 느꼈다. 그녀의 초능력으로부터 발해지는 마력의 흐름을 감지한 것이었다.
‘저래서야 전혀 접근할 수 없겠어. 중상을 각오하고 달려들면 한두 대 정도는 먹일 수 있겠지만, 문제는 그 다음이 없다는 거지.’
접근하기만 해도 모든 물질을 가루로 만들어버리는 초능력. 접근전을 특기로하는 류태현에게 있어선 그야말로 천적이나 다름없는 능력이었다.
‘빌어먹을…….’
그 사실에 류태현은 분해 미칠 것 같았다. 고아원 아이들을 해친 범인을 이렇게 만났음에도 손가락 하나 건드릴 수 없다는 사실이. 차오르는 무력감에 그가 어금니를 꽈악 깨물며 분함을 표했다.
바로 그때.
“그러게 내가 말했잖아. 네 천적이라고. 얌전히 뒤로 물러나 있어.”
류태현과 바톤을 터치하듯 안수호가 앞으로 나섰다. 그의 등장에 러스티네일이 피식 비웃었다.
“자신만만한데 무슨 비장의 수라도 있나봐?”
“글쎄. 비장의 수라면 비장의 수인가?”
안수호가 자세를 낮춰 돌진할 준비를 하자 러스티네일이 코웃음쳤다. 말은 번지르르해도 결국 근접전을 걸 생각이라면 러스티네일이 유리했으니까.
타앙!!
그렇기에 안수호가 달려들기 시작했을 때에도 그녀는 전혀 경계하지 않았다. 여유로운 태도로 능력을 발동할 준비를 하며 자살하러 들어오는 그를 오직 기다릴 뿐.
그러나.
키이이잉!
일순, 안수호의 손등에서 푸른빛이 일렁이기 시작하고.
스파앙!!
다음 순간, 안수호의 손아귀에서 길이만 족히 7, 8미터에 달할 검은 칼날이 솟구쳤다.
“어?”
러스티네일이 당황한 것도 잠시, 안수호가 인정사정없이 칼날을 휘둘렀다. 채찍처럼 낭창낭창 휘어진 칼날이 짓쳐들자 러스티네일이 여유롭게 손을 들어올렸다.
원거리에서 공격할 셈인가 보지만, 그래봐야 자신에게 닿기도 전에 썩어 문드러질 게 뻔하다며.
쐐애애액!
“…………어?”
그러나 칼날은 부식의 범위 안에 들어왔음에도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순식간에 자신의 목까지 짓쳐든 칼날을 보며 러스티네일이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럴 리가. 이 칼날을 이루는 게 뭐든 고체라면 자신의 능력이 통할 텐데.
그렇게 생각한 순간, 러스티네일은 마침내 그 칼날의 정체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콰아아아아.
지척까지 다가온 칼날에서 들려오는 날카로운 바람소리.
그것은 고체로 이루어진 칼날이 아니었다. 안수호가 능력으로 만들어낸, 극한으로 압축한 기체로 이루어진 일종의 고압 커터였다. 금속은커녕 고체조차 아니니 당연히 그녀의 능력이 통할 리도 없었다.
‘잠깐, 이 능력은 설마…….’
직후 러스티네일이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아슬아슬하게 공격을 피하긴 했지만 완벽하진 않아서, 그 가슴에 가로로 한 줄기 자상이 깊게 새겨진다.
“아깝다. 단번에 죽일 수 있었는데.”
그 결과물을 보며 안수호가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그런 그를 보며 러스티네일이 하하, 하고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이 능력, 이 빌어먹을 시꺼먼 연기. 본 기억이 있어. 그래, 분명 그날 나랑 싸웠던……. 분명 이름이…….’
“……안수호.“
다음 순간, 러스티네일이 형형한 살기를 담은 눈으로 안수호를 노려봤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