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9화 〉 258. 빌헬...름?(2)
* * *
한편 그 시각, 슬럼 어딘가의 한 술집.
낮 시간이라 손님 한 명 없이 텅 비어있어야 할 술집은 오늘따라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번잡한 느낌은 전혀 없었다. 두 무리로 나뉜 남성들은 오와 열을 맞춘 채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런 남성들 사이에 놓인 테이블 하나.
그리고 그것을 사이에 둔 두 남성. 그 두 사람이야말로 이 자리의 주인공이었다. 둘 다 슬럼에서 모르는 이가 없을 유명인사들이었다.
“그럼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확인하지.”
그중 한 사람. 정장차림의 중년이 시가를 문 채 거들먹거리며 물었다.
160을 겨우 넘길 정도로 작은 키. 그러나 당장이라도 옷감을 뚫고 나올듯한 우람한 근육.
남자는 이곳 슬럼에서 흔히 ‘마사장’이라 불리는 자였다. 본명은 마재우. 슬럼의 3대 세력 중 하나인 블랙스미스의 ‘사장’이었다.
“성철파는 우리 블랙스미스와의 상호불가침을 조건으로 양주 동남쪽 지역 3개 구역의 사업권을 10년 동안 대여. 이 조건에 더 이상 이의는 없나?”
“없다.”
“시원시원하고 좋구만. 좋아, 도장 찍으라고.”
마사장의 말에 맞은편에 있던 쏨밧이 서류에 도장을 찍었다. 거의 반년 가까이 이어졌던 두 조직 간의 전쟁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그나저나 설마 그쪽에서 이런 조건을 먼저 제시해올 줄은 몰랐는데…….”
애시당초 슬럼에 전쟁이 벌어진 이유부터가 한정된 슬럼의 ‘사업권’을 두고 다퉜기 때문 아닌가.
헌데 그 휴전한답시고 그 사업권 일부를 홀라당 넘겨주다니, 이래서야 말이 휴전이지 성철파가 패배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성철파 쪽 조직원들도 그 사실을 아는지 표정이 마냥 좋아보이진 않았다.
“……모든 결정은 조직의 발전을 위해서다."
“조직의 발전을 위해서라고?”
쏨밧의 대답에 마사장이 씨익 웃었다.
‘똠양꿍 자식. 거짓말을 너무 티나게 하는군.’
쏨밧은 거의 완벽에 가까운 포커페이스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슬럼에 오기 전, ‘원래 세상’에 있었을 적부터 온갖 위험인물들을 상대하며 산전수전 다 겪은 마사장의 눈썰미를 속이기엔 다소 부족했다.
‘아마 다른 꿍꿍이가 있는 거겠지. 놈의 그간 행적을 생각하면 녀석의 진짜 목적은 아마…….’
“……킥.”
곰곰이 고민하던 마사장의 입에서 작은 웃음소리가 튀어나왔다.
“이보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 뭐 그런 건가? 그렇다면 내가 굳이 신경 쓸 필요는 없지.”
마사장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가 무표정한 쏨밧에게 슬쩍 이죽거리며 테이블을 떠났다.
“신속하고 깔끔한 거래에 감사하지. 그럼 행운을 빌겠어.”
마사장과 블랙스미스 조직원들이 그대로 가게를 나섰다. 기분이 썩 괜찮아 보이는 마사장의 뒤로 그의 비서가 따라붙었다.
“축하드립니다 사장님.”
“뭐가?”
“예전부터 계속 눈독들이시던 사업권 아닙니까. 이걸 놈들한테서 돈으로 사내려면 수십 억은 족히 깨졌을 텐데 다행이죠.”
“그건 그렇지. 원래는 그 박지현이란 여자의 초능력으로 저놈들을 꾀어내려 했는데, 그때 그 양철머리놈 때문에 다 수포로 돌아갔으니.”
“그러고 보니 그런 일도 있었죠.”
비서는 얼마 전에 있었던 살인사건을 떠올렸다.
다른 두 조직과 달리 블랙스미스의 구역에서는 살인과 같은 강력범죄가 철저히 통제된다. 그것이 블랙스미스의, 마사장의 지배 방식이었다.
헌데 얼마 전, 그런 그들의 규칙을 무시한 당돌한 살인사건이 일어났다. 안수호가 박지현의 입을 막기 위해 죽인 바로 그 사건이었다.
“놈은 찾았냐?”
마사장의 질문에 비서가 고개를 저었다.
“아뇨,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이상하리만치 목격 정보가 없습니다. 아마 슬럼 주민이 아니라 외지인인 것 같습니다.”
“외지인이더라도 슬럼에서 사람을 죽였다면 무슨 이유로든 슬럼과 관련이 있는 놈이다. 끝까지 찾아라. 거래야 잘 끝났다고 해도, 내 일을 훼방낸 녀석을 이대로 곱게 살려둘 순 없으니까.”
“알겠습니다. 계속 인원을 할애해 놈을 찾아보겠습니다.”
“정 안 되겠다 싶으면 프로페서, 그 노인네한테 부탁하고. 그 양반이 사람 찾기에 한해선 우리 오르테가보다 더 뛰어나다고 하니.”
“참고하겠습니다.”
지하 계단을 오른 그들은 곧장 도로 한편에 늘어서있는 차량 행렬로 다가갔다. 비서가 자동차 뒷좌석 문을 열어주자 마사장이 그대로 탑승했다.
“후우우우.”
푹신한 시트에 몸을 기댄 그가 눈을 감은 채 명령했다.
“돌아가자.”
“예, 사장님.”
곧 그의 명령에 따라 수많은 차량 행렬이 일제히 출발했다.
***
“빌헬름. 미안하지만 블랙 도베르만과의 대련은 불가능할 것 같다. 최중요 전력을 그런 일 따위에 허비시킬 수 없다고 형님께서 말씀하시는군. 네 전력은 추후 다른 방법을 통해 확인하도록 하겠다. 이의는 없겠지?”
윗선과의 통화를 마친 강태수가 안수호에게 물었다. 그 질문에 안수호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여기서 무조건 싸워야 한다고 박박 우겨봐야 수상하게만 여겨질 테니.’
실력 검증을 명목으로 류태현과 만난다.
꽤 괜찮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했건만, 역시 세상 일이라는 게 그의 생각대로만 돌아가는 건 아니었다. 허나 아쉬울 건 없었다.
대련을 통해 류태현과 만나고자 한 건 어디까지나 플랜 A. 그에게는 플랜 B가 있었으니까.
‘프로페서의 정보로 이미 류태현이 있을만한 후보지는 추려졌다. 성철파에 정식으로 고용되었으니 이제 그 후보지들을 하나하나 돌아보기만 하면 류태현을 찾을 수 있겠지.’
프로페서의 정보가 정확하다는 전제 하의 계획이었지만 안수호는 그 불가사의한 노인네를 신뢰하고 있었다. 적어도 그의 실력만은 말이다.
‘그럼 제일 먼저 광사동에 있는 사무실부터 가볼까.’
성철파 지배구역의 최북단. 양주시 남부에 걸쳐있는 그곳은 프로페서가 류태현이 머물 것으로 예상되는 제1 후보지로 선정한 곳이었다. 이유야 여럿 있지만 가장 큰 것은 다른 두 조직과의 접경지에 가까워 전투 현장에 신속히 파견되기에 용이하다는 것이었다.
강태수로부터 신원 증명을 위해 그의 명함을 받아낸 안수호는 그대로 곧장 광사동 사무실로 향했다. 그러곤 사무실 입구를 지키고 있던 조직원에게 보란 듯이 그의 명함을 들이밀며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그러나.
“넌 못 지나간다.”
조직원은 모 카드 게임의 방패병처럼 입구를 우뚝 막아선 채 조금도 비켜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안수호가 투구 속에서 불만을 삼키며 강태수의 명함을 내보였다.
“이 명함 안 보여? 난 이 사람한테 정식으로 고용된 니네 조직 용병이라고. 수상한 외부인이 아니야.”
“수상하진 않지만 외부인이긴 하지. 아무리 용병이라도 외부인이 조직 사무실을 제 집 드나들 듯 할 수는 없다.”
정론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물러설 수는 없었다.
“그럼 난 어디 가있으라고? 니들이 부를 때까지 노숙이라도 하란 거야?”
“사무실만 빼면 어디든 가도 된다. 성철파 구역 안에서라면 말이지. 그 명함을 보여주면 구역 내의 술집이나 모텔은 전부 무료로 이용할 수 있을 거다. 창관도 마찬가지고.”
“그런데 사무실은 안 되고?”
“그게 보안이라는 거다.”
“그럼 그 어떤 용병도 너희 사무실엔 들어갈 수 없다는 건가?”
“허가를 받은 자가 아니라면……그 말대로다.”
즉 류태현은 안에 있을 수도 있다는 소리였다. 그 대답에 안수호는 안쪽을 확인해보고 싶은 마음이 더 굴뚝 같아졌지만, 경비가 이렇게 대놓고 막아서서야 들어가기란 요원해보였다.
‘힘을 써서 억지로 침입할까? 아니지. 모처럼 실력 좋은 용병이라고 잠입했는데 사고를 쳐서야. 괜히 신용만 잃게 될 거야.’
그렇다면 이대로 앉아서 손가락만 빨고 있어야 하는가.
다행히 그것은 아니었다. 용병 신분을 들이밀며 사무실에 직접 잠입하는 건 플랜 B. 그에게는 아직 플랜 C가 있었다.
‘이대로 다음 싸움이 있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전투에 나타난 블랙 도베르만을 현장에서 급습한다는 선택지도 있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최후의 수단이지.’
단념한 척 사무실을 떠난 안수호가 몰래 골목으로 들어갔다. 그러곤 주위에 사람이 없는 걸 확인하고 사념으로 말했다.
‘나와라 실비4’
뽀로록.
그러자 그의 오른손에서 10cm 크기의 4등신 여자아이가 튀어나왔다. 실비의 분신체였다.
‘이미 예원이랑 하늘이한테 분신을 하나씩 떼어줘서 많은 질량을 할애할 순 없지만…….’
그래도 전투가 아닌 잠입 수사를 할 분신체 정도는 충분히 만들 수 있었다. 강하늘이 하던 대로 새로운 분신을 ‘실비4’라 명명한 그가 속으로 분신체에게 명령했다.
‘몰래 들어가서 류태현을 찾아.’
옛썰!
빠릿빠릿한 대답과 함께 분신체가 골목을 나섰다. 나서자마자 참새의 모습으로 변신한 분신체가 파다닥 날아가더니, 그대로 옥상 위에 안착한다.
사무실 건물은 지상 6층. 지하로 몇 층까지 있을지 모르니 효율적인 탐색을 위해선 옥상부터 뒤지는 편이 좋았다. 이에 따라 분신체는 옥상에서부터 순서대로 아래로 내려가며 탐색을 개시했다.
6층. 5층. 4층.
층을 내려가고 또 내려가면서 분신체는 그 층에 있는 모든 인원을 살펴보았다. 실비는 안수호와 기억을 공유하고 있기에 분신체는 류태현의 외모를 기억하고 있었다. 또한 그가 도베르만 형상의 가면을 쓰고 있다는 사실 또한 알고 있었다.
그렇게 3층, 2층, 1층을 지나 드디어 지하층에 다다른 분신체.
자그마한 몸으로 탐색을 진행하다보니 들키진 않았지만 대신 시간이 많이 걸렸다. 탐색 개시로부터 흐른 시간은 어느덧 3시간. 안수호는 진작에 골목을 떠나 근처 술집에서 시간을 죽이고 있었지만, 분신체는 그것도 모른 채 열심히 류태현을 찾고 있었다.
그야말로 악덕 사장 밑에서 열심히 일하는 성실한 사원.
실비4는 안수호의 명령이라면 뭐든지 듣는 실비의 분신체답게 불타오르는 사명감과 책임감으로 탐색에 임했다. 단 한 순간도 쉬거나 한눈을 팔지 않은 채.
그리고 그 노력은 분신체가 지하 2층에 내려갔을 때 마침내 보답받았다.
뚜벅. 뚜벅. 뚜벅.
지하 복도를 가로지르는 한 남성.
분신체는 남성의 체형이 류태현과 비슷하다는 걸 알아차리고 곧바로 그를 따라갔다. 환풍구를 통해 그를 앞질러 천장에서 빼꼼 고개를 내밀자, 푹 눌러쓴 후드 아래로 삐죽 튀어나온 까만 가면이 보였다.
도베르만…!
그것은 누가 보아도 개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마침내 찾아냈다는 생각에 분신체가 쾌재를 부르려던 찰나, 그 얼굴에 오묘한 의문이 떠오른다.
도베르만…?
그렇다. 실비는 도베르만을 실제로 본 적이 없었다. 안수호 또한 마찬가지였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도베르만의 모습을 본 적이 있기야 하다만, 그때의 기억은 아주 희미하게 남아있을 뿐이었다. 때문에 안수호의 머릿속에는 도베르만이라는 견종에 대한 명확한 이미지가 존재하지 않았다.
기실 개의 형상을 한 가면을 쓰고 다니는 사람이 흔할 리도 없다. 만약 안수호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대충 개처럼 생긴 가면을 보고 곧바로 류태현이구나 알아차렸겠지.
도베르만……인가요?
허나 분신체에겐 그만한 융통성 내지는 응용력이 없었다. 개의 형상이긴 하지만 과연 저게 도베르만이 맞을까. 만약 도베르만이 아닌데 잘못 보고했다간 안수호의 미움을 사게 되는 게 아닐까.
삐질. 삐질.
실비4는 혼란에 빠졌다. 그러는 사이에 남자는 어느새 실비4의 아래를 지나 복도 반대편으로 멀어지고 있었다. 도베르만이든 아니든 일단 놓칠 수는 없었기에 실비4는 곧바로 그 뒤를 따랐다.
뚜벅. 뚜벅.
이윽고 남자가 향한 곳은 복도 가장 끝의 깊숙한 지하.
굳게 닫힌 철문을 열고 그가 안으로 들어섰다. 안쪽에는 침대를 포함한 각종 가구가 들어선 자그마한 방이 있었다.
그곳은 쏨밧이 류태현을 위해 준비해준 그만의 쉼터였다. 조직에 있는 이상 24시간 내내 가면을 쓰고 있을 수밖에 없는 그를 위해 만들어준, 그가 유일하게 남들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보낼 수 있는 휴식처.
“후우우우우.”
철문을 닫고 잠금을 확인한 류태현이 침대에 걸터앉은 채 가면을 벗었다. 깊게 새어나오는 한숨에서 그의 하루가 오늘도 고단했음을 쉬이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게 다 고아원의 아이들과 권은하를 위해 그 스스로 자처한 일인데.
‘목이 마른데 뭐라도 좀 마실까.’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류태현이 냉장고로 향했다.
그 순간.
“어?”
철문 아래, 아주 작게 난 틈을 통해 주르륵 흘러들어온 은색 액체.
곧 그것이 자그마한 여자아이의 형상을 취하더니, 류태현을 향해 손가락을 가리키며 입을 아! 하고 벌렸다.
찾아따!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