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7화 〉 256. 잠입 개시
* * *
프로페서가 넘긴 서류 더미에는 안수호가 현재 필요한 거의 모든 정보가 담겨 있었다.
류태현이 본가로 올라온 7월 4일 토요일부터 시작해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의 행적.
4년 만에 다시 나타난 블랙 도베르만과 류태현이 동일인이라는 증거.
류태현이 지금까지 참가한 전투 목록과 해당 전투에 참여한 각 조직의 주요 인물들.
류태현이 평소 머물고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성철파의 거점 정보.
슬럼의 전반적인 정세 및 류태현 구출에 필요할 수 있는 성철파의 내부 사정 등.
개중에는 류태현의 구출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정보도 있었고, 혹은 관련이 있어도 지나치게 사소한 정보도 있었다.
그러나 그 모든 정보의 공통점은, 안수호로 하여금 ‘도대체 이런 정보들을 어떻게 구한 건지.’하는 의문을 품게 만들었다는 점.
‘이건 절대 이틀 만에 알아낼 수 있는 양이 아니야. 그렇다면 정말 이 사람 말대로, 예전부터 류태현을 주시하고 있었던 건가? 그리고 나도? 도대체 왜? 슬럼의 정보상이 나나 류태현을 어째서’
백 보 양보해 류태현이라면 그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4년 전에 활약했던 블랙 도베르만, 그 흔적을 쫓은 끝에 류태현에 다다랐다고 하면 말이 안 되는 건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안수호, 그 자신은 왜 그 조사 대상에 오른 것인가. 그가 살면서 슬럼과 엮인 일 따위, 슬럼의 청부업자인 진수&성찬과 두어 번 싸웠던 게 끝이었다. 그 외에는 박지현을 죽이기 위해 슬럼에 아주 잠깐 들렀다 빠져나온 정도.
‘……아니, 지금 생각해봐야 알 수 있는 건 없어. 지금은 류태현 확보에만 집중하자. 프로페서에 대해서는 나중에 알아봐도 돼.’
수상하기 짝이 없는 노인이었지만 거래 관계로 있는 지금은 일단 협력자였다. 굳이 대립각을 세우며 노심초사하지 않아도 되겠지.
“어떤가, 제공된 정보에 만족하나?”
프로페서의 질문에 안수호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이 정도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 나머지는 제가 알아서 할 일이죠.”
“그 학생을 조직에서 빼내 무사히 돌려보내는 것이 자네 목적이라 그랬지. 이제부턴 어떻게 할 셈인가?”
“제가 그걸 말씀드릴 의무는…….”
고개를 젓던 안수호가 잠시 멈칫했다. 그러곤 이내 말을 이었다.
“……용병으로 성철파에 잠입할 생각입니다. 교수님의 정보가 있으니 녀석을 만나는 건 쉽겠죠.”
“그 다음에는?”
“설득해서 데리고 나와야죠. 범죄에 가담하는 건 옳지 않다고. 널 걱정하는 사람이 산더미라고.”
“정론이군. 하지만 그 친구가 과연 자네 말을 들을 거라 생각하나?”
“그건…….”
아마 듣지 않겠지. 적어도 고아원의 상납금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이상 성철파를 떠나려 하진 않을 것이다.
“……제 말을 듣지 않는다면 방법을 찾아야죠. 상납금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다만 그럼에도 정 방법이 없다 싶으면…….”
안수호는 생각했다. 정 방법이 없다 싶으면 차라리 류태현과 함께 싸우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라고.
그가 용병으로 성철파에 고용되면 당연히 그만한 금전을 받게 될 터. 그 자신의 보수와 류태현의 보수를 합해 상납금을 채우면 류태현도 미련 없이 성철파를 떠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가장 확실한 방법. 그러나 가급적 쓰고 싶지 않은 방법이었다. 범죄의 온상인 슬럼에서 전쟁에 연루된다……라는 사실이 추후 자신이나 류태현의 미래에 무슨 악영향을 끼칠지 모르니.
‘요즘 들어 묘하게 쾌락천마, 그 놈이 조용한 것도 슬슬 거슬리고 말이지. 성유진이 죽은 뒤로느 퀘스트도 안 내려오고.’
지가 벌인 일을 수습하느라 바빠서 그런 건지, 아니면 정말 무언가 꾸미는 꿍꿍이가 있는 것인지.
“고민이 많은 표정이군. 하긴, 고민이 될 수밖에 없겠지.”
그 말에 안수호가 퍼뜩 정신을 차리며 고개를 들었다. 그 모습에 프로페서가 끌끌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정보가 도움이 되었다면 난 이만 돌아가보겠네. 정보의 대가는 추후에 받도록 하지. 기다리고 있게나.”
“저, 한 가지만 여쭤도 되겠습니까?”
“뭐지?”
“정보의 대가로 제 힘을 빌리고 싶으시다 하셨는데, 도대체 어디에 제 힘이 필요한 건지”
“나도 모르네.”
“예? 그게 무슨…….”
안수호가 어리둥절해하며 반문했다. 프로페서는 별 거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자네의 힘을 빌리겠다 한 건 내 나름의……. 일종의 보험 같은 것이야. 가까운 시일 내에 무슨 큰일이 생길 것 같거든.”
“큰일이라면…….”
“나도 아직 그게 무엇일지는 모르네. 그렇지만 이 무력한 노인네에게도 믿음직한 보디가드 하나쯤은 있어야 안심이 되지 않겠나.”
거기까지 말한 프로페서는 이제 정말 안녕이라는 듯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리를 나섰다. 계단 아래로 사라져가는 그의 뒷모습을 안수호는 멍하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프로페서. 참으로 기묘하고 종잡을 수 없는 노인네라고.
그 뒷모습을 쫓던 안수호의 머릿속에 그에 대한 의구심이 깊게 뿌리내렸다.
“흐음.”
한편 프로페서는 카페를 나서며 침음성을 흘렸다.
“이렇게 빨리 저 친구들과 엮이게 될 줄은 몰랐는데……. 역시 세상 이야기라는 게 내 생각대로만 흘러가는 건 아닌가 보군.”
그렇게 말한 프로페서가 하늘을 올려다봤다. 여름 정오 직후의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아 만일 천국이 있다면 그곳까지도 보일 것 같았다. 그런 하늘을 올려다보며 프로페서가 생각했다.
안수호와 류태현.
폭풍의 눈과도 같은 그 사내들과 그의 예상보다 빨리 엮이게 된 이 상황. 과연 길조로 봐야 할지 흉조로 봐야 할지.
“답은 신만이 알겠지.”
시니컬하게 툭 뱉은 프로페서가 피식 웃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1시간 뒤.
“……어제도 말했지만 난 이 계획 반대야.”
프로페서와 만났던 곳과는 다른 카페. 조유리는 안수호 앞에서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 안수호가 곤란한 표정으로 묻는다.
“어제는 끝내 동의하셨을 텐데요.”
“끄, 끝내 동의했지만 개인적으로는 반대라고! 탐탁지 않다는 뜻이야. 아무리 잠입 수사라도, 경비대원이 범죄조직에 용병으로 가담한다니…….”
“어쩔 수 없잖습니까. 필요한 일이니까.”
프로페서를 통해 류태현의 소재는 파악했다. 그러나 현재 그와는 연락조차 닿지 않는 상황. 결국 그를 꺼내오는 건 두 사람이 직접 해야 할 일이었다.
고로 잠입은 필수였다. 조유리도 그 사실을 모르는 건 아니었지만, 이해와 납득은 다른 감정이었다.
“뭐, 슬럼 안에서 일어난 일은 어지간해선 바깥으로 새어나가지 않고. 선배나 태현이만 조용히 있으면 제가 경찰에 신고 당할 일도 없을 테니 괜찮겠죠.”
“경찰에 신고당하는 것보다 전쟁 통에 칼 맞고 죽는 걸 먼저 걱정해야 할걸?”
“오, 설마 저 죽을까봐 걱정해서 반대하신 겁니까?”
“너는 진짜…….”
실실 웃으며 농을 던지는 안수호에게 조유리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사실 별로 걱정 안 되긴 해. 엊그제 싸우는 거 보니까 엄청 강해졌더라 너.”
“당연하죠. 제가 누굽니까? 여명단 간부랑도 싸우고, 오버랭크 던전 보스랑도 싸우고, 암살팀이랑도 싸우고, 그리고 또…….”
“그래그래 너 잘났다. 그렇게 잘났으면 아주 너 혼자 슬럼 평정이라도 하지 그래.”
“까짓 거 못 할 건 없죠. 저 혼자서는 힘들더라도, 태현이도 있으면 평정은 무리더라도 조직 하나 정도는 어떻게 몰래 대가리를 죽여서…….”
“쓸데없는 생각 말고 류태현이나 잘 빼와. 명심해. 너는 싸우러 가는 게 아니야. 그 애를 보호하러 가는 거라고. 무슨 말인지 알겠어?”
“농담 한 번 해본 겁니다. 저도 알아요.”
“……네가 말하면 농담 같지가 않아서 그래.”
조유리는 눈앞의 후배로부터 자신의 상사, 민채령을 겹쳐보았다.
일견 허황되어 보이는 말을 농담이랍시고 하면서, 정작 나중에 보면 그 말도 안 되는 일을 실제로 이뤄내버리는.
안수호는 그런 민채령과 묘하게 닮은 분위기가 있었다. 상사와 부하는 끼리끼리 닮는다는 걸까.
“하여튼 자, 이거 받아.”
더 생각해봐야 자기만 손해겠지. 그렇게 단념하며 조유리가 슈트 케이스를 꺼내들었다. 안수호 용으로 하달된 경비대 장비가 담긴 가방이었다.
“E형 디펜시브 코트 한 벌에 단파 무전기 하나, 부착형 도청기 셋, 응급처치용 포션 희석액 셋……. 무기는 따로 필요 없지? 저번에 보니까 손에서 슉 뽑아내던데.”
“네. 이 정도면 충분합니다.”
사실 실비가 있으면 디펜시브 코트 쪽도 필요가 없었으나, 아무리 슬럼이라 해도 공공연하게 태초의 은을 사용할 수는 없었다. 네버랜드에서의 폭주 영상은 전국에 대대적으로 보도되었고 그건 슬럼도 예외가 아니었으니까.
혹 전신을 은색 금속으로 감싼 채 싸우는 안수호를 보고 네버랜드 기생괴수를 연상하는 자가 나올 지도 모를 일이었다. 게다가 인터넷 등지에선 태초의 은이 실험 중 파괴되었다는 발표가 거짓이라 믿는 음모론자도 왕왕 있었다.
‘따지고 보면 음모론이 아니라 사실이긴 하지만.’
여하튼 장비는 있으면 있을수록 좋았다. 슈트케이스를 받아든 안수호가 그 자리에서 코트를 걸치고 짐들을 빼냈다. 어차피 코트를 제외하면 나머지는 다 코트 안주머니에 들어갈 크기였다.
“슬슬 전 가봐야겠네요. 오늘 밤에 성철파 사무실로 찾아가기로 했거든요.”
“면접?”
“그런 셈이죠. 그녀석들도 적일지도 모를 수상한 놈을 덥석 고용하진 않을 것 아닙니까.”
“네가 적이 아니라는 건 어떻게 증명하는데?”
“그야…….”
어차피 성철파의 적이라고 해봐야 용문이나 블랙스미스 정도. 그들과의 전투에 내보내 적을 죽이는 게 확인되면 그때부터는 아군인 셈이었다. 아마 사상 검증이랍시고 싸움 한 번 시키고 말겠지.
다만 안수호는 그런 부분을 조유리에게 설명하지 않은 채, 그저 어깨를 으쓱이며 얼버무렸다. 아무리 필요한 일이라도 범죄에 가담한다는 사실 자체를 꺼려하는 그녀에게 구태여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는 없었으니까.
‘뭐, 그런 식으로 사상을 검증한다 해도 조직 깊숙이 침투하는 건 무리겠지. 작정하고 잠입한 스파이라면 전투에서 자기네 조직원 한둘쯤 죽이는 건 감수할 테니까.’
그렇기에 성철파는 안수호를 용병으로 고용해도 어느 정도 거리를 벌릴 것이다. 용병이자 외부인인 네게 허용된 범위는 여기까지라고, 딱 선을 그어두겠지.
허나 안수호로선 그 정도로 충분했다. 그는 성철파 내부의 깊숙한 비밀 따위 관심 없었다. 그저 같은 용병 신세인 류태현을 만나, 그를 설득해 빼내오기만 하면 그만이었으니.
“그럼 이만 다녀오겠습니다. 면접이 잘 끝나면 핸드폰이나 무전기로 연락드릴 테니까. 선배는 예나가 준비해준 모텔에서 만일을 대비해 대기해주세요.”
“백업은 맡겨둬. 여차하면 바로 달려갈 테니까. 그런데…….”
조유리가 안수호의 얼굴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맨얼굴로 가는 건 좀 그렇지 않아? 류태현처럼 가면까지는 아니더라도, 너도 뭔가 얼굴을 가릴 방도가 있어야 할 것 같은데.”
“그 부분이라면 걱정하지 마세요.”
그런 조유리에게 안수호가 엄지손가락을 척 치켜세우며 말했다. 다음 순간 옷 안쪽에서 튀어나온 태초의 은이 그의 머리 전체를 감쌌다.
“와…….”
액체처럼 흐르던 태초의 은이 곧 하나의 형태를 이루자 조유리가 입을 살며시 벌리며 탄성을 뱉었다. 감탄의 의미는 아니었다.
“……이거 네 취향이야?”
“이상한가요?”
“이상한 건 아니고…….”
이상하진 않되, 좀 유치해 보인다고.
조유리는 목구멍까지 올라온 그 말을 조용히 되삼켰다.
열심히 일하는 후배의 체면을 지켜주기 위해서.
***
그리고 그날 밤.
의정부 금오동에 위치한 성철파의 사무실.
범죄 조직에게 있어 사무실이란 고정된 거점, 즉 아지트의 역할을 지닌다. 이는 지금과 같은 전쟁 시에는 군사 거점이라 봐도 과언이 아니리라.
고로 조직 사무실은, 특히 금오동처럼 다른 조직의 구역과 맞닿은 최전선에 위치한 사무실은 경계가 삼엄할 수밖에 없었다. 건물 입구에는 누가 봐도 한 실력 할 것 같은 덩치 둘이 경비를 서고 있었고, 그들뿐 아니라 건물 안에도, 그리고 주위 다른 건물에도 임전 태세로 대기 중인 성철파 조직원이 잔뜩 있었다.
뚜벅.
그리고 그런 그들 사이로 자신 있게 나아가는 남성이 한 명.
새까만 디펜시브 코트를 걸친 채 다가오는 청년의 모습에 조직원들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 두 사람의 얼굴에 동시에 당황이 번진다.
“뭐야 저 새끼는……?”
그도 그럴 것이 그들에게 다가오는 청년의 행색이, 정확히는 그 두부의 형태가 기묘했기에.
철그럭.
청년의 목 위로는 중세풍의 투구가 걸려 있었다. 게임이나 영화 따위에 나오는 외형만을 추구한 투구와 달리 투박하고 실용성을 중시한 디자인이었지만, 애초에 현대적인 복식 위에 투구를 걸친다는 것부터가 정상적인 센스는 아니었다. 그렇기에 조직원들은 당황한다.
“어이, 거기! 더 이상 다가오지 말고 그쯤에서 멈춰라.”
그러나 당황은 잠시. 그들은 곧바로 경비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이행했다. 자기네 영역으로 다가오는 수상한 자를 멈춰 세우고, 그 투구에 감싸인 신원을 묻는다.
“어디에서 온 누구냐.”
“용병이다. 오늘 밤에 사무실로 오라고 언질을 받아서 왔는데.”
“용병…?”
그 말에 조직원 한 명이 잠시 고개를 갸웃하다, 이내 생각났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러고 보니 한 명 온다 그랬지. 중립지대에서 실버 혼 녀석들을 죄다 다리병신으로 만든 외지인……. 그거 너 맞지?”
“그녀석들 이름이 실버 혼인 건 모르지만……. 날 습격하려던 자식들 아킬레스건을 싹 자른 건 내가 맞는데.”
“아무리 외지인이라도 중립지대에서 일을 벌이다니 배짱 한 번 두둑하군.”
“먼저 덤빈 건 그녀석들이야.”
숨길 기색조차 없이 당당한 그 말에 조직원이 혀를 내둘렀다.
중립지대에서 한바탕 벌였다기에 얼마나 별난 놈인가 싶었는데 상상 이상이었다. 다른 건 다 제쳐두고서라도 머리 위에 자랑하듯 얹어둔 저 투구만 봐도 상당히 기묘한 자식이었다.
신원을 감추는 거야 그렇다 쳐도 얼굴을 가리기 위함이라면 마스크도 있고 가면이나 고글도 가능할 텐데. 굳이 투구를 쓰고 오는 시점에서 정상은 아니겠지.
정산은 아니겠지……만.
“그래 뭐……. 상대도 못 알아보고 덤벼든 그 자식들 업보긴 하지. 우리야 실력 있는 용병이 와준다면 언제든 환영이니까.”
척 봐도 수상하기 그지없는 행색이었지만 선약이 있는 용병을 자처한다면 일단 올려 보내는 게 맞았다. 용병에 대한 면접은 다른 형님들의 일, 문지기인 자신이 왈가왈부할 문제가 아니었으니.
“들어가서 곧장 보이는 놈에게 똑같이 말해라. 그럼 곧장 안내해줄 거다.”
“수고들 해.”
거만하게 툭 인사를 던지며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투구남.
“잠깐.”
그런 투구남을 조직원이 멈춰 세웠다.
“근데 너……. 이름은 뭐냐?”
어차피 이름을 물어봐야 대답해주지 않을 거란 건 알고 있었다. 얼굴을 숨기려는 자가 제 이름을 밝힌다는 것도 웃기는 일 아닌가.
허나 그렇다면 가명이든 별명이든 제 스스로 자처하는 다른 이름이 있을 터.
그렇기에 조직원은 궁금했다. 얼굴 가린답시고 멋드러진 투구를 챙겨오는 이 기묘한 자식이, 과연 스스로를 뭐라고 자처할지가. 순수한 궁금증이었다.
철그럭.
조직원의 물음에 투구남이 고개를 돌렸다. 세로로 길게 난 슬릿들 사이에서 언뜻 안광이 비치는 듯 했다.
긴장되는 순간. 이게 뭐라고 긴장이 되나 싶었지만, 조직원은 자기도 모르게 마른 침을 삼켰다.
그리고 다음 순간.
“…………빌헬름.”
담담하게, 그러나 살짝 멋쩍은 듯한 목소리로 투구남이 작게 말했다. 그러곤 조직원의 대답도 듣지 않은 채 그대로 휙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남겨진 조직원은.
“빌헬름……이라고?”
조직원은 그 이름에 담긴 의미를 정확히 알지는 못했다. 기사의 무덤에 대한 정보는 대중에 제한적으로만 공개되어 있었고, 그곳 보스의 이름이 빌헬름이란 사실은 관련자들이 아니면 모르는 일이었으니.
그렇기에 그는 안수호가 얼굴을 가리는 수단으로 투구를 고른 것이나, 거기에 더해 굳이 이름을 빌헬름이라 밝힌 것이 오버랭크 던전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은 추호도 몰랐다.
다만, 그저 생각할 뿐이었다.
시꺼먼 개 주둥이 가면을 쓰고 블랙 도베르만이라 칭하던 놈도 별나다 싶었는데, 이제는 투구를 뒤집어쓰고 빌헬름이라 자처하는 놈까지 나타나다니.
“………………말세구만.”
요즘 젊은 놈들 감성을 못 따라가는 걸 보면 자신도 늙었다며. 조직원이 허탈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