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3화 〉 252. 후회
* * *
쏴아아아아아.
차가운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옥상.
그 난간에 선 채 아래를 내려다본 오은수. 그의 시야에 잡힌 것은 사람, 사람, 그리고 또 사람이었다.
본래라면 인적이 거의 없는 슬럼 거리. 그곳에는 말쑥한 정장 차림의 장정들이 가득 늘어서 있었다. 거진 본 적 없는 얼굴들뿐이지만 군데군데 몇 번 마주친 얼굴도 있다. 강진윤과 동격인 용문의 다른 간부들이라든가, 그들의 오른팔에 해당하는 조직원 등.
“하.”
오은수는 순간 자신이 보고 있는 광경이 꿈인지 생시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상식적으로 말이 되는 상황이 아니었으니까. 저들은 그가 이 건물에 숨어있는 걸 어떻게 알고 이곳에 모였으며, 어지간해선 모이는 일이 없는 간부들이 예닐곱씩 이 자리에 있는 건 무슨 우연의 산물이란 말인가.
몇 번이고 돌이켜 생각해봐도 추적은 없었다. 적어도 이 건물에 들어섰을 때, 그는 확실하게 적들의 눈을 따돌렸다.
그러나 눈앞의 이 광경은 현실.
그렇다면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것인가.
“오은수우우우!!!!”
얼떨떨한 머리로 상황을 파악하려던 찰나, 빗소리를 뚫고 한 줄기 외침이 그의 귓가를 두드렸다.
그 외침의 주인공은 강진윤. 부상 때문에 거동조차 힘겨운 상황에서도 용케 이 자리에 찾아온 그는, 부하가 씌워주려던 우산마저 내팽기치고 오은수를 향해 크게 외쳤다.
“항복해라 오은수!! 넌 끝났어!! 얌전히 투항한다면 그간의 정을 생각해 고통스럽지 않게 죽여주마!!”
“저 빌어먹을 새끼가……!”
순간 분노가 차올랐지만 오은수는 곧바로 그 분노를 가라앉혔다. 무작정 화를 내며 달려들기에는 상황이 좋지 않아도 너무 좋지 않았기에.
눈으로 보이는 조직원은 적게 잡아도 일백 이상. 비단 건물 아래뿐 아니라 주변 건물 옥상에도 수많은 조직원들이 진을 치고 대기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작정하고 그를 잡으러 몰려온 수준.
‘도대체 어떻게?’
그렇기에 의문이었다. 저만한 인원수를 무작정 끌고 다니며 자신을 찾으러 다녔을 리도 없고, 놈은 분명 자신이 이곳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온 것이다.
문제는 그 방법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는 것.
‘아니, 지금 중요한 건 어떻게 따위가 아니다. 이 자리를 빠져나갈 방법. 어떻게든 그 방법을 찾아야’
오은수가 빠르게 주위를 훑었다. 그는 성철파의 부두목. 백전노장이란 말조차 그를 완벽히 대변할 수는 없을 정도의 실력자였으니, 조금의 틈만 보인다면 어떻게든 그 틈을 통해 활로를 뚫을 수 있을 터였다.
허나 현실은 그의 생각보다 훨씬 잔혹하다. 겹겹이 완성된 포위망은 그야말로 견고한 요새. 심지어 적들은 그의 투명화 능력을 대비한 적외선 야투경까지 준비해오는 철저함을 보였다.
도주는 불가능. 그렇다고 맞서 싸우는 건 더더욱 말도 안 되는 이야기.
심지어 상대는 협상이 통할 상대도 아니었다. 그가 여기서 무엇을 거래 재료로 제시한들 경쟁조직 부두목의 목보다 값진 건 없을 테니.
“아저씨.”
그때 들려온 류태현의 목소리에 그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오은수에게 다가오려던 태현을 그가 손으로 제지한다.
‘나는 여기서 절대 살아나갈 수 없다. 그렇지만 꼬맹이는 아니야. 내가 놈들의 이목을 제대로 끈다면, 꼬맹이 한 명 도망칠 시간쯤은…….’
고민은 짧고 결단을 빨랐다. 난간에 선 오은수가 있는 힘껏 숨을 들이켰다.
“강진유우우우운!!!”
직후 그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외침.
“지금 당장 내려갈 테니까. 얌전히 거기서 목 씻고 기다리고 있어라.”
“……킥. 그러시든가.”
대군을 앞에 두고도 물러서지 않는 오은수의 모습에 강진윤은 그저 비웃음으로 일관할 뿐이었다. 제아무리 기개 있는 모습을 보인다 한들, 이 수를 앞에선 다 허세에 불과했으니.
그렇게 생각하는 강진윤, 그리고 조직원들을 뒤로한 채 오은수가 난간에서 떨어졌다. 그가 류태현에게 다가가자 그가 불안에 차 묻는다.
“……아래에 적들이 도착한 거지?”
“…….”
“얼마나 있는데?”
“존나 많이. 너랑 나 둘이서는 도저히 뚫고 나갈 수 없을 정도로.”
“……!!”
오은수의 입에서 그런 약한 소리가 나오자 류태현도 그제야 상황의 심각성을 본격적으로 인식했다. 축 늘어진 그의 손이 파르르 떨렸으나, 곧 의지를 다지듯 그가 주먹을 꽈악 쥔다.
“……그래도 싸워야지. 어쩌겠어? 그리고 의외로 아저씨랑 나 둘이 힘을 합치면 어떻게든 될 지도 모르고”
“아니, 넌 내가 신호하면 곧바로 도망쳐라. 내 걱정은 하지 말고. 다 생각이 있으니까.”
“뭐?”
오은수가 주위를 한 번 주욱 훑어보며 이어서 말했다.
“주변 건물들이 죄다 여기보다 낮은 덕에 지금 옥상을 보고 있는 놈은 아무도 없다. 즉, 아래 있는 녀석들은 아직 네가 여기 함께 있다는 걸 모를 거야. 건물 안에 들어온 놈들도 너랑 내가 죄다 쓰러뜨렸으니.”
“그래? 그럼 내가 틈을 보다 기습을”
“아니, 좀 전에도 말했지만 네 역할은 도망치는 거야. 내가 옥상에서 저 아래 있는 용문 놈들 한복판으로 뛰어내리면 나한테 죄다 이목이 쏠릴 거다. 그때 다른 건물 옥상으로 뛰어내려. 너라면 어렵지 않게 도망칠 수 있을 거다.”
“그럼 아저씨는?”
“걱정하지 말라니까 그러네. 다 생각이 있다고”
“그 생각이란 게 뭔데?”
류태현의 거듭된 물음에 오은수의 말문이 턱 막혔다. 당연한 일이었다. 애초에 생각이랄 것도 없으니.
“……너, 너도 알다시피 내 능력이 투명화잖냐. 다른 건 몰라도 도망치는 것 하나는 내 특기야. 그러니 걱정하지 않아도”
“고작해야 1분. 그것도 한 번 쓰면 5분은 사용 못 하는 능력이잖아. 지금 주위에 조직원들 잔뜩 깔려있다며. 그런데 겨우 그 1분으로 도망칠 수 있겠어? 그게 안 되니까 그런 표정 짓고 있는 거 아냐.”
류태현의 지적에 오은수가 반사적으로 자기 얼굴을 더듬었다. 그런다고 제 표정을 읽을 수야 있겠냐만은.
“아저씨답지 않게 왜 그래? 같이 싸우자고. 아저씨랑 나, 둘이면 그깟 깡패놈들 이삼십 명 못 쓰러뜨린다는 법도 없잖아? 안 그래?”
“……이삽십 수준이 아니니까 그렇지.”
“더 많아도 뭐 머릿수가 대수인가. 중요한 건 실력이지. 아저씨랑 나랑 힘을 합치면, 운이 좋으면 둘 다 살아서 도망칠 수 있을 지도”
“운이 나쁘면?”
“…….”
“운이 나쁘면 둘 다 뒈지겠지.”
오은수의 냉담한 말에 류태현의 말문이 턱 막혔다.
“운이 평범해도 둘 다 죽을 거고. 운이 아주 좋아도 둘 중 하나는 죽을 거다. 네까짓 게 아무리 부정하려 해봐야 그게 현실이야. 난 평생을 주먹밥 먹고 살아왔어. 뭐가 이기고 뭐가 지는 싸움인지는 내가 너보다 훨씬 잘 안다.”
“그래서, 나보고 아저씨를 버리고 도망치라고?”
“그럼 같이 죽기라도 하게?”
“100% 우리가 진다는 법은 없잖아…! 정말 약간이라도 두 사람이 살아나갈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면”
퍼억!!
그 순간 오은수의 주먹이 류태현의 복부를 강타했다. 기습적인 일격에 류태현이 얕은 신음을 흘리며 배를 부여잡는다.
“지랄도 정도껏 해야지.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새끼가.”
“아저, 씨…?”
“야 이 새끼야. 뭐? 같이 죽자고? 아주 씨발 독립투사 납셨네 납셨어. 야, 네가 나랑 같이 개죽음 당해주면 뭐 나아지는 거라도 있냐? 어? 고작해봐야 네 그 알량한 양심 챙기기? 그 양심 하나 챙기자고 난 스무 살도 안 된 애새끼가 나 때문에 죽는 걸 뻔히 지켜보고 있으라고? 가뜩이나 뒤지는 것도 좆같은데 애새끼 하나 구하지 못했다는 죄책감까지 짊어지고 뒤지란 거냐? 어?!”
류태현의 답답한 태도에 오은수는 꼭지가 제대로 돌아버렸다. 활로가 보이지 않는 현 상황에서 오는 짜증과 스트레스, 그리고 류태현만은 어떻게든 살려서 보내고 싶다는 간절한 염원. 두 종류의 감정이 한데 어우러져 거친 낱말이 돼 류태현의 가슴을 날카롭게 후벼 팠다.
“이 이기적인 새끼야. 객기를 부리고 싶거든 적어도 책임질 수 있는 객기를 부려야지. 대가리에 피도 안 쳐마른 미성년자 애새기가 꼴에 알량한 양심, 의리 좀 지켜보겠다고 나랑 같이 죽어버리면. 아마 난 죽은 다음에도 억울해서 구천을 떠도는 귀신이 될 거다. 반면 네가 내가 시간을 끄는 사이에 잘만 도망쳐준다면, 난 뒤질 때 뒤지더라도 적어도 조금은 안심하고 만족한 채 죽을 수 있겠지.”
“…….”
“선택해라. 네가 그렇게 사랑해 마지않는 은수 아저씨가 좆같은 기분으로 뒈졌으면 좋겠냐, 아니면 그래도 좀 기분 좋게 뒈졌으면 좋겠냐? 응? 고민할 것도 없는 문제 아니냐?”
어찌 보면 살아생전 마지막 대화가 될지도 모르는 상황에도 여전히 걸걸한 말투를 자랑하는 게 오은수답다면 오은수다웠다. 평상시의 류태현이라면 그 모습에 피식 웃음을 지었겠지만. 지금 상황은 도저히 웃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아저씨….”
“아저씨고 나발이고 잘 들어. 내가 저놈들 한복판으로 뛰어내리면 주변 건물에 있는 놈들도 죄 그쪽을 바라볼 거다. 그때 곧장 저기 오른편에 있는 6층짜리 상가 건물 옥상으로 뛰어내려. 거기가 적이 제일 적으니까. 그 다음은 냅다 달리는 거야. 뒤도 돌아보지 말고.”
“…….”
“그 가면은 여기 두고 가는 게 좋겠다. 맨얼굴이 드러나기야 하겠다만 후드 눌러쓰면 잘 안 보일 거고. 오히려 그 가면 때문에 괜히 블랙 도베르만이다! 하고 이목이 끌리기만 할 거야. 도망칠 때 일직선으로 튀지 말고 되도록 골목골목 사이사이로 요리조리 다니고. 적당히 따돌렸다 싶으면 겉옷 싹 다 벗은 다음 런닝 차림으로 슬럼 주민인 척 해. 쟤네는 네 얼굴을 모르니 태연하게 지나가도 전혀 못 알아볼 거다.”
세세한 것 하나하나까지 지시하는 그 모습에서 류태현은 오은수가 자신을 지대하게 걱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한편으로는 그 걱정이 조금 짜증나기도 했다. 자기는 당장 적들 사이로 뛰어내려 죽을 상황인데도, 통성명한 지 1년 겨우 지난 자신을 이다지도 걱정해준다는 것이.
“……정말 이 방법 밖에 없는 거야?”
“네가 갑자기 영화 주인공마냥 S급으로 각성한다면 모를까. 그게 아니고서야 힘들지. 어쩔 수 없잖냐. 너도 나도 그런 주인공 같은 인생하곤 거리가 먼…….”
이런 상황에도 너스레를 떨며 농담을 던지던 오은수가 흠칫 말을 멈췄다. 그러더니 이내 그의 입가에 자그마한 웃음이 피식 떠올랐다.
“……아니, 난 아니더라도 넌 다를 지도 모르겠다. 넌 정말 재능이 넘쳐나는 녀석이니까. 어쩌면 10년, 아니면 20년 뒤에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강한 헌터로 이름을 날리고 있을지도 모르지.”
오은수가 류태현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곤 돌아섰다. 난간으로 향하는 그 뒷모습을 류태현은 비 내리는 옥상 한복판에서 그저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그가 난간 앞에 선 순간.
“태현아.”
류태현을 돌아보지 않은 채 오은수가 입을 열었다.
여기서 뛰어내리면 자신은 아마 죽는다. 그렇기에 그 전에 류태현에게 멋진 한 마디라도 던지려고. 이제껏 거의 부르지 않던 그의 이름까지 불러가며 입을 열었다.
그렇지만.
‘……씨이발. 하고 싶은 말은 산더미인데 정리가 하나도 안 되네.’
오은수는 원채 말주변이 없었다. 짧은 한 마디로 함축적으로 표현하기보단 장황한 문장으로 제 느낀 바를 그대로 말하는 것이 그의 스타일이었다. 죽음을 앞두고 던지는 한 마디 유언 같은 건 그의 성향과 전혀 맞지 않았다.
“…………잘 살아라.”
휘익!
결국 그가 마지막 순간 꺼낸 말은 특별한 의미도, 이렇다 할 수사어구도 없는 담백한 한 마디였다. 그 한 마디를 뒤로한 채 오은수가 난간을 박차고 아래로 뛰어내렸다.
용문 조직원들이 촘촘하게 늘어선 도로 한복판으로.
“아저씨…….”
망연자실하게 그 모습을 두 눈에 담은 류태현이 이내 침음성을 삼키며 일어섰다. 아래쪽이 소란스러워지는 낌새가 느껴진 순간, 그가 오은수가 말한 건물이 있는 방향으로 냅다 달렸다.
휘익!
“어어? 저, 저거!”
아니나 다를까 그 건물 위에도 조직원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오은수에게 이목이 쏠려 류태현의 다이빙에 반응할 수 없었다. 3층은 아래 있을 건물로 착지한 류태현이 착지의 기세 그대로 앞으로 굴러가듯 내달렸다.
“잡아!!”
곧바로 시작된 추격전. 류태현은 오은수의 말을 끊임없이 되새기며,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달리고 또 달렸다. 어느새 그의 몸은 옥상이 아닌 지면을 밟고 있었고, 거미줄처럼 얽힌 뒷골목을 이리저리 헤매고 있었다. 당장 지금 있는 곳이 어디인지도 몰랐지만 그는 달렸다.
그저 달렸다.
달리고 또 달려서, 자신을 추격해오는 조직원들의 기척이 옅어졌다 느껴졌을 즈음.
파앗!
모퉁이를 돌아섬과 동시에 류태현이 겉옷을 벗어던졌다. 블랙 도베르만의 상징이 된 멋드러진 코트와 까만 후드. 벗어던진 옷을 마침 근처에 있는 쓰레기통 깊숙이 처박는다. 그리고 곧장 몸을 돌린다.
타다다다닷…….
멀리서 들려오는 발소리에도 류태현은 아랑곳 않았다. 그가 모퉁이를 돌아서자 때마침 그를 쫓고 있던 조직원 일곱 명이 그와 마주쳤다.
“저리 비켜!!”
허나 그들은 류태현에겐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모퉁이를 돌아섰다. 당연히 그곳에 그들이 쫓던 자의 모습은 없었고, 나지막하게 욕설을 내뱉은 조직원이 휴대폰으로 다른 조직원들에게 서둘러 연락했다.
바로 옆에 자신들이 쫓던 자가 있다는 사실조차 눈치 채지 못한 채.
“…….”
류태현은 그 길로 자신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얼굴을 한 채 걷고 또 걸었다. 이따금 용문 조직원으로 보이는 이들이 그의 옆을 스쳐 지나갔지만, 한가롭게 걷고 있는 류태현에겐 관심조차 없어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류태현의 모습을 보라.
그는 아직 얼굴에 앳된 티가 남은 미성년자. 머리카락은 비와 땀에 젖어 산발이었으며 걸친 옷이라곤 헐렁한 런닝 하나에 시꺼먼 바지뿐.
그나마 특이할 점이라면 런닝 곳곳에 남은 핏자국 정도가 있겠으나, 슬럼에서 옷에 피가 묻어 있는 정도는 일상다반사였다. 스쳐 지나가는 조직원들은 류태현을 부상을 입은 채 도주 중인 오은수의 동료보다는, 소매치기나 양아치 짓이나 하다 어디서 칼질이라도 당한 평범한 슬럼 불량아 정도로 여겼다.
그야말로 전부 오은수의 말대로.
류태현은 보기 좋게 용문 조직원들의 눈을 따돌렸다. 그는 비를 피하기 위해 근처에 보이는 폐건물에 들어갔다. 안에는 노숙자로 보이는 선객이 몇 있었으나 그들 또한 류태현에게 이렇다 할 관심은 보이지 않았다.
류태현은 그대로 터덜터덜 건물 구석의 벽으로 가 털썩 앉았다. 그의 입에서 진한 한숨이 새어나온다.
살아남았다.
그 사실이 주는 안도감. 긴장감이 풀리며 다시금 엄습한 부상의 고통과 피로.
그러나 그 어느 것보다도 류태현의 표정에 가장 먼저 드러난 건 바로 후회와 자책이었다.
오은수를 두고 혼자 도망쳤다는 사실에, 끝내 그의 도움이 되지 못하여 그를 사지로 내몰았다는 사실에.
“…………씨발.”
밀려오는 후회와 회한에 류태현이 나지막하게 욕설을 내뱉었다. 고개를 푹 숙인 그의 뺨을 타고 빗물인지 무엇인지 모를 물줄기가 뚝뚝 흘러내렸다.
그 모습, 남이 보면 딱 보아도 무언가 사정이 있어 보이는 모습이긴 하였으나.
이곳 슬럼에 남다른 사정 갖지 않은 이가 어디 있겠는가 하여, 류태현이 건물 구석에서 흐느낀다 한들 그 모습 또한 별다른 이목을 끌지는 않았다.
밤은 깊어지고 빗줄기는 더욱 거세졌으며.
류태현은 그 폐건물에서 꼬박 하루를 보낸 다음 날, 터덜터덜 고아원으로 향했다.
***
그리하여 시간은 흐르고 흘러.
2020년. 현재.
“…………까지가 제가 태현이한테 들었던 그날의 이야기에요. 그 이후 태현이는 슬럼을 떠났고, 1년에 서너 번 정도 저나 아이들 안부를 물으러 오는 게 고작이었어요. 그마저도 최근에는 입시다 대학생활이다 하면서 거의 오지 않았고요.”
권은하가 꺼낸 이야기에 안수호나 조유리나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다만 안수호의 경우 조유리와는 생각하는 바가 조금 달랐다.
‘설마 류태현의 과거사가 이런 식으로 설정되어 있었을 줄은…….’
주인공이니 그럴듯한 과거사 하나쯤은 있겠지. 슬럼 근처에 사니 슬럼과 관련된 일이 있겠지.
막연하게 그렇게 생각하긴 했으나, 실상 류태현은 안수호의 예상보다도 훨씬 슬럼에 깊게 연관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연관은 아직도 끊어지지 않은 채였고.
“좀 전에도 여쭤보긴 했지만 다시 한 번 묻겠습니다. 권은하 씨는 류태현이 성철파 밑에서 용병으로 일하고 있다 생각하시는 거죠?”
“그럴 거예요. 태현이가 성철파를 상대로 내세울 거래 수단은 자기 힘밖에 없으니까.”
“…수호야.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꽤 심각해. 학생이 범죄에 연루된 거야. 그것도 최소 폭행이나 상해, 어쩌면 살인까지…….”
“태, 태현이는…!”
조유리의 우려 섞인 말에 권은하가 벌떡 일어서며 외쳤다.
“……태현이는 절대 나쁜 애가 아니에요. 걔가 범죄를 저질렀다고 해도 그건 어,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 그런 거일 테니까. 그 부분은 어떻게 참작을 해주시면…….”
“…………뭐어, 그때 일은 그때 가서 생각하죠. 우선은 태현이를 찾는 게 급선무니까.”
지예원이 말한 프로페서의 실력이 사실이라면, 그에게 의뢰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류태현의 소재는 파악이 될 터였다. 특히나 그가 범죄조직 밑에서 용병으로 일한다는 눈에 띄는 짓을 하고 있다면 더더욱.
‘아니지. 얼굴은 그때처럼 또 가면 같은 걸로 가리고 있을지도 몰라. 아니, 무조건 그러겠지. 그럼 프로페서의 정보력도 기대할 수 없는 것 아닌가?’
4년 전 류태현이 용병으로 일할 땐 오은수와 쏨밧이라는 남자를 제외하곤 그 누구도 그의 정체를 알아내지 못했다고 했다. 심지어 그중 한 명은 이미 죽어버렸으니, 제아무리 프로페서의 실력이 뛰어난들 류태현의 정보를 얻어내는 데엔 어려움이 따르지 않을까.
“수호야. 아무래도 토요일 전에 우리가 개인적으로 조사해봐야 할 것 같은데.”
조유리도 같은 결론에 다다랐는지 자체적인 조사의 필요성을 논했다. 안수호 또한 같은 생각이었다.
“제 생각도 그래요 선배. 다행히 수확은 충분히 있었네요. 태현이가 성철파와 관련되어 있다는 걸 알았으니 그쪽을 조사해보면 뭐라도 나오겠죠.”
“저……. 실례지만 그건 좀 위험하다고 생각되는데요. 안 그래도 전쟁 때문에 민감해진 성철파를 경비대 분들 같은 외부인이 들쑤신다면…….”
“뭐 다소의 위험은 따르겠죠. 그렇지만 그리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안수호가 슬쩍 시선을 보내자 조유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에 안수호가 씨익 웃으며 권은하에게 대답했다.
“저희 두 사람, 이래 보여도 꽤 강하거든요.”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