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9화 〉 248. 블랙 도베르만(1)
* * *
고아원 1층 거실.
안수호와 조유리는 각자 소파에 앉은 채 권은하를 기다리고 있었다.
거실에는 그 두 사람밖에 없었지만, 두 사람은 사방에서 쏟아지는 시선을 느꼈다. 고개를 조금만 돌려보면 문틈이며 모퉁이며, 아이들이 빼꼼 고개를 내민 채 그 둘을 감시하고 있었으니까.
그 얼굴에 떠오른 감정은 경계심이 반, 그리고 호기심이 반이었다. 시선이 마주칠 때마다 게 눈 감추듯 고개를 휙 내리는 아이들을 뒤로한 채, 안수호가 조유리에게 물었다.
“선배. 거기서 그렇게 소속을 밝혀버리면 어떡합니까?”
“……딱히 문제는 없잖아.”
“슬럼 사람들이 경비대 같은 족속을 환영할 리가 없으니까요. 만약 그 여자가 적대적으로 돌아서기라도 했으면”
“겨, 결과적으로 잘 됐잖아. 그럼 된 거지…….”
결과적으로 잘 되었다. 그것만큼 무책임한 말이 또 있을까. 자칫 잘못했다간 고아원의 신고로 성철파 조직원들이 자신들을 쫓게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인데.
조유리도 그 사실을 아는지 안수호의 핀잔에 적극적으로 반박하진 않았다. 안수호도 그 이상 무어라 말하진 않았다.
저벅. 저벅.
그때 주방으로 갔던 권은하가 쟁반에 찻잔을 받친 채 거실로 왔다. 유리잔에 담긴 진한 녹차. 거실 안에 은은한 향기가 퍼져나간다.
“여기요.”
“감사합니다.”
“잘 마실게요. 그나저나 그, 성함이…….”
“권은하. 권은하예요. 그쪽 두 분은…….”
“저는 조유리. 이쪽이 안수호예요.”
어색한 통성명과 함께 착석한 세 사람.
서로 눈치를 보며 말없이 차만 홀짝이길 5분여,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권은하였다.
“태현이를 찾으러 오셨다 그랬죠.”
그 말이 나오기까지의 침묵은 무슨 의미였을까. 망설임인가. 아니면 생각을 정리하기 위한 시간이 필요했는가.
“저희 경비대는 류태현 학생이 위험에 처하진 않았을까 싶어 이곳에 왔습니다. 태현 학생이 무사히 집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부디 협조해주시죠.”
그 말에 권은하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걸렸다.
“제가 아는 건 다 말씀드릴게요. 그렇지만 그다지 도움이 되진 않을 거예요. 태현이가 집에 돌아가지 않고 있는 건 아마 본인 의지일 테니까.”
“그게……무슨 말씀이시죠?”
“저도 확실히 아는 건 아니지만……. 아마 태현이는 지금 성철파에서 용병으로 일하고 있을 거예요.”
“네?”
“에?”
그 황당한 말에 조유리와 안수호, 두 사람의 얼굴에 동시에 당황이 번진다.
류태현이 용병을? 그것도 범죄조직인 성철파에서?
“그럴……리가요. 태현이 그 놈……류태현 학생이 범죄조직에 가담한다든가, 그런 일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모르실 수도 있지만 그 학생 성격이 딱 불의를 못 참는 만화 주인공 같은 성격이라서”
“태현이 성격이라면 잘 알아요. 누구보다도 제가 가장 잘 알죠. 그렇지만 사람이 어떻게 하고 싶은 일만 하겠어요? 세상엔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하는 일이라는 것도 있는데.”
“류태현 학생이 어쩔 수 없이 성철파에 가담했다는?”
“네. 아마 그럴 거예요. 그리고 그 원인은 저희들이고.”
착잡한 얼굴을 한 채 권은하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문틈에서 자기들을 지켜보는 아이들은 물론이고 시야에 들어오는 자그마한 물건 하나하나까지. 류태현은 그 모든 것을 지키기 위해 성철파에 투신했다. 본인으로부터 직접 들은 건 아니지만, 적어도 권은하는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았다.
“뭐, 그쪽 반응도 이해가 가요. 태현이를 잘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렇게 말하겠죠. 류태현이 범죄에 가담할 리가 없다. 그 정의로운 사람이 범죄라니 말이 안 된다……라고.”
그렇지만.
그렇게 덧붙인 권은하의 눈은 어느새 눈앞의 두 사람이 아닌, 쓸쓸하기 그지없는 과거를 바라보고 있었다.
“태현이는 4년 전에 이미 한 번, 성철파 밑에서 용병으로 일했던 적이 있어요.”
“예? 그게 무슨…….”
4년 전이면 류태현이 아직 고등학교도 들어가기 전 아닌가. 미성년자가 범죄조직에서 용병일을 했다니 쉽게 믿을 수 있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렇지만.
“……좀 긴 이야기가 될 것 같은데 괜찮은가요?”
그렇게 말하는 권은하의 얼굴에선 거짓이나 기만하려는 낌새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조유리와 시선을 교환한 안수호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부디, 자세히 들려주시죠.”
제아무리 권은하가 류태현과 친했다 한들 권은하는 결국 타인이다. 그녀가 기억하고 있는 류태현의 과거는 류태현이 이야기해준, 혹은 그녀가 직접 눈으로 본 일부에 불과했다.
허나 그 정도로도 안수호나 조유리가 사정을 파악하기엔 충분했다.
그린하우스 1학년 수석인 모범생 류태현과 대한민국 최흉최악의 우범지대인 의정부 슬럼. 그 둘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가.
이야기는 4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4년 전. 정확히는 류태현이 오은수와 만난 시점으로부터 1년간.
그 시기는 류태현이 그의 인생에 있어 가장 가파른 성장세를 보인 시기였다. 슬럼 최강의 초인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오은수 아래에서 가르침을 받은 그 시기야말로, 이후 아카데미 수석 자리를 꿰찬 그의 강함을 만들어낸 배경이라 할 수 있겠지.
허나 동시에 그 시기는 류태현의 자아가 가장 불안정한 시기이기도 했다. 16살. 남들이 흔히 사춘기에 빠지던 그 시기에 류태현이라고 예외는 없었다.
사춘기 특유의 반항심. 그리고 스스로 다 자랐다며 자부하는 오만과, 그것으로부터 비롯된 자기증명의 욕구.
그러한 류태현의 정서적인 요인들과 1년 전부터 계속되온 성철파와 용문의 전쟁이란 상황이 맞물리자, 류태현은 당시로서도 지금으로서도 상당히 무모한 결심을 하게 된다.
오은수.
자신의 목숨을 구해줬고 소중한 친구인 권은하의 목숨을 구해준 은인.
그런 그에게 은혜를 갚기 위해, 그의 조직인 성철파의 편에 서서 용문과 싸우겠노라고.
“좆까.”
허나 류태현의 치기어린 포부를 오은수는 단칼에 잘라냈다.
“왜 거절하는 건데! 내가 뭐 불손한 의도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아저씨한테 진 빚을 갚고 싶은 것뿐이라니까?”
“좆이나 까잡숴! 누가 너한테 은혜 갚으라고 닦달하든? 은혜고 나발이고 갚을 필요 없으니까 괜히 기웃거리지 말고 전쟁에는 신경 꺼라.”
“……도대체 왜 그러는 건데? 설마 아직도 내가 약하다고 생각하는 거야? 아저씨도 봤잖아! 내가 1년 사이에 얼마나 강해졌는지!”
“알지! 강해졌지! 강해져도 진짜 더럽게 강해졌지! 이야, 가르치면서 질투가 날 정도였다니까? 내가 10년 20년에 걸쳐 쌓은 노하우를 무슨 스펀지마냥 쭉쭉 빨아먹는데, 요즘 애들 말로 재능충이라 하든가? 하여튼 재능 하나는 넘쳐나는놈이라니까”
“그걸 알면서 도대체 왜 안 된다는 건데! 나도 싸우겠다고!”
“응 좆까.”
“하다못해 이유라도 좀 말해주든가!”
류태현의 일갈에 오은수는 웃음기가 싹 가신 얼굴로 말했다.
“꼬맹아. 네가 1년 전에 나한테 싸움을 배우기로 했을 때. 왜 배우기로 했는지 기억 나냐?”
“뭐? 그건 갑자기 왜”
“말대답하지 말고. 그때 나한테 뭐라 하면서 가르쳐달라고 했냐? 응? 설마 지가 한 말을 까먹은 건 아니지?”
오은수의 이죽거림에 류태현이 미간을 있는 대로 찡그렸다. 그러나 그것과 별개로, 그의 입은 어느새 오은수가 원하는 답을 읊고 있었다.
“……소중한 사람들을 지키고 싶다고. 그래서 강해지고 싶다고. 그렇게 말했어.”
“잘 기억하고 있네. 그럼 그 말대로 여기 고아원 애들이나 잘 지키고 있으라고. 쓸데없이 전쟁에 끼어들겠다 기웃거리지 말고.”
“쓸데없다니…. 나라고 아무것도 모르는 줄 알아? 아저씨네 조직 지금 용문한테 개같이 발리고 있다며! 그래서 있는 돈 없는 돈 끌어다 쓰면서 용병도 잔뜩 고용하고, 그러고도 모자라서 구역들 잔뜩 빼앗기는 중이라며!”
“이런 씨이벌 그건 또 누구한테 쳐들었냐. 누가 말했어? 응? 만수? 규태? 설마 쏨밧 저 자식은 아닐 거고”
“지금 누가 말했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잖아!”
콰앙!
류태현이 있는 힘껏 지면을 밟자 땅이 우르릉, 작게 울렸다. 그가 느끼고 있는 분노나 답답함이 여실히 드러나는 제스처.
“이 새끼가 지금 어른 앞에서 예의를 밥 말아처먹었나”
“아저씨. 냉정하게 생각해봐. 아저씨네 조직 지금 위험하잖아. 찬밥 더운밥 가릴 신세가 아니라고! 진짜 만약에라도 아저씨네 조직이 지면, 아저씨가 죽기라도 하면 아저씨만 보고 사는 여기 고아원 애들은 어떡하고? 당장 길거리에 나앉을 게 뻔한데, 나보고 그냥 여기서 가만히 보고만 있으라고?”
그 말에 오은수의 얼굴에 일순 갈등의 빛이 서렸다. 그러나 곧바로 표정을 다잡은 그가 고개를 저었다.
“꼬맹이 니 마음은 알겠다만, 그래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야. 슬럼 주민하고 외지인 사이에는 지켜야 할 선이라는 게 있는 거라고.”
“그놈에 선, 선, 선, 선! 진짜 귀에 딱지가 앉겠네. 도대체 그 선이 뭔데? 고아원 애들 지키는 것보다 더 중요한 거야?!”
“네가 아무리 떼를 써도 난 절대 허락해주지 않을 거다. 그러니까 포기해.”
그렇게 말한 오은수가 이제 가봐야겠다며 발걸음을 돌렸다.
“네 말마따나 전쟁 때문에 한동안 바빠서 또 못 올 거야. 고아원은 잘 부탁한다.”
“아저씨!”
“응 좆까. 깠으면 한 번 더 까고. 쏨밧!”
오은수의 외침에 쏨밧이 고아원에서 나왔다. 그의 팔다리에는 그에게 놀아달라며 달라붙은 아이들이 아쉬운 얼굴로 붙어있었다.
“이제 놔줘라. 난 가야한다. 다음에 또 놀아줄 테니 얌전히 기다린다.”
“다음에 언제? 다음에 언제 오는데?”
“As soon as possible. 금방 오겠다.”
“다음에 오면 오늘 해준 아저씨 고향 이야기 마저 해줘야해? 알겠지?”
“그러지.”
아이들을 떼어놓고 오은수에게 향하던 쏨밧이 류태현 곁에 멈춰섰다. 분한 얼굴로 주먹을 꽈악 말아쥐고 있는 그의 곁에.
“……태현.”
“당신도 나한테 훈계질이나 할 생각이면 그냥 갈 길 가.”
“No. 난 태현에게 훈…계? 나쁜 말 하려는 게 아니다. 왜냐하면 태현이 원하는 것. 내가 원하는 것과 같으니까.”
“뭐?”
예상 외의 답에 쏨밧이 슬쩍 오은수 쪽 눈치를 보았다. 좀 전의 대화에서 열불이 뻗친 건 마찬가지였는지 그는 두 사람에게서 등을 돌린 채 담배를 뻐억뻐억 피워대고 있었다.
그 모습을 확인한 쏨밧이 류태현에게 작게 속삭인다.
“……태현. 네 말대로 지금의 성철파, 많이 힘들다. 용문, 실력 있고 이름 모를 용병 잔뜩 고용. 반면 성철파, 자금도 인맥도 한계다. 타파하기 위해선 새로운 사람 필요. 기왕이면 강하고 실력 있는. 바로 태현, 너처럼.”
“거 보라지. 사정 힘든 거 뻔히 아는데 왜 쓸데없는 자존심을 부려서는….”
“No. 자존심 아니라 걱정. 은수 형. 태현을 걱정하는 거다. 태현을 많이 아끼니까. 그렇지만 그 걱정, 내가 생각하기에도 지나치다는 생각은 든다. 태현은 걱정할만큼 약하지 않다.”
“내 말이 그 말이야! 그런데도 아저씨는 나보고 쓸데없이 끼어들지 말라고”
“Take it easy. 나도 태현 억울한 것 안다. 그리고 태현이 실제로 조직에 도움될 것도 안다. 그래서 생각해봤다. 서로가 전혀 손해보지 않을 아이디어.”
“……아이디어? 그게 뭔데?”
류태현의 물음에 쏨밧의 입가에 씨익 웃음이 그려졌다. 평소 웃음이라곤 일절 보이지 않던 그치고는 이질적인 모습.
“태현. 가면을 써라. 신원을 밝히지 않고 익명의 용병이 되는 거다. 나라면 은수 형에게 들키지 않고 태현을 쓸 수 있다.”
“……정말? 정말 들키지 않을 수 있어?”
“Of course. 은수 형은 부두목. 관리자다. 반면 나는 그 오른팔. 조직의 실무는 내가 한다. 용병 고용을 포함해서. 은수 형에게는 고향에서 알던 용병이라 속인다. 가면을 쓰고 말을 하지 않으면 목소리로 들킬 일도 없고, 한국어 모르는 외국인이라고 속이기도 쉽다. 그렇게 하면 태현, 은수 형에게 몰래 은혜 갚을 수 있다. 은수 형도, 태현 때문에 괜한 걱정 않고 전쟁에 집중할 수 있다. 누이 좋고 매부 좋고. Do you understand?”
쏨밧의 말에 류태현은 잠시 고민했다. 그러나 기실 류태현으로선 고민할 필요도 없는 문제였다.
“……정말 들키지 않는 거 확실하지?”
마지막 확인차 묻는 그 질문에 쏨밧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Absolutely. 당연하다.”
그로부터 일주일 뒤.
류태현이 변장한 태국 용병 ‘블랙 도베르만’은 구 시가지에서 벌어진 용문과 성철파의 국지전에서 화려하게 데뷔했다.
얼굴을 가리는 도베르만 형상의 가면. 머리를 덮은 후드와 그 위에 걸친 칠흑의 정장.
특징적인 외형만 있었다면 그저 좀 특이한 용병이구나 싶었겠지만 블랙 도베르만에게는 특이한 외형에 뒤지지 않는 압도적인 실력이 있었다. 용문의 간부 한 명을 문자 그대로 척살해버린 그의 활약은 순식간에 조직 전체에 퍼졌고, 자연스레 조직원들은 블랙 도베르만의 정체에 대해 궁금해하기 시작했다.
허나 블랙 도베르만은 그 외형만큼이나 신출귀몰했다. 전투 전후를 제외하곤 결코 조직에 모습을 드러내는 일이 없었으며, 혹 조직원과 마주치더라도 단 한 마디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유일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그의 고향 친구로 알려져 있는 쏨밧뿐.
그야말로 수상하기 그지없는 행태였지만 조직원들은 구태여 이를 들춰내지 않았다. 전쟁이 한창인 와중 실력 있는 용병 한 명이 귀한 실정이었고, 잘 싸워주기만 한다면 괜히 긁어부스럼을 만들 필요는 없었으니까.
다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개 조직원들의 경우.
“쏨밧. 그 블랙 도베르만이란 친구. 개인적으로 한 번 보고 싶은데 자리 좀 주선해줄 수 없나?”
조직의 모든 것을 총괄하는 부두목, 오은수는 혜성처럼 등장한 용병에게 계속 관심을 보였다. 그 또한 다른 조직원들처럼 용병의 정체가 궁금하였으나, 비단 이유가 그것만은 아니었다.
“은수 형. 그는 가면의 용병이다. 의뢰인과는 절대 사적으로 만나지 않는다. 나조차도 과거의 인연 덕에 이야기가 가능. 그마저도 꼭 필요한 이야기만 하고 있다.”
“그래서, 사적으로 자리를 만드는 건 불가능하다는 건가?”
“That`s right. 그는 아픈 과거를 가지고 있다. 그 과거를 딛고 차가운 기계가 된 남자. 인간불신. 결코 은수 형을 만나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싸울 때만 모습을 드러내는 놈이라니까 나도 다음 싸움에는 한 몫 끼어야겠어.”
“……제정신이 아니다. 은수 형. 조직의 부두목. 싸움에 끼어드는 순간 곧바로 노려진다. 그러다 죽기라도 하면 큰일. 은수 형의 죽음은 곧, 우리 조직의 패배다.”
“씨이벌. 어딜 가나 다들 그 소리군. 난 성철이 형이랑 달리 아직 한창 팔팔한 현역인데, 벌써부터 뒷방 늙은이 취급이나 하고 말이야.”
그 말대로, 이번 전쟁에 있어서 오은수는 아직 직접 주먹을 휘두른 일이 없었다. 그가 가진 부두목이라는 위치 때문이었다. 이는 조직의 보스인 박성철 또한 마찬가지.
“쓰읍. 만나서 술잔이나 기울이면서 덕담이라도 해주려고 했는데. 못 만난다면야 어쩔 수 없지. 아, 생각해보니 한국어를 못하면 내가 덕담을 해준들 소용이 없겠군. 아니, 쏨밧 네가 통역해줄 수 있으려나?”
“……maybe. 일단 그 친구에게 은수 형의 의향 전해두겠다. 그렇지만 너무 많은 기대는 안 하는 게 좋다.”
“그래 그래. 부디 말 좀 자알 해달라고.”
사무실을 나선 쏨밧은 곧바로 거리로 향했다. 굽이굽이진 골목길을 돌고 또 돌아 인적이 드문 폐허 지대에 다다른 그가 한 폐건물 옥상 위로 올라갔다.
“……도베르만.”
그의 부름에 먼저 와있던 선객이 고개를 돌렸다. 가면에 손을 가져다댔던 그가 잠시 멈칫한다.
“경계하지 않아도 된다. 미행은 없다. 확실하게 확인 했다.”
“…….”
그 말에 류태현이 가면을 벗었다. 눈가에 드리운 진한 다크서클은 그가 얼마나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낮에는 학업, 밤에는 슬럼에서의 전투로 쉴 틈 없이 바빴으니까. 게다가 누군가에게 정체를 들키지 않도록 24시간 내내 미행을 경계하고 있었으니.
“주말 동안 수고했다. 빼앗겼던 구역도 다시 빼앗았고. 용문 놈들은 하천 너머까지 후퇴. 최소 일주일은 서로 다음 싸움을 위해 정비할 거다. 태현도 그동안 푹 쉬면 된다.”
“…….”
“다친 곳은 없나?”
“……다 생채기야. 침 바르면 하루 만에 나아.”
일견 허세 같이 들리는 말이었지만 과장 하나 없는 사실이었다. 16살도 이제 반이 지나, 류태현의 신체는 거의 성인이나 다름없이 여물어 있었다. 그에 따라 근력은 물론이고 재생력 또한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져 있었다.
“다행이다. 자, 이건 이번 주 분의 보수다.”
쏨밧이 자그마한 햄버거 봉투 하나를 휙 던졌다. 안에는 만원짜리 묶음 다발이 다섯 개나 들어있었다.
“……몇 번이나 말했지만 굳이 이렇게 챙겨줄 필요 없어. 돈 때문에 하는 일 아니니까.”
“노동에는 합당한 대가가 따르는 법이다. 태현, 너는 성철파를 몇 번이나 위기에서 구해줬다. 너의 활약상을 생각하면 그 정도도 부족할 정도다. 조직의 자금 사정만 괜찮았어도 세 배는 냈을 거다.”
“그런 돈이 있어봐야 어차피 쓸 곳도 없어.”
“고아원에 기부라도 하지 그러나.”
“농담하는 거지? 아직 고등학교도 못 간 내가 갑자기 몇백씩 기부하는 걸 그러려니 할 것 같아?”
말은 그렇게 했지만 생각해보면 썩 나쁜 아이디어도 아니었다. 아무리 그래도 수백만 원을 대뜸 기부할 순 없겠지만, 알바라도 했다는 명목으로 피자 정도는 아이들에게 돌릴 수 있지 않겠는가.
우우우우웅.
그때 쏨밧의 주머니에 있던 휴대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나다.”
전화를 받은 쏨밧이 가만히 상대방의 이야기를 듣는다. 그러더니 그의 얼굴이 점차 심각하게 일그러진다.
이윽고 ‘금방 가겠다’고 대답하곤 전화를 끊은 쏨밧. 류태현이 대수롭지 않게 묻는다.
“왜 그래? 또 용문 놈들이 어디 쳤대?”
“……태현. 아래층에서 옷을 갈아입고 기다리고 있어라. 그리고 나나 은수 형한테서 연락이 오면 그때 고아원으로 와라.”
“갑자기 고아원은 왜”
“고아원이 습격당했다.”
그 말에 류태현의 표정이 창백하게 굳었다.
“나와 함께 오면 쓸데없는 의심을 받을 수 있다. 태현. 이곳에서 기다려라. 그리고 나나 은수 형의 연락을 받은 뒤 움직여라. 난 먼저 가겠다.”
류태현이 무어라 물을 새도 없이, 쏨밧이 다급한 표정으로 계단을 내려갔다. 반면 류태현은 여전히 굳은 채 옥상 한가운데 덩그러니 서있을 뿐.
‘고아원이 습격당했다고?’
그런 그의 머릿속에선 오만가지 의문이 휘몰아치고 있었으나, 이를 간추리면 단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었다.
‘도대체, 왜?’
그로부터 20분 뒤. 쏨밧에게서 온 연락에 류태현은 곧바로 고아원으로 향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