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7화 〉 246. 슬럼 잠입(4)
* * *
“나 저 사람 싫어.”
안수호와 함께 지예원이 준비해둔 객실에 들어선 순간, 조유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렇게 말했다. 그 반응에 안수호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앓는 소리를 냈다.
“아까부터 계속 우리한테 무례하게 군 거 봤지? 저 인간, 우리가 자기 도움을 받아야 하니까 아무런 반항도 못 할 거라 생각하고 기고만장해서는! 두고 보라지. 내 눈에 조금이라도 범법 행위를 저지르는 게 보이는 순간 바로 잡아다가 경찰에 넘겨버려서”
“선배, 선배. 잠시만요. 잠시만 진정하시고. 좀 진정하시고 제 이야기 좀 들어주세요. 네?”
안수호의 만류에 조유리가 째릿! 하고 그를 노려봤다. 날카로운 시선이 꼭 나이프로 그의 뺨을 쿡쿡 찔러대는 것 같았다.
“……선배. 저 친구가 선배한테 무례하게 군 건 맞아요. 근데 쟤가 또 그렇게 나쁜 애는 아니거든요? 그러니 선배가 넓은 마음으로 조금만 아량을 베풀어주신다면”
“슬럼 범죄자한테 나쁜 애가 아니라고? 안수호, 너 지금 네가 하는 말이 말이 된다고 생각해? 그거 완전 모순 아니야?”
“그건 그렇지만요…….”
지예원과의 설전 때문인가, 안수호에게마저 날 선 태도를 보이는 조유리는 평소와는 전혀 딴판인 모습이었다.
“뭐어, 선배 말대로 원예나 저 친구가 나쁜 사람이긴 해요. 그렇지만 선배, 지금은 그 나쁜 사람의 도움을 구해야 하는 상황이라고요. 그 뭐시냐, 거악을 잡기 위해 소악과 손을 잡는, 물론 류태현을 찾는 게 거악에 맞선다거나 하는 건 아니지만. 대를 위한 소의 희생이라든가. 뭐 어쨌든, 무슨 말씀이신지 아시겠죠?”
“그래서?”
“아무튼, 그런 식으로 도움을 받았으면 저희도 나름 도의적인 책임을 져야한다고 해야하나. 은인의 등에 칼을 꼽느냐는 말도 있잖아요. 무, 물론 원예나가 선배 은인이란 건 아니고요! 그렇지만 선의로 도와준 사람의 뒤통수를 치다니, 그거야말로 비겁한 범죄자의 방식이잖아요. 쟤랑 선배 사이의 첫 만남이 좀, 좀 많이 그렇긴 했지만. 아까도 말했듯 깔끔한 비즈니스 관계로. 이번 일만 끝나면 서로 더 이상 간섭하지 않고 훌훌 털고 갈 길 가는 게 가장 좋은 게 아닐까 생각이”
“……이제 보니 너, 은근 혀가 길다?”
안수호의 필사적인 설득에도 조유리는 눈을 흘기며 부정적인 태도를 유지했다. 그 모습에 안수호는 목구멍을 넘어서려던 한숨을 간신히 도로 삼켰다.
“……뭐, 네 말이 무슨 뜻인진 알겠어. 그래, 그 예나인지 뭔지 하던 범죄자가 네 친구라며. 기껏 친구가 자길 도와줬는데 보답으로 경찰에 넘긴다거나 하면 마음이 편치 않겠지. 이해해. 이해해볼게. 이해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감사합니다.”
“참나, 경비대원이라는 사람이 선배 앞에서 범죄자 옹호나 해대고. 처음에는 그저 상명하복 충실하고 빠릿빠릿한 후배구나 싶었는데 이런 면이 있는 줄은 몰랐어.”
“……저야말로 선배한테 이렇게 강단 있는 면이 있으신 줄 몰랐습니다.”
다만 너스레를 빙자한 볼멘소리 한 번 정도는 뱉어줘야 속이 시원할 것 같아, 안수호가 그렇게 불평하듯 툭 던졌다. 그러자 조유리가 피식 웃었다.
“아하. 네 말은 즉, 나란 여자는 원래 유약하고, 소심한데다가, 누가 말이라도 걸면 움찔움찔 놀라기나 하는 겁쟁이 쫄보다 그거야?”
“그렇게까지 말한 건 아닌데요…?”
자신의 불평 한 마디가 그렇게까지 와전된다니. 안수호가 당황해서 손사래를 쳤다. 그러나 조유리는 별로 불쾌한 기색도 없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 제대로 봤으니까. 나 원래 그런 여자거든.”
“선배, 제 말은 그게 아니라”
“오해하는 것 같은데 널 나무라는 게 아니야. 난 실제로 유약하고, 소심하고, 또 겁쟁이지. 물론 지금은 이렇게 전혀 딴판인 성격이지만.”
“잠깐, 선배 설마…….”
그 순간 안수호의 뇌리에 한줄기 번뜩임이 스쳐 지나갔다.
“지금 능력 사용하고 계세요?”
“어.”
“언제부터요…?”
“그 소매치기 여자애랑 헤어지고 나서부터 계속. 그 여자애가 그랬잖아. 슬럼에서 얕보이면 큰 코 다친다고. 그래서 이런 거야. 얕보이지 않으려고.”
평소와는 그야말로 딴판인 지금 조유리의 모습은, 말하자면 그녀의 대사조절 능력으로 수십 가지 호르몬과 체내 물질 대사를 조절해 인위적으로 꾸며낸 결과란 소리였다.
이른바 ‘조유리 대외활동.ver'이라고 할까.
“생각해보니 호르몬 영향 때문에 좀 지나치게 까칠하게 반응한 면도 없잖아 있겠네. 범죄자가 나한테 무례하게 군 것도, 그런 범죄자와 군말없이 손을 잡고 협력해야 하는 것도 마음에 안 들지만…….”
조유리가 한숨을 푹 내쉬며 눈을 감았다. 그녀의 체내에서 이루어지던 다양하고 인위적인 화학 기전들. 그것들의 방향성이 180도 뒤집어져 차츰 그녀의 몸이 평소의 상태로 돌아가기 시작한다.
“……그래. 네 말대로 기껏 도와준 사람 뒤통수에 칼 꼽는 건 예의가 아니겠지. 내가 좀 흥분했나봐. 미안.”
그렇게 말하는 조유리의 표정은 다소 어두웠다. 초능력의 남용으로 인해 자기 자신을 잠시 잃었던 것을 자각했기 때문이다.
조유리의 능력은 대사조절. 오만가지 체내 물질들을 조절할 수 있는 그녀는 단순 몸의 컨디션은 물론이고 마음만 먹으면 스스로의 성격이나 심리 상태까지 자유자재로 조절할 수 있었다. 불같은 성격의 다혈질로도, 감정을 전혀 드러내지 않는 킬러로도 순식간에 변할 수 있는 능력. 그것이 그녀의 초능력이었으니.
허나 그렇기에 조유리는 자신의 능력을 경계했다. 마약 중독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초능력이 가져다주는 쾌락과 편리함, 그리고 안정감에 중독되어 스스로를 잃지 않도록.
그렇기에 평소에는 가급적 능력의 사용을 자제하고, 또한 주의 깊게 초능력을 다뤄왔건만.
‘……나도 모르게 너무 기합이 들어갔어. 슬럼에 와서 그런가.’
밀려오는 것은 후회와 미안함.
조유리는 자신 때문에 노심초사했을 안수호에게 다시 한 번 사과했다. 그제야 안수호는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그래서, 네 친구 말에 따르면 접선까지는 하루이틀은 걸릴 거라던데. 그동안은 어떻게 할 거야?”
“일단 내일 아침에 낮에 마주쳤던 소매치기를 다시 찾아가볼 생각입니다.”
“걔가 어디 있는지는 어떻게 알……. 아, 지폐에 무슨 수작을 부려놨다 했지?”
위치추적기라도 어디서 구해 달아둔 것일까. 지폐 한 장에 숨길 수 있는 위치추적기라니 도무지 그런 게 있을 거란 생각이 들진 않았지만, 조유리는 안수호의 말이 마냥 허세는 아닐 거라 믿었다.
“예. 류태현이 그 소매치기 여자애랑 함께 있다……같은 상황은 아니더라도. 어쩌면 무언가 단서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랬으면 좋겠네. 기왕이면 저 여자한테 도움 받지 않고 류태현을 찾아내는 편이 좋으니까.”
째릿, 하고 날카로워지는 눈빛에 안수호가 멋쩍게 하하 웃었다. 호르몬 영향과는 별개로, 조유리는 여전히 원예나라는 범죄자가 마음에 들지 않았기에.
“좋아. 그럼 오늘은 푹 쉬고 수색은 내일 아침부터 계속하는 걸로 하자.”
“그렇게 하죠. 전 이만 가볼 테니 선배도 이제 편히 쉬세요.”
“그래. 오늘 하루 수고했어.”
조유리에게 인사한 안수호는 그대로 방을 나섰다. 그러곤 지예원의 방을 사이에 두고 반대편에 있는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후우우우우우우.”
방에 들어서고 문을 닫자, 그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새어나온다.
‘예원이 걔는 도대체 왜 그렇게 조유리한테 날카롭게 군 건지 원…….’
하마터면 초장부터 파토날 뻔한 협력 관계에 안수호가 진땀을 흘렸다. 비유가 아니라 정말 온몸이 땀범벅이었다. 물론 좀 전의 상황 때문만은 아니고, 그저 바깥 날씨가 무척 더웠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삐익.
안수호가 에어컨을 켜곤 그 밑에서 바람을 만끽했다. 땀에 절은 몸에 스며드는 차가운 바람에 그가 기분 좋은 한숨을 내쉰다.
“후아, 이제야 좀 살 것 같네.”
그렇게 땀을 식힌 안수호가 벽으로 다가가더니 주먹으로 벽을 쳤다.
통. 토동. 통. 통.
특정한 리듬의 노크 소리. 그것은 본래 자취방에서 두 사람이 서로를 호출하는 일종의 암호였다. 아니나 다를까, 그 소리를 듣고 얼마 지나지 않아 현관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벌컥.
그리고 문을 열자 나타난 것은 여전히 변장을 풀지 않은 지예원과 강하늘.
“무슨 일이야?”
“들어와서 얘기 좀 해.”
안수호는 곧바로 두 사람을 방 안으로 들였다. 강하늘이 먼저 그의 뒤를 따르고, 늦게 들어온 지예원이 방문을 확실하게 닫고 잠근다.
그러자.
“오빠아!!”
“으왓?!
와락!
강하늘이 기습적으로 안수호에게 달려들듯 안겼다. 비틀, 한 발작 물러선 그가 자신에게 고양이처럼 앵기는 요염한 미인을 보며 당황에 빠졌다.
“뭐야, 갑자기 왜 그래?”
“오랜만에 오빠 보니까 좋아서요!”
“오랜만은 무슨. 아직 헤어진 지 하루도 안 지났는데…….”
“히히히. 그건 그렇지만. 사실 아까 오빠랑 만났을 때부터 인사하고 싶었는걸요.”
그렇게 말하는 강하늘의 모습에 더 이상 조금 전 방 안에서 풍기던 신비로운 분위기는 온데간데 없었다. 외형만은 여전했으나, 속은 영락없이 강하늘 그 자체였다.
파앙!
그때 그녀의 몸에서 빛무리가 터지더니 강하늘이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안수호의 몸에 가해지던 무게감, 그리고 복부 근처에 느껴지던 묵직한 감촉이 조금 덜해진다.
“이히히. 처음에는 거기 있는 게 저라는 거 전혀 눈치도 못 채셨죠? 저 연기 엄청 잘하지 않았어요?”
“그래, 그래. 너 연기 엄청 잘하더라. 완전 여우주연상감이던데?”
그 칭찬에 강하늘이 히히 미소 지으며 안수호에게 정수리를 내밀었다. 그러자 안수호가 피식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고양이 다루듯 살살 쓰다듬었다.
“연기는 무슨. 하늘이 네가 한 건 그냥 있어 보이게 분위기 잡고 앉아있던 게 전부잖아. 연기는 다 내가 했지.”
그 광경에 지예원이 못마땅하다는 듯 피식 웃으며 끼어들었다. 안수호를 침대에 앉힌 강하늘이 지예원에게 불평을 뱉는다.
“언니가 그러라고 시킨 거잖아요. 최대한 의미심장하고 뭐 있어 보이게 분위기 잡아서 무언으로 압박하라고. 전 언니가 시킨 걸 충실히, 그리고 아주 자아아알 따른 것뿐이거든요?”
“그래. 초보자치곤 잘 했지. 아무렴, 나 정도는 아니지만.”
그렇게 말한 지예원이 가발과 마스크를 벗곤 안수호 옆에 앉았다. 그러곤 그에게 기대듯 머리를 살짝 그에게 기울였다.
“…….”
“……?”
어색한 침묵 속. 안수호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지예원을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에선 딱 그녀의 정수리가 보이는 위치였다.
“예원아?”
“……크흠.”
안수호가 자신의 의중을 알아차리지 못하자, 지예원이 뺨을 살짝 붉히며 머리를 더욱 기댔다. 강하늘에 비하면 소극적인 접촉이었으나 그 행동이 의미하는 바는 명백했다.
내가 강하늘보다 더 잘했어.
그러니 나도 쓰다듬어줘.
“……????”
그러나 그러한 의중은 지예원의 평소 캐릭터와는 완전 딴판인 것이었다. 안수호는 쉽사리 그녀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하고, 둘 사이에 어색한 침묵만이 흘렀다. 반면 같은 여자인 강하늘은 그녀의 행동에 담긴 진의를 곧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오빠. 언니가 자기도 쓰다듬어달라는데요?”
“뭐? 진짜?”
“무, 무슨 소리야 그게! 아니거든! 내가 무슨 애도 아니고! 하! 진짜 어이가 없어서!”
강하늘의 너스레에 지예원이 발끈 하며 침대에서 일어섰다. 그러나 그 표정의 이면엔 미처 숨기지 못한 아쉬움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안수호도 충분히 읽을 수 있을 정도로.
“……쓰다듬어줘?”
“됐거든!? 그보다 왜 부른 건지나 이야기 해!”
“맞다. 내가 불렀던 거지 참.”
일련의 소동으로 잊고 있던 본래의 목적을 안수호가 입에 담았다.
“저 예원아. 도대체 조유리를 왜 그렇게까지 날 선 태도로 대한 거야?”
“이런 관계에선 기선을 제압하고 상황을 주도하는 게 중요하니까. 얕보여서 좋을 건 없다 생각해서 그랬어. 그게 다야.”
“조유리는 내 직장 동료인데 얕보이고 말고가 어디 있다고…….”
“그 사람 입장에서 우리는 슬럼 범죄자잖아. 얕보였다가 나중에 배신 때려서 수갑이라도 채워지면 어떡하라고?”
확실히, 조유리는 지예원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아 일이 다 끝난 후 그녀를 체포할 생각을 하긴 했었다. 그렇기에 안수호로서도 지예원의 말이 마냥 이해가 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예원이가 틱틱 대지만 않았어도 조유리는 그냥 넘어갔을 것 같은데……. 그럼 그냥 스스로 위기를 자처한 것 아닌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으나 지예원이 초장부터 굽히고 들어간다 한들 조유리가 그녀를 마음에 들어했으리란 보장도 없었다. 결국에는 다 만약의 이야기이니, 이제 와서 따져봤자 시시비비를 가릴 수는 없는 것이었다.
다만, 그건 어디까지나 지예원의 속내를 모르는 안수호 나름의 판단이었고.
‘……헤퍼보이는 여자가 네 옆에 착 달라붙어있는 게 보기 싫어서 그랬다고는……죽어도 말 못하지.’
기실 지예원의 날 선 태도의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러나 지예원은 결코 그 이유를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안수호는 물론이고 강하늘에게조차.
“안수호. 근데 그 사람……. 정말 그냥 직장 선배 맞지?”
“직장 선배가 아니면 또 뭔데?”
“……됐어.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잊어.”
조금 전부터 묘하게 시원하지 않은 지예원의 태도에 안수호가 답답한 표정을 지었다.
“맞다 언니. 저 언니한테 궁금한 거 있어요.”
그때 강하늘이 안수호를 사이에 두고 지예원에게 고개를 내밀었다.
“뭔데?”
“좀 전에 말한 정보상들이요. 오르테가랑 프로페서. 둘 다 실력이 엄청 뛰어난 사람들이라면서요? 그럼 언니가 찾고 있는 언니 친구분……. 그 김민아라는 분의 수색도 그 사람들한테 맡길 수 있지 않아요? 특히 프로페서란 사람은 사람찾기 전문이라면서요.”
“어? 듣고 보니 그러네?”
그 부분은 안수호도 미처 생각지 못하고 있던 부분이었다. 확실히, 지예원에게 그만한 정보상들에게 연락을 넣을 연줄이 있다면 김민아 수색에도 충분히 이용할 수 있을 터인데.
“민아 위치라면 이미 알고 있어. 그 애는 여명단 본부에 잡혀 있으니까. 이제 와서 굳이 수색 의뢰를 넣을 필요는 없지.”
“그렇지만 그건 정황이라며. 100% 확실한 건 아니잖아.”
“100%는 아니지만 95% 정도는 될걸. 그리고 설령 아니더라도 그 둘한테 민아의 수색 의뢰를 밑기는 건 불가능해. 두 사람은 어디까지나 슬럼 내부를 담당하는 정보상들이니까.”
오르테가든 프로페서든. 두 사람의 정보력은 슬럼 안에서라면 구하지 못할 정보가 없다 자부할 정도로 뛰어났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슬럼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의 이야기.
슬럼 안과 바깥은 별천지라 부를 정도로 다른 세상이었다. 제아무리 오르테가, 혹은 프로페서라도 슬럼 바깥에서까지 완벽에 가까운 정보력을 보여줄 순 없는 노릇이었다.
“슬럼 안은 슬럼 안의 사람에게. 바깥은 바깥의 사람에게 맡기는 게 좋다는 거지. 반대로 민채령처럼 바깥에선 날고 기는 사람도 슬럼 안의 사정에 대해선 상대적으로 미흡한 경우가 많으니까”
똑똑.
그때 현관에서 돌연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세 사람의 표정이 단숨에 흠칫 굳는다.
“누구야? 사장?”
“그럴 리가. 그 사람 어지간해선 객실에 안 올라오는데.”
“제 생각에는 아마…….”
수호야? 안에 있어?
현관 너머에 있는 건 조유리였다. 그녀의 갑작스런 방문에 세 사람이 발 빠르게 행동했다.
강하늘은 다시금 아바타 능력으로 변신했고 지예원도 벗어둔 마스크와 가발을 썼다. 그 사이 안수호는 현관으로 다가가 조유리의 의중을 물었다.
“예, 저 안에 있습니다. 무슨 일이세요?”
조금 전에 미처 하지 못 한 이야기가 있어서. 괜찮으면 안에서 이야기 좀 해도 될까?
그 말에 안수호가 고개를 돌렸다. 지예원과 강하늘. 두 여인과 함께 있는 지금 상황을 조유리에게 무어라 설명해야 할까.
‘그냥 이야기 중이었다라고 하면 되겠지만…. 안 그래도 조유리는 지금 예원이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잖아. 그런 와중에 내가 자기 몰래 저 둘이랑 이야기하고 있었다는 걸 알면…….’
적어도 별로 유쾌한 상황이 되진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판단은 지예원과 강하늘도 동일했다.
두 사람이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곧바로 창문으로 향했다. 창문으로 탈출, 옆방으로 넘어가기 위해서.
그러나.
“엣?”
안수호가 머물고 있는 703호의 창문은 작아도 너무 작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창문 자체는 채광을 고려해 충분히 컸으나 열리는 부분은 작게 난 환기창뿐. 거기로 나가는 건 불가능해보였다.
수호야? 왜 말이 없어? 혹시 안에 들여보내기 곤란한 상황이야?
“예, 예에! 제가 그, 씻고 있던 중이라서요! 좀 걸릴 것 같은데”
그래? 그럼 기다리고 있을게. 천천히 씻어.
거기에 더해 가까스로 찾아낸 궁여지책조차 무용지물로 돌아갔다. 이에 안수호가 미간을 찌푸리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쩔 수 없다. 방법이 더 이상 없었다. 그냥 문을 열어주고, 조유리에게 있는 그대로의 상황을 보여주자. 자기 몰래 밀담을 한 것을 수상하게, 혹은 서운하게 여길 수야 있겠지만, 지금은 그 방법 밖에 없다고.
“하늘아. 침대 옆에 숨어 있어.”
그렇게 생각한 순간 지예원이 그렇게 말하며 성큼성큼 걸어 나왔다. 무슨 짓을 하려는 거냐고 안수호가 미처 묻기도 전에 그녀가 문을 벌컥 열었다.
“수호야? 씻고 있는 중이라고”
말을 잇던 조유리의 표정이 흠칫 굳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안수호의 방에서 돌연 원예나, 그 마음에 들지 않는 여자가 나왔으니.
“당신이 왜….”
“……참나, 눈치가 없는 건지 아니면 정말 모르는 건지. 젊은 남녀 둘이 모텔방에 있을 이유가 뭐겠어요?”
“뭐?”
“에?”
지예원의 은유에 안수호의 표정에 경악이 번졌다. 그리고 그보다 한 박자, 아니 두 박자 정도 늦게 조유리 또한 차츰 눈이 크게 떠지기 시작한다.
“수, 수호야. 너, 너 설마, 설마 지금”
조유리의 당황어린 시선이 안수호에게 향했다.
조유리만큼은 아니나 지예원의 갑작스런 행동에 당황한 그의 얼굴. 그 아래로는 땀 때문에 착 달라붙어 몸의 윤곽을 부분부분 드러내고 있는 티셔츠가 이어졌다. 상의가 땀에 젖은 거야 한참 전부터 그랬다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조유리는 뒤늦게 그러한 요소를 알아차리기 시작했다.
“이, 임무 수행 중에 도대체 무슨, 무슨 짓을 하, 하는, 하느으…….”
발갛게 달아오르다 못해 귀까지 시뻘개진 얼굴로 조유리는 말조차 제대로 잇지 못했다.
슬럼의 지인이라고, 자기 친구라고 하더니 그 친구가 섹스 프렌드였던가.
머릿속에 떠오른 낯간지러운 생각은 그녀의 머리에 더욱 열을 더했다.
낯간지러운 상황에서 오는 부끄러움. 그리고 새삼스레 안수호를 ‘남성’이라 인식하며 도지기 시작한 남성공포증.
그 둘이 한데 어우러져 조유리의 심장을 미친 듯이 뛰게 만들었다.
당장이라도 이곳을 떠나고 싶어질 정도로.
“그, 근무태만이라고! 티, 팀장님한테 보고 할 거야!”
“저, 선배?”
그 말만을 남기고 조유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기 방으로 도망쳤다. 열린 문조차 닫지 않고서.
쾅!
세게 닫힌 701호의 문을 보며 안수호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그에게 슬쩍 다가온 지예원이 손가락으로 브이를 그리며 속삭였다.
“문제 해결?”
“문제 해결은 뭔…! 그냥 이야기 중이었다 하면 될 걸 왜 쓸데없는 오해를 만든 건데?!”
“자기 후배가 자기 몰래 범죄자랑 밀담을 나누고 있던 것보다야 그냥 성욕을 못 이겨 떡이나 치고 있었다는 편이 덜 수상하게 여겨지지 않겠어?”
“너 진짜…….”
진심으로 하는 소리인가 싶은 해명에 안수호가 골머리를 앓았으나, 기실 지예원의 말은 틀린 구석이 하나도 없었다.
졸지에 직장 선배를 옆에 두고 섹스를 하려던 미친놈이 되어버린 안수호 자신의 기분만 고려하지 않는다면.
우우웅.
그때 지예원의 주머니에 넣어둔 핸드폰이 지이잉 울리기 시작했다. 화면을 확인한 그녀가 놀란 눈으로 피식 웃었다.
“세상에, 이쪽 문제도 해결됐네?”
“그건 또 무슨 말이야?”
“프로페서한테서 메일이 왔어. 최소 하루 이틀은 걸릴 줄 알았는데 이게 웬일이래? 거의 우리가 연락하길 기다리고 있었던 수준인데?”
지예원이 보여준 화면에는 일회용 메일 수신 사이트가 띄워져 있었다. 최상단에 딱 하나 표시되어 있는 메일이 바로 프로페서의 메일이리라.
“아무튼 잘 됐네. 프로페서와의 접선이 빠르면 빠를수록 류태현을 찾는 것도 빨라질 테니까. 어째 운이 잘 따라주네? 별일이다. 그지?”
“…….”
안수호는 그렇게 말하는 지예원을 내려다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녀의 말마따나 운이 따라주긴 했으나, 그렇다 해서 자신과 조유리 사이에 생겨난 오해가 없어지는 건 아니었다.
“저, 언니 오빠들…?”
그때 침대 옆에 몸을 숨기고 있던 강하늘이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모습은 여전히 아바타로 변신한 상태였지만 말투나 태도는 평소의 강하늘이었다. 이불을 손으로 쥔 채 꼼지락 거리며, 그녀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작게 물었다.
“그래서 그…. 혹시 진짜로 하실 거예요…?”
그 순수한 물음에 안수호의 입에서 진한 한숨이 새어나왔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