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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 경비원으로 빙의당했다-241화 (242/266)

〈 241화 〉 240. 약속(1)

* * *

사람이 살아감에 있어 처음으로 가까운 이의 죽음을 겪는 나이는 천차만별이다. 그러한 ‘첫 죽음’의 가장 대표적인 사례인 조부모상만 해도, 누군가는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조부모가 사망했는가 하면 성인이 된 뒤로도 멀쩡히 살아있을 수도 있으니까.

허나 그 시기는 천차만별일지언정, 가까운 이의 죽음이 그 사람으로 하여금 삶과 죽음에 대해 생각해볼 계기를 마련해준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그리고 류태현에게 있어서 그 계기는 바로 눈앞의 무덤이었다.

지금으로부터 딱 4년 전, 그가 16살이던 해의 여름.

자신의 과오로 인해 소중한 은인을 떠나보낸 류태현은 그날 이후 삶과 죽음에 처음으로 체감해보았고, 끝내 보다 성숙해질 수 있었다. 지금의 류태현은 그날 이후 만들어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리라.

그렇기에 류태현은 슬럼을 떠나기로 결심한 그날의 사건 이후에도, 1년에 몇 번 이따금 이렇게 이 무덤 앞에 찾아와 그날의 기억을 되새기곤 했다.

자신의 실수를 반성하기 위해서.

그리고 다시는 반복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다지기 위해서.

“어?”

허나 그가 부모에게까지 숨기며 가끔씩 슬럼을 드나드는 이유가 그것만은 아니었으니.

“류태현?”

지금 등 뒤에서 들린 이 목소리의 주인이야말로, 류태현이 이따금 슬럼에 들르는 또 하나의 이유였다.

“류태현 맞지 너?! 야! 아무리 입시 때문에 바빠도 그렇지 무슨 애가 1년 동안이나 연락이 없어! 아니지! 입시는 겨울에 진즉에 끝났을 거 아냐! 근데 반년 동안 코빼기도 안 비추냐? 어!?”

어조는 까탈스러웠지만 그 이면엔 류태현을 그리워하고 있던 마음이 절절히 묻어나는 말들. 무덤 쪽을 보고 있던 류태현이 피식 웃으며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녀와 마찬가지로, 그리운 마음을 한껏 담아낸 표정으로.

“오랜만이야 은하야.”

“은근슬쩍 어물쩍 넘어가려는 건 여전하네. 그래. 오랜만이야 너도.”

1년만의 해후에 류태현의 얼굴에 포근한 미소가 감돌았다.

“성묘하러 왔어?”

“성묘는 무슨. 그냥 오랜만에 얼굴들 좀 보러 온 거지. 겸사겸사 아저씨한테 인사도 하고.”

“그게 성묘지 성묘가 별 거야? 그러고 보니 슬슬 아저씨 기일이네.”

“그러니까.”

대화가 멎은 두 사람이 말없이 나무 아래 무덤을 내려다보았다. 두 사람 다 말은 하지 않지만, 너나 할 것 없이 그 무덤의 주인에 대해 회상하고 있었다.

“……늘 생각하는 거지만 조직 부두목 무덤치고는 참 초라해.”

“아저씨가 원했던 거잖아. 쓸데없이 돈 들이지 말고 화장해서 여기 나무에다 뿌리라고.”

“그래, 그랬었지…….”

그는 예전부터 허례허식 같은 걸 혐오하는 남자였다. 자기가 죽어서도 번지르르한 납골당에 매년 우르르 몰려와 절하는 건 사양이라며 매일같이 말했었고, 결국 그 소원대로 초라한 비석 하나만 남기고 가버렸다. 아마 제 딴에는 꽤 만족하고 있을 테지.

“어떻게. 좀 더 있을래? 아님 들어와서 오랜만에 애들 만날 거야?”

“애들 얼굴도 봐야지. 어차피 오래 있지도 못해. 저녁 전에는 들어가야 하거든.”

“그린하우스 입학했더니 아주 바빠지셨어? 캠퍼스 라이프가 그렇게 재밌어?”

“아무렴. 파란만장하지.”

“어련하실까. 그럼 이제 안으로 들어가자.”

권은하가 류태현에게 손짓하며 앞섰다. 류태현 또한 곧바로 그 뒤를 따랐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의 눈에 기묘한 빛이 서린다.

­절뚝. 절뚝.

류태현의 시선이 그녀의 왼다리로 향했다. 묘하게 다리를 저는 모습이 어딘가 다치기라도 한 것 같았다.

“은하야. 너 혹시 다리 다쳤어?”

“…….”

그 질문에 돌아온 건 대답 대신 숨을 삼키는 소리였다. 류태현을 돌아보지 않은 채 망설이던 그녀가 고개도 안 돌리고 짧게 답했다.

“……응. 어쩌다가 살짝. 걱정하지 않아도 돼.”

“살짝이 아니라 꽤 심하게 다친 것 같은데. 너 지금 엄청 다리 절고 있어.”

“통증이 좀 남아있어서 그래. 별 거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

“그렇다면야 뭐…….”

어디서 접지르기라도 했나보다 하며 류태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허나 그 시선은 여전히 그녀의 다리에 향해 있었다.

­절뚝. 절뚝.

걸을 때마다 묘하게 축이 어긋나는 듯한 걸음걸이.

그렇게 얼마나 응시하고 있었을까, 곧 류태현의 표정이 하얗게 질렸다.

“은하야.”

“오늘 진짜 덥다. 안에 들어가서 에어컨이라도 틀어야겠­”

“권은하.”

류태현의 거듭된 부름에 권은하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너, 그 다리 어떻게 된 거야.”

“말했잖아. 삐었다고.”

“거짓말치지 마.”

류태현이 성큼성큼 그녀에게 다가갔다. 권은하는 그런 그를 막지 않았다.

이내 류태현이 바닥에 쭈구려앉아 그녀의 바지자락을 잡았다. 속으로는 계속 아닐 거라고 부정하면서도, 언뜻 본 진실을 확인하기 위해서.

­스윽.

“이럴 수가…….”

그리고 류태현은 자신이 헛것을 본 게 아님을 깨달았다.

류태현의 시선은 그녀의 왼다리에 고정되어 있었다. 정확히는 그녀의 왼다리가 ‘있어야 할’ 곳에.

권은하의 왼다리는 무릎 아래가 텅 비어있었다. 있는 거라곤 조악한 프레임의 철제 의족뿐이었다. 몸의 무게 중심이 변할 때마다 발목 부분에서 삐걱이는 소리가 났다.

“너 다리가…….”

“아아, 이거? 그냥 그런 일이 있었어.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

“괜찮기는 무슨!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그녀의 다리는 1년 전에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만 해도 멀쩡했다. 그렇다면 자신이 슬럼에 들르지 않은 요 1년 사이에 무슨 일이 생긴 것인가.

“그냥 그런 일이 있었다니까 그러네. 여긴 슬럼이잖아. 팔다리 한둘 없는 것 정도야 별로 특이한 일도 아닌데…….”

“특이한 일이고 자시고 당장 말해.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

권은하의 표정이 착잡하게 일그러진다. 차마 말할 수 없다는 감정이 그 표정에서 여실히 전해져온다.

“은하야.”

“…….”

“은하야. 제발 말해줘.”

“…………잠깐만 기다려봐. 지금, 할 말을 정리하고 있으니까.”

허나 거듭되는 류태현의 재촉이 권은하의 등을 떠밀었다. 한숨을 푹 내쉬며 생각에 잠긴 그녀가 이내 입을 열었다.

“최근 들어서, 대략 한 반년 전부터 슬럼이 다시 술렁이기 시작했거든. 삼대 조직이 전부 맞붙는 전쟁이 일어나려 하고 있어. 그래서 이래저래 뒤숭숭한 일이 많이 일어났는데…….”

“돌려 말하지 말고 그냥 확실하게 말해. 누가 그런 건데? 아니, 물어볼 것도 없지. 보나마나 용문 그 자식들일 거야. 강진윤 그 빌어먹을 새끼가 또­”

“용문은 아니야.”

“그럼 어딘데!”

“성철파.”

“………………뭐?”

순간 류태현은 자신이 잘못 들었나 제 귀를 의심했다. 그런 그의 의심을 잠재우려는 듯 권은하가 다시 한 번, 확실한 발음으로 말했다.

“성철파 조직원이 이랬어. 보호비를 안 내고 버티다 크게 당했거든.”

“지, 지금 그게 무슨 말이야…? 성철파? 은수 아저씨네 조직이 너한테 그랬다고…? 게다가 보호비라니, 뭐? 그건 또 무슨…….”

류태현은 권은하의 말을 제대로 알아들었다. 제대로 알아들었기에 이해할 수가 없었다.

성철파가? 왜?

도대체, 어째서?

“류태현. 네가 얼굴 안 비춘 1년 사이에 많은 게 바뀌었어. 나도, 아이들도, 고아원도, 그리고 성철파도.”

줄곧 등을 돌리고 있던 권은하가 그를 돌아보았다.

“이야기하자면 길어. 안에 들어가서 이야기하자.”

그 얼굴에는 진한 체념의 빛이 서려있었다.

***

오은수가 죽고 류태현이 슬럼을 떠났다.

햇수로 따지면 2015년에서 2016년까지. 류태현이 슬럼을 줄기차게 드나들던 그 1년 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그 결과를 요약하자면 저랬다.

그러나 오은수가 죽고, 류태현이 떠났다 해서 슬럼의 이야기가 끝나는 것은 아니다. 슬럼에는 여전히 많은 이들이 살았고, 그들은 류태현이 없어도 저마다의 이야기를 계속 써내려가고 있었다.

그리고 성철파의 변화 또한 그런 수많은 이야기 중 하나였다.

4년 전. 류태현의 활약 덕에 성철파는 용문과의 전쟁에서 거의 승리하다시피 한 채로 전쟁을 마무리했다.

그러나 4년이라는 시간은 긴 시간이다. 패배한 용문이 제 몸을 추스르고 다시금 송곳니를 드러내기엔 충분한 시간이었고, 4년 동안 복수의 칼날을 갈던 그들은 마침내 반년 전 다시 한 번 성철파에게 이빨을 들이밀었다.

어디 그뿐인가. 그간의 세력다툼에서 줄곧 한 발 물러난 위치를 고수하던 나머지 조직, ‘블랙스미스’마저 슬럼의 패권을 쥐기 위해 전쟁에 뛰어들었다. 그렇게 되자 잠정적인 슬럼의 제1 조직이었던 성철파도 상당한 손실과 피해를 입기 시작했다.

슬럼의 전쟁이라 해도 그 근간은 일반적인 전쟁과 다르지 않다.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서 필요한 건 첫째도 돈, 둘째도 돈, 셋째도 돈이었다.

때문에 각 조직들은 자기들 휘하에 있는 구역을 문자 그대로 쥐어짜기 시작했다. ‘보호비’ 명목의 세금을 더 걷거나, 아니면 대놓고 전쟁 비용이랍시고 돈을 뜯어내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다른 조직 구역을 대상으로 한 약탈도 빈번하게 일어났으며, 전쟁 도중 지배 구역이 바뀌기라도 하면 바뀐 구역의 주민들은 이중 삼중으로 세금을 내야만 했다.

그 외에도 주민들의 고충이야 이루 말할 수 없겠으나, 요약하자면 세 조직이 모두 대대적인 자금 확보에 나섰다는 것.

그리고 그 자금 확보의 대상에는 이곳 고아원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전쟁이 시작되고 나서 아저씨가 죽은 뒤로도 줄곧 오던 후원금마저 끊겼어. 거기까지는 그래도 괜찮았는데, 좀 지나니까 조직에서 찾아와서 보호비를 내라고 닦달하더라.”

1달에 1000만.

그것이 고아원을 내친 성철파에서 그들에게 내건 액수였다. 일찍이 보호비를 내지 않은 가게는 곧 조직의 ‘응징’을 당했고, 이는 고아원에도 예외 없이 적용됐다.

“죽었다 깨나도 그런 돈 없다고 하니 순순히 물러나나 싶더니. 며칠 지난 밤중에 웬 미친놈들이 고아원을 습격했어. 원장님이고 나고 애들이고 가릴 것 없이 훔씬 두드려 맞았지. 이 다리도 그때 저항하다가 다쳐서 잘라낸 거고.”

조직의 ‘응징’은 그들을 죽이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뇌리에 공포를, 두려움을, 그리고 무력감을 심어줘 조직에 복종하게 만들기 위함이었다.

설령 맹목적인 복종의 굴레를 씌우진 못하더라도, 최소한 자신들이 요구한 액수를 제 때 지불할 수 있도록.

당시 고아원에는 제대로 된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원장은 70을 바라보는 늙은 여성이었으며 권은하는 다리의 부상으로 몸져누운 상태.

결국 일을 할 수 있는 건 아이들밖에 없었다.

기껏해야 제일 맏이가 14살 15살이 고작인, 나름 나이를 먹었다 해도 아직은 어리기만 한 아이들.

“그런 어린 애들이, 더군다나 이런 슬럼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었겠어. 어디 가게 같은 데에 박봉으로나마 일자리를 구한 애들도 있긴 했지만, 대부분은 불법적인 일에 연루됐지. 매춘업소 청소부라든가, 수상한 물건 배달이라든가, 소매치기, 금품 갈취, 그 외 이것저것.”

사는 곳이 슬럼이라곤 해도, 고아원의 아이들은 권은하처럼 어릴 때부터 범죄에 노출되었던 건 아니었다. 그저 부모만 없다 뿐이지 슬럼 안에 있는 학교를 다녔으며, 너나 할 것 없이 바깥세상으로의 진출을 꿈꾸고 있었다.

그러나 그건 다 옛말이었다. 이제 그 아이들은 크든 작든 범죄에 연루된 범죄자였다. 비록 자신들의 집을 지키기 위해서라곤 하나, 그것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뭐, 그렇게 한달 벌어 한달 먹고 살면서 어찌어찌 6개월이 지났어. 참고로 이번달 보호비 상납은 다음주 수요일이야.”

“…….”

“이야기를 들은 감상이 어때? 참 별 좆같은 일이 다 있구나 싶지?”

하지만 어쩌겠어. 그게 슬럼인걸.

냉소적으로 툭 던진 그 말에는 이미 많은 걸 포기해버린 그녀의 마음이 진하게 묻어나왔다. 그 감정을 읽은 류태현이 곧바로 입을 열었다.

“은하야. 내가 도와줄 일이 있다면­”

“없으니까 신경 꺼.”

허나 권은하는 단칼에 그의 호의를 거절했다.

“이 일은 우리 일이야. 슬럼의 일이라고. 넌 슬럼에서의 일에 다시는 관여하지 않기로 약속했잖아. 고작 4년 지났다고 잊은 건 아니지?”

앞서 그녀가 류태현과 마주쳤을 때 힘든 내색 하나 없이 그를 반긴 것은, 오랜만에 그를 만나 반가운 것도 있었지만 류태현이 이번 일에 관여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 또한 있기 때문이었다.

‘슬럼의 일에 끼어들어봐야 결국 태현이만 피해를 볼 뿐이야. 과거의 실수를 반복할 필요는 없어.’

때문에 권은하는 그의 호의를 단칼에 거절했다. 매몰차게 들릴 순 있을지언정, 다 류태현을 위한 행동이었다.

그렇지만.

“……그 약속은 아저씨랑 한 약속이야.”

“그래. 아저씨가 죽기 전에 너한테 남긴 약속이라며. 네가 네 입으로 직접 말했어. 그런데 그걸 이제 와서 없던 일로 할 생각­”

“아저씨는 죽었어.”

냉랭하게 퍼지는 그 목소리에 권은하의 표정이 흠칫 굳었다.

“죽은 사람하고의 약속을 지킬 의리는 없어. 있다 하더라도, 죽은 사람보다는 산 사람이 중요하잖아. 예전에 한 약속이 어떻든, 난 이번 일에 관여할 거야. 네가 거절하더라도 내 마음대로.”

오은수 따위 이미 죽은 과거의 망령이라고.

말은 그런 논조로 하고 있었지만, 실상 그가 오은수와의 약속을 가벼이 여기는 건 결코 아니었다. 그만큼 고아원을 돕고 싶었기에 꺼낸, 핑계거리에 불과한 말이었다.

그리고 권은하도 그가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핑계로 대고 있다는 걸 금방 눈치 챘다. 그녀의 얼굴에 고마우면서도 씁쓸한, 복잡한 감정이 떠올랐다.

“조직에 가서 직접 따지겠어. 아무리 아저씨가 죽었다 해도 그렇지. 아저씨가 그렇게 아끼던 고아원을 상대로 삥이나 뜯어대는데 그걸 가만히 보고만 있으라고? 여차하면 힘을 써서라도 고아원에는 손도 못 대게 할 거야.”

“성철파를 상대로 싸움을 걸 생각이야? 아무리 태현이 너라도 그건 너무 무모해.”

“그거야 모르는 일이지. 그리고…….”

류태현이 떠날 채비를 하며 덧붙였다.

“네 말 들어보니 그 새끼들, 못 본 사이에 완전 나쁜 새끼들이 됐잖아. 그럼 가서 훔씬 두들겨 패줘야지. 아저씨랑 약속했거든. 내 주먹은 나쁜 새기들 두들겨 팰 때만 쓰기로.”

꽉 쥔 주먹을 들어올리며 류태현이 씨익 웃었다. 그 모습을 보자 권은하의 입에서도 실소에 가까운 웃음이 새어나왔다.

“……약속을 지키든 무시하든 하나만 해. 이 일관성 없는 자식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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