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7화 〉 236. (P)경계의 안쪽에서(2)
* * *
류태현이 권은하와 만난 지도 어느덧 4개월.
시간은 흘러 땡볕 같던 여름이 끝나고 선선한 가을이 찾아왔다.
그 사이에 있었던 일들은 과연 무어라 표현하면 좋을까. 많은 일들이 있었다 하면 많은 일들이 있었고, 아무 일이 없었다 하면 아무 일도 없었다.
좋게 말하면 평화로웠고 나쁘게 말하면 지루하고 단조로웠다. 그러나 류태현은 결코 그 나날을 나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날, 비가 내리던 여름밤에 강진윤 패거리와 싸운 이후, 류태현은 평화로운 일상이라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깨달았으니까.
“형아! 저번에 만들어준 개구리 다시 접어주라!”
“태현이 오빠 우리랑 보드게임하자 보드게임~. 예나랑 민진이랑 할 건데 사람 부족해~.”
저녁시간 이후부터 취침 전까지 주어진 자유시간은 고아원의 아이들이 가장 즐겁게 노는 시간대였다. 그리고 그 시간대의 아이들은 거의 대부분 고아원에 단 둘밖에 없는 또래 오빠, 언니와 함께 놀기를 원했다.
“태현이 형 나 종이접기! 종이접기이~!”
“야 박수용! 오빠는 우리랑 보드게임 할 거거든?! 개구리는 너 혼자 접어!”
자기를 사이에 두고 싸워대는 아이들을 보며 류태현이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슬슬 돌아가 봐야 하는데…….’
류태현이 이곳에 있을 수 있는 시간은 길지 않다. 저번 사건 이후로 부모님과 적어도 10시 전에는 집에 들어오기로 합의했고, 시간을 맞추려면 여기서 8시 30분에는 떠나야 했으니까.
류태현에게 있어서 통금은 절대적이었다. 이를 어겼다간 곧바로 외출금지를 당할지도 모를 일이었기에.
기실 한때 불량청소년이었으며 외박을 밥 먹듯이 하던 그가 10시 언저리에 귀가한다는 것만으로도 장족의 발전이었다.
허나 류태현의 부모, 특히 어머니 김수희는 그의 귀가가 10분만 늦어져도 불안 증세를 보이며 전전긍긍했다. 애초에 10시까지의 외출도 남편 류승철이 아니었다면 허락하지 않았을 정도였으니.
“그, 얘들아. 형이, 오빠가 이제는 좀 가봐야 해서 그러는데……. 종이접기나 보드게임은 내일 같이 하면 안 될까?”
“아아아악!! 싫어! 오늘 해! 오늘 할래! 오늘 할래!!”
“왜 내일 하는데? 내일은 안 할 건데? 오늘 해야 하는데? 오늘 안 해주면 이제 태현이 오빠 올 때마다 얘기도 안 하고 말도 안 붙일 건데?”
“얘들아 제발…….”
류태현이 곤란한 표정으로 웃으며 아이들을 달래보았지만, 아이들은 도통 고집을 굽힐 줄을 몰랐다. 그만큼 류태현을 좋아한다는 뜻이겠으나, 그로선 마냥 기뻐하기만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박수용! 최단비! 너네 내가 태현이한테 떼쓰지 말라 그랬지!”
그때 상황을 지켜보던 권은하가 구원투수처럼 나타났다. 그녀의 등장에 고집을 부리던 아이들의 표정이 흠칫 굳었다.
“너희도 이제 곧 10살이잖아. 나이 두 자릿수 되면 좀 어른스럽게 행동할 줄도 알아야 한다고 언니가 그랬어? 안 그랬어?”
“……나한텐 언니 아니고 누나인데”
“대답해!”
“그, 그랬어!”
“그랬어 언니….”
“알았으면 태현이는 이제 보내주자. 쟤는 그……다른 어른들처럼 밖에서 할 일이 있으니까. 이 시간 되면 나가야 해.”
“태현이 형 밖에서 일하는 거야?”
“오빠 일하러 가야하는 거야?”
아이들의 물음에 류태현이 멋쩍게 고개를 끄덕였다. 집도 부모도 없는 아이들에게 ‘부모님이 들어오래서 이제 가봐야 한다.’라고 말했다간 상처가 될 수도 있었기에, 고아원 아이들은 류태현이 밤마다 돈을 벌기 위해 일하러 나가는 줄 알고 있었다.
“자, 박수용 최단비. 태현이한테 인사해.”
“잘 다녀와 형. 대신 내일 종이접기 꼭 해줘야 해?”
“우리랑 보드게임도! 잘 다녀오구 일 열심히 해 오빠! 내일 보자!”
두 사람의 인사에 뒤에서 놀고 있던 아이들이 저마다 ‘잘 가 형’, ‘내일 보자 오빠!’ 하며 인사했다. 웃으며 인사를 받아준 류태현이 고아원을 나서자, 권은하가 그 뒤를 따랐다.
저벅. 저벅. 저벅.
어둠에 휩싸인 정원을 두 사람이 나란히 걸었다. 이윽고 류태현이 주차해둔 자전거 앞에 도착하자 권은하가 말했다.
“미안. 애들이 아직 어려서 버릇이 좀 없어.”
“괜찮아. 애들이 원래 저렇지 뭐. 난 저 나이 때 더 버릇없었어.”
“킥. 너라면 그랬을 것 같긴 해.”
“좋은 게 좋은 거잖아. 슬럼에서 평범한 애들처럼 웃고 울고 떼쓰고 할 수 있다는 게 다행인 거지.”
류태현의 뼈 있는 말에 권은하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하긴, 그것도 그러네.”
“아, 미안. 살짝 말실수였나…?”
“아냐, 괜찮아. 어차피 다 지난 일인걸. 확실히, 나 어릴 때는 저렇게 천진난만하게 놀아보지도 못했던 것 같아. 7살……. 아니, 6살? 5살? 적어도 6살부터는 간부 후보생으로 훈련에 들어갔으니까. 조직 숙소가 어리광 부린다고 받아주는 분위기도 아니었고.”
권은하가 살던 후보생 숙소의 생활은 먼저 후보생이 된 연장자들이 그 아래 후보생을 돌봐주는 형태였다.
그러나 말이 돌봐주는 것이지, 실상 그곳에선 훈육을 빙자한 구타가 만연했다. 권은하 역시 어릴 때는 선배 후보생들에게 매일같이 맞으며 자랐고, 그녀 또한 다른 아이들에게 손찌검은 하지 않았어도 말로 압박하고 부담을 준 적은 몇 번이나 있었다.
“학교 생활은 어때? 좀 할만해?”
“따분해 죽을 것 같아. 방학 때가 그립다니까? 매일 방과 후만 기다리고 있어.”
“슬럼이나 싸돌아다니던 불량청소년이 학교 끝나고 고아원에서 봉사하고 싶어서 안달이라니 웃긴 이야기네. 아, 고아원도 슬럼이긴 하니까 별로 달라진 것도 없나?”
“글쎄. 나도 잘 모르겠어.”
류태현이 자전거에 오른 채 모자와 마스크를 썼다. 오은수로부터 그의 수배사실을 전해들은 뒤로 강구한 보험책이었다.
“알지? 갈 때 성철파 구역으로만 잘 돌아서 가는 거….”
“알고 있어. 벌써 몇 십 번이나 다녔는데 그걸 모르겠냐? 게다가 그놈들 지금 은수 아저씨네 조직이랑 전쟁 중이라며? 그런 와중에 나한테까지 신경 쓸 여유는 없을걸?”
“그 전쟁이 슬슬 마무리되어가니까 그러지. 아무튼 조심해. 성철파 구역이라고 해도 감시가 없는 건 아니니까”
“예예 알겠습니다. 거 참, 맨날 애들 돌봐주다보니 잔소리만 늘었다니까. 난 간다! 내일 보자!”
촤르륵.
류태현이 있는 힘껏 페달을 밟아 산길 아래로 내려갔다. MTB도 아닌 자전거로 울퉁불퉁한 산길을 타는 무모함에 권은하가 혀를 내둘렀다.
‘어차피 초인이니까 넘어져도 별로 다치진 않겠지만…….’
그거랑 별개로 걱정되는 건 걱정되는 거였다. 권은하는 류태현이 더 이상 사소한 이유로라도 다치지 않았으면 했다.
촤르르르륵!
반면 류태현은 그런 친구의 속마음은 알지도 못한 채 빠르게 산길을 내려가고 있었다. 아이들에게 잡혀 있던 것 때문에 통금이 아슬아슬했기 때문이다.
‘원래 가던 길로 가면 살짝 늦을 것 같은데…….’
늦었다간 또 한 소리 들을 게 뻔했다. 마스크 안에서 입술을 잘근 씹은 류태현이 산길이 끝나자마자 핸들을 확 꺾었다.
‘지름길로 가야겠어.’
류태현의 자전거가 평소 가던 길과는 다른 방향으로 향했다.
성철파와 용문의 구역 경계 부근으로.
엄밀히 말하면 성철파의 구역이었지만 경계이니만큼 용문 조직원이 다녀도 이상하지 않을 곳이었다. 꼭 조직원이 아니더라도 용문과 관련이 있는 슬럼 주민이야 잔뜩 있을 것이고.
그렇지만 류태현은 마스크에 모자까지 썼는데 괜찮겠지 싶었다. 실제로 지금껏 몇 번이나 지름길을 이용했지만 아직까지 안 들키지 않았던가.
촤르르륵!
류태현의 자전거가 군데군데 패인 도로를 빠르게 주파했다.
허나 결과적으로, 류태현의 그런 안일한 판단은 그의 숨통을 스스로 조이는 선택이었다.
그로부터 며칠 뒤, 용문의 거점 중 하나의 지하실.
“형님. 아무래도 저번에 보고드렸던 그놈이 그 애송이가 맞는 것 같습니다.”
곽준효의 보고에 의자에 드러눕듯 앉아있던 강진윤이 눈썹을 까딱였다. 그런 그에게 곽준효가 커다랗게 인쇄된 사진 몇 장을 건넸다.
대부분 어두운 밤에 도로 위를 달리는 류태현이 찍힌 사진들이었다. 그것만으로는 그의 신원을 명확히 파악할 수 없었지만, 그중 한 장 그의 얼굴이 드러난 사진이 있었다. 가로등 밑에 놓인 자판기에서 음료수를 뽑아먹고 있는 그의 사진이었다.
“……이걸 찍은 시간이랑 장소는?”
“7일 전 오후 9시 20분. 장소는 준구가 관리하는 업장 앞입니다. 왜 있잖습니까. 저희 아래로 들어온 크루 중에 구역 걸쳐서 물장사하던….”
“어어 기억하지. 용문이랑 성철파 사이에서 갈팡질팡 박쥐짓 하려다 대차게 깨진 그놈 말하는 거 아냐. 그때 그새끼 업장 뒤집어놓은 게 나였잖냐. ……그래서, 이놈이 그 가게 앞에서 찍혔다고?”
“예. 방향 상 성철파 구역에서 나온 것 같아 그쪽에 사람을 풀어 수소문해봤습니다. 물론 조직원이 아닌 애들로다가 말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 놈이 일주일에 최소 5번은 같은 시간대에 성철파 구역에 나타난다는 걸 알아냈습니다.”
“그게 끝이냐? 성철파 그 자식들 구역이 얼마나 넓은데, 설마 겨우 이 정도 정보 가지고 나한테 보고하러 온 건 아닐 거야. 그렇지?”
그 말에 곽준효의 입가에 자그마한 웃음이 떠올랐다. 품에서 스마트폰을 꺼낸 그가 지도 어플을 켜 강진윤에게 보여줬다.
“그쪽 주민들한테 협조를 구해 놈의 동선을 추적해봤습니다. 그랬더니 매번 천보산 동쪽 기슭에서 모습을 드러낸다는 걸 알았습니다.”
“산 안에 뭐라도 있나?”
“고아원이 하나 있더군요. 성철파 오은수가 관리하는.”
“……뭐? 그 새끼 이름이 여기서 왜 나와?”
예기치 못한 이름에 강진윤의 얼굴에 당황이 떠오른다. 그리고 그 당황은 곧 불쾌함으로 번졌다. 강진윤에게 있어서 오은수라는 작자는, 물과 기름이라는 비유마저 부족할 정도로 극상성이었기에.
“오은수가 고아원이라…. 슬럼 안에 있으니 뭐 조세피난처 같은 걸리는 없고. 거기 뭐 그 자식 애인이라도 숨겨둔 건가?”
“애인은 아니지만 숨겨둔 여자가 있을 것 같긴 합니다. 그날 류태현과 함께 사라졌던 권은하의 목격 정보가 그 고아원 근처에서 나왔거든요.”
“그년 이름은 또 왜 나오는 거야 씨발. 오은수가 그 계집애를 왜 데리고 있는데?”
“그날, 저희 애들도 많이 다쳤지만 류태현과 권은하도 부상이 심각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도 두 놈이 멀쩡하다는 것으로 미루어보아, 아마 어떤 경로로 오은수가 그 두 사람을 거둔 게 아닐까 싶습니다.”
“하!”
강진윤 입장에서는 기가 찰 노릇이었다. 자신에게 반항해서 반드시 찢어죽이겠다 다짐한 두 연놈들이 하필이면 자신의 가장 짜증나는 원수의 밑에 있다니. 사실이라면 그야말로 운명의 장난 같은 일이었다.
“…형님. 만약 그 둘이 오은수 밑에 붙은 거라면…….”
“그 두 놈을 건드리기가 쉽지 않겠지. 전쟁이 겨우 소강상태에 접어들고 있는데 오은수가 관리하는 고아원을 건드렸다간 다시 항쟁이 불거질 테니까. 그래선 안 돼. 너도 알다시피 갑작스레 시작된 전쟁이라 우리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니니까. 지금 우리한테 필요한 건 피해를 수습할 시간이다. 그렇지만…….”
뿌드득!
강진윤이 거칠게 어금니를 다물었다. 그의 얼굴에 명백한 분노의 감정이 진하게 떠오른다.
“……그 빌어처먹을 연놈들을 이대로 놔두는 것도 성에 차지가 않는군. 계집애쪽은 몰라도 애송이는 반드시 잡아 죽여야 해. 그래야지 내 체면이 사니까. 안 그래도 미성년자 애송이한테 깨졌다고 온 동네방네 소문이 난 판이니…….”
강진윤은 일종의 깡패였다. 그리고 깡패는 체면이 생명이다. 그러나 그의 체면은 류태현과의 일로 인해 바닥까지 떨어진 상태였고, 그건 류태현에게 확실한 보복을 가하지 않는 이상 결코 회복되지 않을 터였다.
“씨발. 하필이면, 하필이면 오은수 그 자식이…! 그 자식만 아니었어도 고아원이고 뭐고 진즉에 쓸어버리고 두 연놈들 다 내 앞에 끌고와 찢어죽이는 건데…!”
“……형님, 저희가 한 짓인 게 들키지만 않는다면 조직 간 마찰로는 번지지 않을 겁니다. 청부업자를 고용하는 건 어떻겠습니까?”
“나도 그 생각은 해봤다. 그렇지만 그게 어디 쉬운 일이냐? 너도 그 애송이 실력 알잖아. 어지간한 청부업자로는 그 애송이를 이길 수 없을 거다. 그렇다고 실력 있는 놈을 고용했다간, 그것만으로도 오은수 놈이 단번에 우리 소행인 걸 알 거다.”
약 두 달 동안의 전쟁으로 인해 용문과 성철파는 일종의 제3세력인 청부업자들에게 만전의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다. 특히나 전쟁의 판도를 뒤엎을 A급 이상 업자들에겐 더더욱.
때문에 강진윤이 몰래 업자를 고용해 류태현을 친다 해도, 류태현을 이길 정도의 업자면 그 고용 사실이 곧바로 오은수에게 전해질 터였다. 슬럼의 청부업자들은 모두 비밀을 엄수하지만, 슬럼 전체에 뻗어있는 삼대조직의 정보망은 그 비밀마저 어렵지 않게 캐낼 테니까.
그러나.
“……하지만 형님. 만약 절대 들킬 염려가 없고, 또 실력도 확실한 업자가 있다면 어떻습니까?”
강진윤의 오른팔, 곽준효에게는 이미 그에 대해서도 생각이 있었다.
“…………그렇다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근데 정말 그런 업자가 있기는 한 거냐?”
“얼마 전에 새로 슬럼에 들어온 자입니다. 청부업자로서 마친 의뢰는 아직까지 하나도 없고. 때문에 누구도 주목하고 있지 않은 업자죠. 그렇지만”
“실력은 확실하다? 실력을 보인 적이 없는데 그건 어찌 아는데?”
“직접 싸워봤습니다. 사흘 전에. 그리고 졌지요.”
“뭐?”
강진윤이 당황해 되묻자 곽준효가 셔츠 자락을 스윽 들어올렸다. 그러자 복부 전체에 걸쳐 팽팽하게 감겨있는 붕대가 드러났다.
“보고드리지 않아서 죄송합니다. 형님의 명령이 아니라 제 개인적인 판단으로 한 싸움이라, 차마 다쳤다고 말씀드리기가 겁났습니다.”
“부상은 별로 심하지 않은 것 같은데.”
“상대방이 봐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봐줬는데도 일방적으로 당했죠.”
“준효 네가 일방적으로 당했다니…. 실력 하나는 확실한가보구만. 근데 그 업자하곤 왜 싸운 거냐?”
“조직에서 직접 일을 받고 싶다고. 그 전에 자기 실력을 보여주겠다고. 건방지게 도발해 와서 밟아주려고 했습니다만…….”
결과는 보시는 바와 같습니다.
그렇게 덧붙인 곽준효는 차마 면목이 없다며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강진윤의 입가엔 이미 진한 웃음이 떠오른 뒤였다.
“……준효야. 그 업자 이름은?”
“진짜 이름은 모릅니다. 대신 별명 같은 걸 내세우더군요. 본인을 두고 러스티네일이라고 했습니다.”
“러스티네일이라…….”
러스티 네일. 한글로 풀이하면 녹슨 못.
그 이름을 곱씹으며 잠시 생각에 잠겼던 강진윤이, 이내 곽준효에게 명령했다.
“그 업자에게 연락해라. 용문 간부 강진윤이 시킬 일이 있다고.”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