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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 경비원으로 빙의당했다-236화 (237/266)

〈 236화 〉 235. (P)경계의 안쪽에서(1)

* * *

오후에 약속이 있다며 나선 류태현이 향한 곳은 거리의 북쪽이었다. 자전거에 오른 채 정처 없이 페달을 밟자, 어느덧 주위 풍경이 그립고도 아련한 그날의 기억들과 겹쳐지기 시작한다.

슬럼.

대한민국에서 유일하게 법과 사회질서가 통하지 않는 무법지대. 그러나 한편으론 수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살아가고 있는 회색 도시.

그 한가운데를 류태현의 자전거가 가로질렀다.

5년 전 여름에 그랬던 것처럼.

그때와 달리 지금은 뒤에 아무도 타고 있지 않지만, 아무렴 어떤가.

그렇게 별 거 아닌 허전함을 느끼며 도로를 달리자 어느덧 주위의 풍경이 점차 변하기 시작했다.

회색 건물들만 즐비하게 늘어섰던 거리에 차츰 자연의 초록이 섞여들기 시작한다. 갈라진 아스팔트 사이로 피어난 풀들은 무릎 높이까지 올라왔고, 숨을 크게 들이쉬면 싱그러운 풀내음이 허파 가득 퍼진다.

이윽고 포장도로가 끝나고 울퉁불퉁 굽이진 산길 초입이 나타나자, 류태현이 자전거에서 내렸다. 그러곤 자전거를 끌고 산길로 들어섰다.

벌써 몇 십 번, 혹은 몇 백 번은 오르내렸을 좁은 산길.

따사로운 햇살을 막아주는 은혜로운 나무그늘 사이로 얼마나 길을 올랐을까, 마침내 고즈넉한 분위기의 양옥이 나타났다.

5년 전에 보았을 때보다 더욱 낡은 건물은 이제는 자연과 하나가 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벽과 담장 가득 자라난 덩굴과 이끼들. 그러나 결코 불결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초록에 휩싸인 건물은 보는 이로 하여금 묘한 아늑함을 느끼게 해주었다.

그 건물에는 이름이 없었다. 다만 건물에 얽힌 사정을 아는 이들은 이곳을 그저 ‘고아원’이라 불렀고, 그중 몇몇은 이곳을 소중히 여기며 ‘집’이라 불렀다. 류태현의 경우는 전자였다.

‘딱 1년만인가.’

녹슨 철문을 열고 들어가자 아늑한 정원이 펼쳐졌다. 그네, 시소, 미끄럼틀, 모래사장. 아이들이 뛰놀법한 그 놀이기구들은 그나마 관리는 되고 있는지 깨끗한 때깔을 유지하고 있었다.

­끼익. 끼익. 끼익.

불어오는 바람에 그네 한 쌍이 힘없이 흔들렸다. 류태현은 잠시 아련한 눈으로 그 그네를 바라보다, 이내 고개를 돌려 정원의 구석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높게 자란 감나무가 한 그루 있었다. 그리고 그 밑에는 빛 바랜 비석 하나가 세워져 있었다. 5년 전 이곳에 처음 온 이래로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었으나, 저 비석만이 유일하게 처음과 달라진 것이었다.

그것은 무덤이었다. 이렇다 할 장식 하나 없이 낡은 비석 하나만 세운 볼품없는 무덤. 하물며 그 아래엔 아무것도 묻혀있지 않았으나, 그렇다고 해서 그 무덤이 류태현에게 있어 하찮은 건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그 빛바랜 비석은 도저히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류태현의 머릿속 깊숙이 박혀있었다.

어찌 잊겠는가. 저 무덤이야말로 류태현, 그가 저지른 과오의 상징이자 실패의 낙인인데.

그날, 자신이 조금만 더 제대로 판단했더라면.

조금만 더 이성적이었다면.

조금만 더 성숙했다면.

그리고 조금만 더 강했더라면, 그날의 일이 이런 비극으로 끝나진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류태현이 하늘을 올려다보며 후회 섞인 한숨을 깊게 내뱉었다.

하늘은 울적한 그의 기분과는 달리 참 푸르고 맑았다.

***

시간을 다시 거슬러 올라가 5년 전.

오은수에게 뼈저린 일침을 들은 류태현은 그날, 사흘 만에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다.

사흘 만의 귀환. 당연히 집안에선 난리가 났다. 특히 그의 몸 곳곳에 미처 회복되지 못하고 남은 부상의 흔적들을 본 류태현의 어머니, 김수희는 과장 없이 졸도 직전까지 몰리기도 했다.

하나뿐인 아들이 대뜸 수상쩍은 여자애를 데려오더니 사흘이나 실종되어버리고, 겨우 돌아왔나 싶더니 온몸에 칼자국이 잔뜩인데 어찌 놀라지 않겠는가.

이에 김수희가 류태현에게 다그치듯 물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냐고. 어디서 무슨 짓을 했기에 몸이 그 꼴이냐고.

그러나 류태현은 부모로부터 쏟아지는 모든 질문을 이렇게 일축했다.

“그냥 일이 좀 있었어요.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고작 그런 말 한 마디로 걱정이 풀릴 리가 있겠냐만은, 류태현의 태도는 완고했다. 그는 부모는 물론 학교의 선생이나 상담사에게도 묵비권을 행사했다. 그 고집스런 묵언 앞에 다들 답답하기만 했지만, 그렇다 해서 류태현이 입을 여는 일은 없었다.

결국 한 보름 정도 지났을 때, 류태현의 부모는 그에게서 진실을 듣는 것을 포기했다. 그 결정 아닌 결정에는 그의 아버지, 류승철의 역할이 컸다. 아들의 문제로 나날이 답답해하고 전전긍긍하던 김수희에게 남편 류승철은 이렇게 속삭였다.

무언가 말 못할 사정이 있는 거겠지. 그러니 더 이상 묻지 말고, 그냥 이해해주고 보듬어주자. 그게 부모가 할 일이니까.

라고.

당시의 류태현은 누구에게도 사정을 밝히진 않았지만 힘들어하는 기색만은 역력했다. 그런 와중에 남편이 그렇게 말하자, 결국 김수희는 아들을 추궁하기보다 보듬어주는 길을 택했다.

류태현의 가출 아닌 가출 사건은 그렇게 흐지부지 막을 내렸다.

막을 내렸으나.

그렇다고 해서 류태현과 슬럼의 이야기가 거기서 끝이 난 건 아니었다.

“……너 이 새끼, 너 여기서 뭐하냐?”

“보면 몰라? 일하는 중이잖아.”

한 달이 지나 류태현의 주변 사람들이 그의 가출 사건에 대해 슬슬 잊어갈 즈음. 대뜸 고아원에 나타난 류태현의 모습에 오은수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일? 무슨 일?”

“청소, 빨래, 설거지, 그 외에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면 뭐든. 특히 힘 좀 써야하는 일들은 다 나한테 맡겨달라 부탁했어. 지붕 수리라든가 창고 정리 같은 거.”

“왜 꼬맹이 네가 그것들을 하고 있는데?”

“그걸 당신이 묻는 건 좀 이상하지 않나?”

먼지털이를 탁탁 턴 류태현이 그의 앞에 손가락 다섯 개를 쫙 펴보였다.

“빚. 5억이라며. 갚으려면 부지런히 일해야지. 방과 후에 4시간 씩 여기서 일한다 쳐도 도대체 몇 년이나 걸릴지…….”

“……야, 꼬맹아. 그때 내가 분명 말했을 텐데? 너한테는 미래가 있다고. 그러니 네 빚은 신경 쓰지 말고 다시는 슬럼에 얼씬하지 말라고.”

“난 누구한테 빚지고는 못 사는 성격이라서. 그리고 당신네 조직에서 일하는 거면 모를까, 고아원 일 도와주는 게 딱히 내 미래에 악영향을 끼치는 건 아니잖아? 오히려 청소년기의 봉사경험은 이후 사회생활의 밑거름이 되는 귀중한 경험이라고.”

뻔뻔하게 말대꾸하며 청소에 매진하는 류태현.

“…….”

오은수는 그 얄미운 꼬맹이를 보며 어처구니가 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곧 그 입가에 피식 웃음이 떠오르고, 이윽고 그가 복도가 가득 울릴 정도로 웃어제끼기 시작했다.

“크하하하하핫! 씨이벌, 애새끼 주제에 말은 청산유수네 아주. 그래, 새끼야! 니 마음대로 해라! 고아원에 일손이 늘면 나야 땡큐지! 아주 골수까지 뽑아먹어 줄 테니 각오해라!”

“얼마든지. 빚만 확실하게 까준다면야.”

“크하하핫! 불량청소년이 개과천선해서 고아원에서 봉사활동이라, 꼭 무슨 청춘영화 스토리 같구만 그래. 좋아, 아주 좋다고.”

짝짝 박수를 치며 고개를 주억거리던 오은수가 류태현에게 물었다.

“그런데……. 꼬맹이 너 여기 올 때는 무슨 길로 왔냐?”

“하천 따라 달리다 중간에 산 쪽으로 꺾었지. 좀 돌아가는 길이긴 한데, 그 자식들 구역을 피하려면 어쩔 수 없어서….”

“내가 하고 싶은 말이 그 말이다. 가급적이면 용문의 구역에는 이제 발을 들이지 않는 편이 좋을 거다. 한 달이 지났다곤 해도 조직의 간부가 당한 사건이니까. 아마 지금도 범인을 계속 찾고 있을 거야.”

한 달 전. 류태현과 강진윤 패거리의 싸움은 대외적으로 강진윤의 패배로 알려졌다. 그도 그럴 것이 이름도 모를 외지인 1명에게 조직의 간부와 그 휘하 정예 조직원들이 죄다 당해버린 사태였으니.

비록 목격자가 없었다곤 해도, 그 자리에는 수십 명의 조직원들이 있었다. 그들에 의해 조직 내부에서만 알음알음 전해지던 그날의 진상은 점차 조직 바깥으로 새어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내 한 달이 지난 현시점에선, 슬럼에서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유명한 일이 되었다.

“대충 수락산 기준으로 서쪽은 용문이, 동쪽은 우리 성철파 구역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산 북쪽에 길 하나 동서로 크게 뚫려있는 거 알고 있지? 안전하게 오려면 그쪽을 통해서 오는 편이 좋을 거다.”

“다음부턴 그렇게 할게. 근데 용문에서 아직도 날 애타게 찾아?”

류태현의 질문에 오은수가 낄낄낄 웃었다.

“그 사건 이후로 한 일주일 동안은 거의 조직원 전체가 널 찾아다녔다 해도 과언이 아니지. 근데 지금은 그럴 겨를 없을 거다. 강진윤네 패거리가 빌빌대는 사이에 우리 쪽에서 놈들을 제대로 쳤거든.”

“전쟁이라도 걸었단 거야?”

“지금은 국지전이지만 조만간 그렇게 되겠지. 줄곧 눈독 들이고 있던 놈들 구역을 우리가 홀라당 접수했거든. 아마 강진윤 입장에서도 자기 후드려깐 꼬맹이 찾는 것보단 눈앞에 들이닥친 성철파를 막는 데에 급급할 거다.”

“그것 참 잘 됐네.”

“그럼. 네가 그놈을 손봐준 덕분에 앉아서 손 안 대고 코 푸는 격이지.”

“그럼 빚이나 좀 까줘. 내 덕에 이득 잔뜩 본 거잖아?”

“고려는 해보마. 일단 놈들과의 전쟁에서 이긴 뒤에.”

선글라스 아래로 특유의 경박한 웃음을 씨익 지으며 오은수가 창고를 나섰다. 바깥으로 나가는 길 아이들의 인사를 받아주면서도 그의 머릿속엔 류태현에 대한 일로 가득했다.

‘새끼. 그렇게나 잘 말해줬으면 다시는 오지 말 것이지. 기어코 돌아와버렸어. 고아원이고 나발이고 슬럼에는 발붙이지 않는 게 상책인데.’

기실 오은수는 여전히 류태현이 슬럼에 오지 않았으면 했다.

설령 조직에서 일하지 않는다 해도, 그저 고아원 일을 거드는 것뿐이라 해도, 슬럼이라는 장소는 그 자체만으로 그에게 악영향을 줄 테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류태현을 내쫓지 않은 건 류태현이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임을 짐작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말마따나 빚을 지곤 못 사는 성격이라 그런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인지. 하여튼 간에 류태현의 마음은 이미 이곳 슬럼에 있었다. 이제 와서 그가 다시 한 번 내친다 해도 그는 결국 다시 돌아올 것이 분명했다.

‘곤란하게 됐구만 이거. 진윤이네 놈들이 냄새를 맡지 말아야 할 텐데.’

전쟁으로 인해 한창 정신없을 때니 용문의 구역에 들어서지만 않으면 괜찮을 거다. 오은수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스멀스멀 올라오는 불안감이 묘하게 뒷목을 간질였다.

‘…………뭐, 저 꼬맹이가 뒤지든 말든 내 알 바 아니지.’

그러나 이내 고개를 홱홱 돌리며 상념을 턴 오은수가 건물을 나섰다.

시간은 저녁이었지만 하늘은 아직 밝았다. 7월이라 해가 긴 탓이었다. 그러나 마냥 밝지만은 않고, 희끄무레한 박명이 조금 남아있을 뿐.

오은수는 그 하늘을 올려다보며 생각했다.

어째, 색깔이 우중충한 게 불안한 기분이 드는 하늘이라고.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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