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카데미 경비원으로 빙의당했다-234화 (235/266)

〈 234화 〉 233. (P)경계의 저편에서(9)

* * *

류태현이 눈을 떴을 때, 그가 처음으로 느낀 것은 비에 젖어 쩔은 머리카락 냄새와 지독한 약품 냄새였다.

“으윽…….”

몽롱한 의식인 채 몸을 일으켜보려 했지만 날카로운 격통에 그대로 드러눕는다. 그 격통이 류태현의 정신을 깨어나게 했고, 그제야 그는 주변을 둘러볼 겨를이 생겼다.

‘어디야 여긴…?’

진한 약품 냄새. 새하얀 철제 침대. 그리고 자기 팔에 꽂혀 있는 링거.

그것들을 통해 처음에는 이곳이 병원인 줄 알았으나, 병원치고는 어째 인테리어가 이상했다. 칠이 다 벗겨진 콘크리트 벽에 군데군데 널브러진 잡동사니들. 마치 폐허에다가 병원 침대만 휙 가져다 둔 것만 같은 모습이었다.

‘내가 왜 이런 곳에 있지? 난 분명 그때, 용문의 조직원들이랑 싸워서…….’

약 기운 때문인지 멍한 머리로 기억을 복기한다. 후보생들을 쓰러뜨린 것부터 시작해 강진윤과 싸우게 된 것까지.

막판에 분노에 휩싸여 날뛰었던 부분의 기억은 거의 남아있지 않았지만, 흐릿하게나마 자신이 조직원들을 전부 쓰러뜨렸었다는 것만은 기억하고 있었다. 그 다음에 곧바로 쓰러지긴 했지만.

‘누가 날 구해준 건가? 은하? 아니면 다른 사람이…?’

곰곰이 생각해봤지만 떠오르는 건 없었다. 없을 수밖에. 기절한 뒤에 일어난 일을 그가 어떻게 알고 있겠는가.

“저기요? 누구 없어요?”

여하튼 자신을 치료해준 걸 보면 적은 아닐 거라고. 그렇게 생각한 류태현이 불안감이 감도는 목소리로 크게 물었다. 방 안에는 그 혼자뿐이었지만, 바깥에서 누가 듣고 올 수도 있으니까.

“저기요? 누구 없습니까? 거기 아무도 없어요? 아무도 없냐고? 야! 진짜 아무도 없냐? 환자를 이렇게 방치해두면 어떡하­”

­벌컥!!

“시끄러 씨발! 네가 여기 전세냈냐?! 아주 복도까지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리네 썅!”

그때 병실 문이 벌컥 열리며 의사가운 차림의 여성이 들어왔다.

여성의 나이는 이십대 후반 정도로 보였다. 머리카락 색이 백금발인 걸 보면 탈색이라도 했나 싶지만, 혼혈아처럼 묘하게 이국적인 외모를 보면 자연색인가 싶기도 했다.

의사가운 아래에는 몸에 착 달라붙는 타이트한 원피스를 입고 있었으며, 그 복장 탓에 의사라기보다는 이미지 클럽 따위에서 의사 코스프레를 한 여성처럼 보였다. 허나 그 외양과 달리 여성은 일단 의사는 의사였다.

면허 하나 없는 불법 의사.

“한 번만 더 시끄럽게 떠들어봐. 확 그냥 입을 스테이플러로 찝어서 닥치게 만들어줄 테니까. 어린 새끼가 예의는 밥말아처먹었나 진짜…….”

“저, 실례지만 누구신지­”

“너 치료해준 의사다 짜샤! 이름은 나타샤! 본명에 혼혈이고 애비놈 국적은 나도 모르니까 묻지 말고! 깨어났으면 얼른 그 자식한테 연락해! 치료비 청구해야 하니까!”

“치료비요? 그 자식? 그, 제가 방금 깨어나서 무슨 말씀이신지 잘…….”

그 말에 나타샤의 표정이 흠칫 굳었다. 그녀가 의아한 얼굴로 류태현을 바라보았다. 마치 ‘네가 왜 그걸 모르냐?’라고 묻는 것처럼.

“……너 오은수 몰라?”

“모르는데요.”

“이런 씨이이이이이펄. 그 참견쟁이 자식 또 어디서 아무나 주워다가 던져두고 갔나보네.”

류태현의 대답에 나타샤가 짜증 섞인 표정으로 한숨을 푹 내쉬더니, 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환자가 있음에도 뻔뻔히 담배를 태우는 모습이 결코 제대로 되먹은 의사처럼 보이진 않았다.

“……지가 소중이 아끼는 동생이라며. 반드시 살려야 할 녀석이라며…! 그렇게 신신당부를 하기에 있는 포션 다 들이부어서 억지로 살려낸 건데…! 씨발, 씨발, 씨이발, 씨이발……!!”

“저, 혹시 치료비가 많이 나왔나요?”

“많이 나왔지. 그것도 엄청.”

나타샤가 뚜벅뚜벅 류태현의 곁으로 다가왔다. 어느새 다 피운 담배를 그녀가 벽에 비벼 껐다.

“중급 포션 하나에 하급 포션 둘. 그 외 기타 잡다한 약품에, 수혈할 때 쓴 혈액에, 내 인건비랑 입원비 이거저거 다 합치면…….”

나타샤의 손가락이 하나씩 펴지기 시작한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5억. 적어도 그 정도는 받아야 해.”

“5억…….”

“이것도 거의 원가 수준이거든?! 아무튼 꼬맹아. 너 정말 오은수랑 아는 사이 아니야? 성철파는? 성철파랑도 아무런 관련 없어? 아님 쏨밧 고향 아는 동생이라든가?”

“죄송한데 진짜 아는 게 하나도 없거든요. 도대체 그 오은수라는 사람이 누군지…….”

“성철파 2인자야. 슬럼에서 가장 알아주는 범죄조직. 아니, 이젠 두 번째로 알아주는 조직인가? 아무튼, 난 그 빌어먹을 자식한테 연락하고 올 테니까 넌 여기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 절대 어디 움직이지 말고.”

말은 걸걸하게 해도 일단은 의사라 환자의 안정을 위해주는 것인가.

그렇게 생각했으나 나타샤는 곧바로 ‘도망쳐도 지구 끝까지 쫓아가서 치료비 받아낼 테니까.’라 덧붙이곤 병실을 나섰다. 정말이지 처음부터 끝까지 의사다운 부분은 하나도 없는 의사였으나, 장소가 슬럼가였으니 그러려니 했다.

그렇게 류태현은 나타샤의 말대로 얌전히 그녀를 기다렸고.

그렇게 1시간 정도 지났을까.

­벌컥!

“오! 깨어났군! 그 상처로 살아나다니 진짜 대단한 놈일세!”

병실 문이 열리고 선글라스를 낀 중년 남성이 성큼성큼 들어왔다. 그 뒤를 따른 나타샤가 볼멘소리를 뱉었다.

“대단한 건 저 녀석이 아니라 치료해준 나지! 그날 쟤 상태 어땠는지 벌써 잊었어? 슬럼에서 그 정도 부상자를 치료할 수 있는 건 나뿐이라고!”

“그럼! 나타샤 너도 대단하긴 마찬가지지. 누가 뭐래도 슬럼 최고의 무면허의사 아닌가! 실력만 놓고 보면 바깥의 대학병원 교수들도 한 수 접어줄걸?”

“흥! 입에 발린 소리는 집어치우고 치료비나 얼른 뱉어. 여자애랑 남자애 합쳐서 5억 3천! 일시불이야.”

“우리 사이에 돈 이야기는 차차 하자고. 그보다 일단 저녀석한테 사정부터 설명해줘야지.”

‘돈 이야기를 제일 먼저 해야지!’ 하며 날뛰는 나타샤를 뒤로한 채 중년 남성, 오은수가 류태현에게 다가왔다.

누가 봐도 깡패구나 싶던 강진윤이나 곽준효와 달리, 그는 어디에나 있을법한 인상 좋은 중년 남성이었다. 얼굴에 걸친 선글라스조차 어설프게 멋 좀 부리려는 애아빠 같은 느낌. 아무튼 간에 도무지 위압감이라는 게 느껴지지 않는 사내였다.

허나 그 정체는 용문과 함께 슬럼을 삼분하는 범죄조직, ‘성철파’의 2인자.

조직이 다르긴 하나 단순 서열만 놓고 보면 강진윤보다 더 높은 사람이었다. 그 사실을 자각하니 별볼일 없어 보이는 그 모습조차 상대를 방심시키기 위한 의태가 아닌가 의심되었다.

“반갑다 꼬맹아. 난 오은수라고 한다. 네 이름은?”

“…….”

“이름은 밝히지 않겠다는 건가! 음! 좋군! 신중한 건 좋은 거지! 말하지 않겠다면 그냥 내 마음대로 부르겠다. 그래, 류태현이라고 부를까?”

“당신, 그걸 어떻게­”

“하하하하! 사실 이미 네 친구한테 들었거든.”

네 친구. 그 말이 의미하는 게 누구일지는 명백했다. 류태현의 표정에 단숨에 다급함이 서린다.

“……은하는 지금 어디 있어? 은하한테 무슨 짓 한 건 아니겠지?”

“워우. 눈빛 한 번 살벌하구만. 난 너희 둘을 구해준 입장인데 그렇게 의심하면 쓰나.”

“당신 성철파의 2인자라며. 범죄조직 부두목이란 사람을 초면에 바로 믿을 정도로 난 어리석지 않아.”

“그거야 그렇다만 꼬마야. 그래도 일단 구해줘서 고맙다고 감사인사를 하는 게 먼저 아니냐? 나타샤한테 못 들었어? 난 네 치료비에 5억을 태웠다고!”

“태울 예정이지. 아직 안 냈잖아.”

“그게 그거지! 아무튼! 5억이 무슨 뉘집 개 이름도 아니고 말이야. 그 정도 돈을 대신 내줬으면 일단 감사부터 해야하는 것 아니냐?”

그 말에 류태현의 표정이 잠깐 누그러졌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경계의 기색을 잃지 않았다.

“……날 치료해준 거에 대해선 감사를 표할게. 그렇지만 난 도저히 당신이 무상으로 날 치료해줬단 생각은 들지 않는데. 뭔가 속셈이 있으니까 그런 거 아니야?”

“…………나타샤. 요즘 애들은 다 이런가? 엊그제 그 여자애도 그렇고. 순수해야할 꼬꼬마 어린이들이 벌써부터 이래 풍파에 찌들어서야 원…….”

오은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담배를 꺼내 물려다가, 류태현의 눈치를 보더니 다시 집어넣었다. 환자를 배려한다는 부분에선 그가 나타샤보다 나았다.

“뭐어……. 네 말이 맞다! 널 순수한 선의로 구해준 건 아니야! 세상에 공짜란 건 없으니까. 5억을 네게 투자했으니 그만큼은 확실히 돌려받을 거다! 그 여자애도 이미 엊그제부터 일을 시작했고 말이지.”

일을 시작했다. 그 말에 류태현의 미간이 와락 찌푸러졌다.

“일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은하한테 무슨 짓을 시킨 건데?!”

“그 여자애가 할 수 있을만한 일을 시켰지.”

의미심장한 말과 함께 오은수의 입가에 씨익 웃음이 떠올랐다. 그 웃음을 본 순간, 류태현은 순간적으로 오은수 위에 강진윤을 겹쳐 보았다.

그래, 아무리 분위기가 다르다 한들 눈앞의 남자 또한 슬럼가의 범죄자.

그것도 성철파라는, 용문에 비견되는 거대 조직의 2인자씩이나 되는 남자가 아니던가. 그가 자신을 구해준 것은 호의 따위가 아니라, 음흉한 꿍꿍이 때문임이 분명할 거라고.

“왜, 궁금한가? 궁금하면 직접 가서 확인해보지 그래? 네 친구가 빚을 갚기 위해 어떤 일을 시작했는지…….”

­뿌드득.

류태현이 분함을 이기지 못하고 어금니를 강하게 깨물었다. 오은수는 그 반응이 즐거운지 계속 킥킥 웃어댔다.

“오은수. 당신도 참 여전히 성격이 나쁘네.”

“크흐흐흐. 범죄조직 간부가 그럼 성격이 좋겠어? 뻔히 알만한 사이에 새삼스럽게 왜 그래? 아무튼 꼬맹아. 네가 그러고 싶다면 당장 그 여자애가 일하고 있는 곳으로 데려다주마. 어때, 가보고 싶나?”

“……당장 안내해.”

­피슛!

류태현이 팔에 꽂혀 있던 링거를 우악스럽게 뜯어냈다. 그러자 한 줄기 핏물이 피슉 튀어올랐다.

“야! 뭘 멋대로 퇴원하려고 그래?! 넌 아직­”

“괜찮잖아 나타샤. 어차피 포션 덕에 상처는 거의 다 봉합됐다며? 가볍게 움직이는 것 정도야 지장 없겠지.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을 거야.”

“뭔 소리야 씨팔! 아직 돈 안 냈다고! 돈 내라고 돈!! 5억 3천!! 일시불!! 오은수 너 저 녀석 데리고 나가면 또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치료비 지급 차일피일 미룰 거잖아!”

병실을 나서려던 두 사람을 나타샤가 두 팔 벌려 가로막았다. 그러자 오은수가 슬쩍 이야기했다.

“내일 쏨밧 현찰 두둑하게 챙겨서 보낼게.”

“꼭이다 진짜! 이번에도 떼어먹으면 니네 조직은 싹 다 보이콧할 거야!”

“으하하하하! 거 참 무섭군. 가자 꼬맹아. 니 친구한테 데려다주마.”

두 사람은 곧바로 병원을 나섰다. 바깥에서 본 건물은 슬럼가 어디에나 있을법한 폐건물이었다.

류태현은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이곳이 어디인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적어도 그가 알고 있는 슬럼 외곽 쪽은 아닌 것 같았다.

“나타샤가 말은 저래도 사실 착한 녀석이다. 너처럼 이름도 출신도 아무것도 모르는 환자도 일단 받으면 어쨌든 치료는 해주거든. 대신 그만큼 나 같은 놈들한테서 비싸게 받아내긴 하지만 말이지. 여튼 너무 안 좋게 보지 말라고.”

오은수가 조금 전 나타샤의 행적을 변호하듯 말했지만 류태현의 관심사 밖의 일이었다. 그는 여전히 오은수를 죽일 듯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거 진짜 살벌하구만. 그 여자애가 꽤 소중한가 보지?”

“…….”

“그래. 대답하지 않겠다 그거군. 신중한 건지 날 싫어하는 건지는 모르겠다만, 조만간 그 태도는 고치는 게 좋을 거다. 빚을 갚으려면 앞으로 나랑 꽤 오랫동안 봐야할 것 같으니까.”

그 뒤로 두 사람은 한참 동안이나 말없이 거리를 걸었다. 여전히 주위는 류태현이 한 번도 본 적 없는 곳이었고, 그러는 사이 어느새 두 사람은 야트막한 야산 기슭까지 다다랐다.

­부스럭. 부스럭.

수풀이 우거진 산길을 오르기 시작하는 두 사람.

그쯤 되자 류태현의 경계심은 거의 하늘까지 치솟았다. 슬럼가에서도 이렇게 외진 곳까지 오다니, 필시 목적지가 정상적인 곳은 아닐 거라 그가 짐작했다.

‘치료비를 갚게 하기 위해 일을 시켰다 그랬지…….’

도대체 권은하에게 무슨 일을 하게 한 것일지. 류태현의 머릿속에 불길한 상상이 우후죽순 솟아났다.

그날 만났던 강진윤은 범죄조직 간부라는 명함조차 부족할 정도로 쓰레기 중의 쓰레기였다. 그렇다면 눈앞의 남자 또한, 부두목이라는 직책에 걸맞은 쓰레기이지 않을까.

그런 작자가 권은하에게 빚을 지우고 도대체 무슨 짓을 시켰을지 류태현은 불안해 미칠 것 같았다.

정작 자신이 권은하의 16배나 되는 5억이란 빚을 지고 있다는 것조차 까맣게 잊은 채.

“이봐. 도대체 언제까지 걸어야 하는 거야?”

“조금만 더 가면 된다. 사내자식이 이 정도 걸은 걸로 찡찡대기는.”

“이런 외진 곳에서 도대체 은하한테 무슨 일을 시키고 있는 거야?”

“말했잖냐. 네 눈으로 직접 확인하라고.”

슬쩍 돌아본 오은수가 다시 한 번 씨익 하고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

“그보다는 네 걱정이나 하지 그러냐. 그 여자애야 3천만 갚으면 된다지만 넌 5억이라고 5억. 아, 혹시라도 도망칠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을 거다. 만약 네가 도망치면 그 빚은 고스란히 그 여자애한테 갈 테니까.”

“도망칠 생각 따위 없어. 5억이든 10억이든 내 빚은 내가 알아서 해결해. 그리고…….”

잠시 망설이던 류태현이 이내 결연한 눈빛으로 덧붙였다.

“은하 몫의 빚도 내가 갚겠어. 그러니 은하는 풀어줘.”

“으하하하하! 풀어달라니! 누가 보면 내가 억지로 붙잡아두고 강제노역이라도 시키는 줄 알겠어! 난 엄연히 선의로 너희들을 치료해주고, 또 치료비까지 무상으로 빌려준 건데 말이야!”

“풀어달라면 풀어줘. 5억이든 3천이든 전부 내가 일해서 갚으면 되잖아. 안 그래?”

“새끼…. 배포가 큰 건 좋다만 피도 안 마른 꼬맹이가 돈 귀한 줄 모르고 씨부리는 게 보기가 좋진 않구만 그래.”

류태현의 각오에 이죽거리던 오은수가 다시 한 번 씨익 웃었다. 진중함도 위압감도 없는 경박한 웃음이었지만, 류태현은 그 웃음 하나에 불안해서 신경 전체가 곤두서는 것 같았다.

“크흐흐흐. 뭐, 누가 빚을 갚든 상관은 안 한다만 빚을 대신 갚겠다면 그 여자애 동의는 구해둬라. 내 스스로 말하긴 뭣하지만 내가 꽤 괜찮을 일을 소개해줬거든. 내 생각엔 아마 네가 대신 빚을 갚아준다 해도 자기가 자진해서 일하겠다 할 것 같다만…….”

오은수의 말이 이어질수록 류태현의 머릿속엔 불길한 예감밖에 들지 않았다. 그가 분한 듯 주먹을 꽉 쥐고 부들부들 떨었다.

“오, 도착했구만.”

그러는 사이 두 사람은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했다.

야산 중턱에 위치한 낡은 서양식 저택.

주위에 빙 둘러진 울타리에는 가시덤불이 자라있었고 전체적인 분위기는 을씨년스럽기 그지없었다. 마치 공포영화에 나오는 귀신들린 집을 보는 것 같았다.

‘여기가 은하가 일하는 곳이라고?’

그 외양만 놓고 보면 도무지 무슨 시설인지 알아낼 도리가 없었으나, 류태현의 머릿속엔 이미 온갖 가능성들이 휘몰아치고 있는 중이었다. 마약 재배 시설, 범죄조직의 자금 세탁소, 혹은 VIP를 위한 비밀 성매매 업소에 이르기까지.

“시간이 시간이다 보니까 다들 안에 있나보군. 얼른 들어가지.”

두 사람은 넓은 정원을 지나 그대로 현관 앞에 섰다. 오은수가 문고리를 돌리려는 순간, 류태현의 심장은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문이 열리자 드러난 풍경은.

“못 찾겠다 꾀꼬리! 숨지 말고 나와라!”

“……엉?”

바깥과 달리 제대로 정돈되어 있는 실내. 넓게 트인 홀에는 여덟 살 정도 되는 아이가 서성이고 있었다. 아니, 숨바꼭질을 즐기고 있었다.

‘숨바꼭질? 왜? 도대체 어째서?’

순간적으로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한 류태현이 얼이 빠진 사이, 오은수가 그들을 향해 등을 돌리고 있던 남자아이에게 친근하게 외쳤다.

“현성아! 아저씨 왔다! 숨바꼭질 중이냐?”

“어? 은수 아저씨!”

오은수를 발견한 아이가 투다다다 달려와 점프해 그의 품에 안겼다. 오은수는 마치 제 자식이라도 되는 것처럼 푸근한 미소와 함께 아이를 안아올렸다.

“얘들아! 은수 아저씨 왔어! 다들 나와봐!”

“뭐? 아저씨 왔다고?”

“은수 아저씨!”

“와아! 아저씨다!”

현성의 외침에 홀 구석구석에서 숨어있던 아이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전원 오은수의 방문을 반기는지 얼굴 가득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달려왔다.

“예빈이 찾았다! 민수! 지성이! 그리고 유라! 그리고 또….”

“야! 아저씨 왔다며! 그럼 숨바꼭질은 끝이지! 이거 반칙이야!”

“맞아! 게다가 너 못 찾겠다 꾀꼬리 말했잖아! 그럼 우리가 이긴 거야!”

“응 아니거든? 술래가 못 찾겠다 꾀꼬리 세 번 말할 때까지 게임 계속 하는 거거든? 제일 먼저 나온 게 예빈이니까 다음엔 예빈이 너가 술래야!”

“그런 게 어디 있어! 다시 해 다시!”

“으하하하! 이 짜식들 오늘도 다들 기운차구만! 그렇지만 놀이 가지고 싸우지는 마라! 알겠지?”

“네에!”

어느새 을씨년스럽던 홀은 아이들이 웃고 떠드는 소리로 왁자지껄 시끄러워져 있었다. 그 변화를 류태현이 따라가지 못한 채 엉거주춤 서있자, 스윽 뒤를 돌아본 오은수가 그에게 말했다.

“왜 그러냐 꼬맹아. 고아원은 처음 와보냐?”

“그야 처음 와보……. 아니, 잠깐만. 뭐라고? 고아원? 여기 고아원이야?”

“그래! 내가 개인적으로 운영하고 있는 고아원이다! 비인가시설이긴 하다만, 슬럼엔 오갈 곳 없는 어린애들 천지잖냐. 누구는 그 애들을 거둬줘야 한다 싶어서 내가 만들었지.”

“……왜? 왜 범죄조직이 고아원을…. 자금세탁…? 아니면 어린애들을 전투원으로 키우려고­”

“이 짜식이!”

­콩!

오은수의 꿀밤이 류태현의 머리에 작렬했다. 공격이랄 것도 없는 장난스러운 일격이었지만, 워낙 당황한 채였던지라 류태현은 전혀 반응하지 못했다.

“애들을 잡아다가 전투원으로 키워?! 내가 용문 그 개호로자식들처럼 인간말종 쓰레기인 것 같냐?! 이 버르장머리 없는 자식이, 감히 나의 하해와 같은 사랑을 뭘로 보고­”

“아저씨! 나쁜 말 금지! 원장님이 나쁜 말 쓰지 말라 했잖아요!”

“어이쿠! 이런이런, 내 실수. 너무 오랜만에 와서 규칙을 깜빡 잊었구만 그래!”

“아저씨 벌점 스티커 받아야해요! 벌점 스티커!”

“아이고 큰일이다 큰일! 벌점 스티커라니! 이따 원장님이 날 보시면 엄청 혼내시겠구만! 아이고 무서워라!”

“아하하하하핫! 아저씨 되게 웃겨!”

“아하하하하하!”

한바탕 웃음소리가 지나가고 아이들이 다시 자기들끼리 떠들기 시작했다. 그 틈을 타 류태현이 오은수에게 물었다.

“이봐, 그럼 설마 은하가 일하는 곳이라는 게…….”

“이 고아원이지 그럼 어디겠냐. 물어보니까 청소랑 설거지도 곧잘 하고 요리도 할 줄 안다기에 바로 여기로 채용시켰지. 애들은 이십이 넘는데 직원이 원장 한 명뿐이라서 늘 인력난이었거든.”

“새로온 언니 요리 엄청 잘해! 그래서 어제 나 새언니한테 요리 배웠다?”

“오구오구 그랬쪄요? 우리 예빈이 꿈이 요리사라더니 벌써부터 조기교육 시작했구나!”

“내 꿈은 요리사 아니고 선생님인……아! 언니야!”

오은수와 이야기하던 예빈이라는 여자아이가 오른편을 보며 손을 흔들었다. 자연스레 류태현의 고개 또한 그 시선을 따라간다.

그러자.

“권은하…?”

그곳에는 그가 그토록 지키려 했던 권은하가 있었다. 리본이 잔뜩 달린 핑크색 앞치마에 한 손에는 대걸레와 물통을 든 채.

군데군데 상처의 흔적이 보이긴 했지만 겉보기엔 거의 멀쩡한 것 같았다. 그런 그녀 또한 류태현을 발견하고, 이내 그 표정에 놀라움이 번지기 시작한다.

“태현아!”

­우당탕!

다음 순간 권은하가 들고 있던 대걸레를 던지고 그에게 달려왔다. 엉겁결에 그가 팔을 벌리자 권은하가 노린 것처럼 그의 품으로 다이빙하듯 뛰어들었다.

“다행이다! 깨어났구나! 진짜 다행이야! 네가 죽기라도 하면 어떡하나 내가 진짜 매일 엄청 걱정했는데­”

계속 들이닥친 예상 외의 상황에 류태현의 뇌가 제대로 따라가지 못했다.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던 그의 시선이 천천히 움직여, 이내 아이들에게 둘러싸인 오은수에게로 향했다.

“어때, 이제는 좀 안심이 되나?”

“…….”

“으하하하! 아직 어안이 벙벙한 모양이구만! 그럴 수 있지! 범죄조직 부두목이란 놈이 숲 속에 고아원 차리고 애들이랑 싱글벙글이라니, 어울리지 않는 거에도 정도가 있으니까!”

그렇지만.

그렇게 덧붙인 오은수가 엄지 손가락을 척 올리며 말했다.

“명심해라 꼬맹아! 되먹지 못한 범죄자라 해서 늘 못된 짓만 하는 건 아니야!”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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