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3화 〉 232. (P)경계의 저편에서(8)
* * *
악화일로로 치닫던 상황은 권은하의 등장으로 인해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아니, 그걸 과연 소강상태라 할 수 있을까.
그녀의 등장은 강진윤에겐 희보요, 류태현에겐 비보였다. 어차피 자신은 죽은 목숨, 권은하라도 무사하길 바랐건만. 설마 자진해서 이곳으로 찾아올 줄이야.
‘……아니지. 어차피 내가 실패한 시점에서 은하도 무사하지 못했어.’
허나 곰곰이 생각해보니 별반 달라질 것도 없었다. 조직의 보복을 두려워한 권은하는 슬럼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 그런 그녀를 구하려면 류태현이 강진윤과 담판을 지었어야 했지만, 결국 실패하고 말았으니.
“부탁드려요. 그 녀석 죽, 죽이지 말아주세요……. 얌전히 지부장님께서 시키시는 대로 다 할 테니까…. 이제 도망치지도 반항하지도 않을 테니까…. 제발, 제발 그 녀석만 살려주세요. 부탁, 부탁드릴게요…….”
그런 상황에서 권은하가 이 자리에 나타난 것은 어쩌면 류태현 입장에서 행운일지도 모른다.
어차피 담판에 실패한 차에 그녀가 강진윤에게 자진해서 넘어간다면, 어쩌면 그 자신의 목숨은 부지할 수 있을지도 모르니.
허나 류태현은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권은하의 희생으로 목숨을 부지하는 걸 행운이라 생각지 않는 그의 올곧은 성격이 첫 번째요.
“으흣, 흐흐하핫! 으하하하하!”
사악하기 그지없는 웃음을 흩뿌리는 이 싸이코가 결코 자신을 살려주지 않으리라 생각한 게 두 번째 이유였다.
“권은하라고 했나. 꼬맹아. 너 지금 뭔가 단단히 착각하고 있는 것 아니냐?”
“……네? 착, 착각, 이요?”
“지금 네가 뭐라도 된 것처럼, 가련한 드라마 속 여주인공마냥 자길 희생해서 이 애송이를 살리려는 것 같은데. 애석하게도 넌 그렇게 딜을 걸 수 있는 입장이 아니야. 네가 도망치든 반항하든 난 널 원래부터 가질 생각이었고, 마찬가지로 나한테 덤빈 이 애송이는 반드시 죽일 생각이다. 네가 나한테 정녕 거래를 제안하고 싶다면 네 알량한 희생 따위가 아니라 다른 걸 제시했어야지.”
이를테면 돈이라도 한 10억 준다든가.
류태현에게 했던 것과 똑같이 이죽거린 강진윤이 피식 웃었다. 자신의 말에 점차 무너져내리기 시작하는 권은하의 표정을 보자 그 웃음은 더욱 깊어지기만 했다.
“하, 하지만. 지부장님께서 그 녀석을 죽이면 곤란해지실지도 몰라요.”
“앙? 그건 또 무슨 소리냐?”
“그, 그 녀석 외지인이거든요. 게다가 미성년자니까. 괜히 죽였다가 골치 아픈 일이 생길지도”
“그럴 일 없다. 이 새끼 목을 슬럼가 바깥에다 효수해두지 않는 이상 바깥 놈들이 알 턱이 없으니까.”
“……!!”
“더 할 변명 있나? 없으면 거기서 얌전히 기다려라. 이 애송이 목만 따면 다 같이 돌아갈 거니까. 어이!”
강진윤의 신호에 부하들이 권은하를 붙잡으러 다가갔다. 권은하는 다가오는 부하들에게 반응하지 않은 채, 그저 망연자실하게 류태현을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허나 그것도 잠시.
강진윤의 나이프가 류태현의 목에 들이밀어진 순간, 권은하의 눈동자에 다급한 의지가 깃들었다.
“……안 돼…!”
탓!!
정신을 차렸을 때 권은하의 몸은 쏜살같이 튀어나가고 있었다.
목표는 30미터 전방. 류태현과 강진윤이 있는 곳.
“잡아!!”
부하들은 즉각 반응했다. 재빠르게 뛰쳐나온 부하들이 권은하의 경로를 가로막았다.
그러나.
퍼버벙!!
다음 순간 권은하의 발치에서 폭발이 일어나며 그녀의 몸이 가속했다. 예상치 못한 가속에 부하들은 그녀를 놓치고 만다.
권은하의 초능력은 ‘수소폭발’.
그것은 신체 곳곳에서 압축된 수소를 분사함과 동시에 폭발시키는 능력이었다. 평범한 공격은 물론이고 이동시의 가속에도 응용할 수 있는, 상당히 뛰어난 초능력.
덕분에 권은하는 기습적으로 부하들의 포위를 뚫을 수 있었다. 폭발의 기세를 앞세운 권은하가 마침내 강진윤에게 다다랐다.
그리고 권은하는 그제야 이성을 되찾았다.
‘이제 어떡하지?’
생각보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지금 권은하의 상황이 딱 그랬다. 류태현이 죽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뒤도 생각 않고 달려들긴 했으나, 그 다음이 문제였다.
덤빈다 한들 이길 수 없다. 그렇다면 도망쳐야 할까. 류태현의 몸을 낚아채, 그대로 폭발로 가속하여 도망친다면, 적어도 지금 이 순간의 위기만큼은 모면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고.
그런 찰나의 고민과 함께 권은하의 몸이 잠시 굳었고.
그 틈은 강진윤이 보기에 너무나도 긴 틈이었다.
터억!
“꺄흑?!”
강진윤이 권은하의 목을 손으로 낚아챘다. 숨이 턱 막히자 권은하가 반사적으로 그의 팔을 꽉 쥐었다.
퍼엉!!
자그마한 폭발이 강진윤을 덮쳤다. 그러나 폭발은 그의 옷만 조금 태웠을 뿐 그의 몸엔 그을음조차 만들지 못했다.
“뭐하자는 거냐.”
쿠웅!!
허나 강진윤을 분노시키기엔 충분했다. 그가 권은하의 몸을 땅바닥에 내리꽂으며 분노에 차 물었다.
“……지금 이게 뭐하자는 거냐 도대체. 설마 나한테 덤비려 한 건 아니겠지?”
“…!!”
조곤조곤한 물음에 권은하의 안색이 파랗게 질렸다. 다급함에 가려져 느끼지 못했던 공포감이 다시금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한다.
곧이어 밀려오는 감정은 후회.
권은하는 스스로 무슨 짓을 한 것인가 싶었다. 조직의 간부에게 덤비다니. 항명으로 당장 죽임당해도 이상하지 않은 일이었으니까.
꾸우우욱.
“커, 케흑!”
강진윤의 손아귀에 목이 더욱 조여들자 잔기침이 튀어나왔다. 강진윤이 그 무력한 모습을 내려다보며 이죽거렸다.
“이렇게나 약해빠진 년이 간부 후보생이었다니…. 왜 진즉에 걸러지지 않은 건지 모르겠군. 초능력은 좀 쓸모 있어 보인다만, 그런 초능력을 갖고도 이 수준이라니. 재능이란 게 아예 없는 수준이구만 이건.”
“끄, 끄흐으….”
“헌데 그런 약해빠진 몸으로 나한테 덤비려고 하다니. 대가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냐? 크하하하하하핫!”
강진윤이 크게 웃자 그의 반응을 살피던 부하들도 하나둘 표정을 풀기 시작했다. 권은하의 접근을 막지 못해 문책당할 줄 알았는데, 다행히 자기들 형님의 기분이 나쁘진 않은 것 같다 생각하며.
“은하를 놔줘! 걘 너네 조직이잖아! 같은 편 아니냐고!”
“조금 전까지는 그랬지! 그렇지만 이 알량한 꼬맹이는 날 공격했어! 그건 명백한 배신! 그리고 조직을 배신한 자는 무조건 죽인다! 그게 우리 용문의 법도지!”
연극 배우처럼 우렁차게 외친 강진윤의 손에서 나이프가 휘리릭 돌아갔다.
그리고.
푸욱!!!
“아아아아아악!!!!!”
어깨를 관통한 나이프에 권은하가 비명을 질렀다. 그 비명에 류태현이 구속에서 벗어나보려 했지만, 지칠대로 지친 몸으론 그마저 여의치 않았다. 상처에서 피만 더 흘려댈 뿐이었다.
고통에 몸부림치는 권은하. 그런 권은하를 구하고 싶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류태현. 두 사람의 모습은 강진윤에게 재미와 즐거움을 선사해주었다. 그는 남의 얼굴이 고통과 공포로 일그러지는 데에서 기쁨을 느끼는 중증 싸이코패스였으니.
“……뭐어. 배신자는 죽이는 게 원칙이다만 널 여기서 죽여버리는 건 아깝지. 난 너랑 해보고 싶은 게 참 많거든.”
“아흐으…. 흐으, 흐윽…!”
“그러길래 왜 주제넘게 나한테 덤볐냐. 얌전히 있었으면 그래도 애완동물 정도론 귀여워해줄 생각도 있었는데. 응? 도대체 왜 그런 거냐? 왜 그렇게까지 해서 이 애송이를 구하려 했지?”
“하아…. 하아….”
권은하의 시선이 류태현에게로 향했다. 눈물이고 빗물이고 다 섞여 축축하게 젖은 그 눈동자가, 무력감에 빠져 번민하는 류태현의 모습을 조용히 담아낸다.
“지부장…님. 드릴 말씀, 이 있는데…….”
“오! 그래, 말해봐라.”
“저는, 저는 어떻게 해도 좋으니까……. 장난감이든, 노리개든, 얼마든지 마음껏 괴롭히셔도, 되니까…. 태현이는 이대로, 보내주실, 수, 없을까, 요……?”
고통을 참아가며 겨우겨우 말한 간절한 바람.
“허.”
그 바람에 강진윤의 얼굴에서 표정이란 게 아주 잠깐 사라졌다.
아주, 잠깐 동안만.
“허허! 흐허허! 으허허하하하하학!!!!”
직후 그가 골목 전체에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박장대소했다.
“다들 들었냐?! 아주 지고지순한 희생정신인데! 야, 니들 정말 친구 사이밖에 안 되는 거 맞냐?! 누가 봐도 각별한 사이 같은데! 응?!”
여자를 구하기 위해 범죄조직을 적으로 돌린 남자. 그리고 남자를 구하기 위해 스스로 지옥의 구렁텅이로 들어가려는 여자.
그 둘의 희생은 강진윤의 말대로 연인 사이가 아니고서야 설명이 안 될 정도의 것이었다. 허나 둘 중 어느 누구도 상대방을 연인이라 생각하고 있진 않았다.
다만, 류태현에게 있어 권은하는 그토록 동경하던, 편견도 억압도 없는 슬럼에서 처음으로 사귄 친구요.
권은하에게 있어 류태현 또한, 그녀의 삶에 있어 처음으로 사귀어본 친구였기에.
두 사람은 서로 연인 사이는 아닐지언정 그에 준할 정도로 서로가 소중했을 뿐이었다.
“크흐흐…. 진짜, 저어어엉말 기대되는군. 이렇게 구미가 당기는 장난감은 오랜만이야. 벌써부터 널 어떻게 가지고 놀까 설레는구나. 후우우우우…….”
크게 호흡을 뱉은 강진윤이 품에서 전자담배를 꺼냈다. 일견 평범해보였지만 안에 든 액상은 초인 전용으로 독하게 배합한 마약 성분이었다.
“후우우우우우.”
달콤한 과일향의 연기가 쏟아지는 비 사이로 퍼져나가고, 혈관 가득 차오르는 기분 좋은 느낌에 취한 강진윤이 천천히 읊조렸다.
“……그래. 일단 너무 일찍 망가지면 안 되니까 처음엔 가볍게. 정석적으로 가자고. 침대 위에 수갑 채워서 던져놓고 삼일밤낮으로 범하는 거지. 아무리 초인이라도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계집애가 버텨봤자 얼마나 버티겠어? 이틀째만 되어도 울고불고 난리 치며 제발 그만둬달라고 하겠지. 그럼 그쯤해서 채찍 대신 당근도 줘야겠다. 중독성이 약한 약물부터 시작해서. 엑스터시, 히로뽕, 헤로인, 코카인……. 조금씩 중독시키다 보면 점점 이성보다도 약을 하고 싶은 본능이 강해져서, 네가 그토록 소중히 여기던 저 애송이도 잊게 될 거다. 삼주? 길어야 한 달이면 지금은 원수처럼 생각하는 날 그 누구보다 따르고 떠받들게 될 거다. 개처럼 짖으라면 짖고, 발바닥이라도 핥으라면 기꺼이 핥겠지. 너도 초인이니 일반인에 비해선 약물 내성이 강하겠다만, 덕분에 오래도록 내게 즐거움을 줄 수 있을 테니 좋은 게 좋은 거 아니겠어? 응? 기대되지? 안 그래?”
“아, 아아…….”
끝도 없이 이어지는 중얼거림은 강진윤이 권은하를 어떻게 망가뜨릴지에 대한 악마적인 계획이었다. 말이 이어지면 이어질수록 권은하의 표정은 하얗게 질렸고, 반대급부로 강진윤은 기대감과 흥분감을 주체하지 못해 새하얀 이빨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그러다가 질리면 적당히 창관에 팔아넘기거나, 정 못 써먹는 상태다 싶으면 죽이고 갈아서 야산에 뿌리는 거지 뭐. 그렇게 되기 싫으면 최대한 오래 버티라고. 혹시 모르잖아? 네가 정말 오랫동안 날 즐겁게 해주면, 내가 그 노고를 높이 사 널 자유롭게 풀어줄지? 그래봐야 약물중독자니 하루도 못 버티고 돌아오겠지만 말이야. 혹시 모르는 거잖아? 응? 그러니 희망을 가지라고. 벌써부터 그렇게 세상 다 망한 표정 짓지 말고 말이야.”
“…….”
“……표정 풀라니까. 내 말이 말 같지 않지?”
푸욱!!
“끄하아아아악!!”
나이프가 이미 벌어져있던 상처를 다시 한 번 헤집었다. 어깨가 타오르는 것 같은 고통에 권은하가 몸부림쳤다. 강진윤이 나이프를 꽉 붙잡고 있었기에 상처가 더욱 벌어졌고, 때문에 그녀의 입에서 다시 한 번 고통에 찬 비명이 터져나왔다.
“그만해 이 개자식아!! 그만하라고 씨발!!!!”
“내가 왜 그만둬야 하지? 슬럼에선 힘이 곧 법이다. 난 나보다 약한 놈 명령 따윈 듣지 않아.”
푹!!
“아흐으으윽!!”
“이 개새끼가!!!”
류태현의 눈동자에 극한의 분노가 서렸다. 어찌나 분노했는지, 그리고 어찌나 원통한지 뺨을 따라 한줄기 피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자기 팔을 붙잡고 있는 이 부하들을 뿌리치고 강진윤을 죽여버리고 싶다고.
그렇게 생각했지만 그의 몸은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류태현의 현재 능력으론 여기까지가 한계라고.
그렇게 말하는 듯 힘조차 제대로 들어가지 않는 자신의 몸이 류태현은 원망스럽기 그지없었다. 그 원망이 장작이 되어 분노가 타올랐고, 갈 곳을 잃은 분노가 그의 가슴속을 시커멓게 태워갔다.
허나 현실은 냉혹한 법.
제아무리 분노가 극에 달했다 한들, ‘분노로 인한 각성’ 같은 소년만화에나 나올법한 전개는 평범한 사람들에겐 결코 허락되지 않은 기적이었다.
그렇지만.
류태현은 평범한 사람이 아닌, 이 세상의 주인공이었다.
푸욱.
“꺄아아아아아아악!!!”
“어이쿠. 이거 신나서 너무 찔러댔군. 이대로 뒈지면 나만 손해인데 말이야.”
“그만두라고 했잖아!! 이 개자식아!!!!”
꾸드드득!!
그의 근육이 거칠게 부풀어올랐다. 분노에 의해 아직 깨어나지 않았던 잠재력이 일부 각성하며, 평소보다 강한 출력으로 그의 초능력이 발동된다.
류태현, 그의 초능력은 신체강화.
우드득!!
능력에 의해 강화된 근육이 강제로 부러진 뼈를 붙들어 맸다. 잘린 혈관을 조여 출혈을 막았다. 심상치 않은 기세에 그를 붙잡고 있던 부하들이 경계했지만, 다음 순간 그들은 요란한 굉음과 함께 좌우로 나가떨어지고 있었다.
콰아앙!!
주위의 부하를 쳐낸 소리. 그리고 지면을 박찬 소리. 그 소리들이 한순간에 겹쳐 하나의 굉음이 되었다. 분노에 찬 류태현이 달려들자 강진윤이 나이프를 뽑아들며 웃었다.
“그럼 그렇지!!! 이래도 안 덤비면 섭하지!!”
강진윤이 흥분한 기세로 나이프를 휘둘렀다. 흥분한 기세, 라곤 하지만 그 궤적은 한없이 냉철하고 날카로웠다. 순식간에 세 군데의 자상이 추가되고, 숨통을 끊기 위한 찌르기가 류태현의 목젖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푸욱!!!
나이프가 깔끔하게 류태현의 가슴을 꿰뚫어 등으로 튀어나왔다. 류태현이 돌진하던 기세 그대로 강진윤에게 안기듯 쓰러진다.
“크하하하! 사내새끼가 징그럽게 안기기는…! 그렇게 멧돼지마냥 돌진만 해서야 나 죽여줍쇼 하는 것밖에 더 되겠”
그러나 다음 순간.
콰득!!
“크윽.”
류태현의 턱이 강진윤의 목덜미를 씹었다. 그리 날카롭지도 않은 이빨들이 억지로 살갗을 뚫고 근육에 박혔다.
“이 자식이 발버둥을…….”
허나 그래봐야 같잖은 저항일 뿐이라고.
강진윤은 그렇게 생각했으나, 그가 미처 간과한 것이 하나 있었으니. 바로 류태현이 지금 화가 나도 단단히 난 상태였다는 점이었다.
콰드득!!
“커억!!”
무언가 잘못되었다. 극심한 격통과 함께 그렇게 생각했을 땐 이미 늦은 시점이었다. 강진윤이 거칠게 류태현을 밀어내자, 류태현의 턱이 그가 씹고 있던 목덜미의 살점째로 뜯어져나갔다.
투확!!
동시에 터져 나온 대량의 핏물.
순간 강진윤은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채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자신이 주저앉은 걸 알아차린 것조차 3초는 지나서였다.
“이게, 무슨…….”
강진윤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어지럽게 굴러간다.
우선 눈앞에 류태현에게로. 가슴에 박힌 나이프 자루를 붙잡은 채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는 그는, 턱부터 시작해 그 아래로 시뻘건 핏물이 잔뜩 번져 있었다.
그중에는 류태현의 피도 있으나 강진윤 자신의 피도 있으리라. 그렇게 생각한 순간 류태현이 입에 물고 있던 살점을 퉤 뱉었다.
그 다음 강진윤의 눈동자가 향한 곳은 자신의 목덜미였다. 허나 자기 목을 자기 눈으로 볼 수 있을 리가 없으니, 그는 어렴풋이 아래쪽으로 시선을 내리며 제 목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움푹.
가져다댄 손가락이 허공을 헤매다 이내 축축한 안쪽에 닿는다. 축축한 건 빗물 때문인가 싶었으나 어째 빗물치곤 꽤 따듯하고, 또 끈적했다.
“이런, 씨바알…….”
강진윤은 살인의 프로. 주요 장기나 혈관의 위치 정도야 꿰고 있었다. 그런 그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렸다. 비단 출혈 때문만은 아니었다.
“형님!!”
“포셔, 커헉! 포션 가져와, 포션…!”
강진윤이 피가 줄줄 새는 목덜미를 틀어막는 한편, 그를 보필하는 부하 몇을 제외한 나머지는 류태현을 둘러싸기 시작했다.
“저 새끼 잡아!”
“저 자식이 감히 형님을!”
“잡아 족쳐!!”
그들이 그동안 개입하지 않고 있던 건 일련의 사태가 강진윤의 ‘놀이’였기 때문이었다. 허나 강진윤이 치명상을 입은 지금 그 놀이는 끝이 났다.
살벌한 기세를 풍기며 주위를 둘러싸는 조직원들.
그들은 전원 한때 간부를 노렸던, 그리고 몇몇은 지금도 간부자리를 노리고 있는 용문의 정예 중의 정예였다. 그들이 내뿜는 형형한 살기가 류태현을 압박했으나.
그는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다.
타앗!!
류태현의 몸이 튀어나갔다. 강진윤이 있는 방향으로.
당연히 그쪽은 조직원들의 방비가 가장 두꺼운 곳. 그러나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시퍼런 날붙이를 빼든 조직원들 사이로 류태현이 다이빙하듯 뛰어들었다.
퍽! 퍼억!! 퍼억!! 퍽! 퍼벅! 퍼어억!! 퍼버벅!!
곧 사람들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가득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몰려든 인파 사이에서 각양각색의 고함과 비명이 주위로 새어나갔다.
“형님! 여기 포션입니다! 얼른 이걸 상처에”
“이 새끼야, 이건 하급포션이잖아…! 이걸론 상처도 제대로 못 막는데…….”
“죄송합니다 형님! 하나 있던 중급 포션은 좀 전에 작은 형님께서 상태가 위독하셔가지고…….”
“이 새끼들이 쓸데없는 짓을…. 커흑?!”
“형님, 일단 돌아가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여긴 저희한테 맡기시고 얼른 돌아가십쇼!”
“크으으……. 이런 씨브알…….”
부하의 염려에 강진윤의 미간이 와락 일그러졌다.
이렇게 당해놓고 도망치듯 돌아갈쏘냐. 그렇게 말하는 듯한 표정.
퍼억! 퍼벅! 퍼억! 퍼억!! 퍼어억!!
허나 전투 광경을 본 순간 그는 오싹한 소름을 느꼈다.
류태현의 시선.
수십 명에게 둘러싸인 채 바쁘게 손발을 놀리며 싸우고 있던 류태현의 시선은 온전히 강진윤에게만 향해 있었다. 결코 한눈팔지 않겠다고, 내 목표는 오로지 네놈이라고 부르짖는 듯한 그 형형한 눈빛에 강진윤은 자신도 모르게 두려움을 느꼈다.
“……이런 제기랄! 확실하게 처리하고 와라. 남자새낀 목을 잘라버리고 계집애는 내 앞에 끌고 와라. 알겠냐?”
“예 형님! 걱정하지 마시고 얼른 가십쇼! 여긴 저희가 막을 테니!”
강진윤은 분명 ‘확실하게 죽이라’ 했음에도 부하는 류태현을 ‘막겠다’고 말했다. 그 말에서부터 이미 그들이 류태현의 기세에 압도되었음을 의미하고 있었다.
부아아아아앙.
허나 강진윤은 그 부분을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채 차에 올라 급히 본거지로 돌아갔다. 여전히 중증인 그의 오른팔 곽준효와 함께.
남은 것은 강진윤과 곽준효를 제외한 정예 조직원 24명.
‘놈은 빈사 상태다. 이 정도 인원이면 충분히 이기고도 남아! 걱정할 건 없어!’
강진윤을 보낸 부하는 그렇게 생각하며 전투의 현장으로 몸을 돌렸다.
그러나.
“끄아아아악!!”
“아악!! 내 팔!! 내 파아아아알!!”
“뭣들 하는 거야! 한번에 덤벼서 잡아 족치라고!!”
“그치만 형님! 이 새끼 이거 미쳤습니다! 눈 다 뒤집어져선 무슨 귀신 같이”
“지금 이십 대 일인데 뭘 쫄고 있냐?! 한번에 달려들면 이길 수 있어!! 죽여!!!!”
“으아아아아아!!!!”
그야말로 아비규환에 빠진 전투 현장을 목격했을 때, 그 확신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용문에서도 걸러지고 걸러진 정예 조직원 24명
대
다 죽어가는 중학생 한 명.
계산할 것도 없다. 승패의 향방은 명백하다.
애써 그렇게 생각해보았지만 그의 다리는 어느새 후들후들 공포에 질려 떨고 있었다.
그로부터 얼마나 지났을까.
폭우 속에서 벌어진 1대24의 전투는 어느덧 끝을 맞이하고 있었다.
“꺼억…!”
쿠웅.
마지막으로 서있던 조직원이 단말마와 함께 쓰러졌다. 조금 전 강진윤을 배웅한 바로 그 조직원이었다.
“허억…! 허억…! 허억…!”
류태현은 기어코 24명의 조직원 전원을 쓰러뜨렸다. 결코 성하다 말하지 못할 몸 상태로 말이다.
허나 그것은 그야말로 몇 번의 기적이 겹친 결과였다. 류태현은 꺼지기 직전의 촛불처럼 활활 타올랐고, 그 끝에 이제는 하얗게 타고 난 재밖에 남지 않았다.
곧 마지막 조직원이 그랬듯 그의 무릎이 꺾이고, 이내 그가 바닥에 털썩 쓰러지려고 했다.
터억.
그러나 그러는 일은 없었다. 쓰러지기 직전 권은하가 그의 몸을 받아냈기에.
권은하 또한 몸이 성한 상태는 아니었다. 잔뜩 헤집어진 오른쪽 어깨에선 피가 줄줄 새어나오고 있었고, 때문에 그쪽 팔은 들지조차 못했다. 그 외에도 강진윤에게 당한 곳이 한두군데가 아니요, 앞서 낮에 맞았던 부상까지 합하면 그녀 또한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상태인 건 마찬가지.
허나 권은하는 쓰러질 수 없었다.
자신이 쓰러졌다간 류태현을 도와줄 사람이 아무도 남지 않게 되니까.
“……은, 하야…….”
“……조금만 기다려. 지금, 당장 치료해줄 테니까…….”
애써 그렇게 말했지만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류태현의 부상은 심각하다 수준이 아니었다. 그는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한 산송장이었다.
가슴에 여전히 박혀있는 나이프부터 시작해 온몸에 새겨진 수많은 상처들. 쏟아낸 피는 빗물에 씻겨 흘러갔다지만 그 양이 치사량에 근접했음은 뻔하디 뻔한 일이었으니.
하물며 그들이 있는 곳은 슬럼의 깊숙한 곳. 이곳은 경찰차도 구급차도 오지 않는다. 류태현을 살리려면 그를 슬럼 외곽까지 데리고 나가거나, 혹은 지금 당장 그의 몸에 포션을 들이붓다시피 해야 할 것이다.
허나 둘 다 불가능한 일이었다. 권은하는 포션 따위 가지고 있지 않았고, 슬럼 외곽까지 가봐야 그 전에 류태현이 먼저 죽을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반드시, 반드시 치료해줄 테니까……”
그러나 권은하는 포기하지 않았다. 한팔로 류태현의 몸을 얼싸안은 채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속도는 한없이 느렸지만.
그런 속도로 가봐야 바깥으로 나가기도 전에 류태현이 죽으리란 건 명백했지만.
권은하는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한걸음 한걸음 그의 몸을 슬럼 바깥으로 끌고 갔다. 머릿속 한 구석에선 부질없는 노력이라는 생각이 우후죽순 생겨났지만, 애써 그 생각을 무시하며.
그야 포기할 수 있을 리가 없으니까.
자신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어준 친구를.
그 끝에 정말 자신을 구해버린 친구를, 어떻게 외면하겠는가.
털썩.
다만 그것은 정신적인 각오일 뿐이었다.
꾸우욱.
지면에 쓰러진 권은하가 분한 듯 바닥을 손톱으로 긁었다. 아니, 그것은 조금이라도 앞으로 나아가려는 몸부림이었다. 그러나 지칠 대로 지쳐, 당장에라도 의식을 잃을 것만 같은 몸뚱이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흐윽…!”
류태현을 살릴 수 없다. 차갑게 직면한 현실로부터 느낀 원통함이, 무력감이, 그리고 설움이 한데 어우러져 따스한 눈물이 되었다.
비는 여전히 억수처럼 내리고 있었고, 그 가운데 그녀가 흘리는 눈물이래봐야 대양에 물 한 컵 붓는 정도도 안 되었지만, 그럼에도 그녀의 두 뺨은 뜨거운 눈물로 따스하게 물들었다.
“제발, 아무나…. 누구 없어요…? 제발, 제 친구 좀 살려주세요……. 부탁드릴게요…. 제발, 제발…….”
마지막 기력을 쥐어짜내 그렇게 외쳐보지만 그 외침조차 빗소리에 묻혀 퍼지지 못했다. 깊은 밤의 슬럼은 고요하기 그지없어, 권은하를 더욱더 절망의 구렁텅이로 사정없이 밀어넣고 있었다.
“제발……. 아무나, 도와주세요…. 아무나. 아무나……. 태현이 좀, 살려………….”
이윽고 기력이 다하자 간절한 목소리마저 스러졌다. 잠시 두 뺨을 따스하게 데웠던 눈물조차 더는 흐르지 않았다. 류태현을 꽈악 붙잡은 왼팔에도, 이젠 더 이상 온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현실은 잔혹하다. 사람들은 으레 그렇게 말하곤 하지만 이 경우에도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본래라면 류태현은 슬럼가에서 객사하고 권은하는 강진윤의 노리개로 굴려진 끝에 망가졌을 터.
허나 두 사람은 지금 죽어간다곤 해도, 서로 손을 맞잡은 채 함께 죽어가고 있었다. 본래대로의 절망적인 현실에 비하면, 어쩌면 이러한 끝맺음은 두 사람에게 있어 그나마 나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이 이상의 기적을 바라는 건 사치일 거라고.
흐려져 가는 의식 속에서 권은하는 무심코 그런 식으로 생각했다. 그런 식으로 납득했다. 그러자 겨우겨우 붙잡고 있던 실낱같은 의식마저 완전히 수면 아래로 잠겼다.
고요해진 밤거리. 싸늘하게 식어가는 소년과 소녀.
비록 비극적인 마무리라 해도 그것은 두 사람이 최선을 다한 끝에 맞이한 결말이었다. 특히 소년에 이르러서는 잠재력의 각성부터 시작해 몇 번에 달하는 기적 끝에 조직원을 전원 쓰러뜨리지 않았나.
권은하의 말대로 그 이상의 기적을 바라는 건 사치요, 애초에 기적이란 그렇게 쉽게 반복되는 게 아니었다.
그렇지만.
“이야, 용문 놈들이 오밤중에 한딱가리 한다기에 보러 왔다 진귀한 걸 봤네. 안 그래 쏨밧?”
“그렇다. 저 남자애. 엄청 강했다. 곽준효, 강진윤, 다른 조직원. 전부 이겼다.”
“이럴 줄 알았으면 보지만 말고 도와줄 걸 그랬어. 그랬으면 강진윤 그놈 오늘 담글 수 있었는데. 아무튼…….”
소년은, 류태현은 명실상부 이 세상의 주인공.
“……저놈 저거 보통 물건이 아닌 것 같은데. 우리가 데려가면 도움 좀 될 것 같지 않아?”
“Of course. 성철이형. 늘 찾았다. 강한 신입. 강한 전력. 전쟁에서 이기기 위한.”
“좋아. 그럼 후딱 데리고 가자고.”
"여자애도 같이?"
"그래야지. 딱 봐도 각별해보이잖아. 괜히 놓고 가면 꿈자리 찝찝해."
그의 인생에 있어, 기적이란 그리 드문 일도 아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