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2화 〉 231. (P)경계의 저편에서(7)
* * *
류태현이 곽준효를 이겼을 시각으로부터 약 1시간 전.
“…….”
권은하는 침대에 누운 채 뜬눈으로 뒤척이고 있었다. 도통 잠이 오지 않은 탓이었다.
낮에 있던 일을 생각하면 피곤해서 곧바로 곯아떨어질 만도 하건만, 아무래도 육체의 피로를 초조함이나 긴장감이 넘어선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새벽에 일어나면 곧장 슬럼으로 돌아가야 하고, 그럼 그녀의 인생은 그 순간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으니.
슬럼으로의 귀환은 이미 속으로 결론을 내린 일. 그걸 가지고 더 고민해봐야 마음고생만 할 뿐이었다. 허나 어디 마음이란 게 그 사람 마음대로 되는 것이겠는가.
벌떡.
상념에 젖어 한숨만 반복하던 권은하가 벌떡 일어섰다. 물이라도 마시고, 세수라도 하면 좀 괜찮아지려나 싶어서.
‘근데 냉장고에서 멋대로 꺼내 마시면 안 될 거 같은데…….’
시계를 보니 자신이 잠자리에 들고 20분 정도 지났다. 고로 류태현은 아직 일어나 있으리라.
그렇게 생각한 권은하가 거실로 나가보았지만, 류태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방에 들어갔나 싶어 그의 방문을 두드려봤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태현아…?”
설마 벌써 잠이 든 것인가. 고민하던 권은하가 슬쩍 방문을 열었다. 다행히 잠겨있지는 않았다.
“류태현…?”
그리고 다음 순간, 그녀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텅 빈 방 안. 활짝 열린 창문. 그리고 그 창문으로 들이닥치고 있는 매서운 빗방울들.
권은하는 반사적으로 달려가 창문을 닫았다가, 왜 방이 텅 빈 채로 창문만 열려 있는지에 대해 생각했다. 그녀가 결론에 이르기까진 오래 걸리지 않았다.
“설마…….”
권은하의 뇌리에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애써 아닐 거라고 되뇌어보지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자신의 예감이 맞는 것 같았다.
“류태현 이 멍청이가…!”
고민은 짧고 결단은 빨랐다. 권은하는 곧바로 신발을 챙겨 신고 거리로 나섰다. 억수처럼 쏟아지는 빗물에도 아랑곳 않고, 곧장 슬럼가로 달려갔다.
류태현이 곽준효를 쓰러뜨린 것으로부터 1시간 전의 일이었다.
***
“……다음.”
나지막히 울려퍼지는 류태현의 목소리에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조직원이, 심지어 강진윤마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곽준효는 강진윤의 오른팔. 그의 밑에 있는 조직원들 중 가장 강한 사내였다. 강진윤을 보필하는 걸 고집하지 않았다면 진즉에 간부가 되었어도 이상하지 않을 인물.
‘준효 놈이 전력을 다한 건 아니다. 저 애송이를 굴복시키려고 일부러 끝장을 내지 않았으니까. 그렇지만, 그렇다 해도 고작 열대여섯 먹은 꼬맹이가 준효를 이긴다는 게……, 말이나 되는 일인가?’
말도 안 되는 일이다. 허나 그 말은 역으로 류태현이 자신의 강함을 훌륭하게 증명해냈단 소리.
“크흐흐…. 이거 참 대단하군. 정말 예상 외야.”
곧 강진윤의 입가에 진한 웃음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설마 준효까지 쓰러뜨릴 줄은 몰랐어. 그래, 그 정도 실력이면 자신만만할 만도 하지. 자신 있게 10억을 부르기에 뭔가 했는데, 확실히 그만한 값어치는 하겠구만.”
“그렇다면 거래를 받아들이겠다는 건가?”
“계속 따박따박 반말 하는 건 좀 그렇지만……. 그래! 뭐 좋다! 거래를 받아들이지! 네 말대로 권은하? 그 여자애한텐 손 하나 대지 않으마! 대신 넌 내가 원할 때마다 내 밑에서 일하는 거다. 이의 없겠지?”
그 말에 류태현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강진윤이 크하하핫! 웃으며 앞으로 나섰다.
“이거 예기치 않게 막강한 전력을 손에 넣게 되었군. 앞으로 잘 부탁하지.”
그렇게 말한 강진윤이 류태현에게 악수를 청했다. 잠시 그 손을 바라보던 류태현이 이내 안심한 표정을 지으며 그 손을 맞잡았다.
그 순간.
스걱!!
퍼억!!
날카로운 소리와 둔탁한 타격음. 있는 힘껏 발길질을 날린 류태현의 무릎이 비틀거린다. 반면 강진윤은 그에게 얻어맞은 배를 손으로 어루만졌다.
“크으. 꽤 하는구만. 공격이 아주 묵직해.”
“……이 새끼가. 지금 이게 무슨 짓이야?!”
“무슨 짓이긴. 넌 설마 내가 진짜 네 거래를 받아들일 줄 알았냐? 이 머릿속이 꽃밭으로 가득 찬 핏덩어리야?”
강진윤이 이죽거리며 나이프를 휘리릭 돌렸다. 나이프의 칼날에는 새빨간 피가 가득 묻어 있었다.
주륵.
류태현의 옆구리에서 피가 줄줄 샜다. 공격이 닿기 직전 가까스로 강진윤을 걷어차 물러서긴 했지만 완벽히 피하진 못했다. 그가 입고 있던 티셔츠가 붉게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너한테도 나쁜 거래는 아니었을 텐데.”
“그래. 나쁜 거래는 아니지. 그렇지만 신뢰가 영 안 간다 이 말이야.”
“신뢰라고?”
“너라는 인간을 믿을 수가 있어야지. 딱 보니까 어쭙잖은 정의감에 반골 기질도 충만한 놈을, 내가 도대체 뭘 믿고 밑에 둬야 하지? 그런 놈을 밑에 뒀다가 무슨 화를 입으라고? 언제 나한테 이빨을 들이댈지 모르는데?”
류태현은 권은하를 구하기 위해 범죄조직에 투신하고자 했다. 그런 정의감을 가진 인간은 당연히 범죄조직과 맞을 리가.
보나마나 자신이 명령을 내린다 한들 어지간해선 비협조적일 테고, 어쩌면 일부러 명령을 어기거나 배신하려 할지도 모른다고.
강진윤이 류태현을 찌른 건 그런 이유에서였다.
“뭐, 그래도 네 강함이 탐난 건 사실이야. 적당한 실력이면 힘으로 찍어눌러서 적당히 써먹으려는 생각도 있었지. 그런데…….”
강진윤의 시선이 쓰러진 곽준효에게로 향했다.
우직하게 자기 밑에 있는 걸 고집하지만 않았어도, 진즉에 간부 자리에 올랐을 미련한 오른팔.
그런 그가 쓰러진 채 파들파들 경련하고 있는 모습이 강진윤의 눈에 깊숙이 박힌다.
“……내 예상보다 애송이, 네가 좀 많이 강해서 말이지. 밑에 두고 통제하기도 힘들 것 같고 괜히 배신이라도 했다간 성가셔질 것 같거든. 그래서 그냥 여기서 깔끔하게 죽이기로 했다.”
“그게 무슨 같잖은 논리야…! 은하만 놔주면 댁 밑에서 얼마든지 일해준다고 했잖아!”
“원래 슬럼에서 구두계약은 믿는 거 아니다. 이 참에 배워라 애송아.”
뭐, 이제부터 뒤질 건데 의미도 없겠지만.
그렇게 덧붙인 강진윤이 류태현에게 파고들었다.
파밧!
신속.
강진윤의 돌진 속도는 그야말로 류태현조차 감히 따라갈 수 없을 정도였다. 류태현에게 가능한 건 그저 어떻게든 치명상을 피하는 것뿐.
서걱! 스걱!
그렇기에 한 번 나이프가 휘둘러질 때마다 살갗이 갈라지고 핏물이 튀었다. 반격조차 허용치 않는 매서운 공격에 류태현의 기세가 크게 위축된다.
“애송이! 아까 그 기세는 어디 갔나! 응?!”
강진윤의 이죽거림에 류태현은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대답할 여유조차 없었으니까.
‘씨발. 몸만 멀쩡했어도 이깟 놈쯤…!’
후보생들부터 시작해 박형석과 곽준효에 이르기까지. 거듭된 연전에 류태현의 몸은 지칠 대로 지쳐있었다. 게다가 부상 또한 심각한 수준. 그런 몸으로 용문의 간부인 강진윤을 이기기란 불가능이었다.
물론, 설령 그의 몸이 만전의 상태였더라도 강진윤에게 미칠 순 없었겠지만.
푸욱!
“끄아아아아!!”
가까스로 피해내던 나이프가 이윽고 류태현의 몸을 정확히 꿰뚫었다. 쇄골 사이에 박혀 아슬아슬하게 폐를 빗겨간 나이프. 그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퍼억!!
이어지는 발차기에 류태현의 몸이 지면을 굴렀다.
“허억…! 허억…! 허억…!!”
그의 몸은 이미 한계였다. 쇄골에 꽂힌 나이프조차 뽑지 못한 채 그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잡아서 일으켜 세워.”
강진윤의 명령에 부하 둘이 류태현의 팔을 하나씩 잡았다. 힘없이 바닥에 꿇어앉은 그의 앞에 강진윤이 털썩 쭈구려 앉았다.
“어이, 꼬맹아. 죽이기 전에 뭐 하나만 물어보자. 너 어디서 굴러먹다 온 놈이냐? 너 같은 파이팅 넘치는 꼬맹이 소문을 내가 못 들었을 리가 없는데 말이야.”
“…….”
“말해봐라. 성철파냐? 아니면 블랙스미스 놈들? 설마하니 외지인은 아닐 테고. 바깥에 살던 놈이 뭐가 아쉽다고 슬럼에서 뒤지려고 환장하겠어? 안 그래?”
그 말에 류태현의 입가에 피식 웃음이 떠올랐다. 강진윤의 말마따나, 도대체 자신이 뭐가 아쉬워서 이렇게 죽음을 자초했나 싶어서.
허나 그 웃음을 강진윤은 전혀 다르게 받아들였다.
“비웃어? 이 새끼가,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되지? 내가 널 못 죽일 것 같냐? 너 지금 당장 나한테 싹싹 빌어도 모자랄 판이야!”
“……빌면. 빌면 뭐 살려주기라도 할 건가?”
“크핫! 물론 그건 아니지! 난 나한테 덤빈 놈은 절대 가만 두지 않거든.”
짐짓 호탕한 호걸인 것처럼 말하고 있었으나 그의 논리는 졸렬하기 짝이 없었다. 제아무리 정당화해보려고 해도 그는 결국 류태현과 나눈 약속을 어기고 그를 기습한 입장이었으니까.
허나 그 부분을 지적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슬럼에선 힘이 곧 법이요 권력이었고, 강진윤은 지금 이 자리에서 힘의 정점에 오른 사내였다. 감히 누가 그의 말에 거역하겠는가.
제 목숨이 조금이라도 아까운 사람이라면 결코 거역하지 못하리라.
“뭐, 준효를 이긴 보상으로다가 고통스럽지 않게 단번에 죽여주긴 하마. 혹시 마지막으로 남길 말이라도 있냐?”
“…….”
그 말에 류태현은 생각에 잠겼다. 유언 따위를 고르려 한 게 아니었다. 그저 자신이 왜, 지금 이 자리에서 이런 꼴에 처하게 되었는지를 되새길 뿐이었다.
‘시발. 꼴에 정의감 좀 발휘해보려 했다가 좆됐네 진짜.’
류태현은 후회하고 있었다. ‘자신의 뜻대로 권은하를 구하려 한 결과이니 후회는 없다’라고 말하기에 그는 아직 어리고 미성숙했기에.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스스로의 어리석음에 대한 후회일 뿐. 권은하를 원망한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그렇기에 류태현은, 자신의 어리석음으로 인해 자초된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할 말 없어. 죽일 거면 얼른 죽이기나 해.”
“……꼬맹아. 너 정말 미성년자 맞냐? 혹시 내용물은 한 4, 50대 되는 거 아니냐? 무슨 애송이가 지금부터 뒤진다는데 이렇게 담담해?”
놀라다 못해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강진윤이 그의 쇄골에 박혔던 나이프를 뽑아들었다. 울컥울컥 붉은 핏물이 솟아오르고, 그가 류태현의 목에 시뻘건 칼날을 들이밀었다.
바로 그 순간.
“잠깐만요!!”
쏟아지는 빗소리를 뚫고 들어온 카랑카랑한 외침.
“…이런 씨발.”
그 외침에 류태현의 표정이 단숨에 어두워졌다.
“으핫! 으하하하하하!!”
반면 강진윤은 숫제 눈물까지 흘리며 폭소했다. 그의 시선이 도로 저편에서 헐떡이고 있는 한 소녀에게 향한다.
“주, 죽이지 말아 주세요! 도망치지 않을게요! 반항하지 않을게요! 그러니까 제발…!”
권은하의 다급한 외침에 강진윤은 순순히 나이프를 거뒀다. 그러나 류태현은 도무지 안심할 수 없었다.
“으흐흐흐…. 씨발. 야, 애송아. 저거 좀 봐라. 어째 상황이 재미있어지는 것 같지 않냐?”
그의 얼굴에 떠오른, 사악하기 그지없는 웃음을 보아버렸기에.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