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카데미 경비원으로 빙의당했다-230화 (231/266)

〈 230화 〉 229. (P)경계의 저편에서(5)

* * *

“밥 감사히 잘 먹었어요 어머님. 진짜 맛있었어요. 그치만 시간도 늦었고 전 이만 들어가볼게요. 감사했습니다.”

고개를 꾸벅 숙이고 가게를 나서려던 권은하의 손목을 김수희가 덥석 붙잡았다.

“자고 가렴. 시간도 늦었는데 여자애 혼자 어떻게 보내니.”

“아뇨, 그렇지만 이 이상 폐를 끼칠 수는…….”

“폐는 무슨. 말했잖니. 오늘 하루 자기 집이라 생각하고 편히 쉬다 가라고. 마침 태현이 누나 방이 비어있으니까 거기서 자면 돼. 태현아?”

“어. 내가 준비해둘게. 가자.”

“……정말 감사합니다. 그리고 번번이 폐를 끼쳐드려 죄송­”

“거 사과 안 해도 된다 그러시잖아. 얼른 가자.”

류태현이 억지로 그녀의 손을 낚아채 바깥으로 향했다. 그 둘의 뒷모습을 김수희가 측은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의 남편 류승철은 주방 정리 중이었지만, 사실 신경 안 쓰는 채 하면서도 귀를 곤두세우고 그들의 대화를 엿듣고 있었다.

“위로 올라가자. 거기가 우리 집이거든.”

류태현은 권은하를 가게 옆 계단으로 데리고 갔다. 억수처럼 쏟아지는 비를 피해 2층 집 안으로 들어가자 아늑한 집안 풍경이 두 사람을 반겨주었다.

“여기가 네가 잘 방이고 저기가 욕실. 일단 잠깐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갈아입을 옷 가져올 테니까.”

갈아입을 옷이라니. 설마 누나 옷이라도 빌려주려는 걸까.

권은하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류태현이 향한 곳은 자신의 방이었다. 곧 그가 펑퍼짐한 흰색 티셔츠와 짧은 반바지를 가져왔다.

“위에는 대충 이거 걸치고. 아래는 허리끈 고무줄이라 아마 흘러내리진 않을 거야. 누나 옷 빌려줄까 했는데 본인 허락도 없이 그러긴 좀 거시기해서…….”

“괜찮아. 무슨 옷이든 고맙지 지금은. 안에서 갈아입으면 돼?”

“갈아입기 전에 일단 씻어. 너 지금 꼴이 말이 아니거든.”

그 말에 뒤늦게 권은하는 자신의 모습을 자각했다.

폐건물에서 얻어맞으며 나뒹굴고 오면서 비까지 맞은 탓에 그녀는 지금 빗물에 땀에 먼지에 피에 온갖 오물들로 범벅인 상태였다. 권은하가 슬쩍 뒤를 돌아보자, 그녀가 걸어온 자리에 자그마한 모래나 흙 따위가 군데군데 떨어져 있었다.

“미안. 지금 치울 테니까­”

“됐어. 내가 치울 테니까 넌 씻고 있어. 아, 수납장에 포장 안 뜯은 칫솔 몇 개 있으니까 그거 쓰고. 누나가 쓰던 린스나 트리트먼트 같은 것도 그 안에 있으니까 알아서 찾아 써. 난 그런 거 잘 모르거든.”

쏜살같이 말한 류태현이 얼른 들어가라는 듯 손을 휘휘 내저었다. 권은하는 반쯤 내쫓기다 시피 욕실 안으로 들어갔다.

­쏴아아아아.

안쪽에서 부산스러운 소리가 잠시 들리더니 곧 샤워기 소리가 문틈으로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류태현은 권은하가 흘린 흙먼지를 청소기로 빨아들이곤 소파에 털썩 앉았다.

‘갈아입을 옷은 줬고. 잠자리야 이미 준비되어 있고. 대충 준비해줄 건 다 해줬…. 아, 드라이어 가져다줘야겠네. 뜨거운 물은 잘 나오려나? 우리집 욕실 저거 수도꼭지 조절 잘못하면 펄펄 끓는 물만 나오는데.’

노크라도 해서 주의를 줘야 하나. 그렇게 생각하며 잠시 일어섰던 그가 이내 다시 소파에 앉았다.

너무 신경 쓰는 모습을 보여주는 건 별로 좋지 않다. 권은하가 부담을 느낄 게 뻔하니까. 데면데면한 태도로 챙겨줄 건 다 챙겨주는 것. 그가 취해야 할 태도는 딱 그 정도였다.

“……하아.”

그러나 그의 머릿속은 이미 권은하에 대한 걱정으로 가득 차있었다. 좀 전의 울음 때문이었다.

류태현은 권은하가 눈물을 흘리는 걸 본 게 처음이었다. 그동안 그녀가 울 일이 없었으니까, 라고 말하기엔 여러 정황으로 그녀의 조직 생활이 그리 녹록치 않았음을 유추할 수 있었다.

어쩌면 자신과 만났을 때도, 실은 울고 싶은데 애써 자기 앞에서만 밝은 척을 했던 날도 있었을지 모른다고.

그렇게 생각하자 류태현의 얼굴은 더욱 착잡해졌다. 식사 자리에서 떠올렸던 무모한 계획이 그의 머릿속에 다시 한 번 떠오른다.

그래, 그 말대로 그야말로 무모하기 그지없는 계획이었다. 류태현은 어렸지만 그래도 만용과 용기의 차이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하려는 짓이 아마 만용에 속하리란 것도.

‘내가 생각했지만 까딱 잘못했다간 나까지 위험해질 수도 있는 계획이야. 근데 권은하 쟤를 위해서 내가 그렇게까지 해줄 필요가 있을까? 어차피 우린 그냥 친구 사이에 불과한데.’

‘친구’라는 말은 관계를 나타내기에 애매하기 그지없는 단어다. 그 짧은 단어 하나로 그저 통성명만 한 같은 반 학생부터 인생에 둘도 없을 정도로 소중한 관계까지 전부 표현할 수 있으니까.

차라리 만약 류태현이 권은하와 연인 관계였다면.

그랬다면 더욱 쉽게 결론을 내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 정도로 둘이 소중한 관계였다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발 벗고 나섰을 테니까.

그러나 두 사람은 친구였다.

그렇기에 류태현은 알지 못했다. ‘친구’인 권은하를 위해 자신이 ‘어디까지 해줘야 하는’ 것인지. 잘 가늠이 되지 않았다.

“차라리 경찰에 신고를 하면……. 씁, 안 되겠지. 애초에 경찰력이 닿지 않으니까 슬럼인 거고.”

아무리 생각해도 방법은 자신이 떠올린 무모한 계획 하나뿐이라고. 그렇게 생각한 류태현이 자기 손을 말없이 내려다봤다. 주먹을 꽉 쥐자 나이에 비해 상처가 많은 피부와 굵은 핏줄이 도드라졌다.

­벌컥.

그때 욕실 문이 벌컥 열렸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린 류태현이 아차 하며 다시 고개를 반대로 돌렸다. 그러나 그는 곧 자신이 갈아입을 옷을 이미 건네주었다는 걸 떠올렸다.

그가 살며시 고개를 돌리자, 김이 모락모락 나는 욕실에서 권은하가 걸어 나오고 있었다. 어느새 드라이까지 했는지 머리는 단정하게 말라있었으나 자세히 보면 아직 촉촉한 물기가 드문드문 보였다.

“욕실 잘 썼어. 이거, 내 옷은 어디 두면 될까? 흙먼지투성이라……. 현관 근처에 두면 걸리적거리려나?”

“옷 안 빨아도 되겠어? 많이 더러워 보이는데.”

“지금 빨면 새벽까지 마르지 않을 것 같아서.”

“새벽에 돌아가려고 그래? 그냥 기왕 자러 온 거 느긋하게 있다 가지.”

“아냐. 조직에서 아침부터 사람을 보낼 수도 있잖아. 늦어도 동 트기 전에는 슬럼으로 돌아가려고.”

“…………그래. 그럼 새벽에 깨워줄게. 시간 늦었다. 이제 들어가서 자.”

“너는? 너는 안 자?”

“난 좀 생각할 게 있……. 아니, 뭐 좀 할 게 있어서. 그 뭐냐, 내일 학교 가는 것 때문에 그, 준비물이라든가 챙겨야 하고…….”

스스로 말하고도 연기인 게 티가 나는 말이었다. 누가 봐도 권은하 문제 때문에 생각할 거리가 많은 게 뻔히 보이는 모습.

“…….”

그런 류태현을 지긋이 바라보던 권은하가 말없이 그에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뭐야, 자러 들어가라니까­”

류태현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지척까지 다가온 권은하가 그의 옆에 털썩 앉았기 때문이다.

몸이 닿지는 않았다. 그러나 거의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그렇게 바짝 붙자 아직 채 가시지 않은 온수의 열기라든가, 분명 같은 제품을 썼을 텐데도 유독 향기롭게 느껴지는 샴푸향 따위가 류태현의 감각을 자극했다.

권은하와의 신체 접촉은 이미 몇 번이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전혀 달랐다. 자전거 따윌 같이 타기 위해 매달리는 거랑 샤워 후의 젖은 몸으로 달라붙는 것. 그 둘의 무게 차이가 류태현의 뇌리에 파바박 박혀들었다.

만약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게 20살의 류태현이었다면 이런 상황에서도 대수롭지 않게 웃으며 너스레를 떨었겠지만.

“뭐, 뭔데…! 왜 갑자기 붙고 지라ㄹ…. 빨리 들어가 자라니까! 새벽에 나간다며!”

15살의 류태현은 어렸고, 그만큼 숫기도 없었다. 그가 슬쩍 소파 끄트머리로 도망쳤지만, 그래봐야 팔을 반만 들어도 닿을 거리였다.

“…….”

다짜고짜 류태현의 곁으로 붙은 권은하는 한참 동안이나 말이 없었다. 그 어색한 침묵이 계속되자 당황했던 류태현도 차츰 평정심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고마워.”

그리고 그 즈음 타이밍 좋게 권은하가 입을 열었다.

“뭐야. 뜬금없이 감사인사는. 고맙다는 말은 이미 잔뜩 들었으니까 더 안 해도 괜찮아.”

“그건 그렇지. 근데 또 말하고 싶었어. 이런 말 하긴 뭐하지만…. 내 삶에 지금껏 이런 식으로 대접……이라고 해야 하나? 은혜?를 받아본 적이 없어서. 그, 말로 잘 표현은 못하겠는데 그러니까…….”

권은하가 생각한 대로 말이 나오지 않아 답답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멋쩍어하며 머리를 긁자 애써 빗질하고 말린 머리가 다시 제멋대로 헝클어졌다.

“……그, 나 예전부터 동경했었거든. 가족 같은 분위기라든가 그런 거. 너한테도 말했지만 나 거의 고아 출신이나 다름없거든. 엄마라는 사람하곤 말도 떼기 전에 헤어졌으니까. 숙소에서 같이 생활하던 애들이 있긴 하지만, 걔네는 가족이라기보다는 경쟁자 같은 느낌이었고…….”

권은하에게 있어선 류태현의 집에서 보고 느낀 모든 것이 전부 새로운 경험이었다.

고작해야 밥 한 그릇, 고작해야 욕실 한 번 빌려 쓴 게 전부였지만. 그녀는 그 사소한 것들 사이에 당연하다는 듯이 녹아있는 따듯한 마음씨나 배려 따위가 낯설었다. 낯설기에 그것을 각별하게 느꼈다.

“아무튼,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거야. 고맙다고. 정말 고맙고. 너나 네 부모님은 나한테 충분히, 해줄 만큼 해줬으니까. 그러니까 이제 신경 안 써도 된다고.”

“신경을 쓰지 말라니. 네 문제 뻔히 아는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그렇긴 하지만…. ……솔직히 너나 네 부모님이 날 이 이상 도와준다 해서 뾰족한 수가 생기는 건 아니잖아. 게다가 너희 가족은 슬럼 주민도 아니고. 슬럼 출신인 내 문제로 이 이상 폐를 끼쳤다간, 기껏 받은 호의를 원수로 갚아버리게 될지도 몰라.”

권은하라는 15살 소녀는 그 나이에 비해 지나치게 슬럼과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용문에게 있어서 그녀는 탈락한 전 간부 후보생. 허나 탈락하긴 했어도 그간 후보생으로서 보고 들은 조직의 정보가 있으니 맘 놓고 풀어줄 순 없었다. 간부 한 명이 권은하를 자신의 노리개로 삼으려는 것도 넓게 보면 그녀를 용문이란 조직에 확실하게 묶어두기 위한 조치였다.

한편 용문 외의 다른 조직 입장에서도 권은하가 가지는 의미는 남달랐다. 만일 용문의 경쟁조직이 그녀를 확보한다면 그녀가 알고 있는 용문의 정보가 그대로 경쟁조직에게 흘러갈 테니까.

그러한 권은하를 류태현네 가족이 뭣도 모르고 도와줬다간, 잘못해서 그들에게 화가 돌아갈 수도 있었다. 권은하는 그 부분이 걱정이었다.

“류태현. 넌 이미 나한테 충분히 호의를 베풀었어. 그렇지만 여기서부터는 내가 해결할 일이야. 슬럼의 일은 슬럼에서 해결해야 하니까. 외지인인 네 도움은 이제 여기서 끝. 무슨 말인지 알겠지?”

“여기서부터는 네가 해결할 일이라고 해도……. 솔직히 까놓고 말해서 너도 뾰족한 수가 있는 건 아니잖아.”

“그건 그렇지. 그래도 발버둥 쳐보려고. 날 갖고 싶다는 간부한테 사정사정해서. 더 열심히 노력해서 전투력을 올릴 테니 제발 후보생으로 남을 수 있게 해달라고 빌어야지. 혹시 모르잖아? 그 의지가 갸륵해서 내 탈락을 유예해줄지?”

그렇게 말하는 권은하는 눈가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본인이 말하고도 설득력이 없는 말이었다. 당연히 류태현이 그 말에 납득할 리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권은하가 처한 상황에 답이란 게 있었다면.

조금 전 식사 자리에서, 그녀가 그토록 서럽게 눈물을 흘리는 일도 없었을 테니까.

“아무튼. 그렇게 알고. 넌 나한테 충분히 잘 해줬으니까 괜히 혼자 골머리 썩히지 말라고. 그럼 난 이제 자러 갈 테니까­”

“만약에.”

그때 류태현이 권은하의 말을 끊으며 물었다.

“만약에 나한테……. 지금 네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어떨 것 같아?”

“……뭐?”

순간 권은하의 얼굴에서 표정이란 게 사라졌다. 너무 당황해서, 혹은 황당해서 당혹감마저 표정에 드러나지 않았다.

허나 당황이란 영원히 이어지는 게 아니다. 류태현의 질문을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점차 그녀의 얼굴에도 표정이, 감정이 돌아오기 시작한다.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네가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다고…….”

권은하는 류태현의 말이 그저 자신을 위로하기 위한, 별다른 근거도 없이 순간 튀어나온 말일 거라 짐작했다.

그 마음씨만은 무척이나 고마웠지만, 마음만으론 그녀가 처한 상황을 해결할 수 없다. 그렇기에 권은하는 씁쓸한 웃음으로 답했다.

“나 때문에 괜히 무리해서 그런 말 안 해도 돼. 몇 번이고 말했지만 내 일은 알아서 해결할 테니까. 넌 이제 그만 네 삶으로 돌아가. 슬럼의 일 따윈 신경 쓰지 말고.”

“슬럼에서 있었던 일들도 다 내 삶이고 경험이야.”

“그래봐야 사춘기의 짧은 일탈이겠지. 이참에 탈선은 그만두고 부모님께 효도나 해. 두 분 다 착하신 분들인데 너 때문에 마음고생 많이 하시겠더라. 하나뿐인 아들이 벌써부터 슬럼이나 다니면서 범죄자랑 어울리니 원…….”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이는 권은하는 류태현과 너스레를 떨던 평소 모습과 다름이 없었다.

그러나 류태현은 그 이면에 감춰진 복잡한 심경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애써 그의 시선을 피하는 권은하의 두 눈동자가 지금도 파르르 떨리고 있었으니까.

“난 이제 자러 갈게. 한 새벽 4시 정도에 깨워줘. 알겠지?”

“……그래. 알람 맞춰둘게.”

“고마워. 그럼 잘 자고. 이따 보자.”

그 말을 마지막으로 권은하는 방으로 들어갔다. 류태현은 그 뒷모습을 말없이 지켜보다가, 깊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푹 숙였다.

일견 아무것도 해주지 못하는 자신의 무력감을 한탄하는 것처럼 보이는 모습.

허나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그의 눈동자는 결연한 의지가 가득 차올라 있었다.

‘……좋아. 지금 대화로 확실히 알았어.’

류태현은 조금 전까지 친구 사이인 권은하에게 자신이 ‘어디까지 해줘야 하는지’ 고민했다.

그러나 사실 고민할 건 그 부분이 아니었다. 중요한 건 어디까지 ‘해줘야 하는지’가 아니라 어디까지 ‘해주고 싶느냐’였다. 그렇게 생각하자 류태현은 드디어 자신의 의지를 굳힐 수 있었다.

‘슬럼의 일은 슬럼에서 해결해야 한다……. 그래, 그 말이 맞지. 슬럼의 일은, 슬럼에서 해결을 봐야 하는 거야.’

류태현은 현관으로 가 자기 신발을 챙겼다. 그리고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고 굳게 잠갔다.

­쏴아아아아.

곧 그가 창문을 열자 비바람이 몰아치는 바깥 소리가 방 안으로 치달았다. 신발을 손에 쥔 그가 지체하지 않고 창문을 뛰어넘어, 2층 아래 지면에 그대로 착지한다.

­쿵!

착지음은 빗소리에 파묻혀 퍼지지 않았다. 류태현이 신발을 챙겨 신곤 비바람을 헤치며 달리기 시작했다.

북쪽. 슬럼이 있는 방향으로.

불이 꺼져 어둠에 휩싸인 익숙한 길을 달리고 또 달리기를 20분.

마침내 다다른 건물 계단을 지체 없이 올라간 그가, 그 건물에서 유일하게 멀쩡하게 생긴 철문을 사정없이 걷어찼다.

­콰앙!!

철로 된 문이 단번에 우그러지며 경첩이 뜯어져나간다. 드러난 안쪽의 풍경은 기다란 복도에 다닥다닥 방문들이 붙어있는, 마치 고시원과도 같은 풍경.

­벌컥!

“뭐야? 방금 그 소리는?”

“무슨 일이야 지금?”

“저거 누구지? 혹시 조직에서 온 건가?”

얼마 지나지 않아 곳곳의 문이 열리며 그와 비슷한 또래의 남녀들이 잔뜩 모습을 드러냈다. 찬찬히 그들의 얼굴을 살피던 류태현이 바닥에 쓰러진 문을 들어 억지로 문틈에 끼워맞췄다.

“후우우우.”

전력질주로 달려온 터라 그는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어느덧 류태현의 앞에 펼쳐진 복도에는 십수 명의 남녀가 그를 바라보며 대치하고 있었다.

“밤중에 소란 피워서 미안해. 내가 급하게 볼일이 좀 있어서. 혹시 니들 중에 오늘 여기 찾아왔던 용문 간부 연락처 아는 사람? 아니, 간부가 직접 안 오고 부하들만 왔던 건가? 아무튼, 혹시 아는 사람?”

“뭐야 너는?! 말하는 꼬라지 보니까 조직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여기가 어디라고 행패야?”

“시끄럽게 군 건 내가 미안하다고 했잖아. 연락처만 받으면 곱게 돌아갈게. 그니까 아무나 그 간부 연락처 좀­”

“이 새끼가 지금 장난하나!”

그때 몰려있던 남녀 사이로 한 남자가 나섰다.

180이 넘는 키에 두꺼운 근육과 그 근육만큼으니 험상궂은 얼굴. 거기에 덥수룩한 수염이 더해지자 얼핏 3, 40대로 착각할법한 외모였으나, 그 또한 권은하와 마찬가지로 간부 후보생. 그 나이는 이제 겨우 19살에 지나지 않았다.

“갑자기 문 부수고 쳐들어와선 형님 연락처를 달라는데 우리가 예 알겠습니다 하고 줄 것 같냐?! 이 새끼, 너 어디서 온 놈이야? 성철파냐? 아니면 슬래터?”

“그,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는데. 일단 댁은 누구?”

“용문 간부 후보생 류지용이다! 이제 와서 발뺌해도 늦었어! 여기 들어온 이상 넌 독 안에 든 쥐니까­”

“류 씨? 나도 류 씬데! 너 어디 류 씨냐? 전주? 아니면 서산?”

“그딴 거 없어 새꺄! 형님들이 붙여주신 이름이니까!”

그 외침과 함께 류지용이 쏜살같이 류태현에게 달려들었다. 류태현 본인 것보다 1.5배는 커다란 주먹이 그의 안면을 노리고 날아든다.

­콰아아앙!!

곧 커다란 격돌음이 복도에 울려 퍼졌다. 뒤에서 구경하고 있던 다른 후보생들은 멋모르고 나댄 침입자의 최후에 저마다 웃음을 흘렸다.

그러나.

“……뭐야 씨발. 그런 거면 미리 말해야지. 괜히 반갑다 말았네.”

“끄, 허어……!”

다음 순간 류지용이 끊어지는 신음과 함께 무릎을 꿇었다. 그가 내질렀던 오른주먹은 문자 그대로 박살이 난 상태. 덜렁거리는 손가락을 부여잡으며 류지용이 눈물과 비명을 토해냈다.

“끄아아아아아아!!”

“시끄러 씨발!”

­콰앙!!

류태현의 발길질이 그의 턱을 후려갈겼다. 홱 돌아간 류지용의 몸이 이내 고장난 것처럼 픽 쓰러졌다.

­쿠웅.

류지용의 거체가 쓰러지고 약속했다는 듯 복도에 정적이 찾아왔다.

“다시 한 번 말한다. 내가 여기 온 건 오늘 낮에 여기로 부하를 보내서, 권은하를 데려가려고 한 간부의 연락처를 묻기 위해서야.”

그 정적을 깬 건 류태현 본인이었다. 그가 쓰러진 류지용의 몸을 일부러 밟고 넘어서며 복도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촘촘히 서있던 후보생들이 주춤주춤 물러나기 시작했다.

류지용을 쓰러뜨린 그의 무위에 겁을 먹은 게 아니다. 물론 그것도 이유기는 하다만, 그보다는 류태현 본인에게서 뿜어져 나오기 시작한 기백에 질린 탓이 컸다.

“그니까 당장 연락처 내놔. 아니, 니들 중 아무나 그 새끼한테 연락해.”

류태현이 주먹을 말아쥐자 까드득! 하고 뼈가 풀리는 소리가 났다.

“……은하 친구가 하고 싶은 말이 좀 있으니까. 당장 여기로 튀어오라고.”

침묵에 싸인 복도에 낮게 깔린 목소리가 스산하게 울려 퍼졌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