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9화 〉 228. (P)경계의 저편에서(4)
* * *
이런저런 일이 있고 류태현이 집으로 돌아왔을 때, 시곗바늘은 어느덧 10시를 넘기고 있었다.
“나 왔어.”
류태현이 가게로 들어섰을 때, 가게 안은 한산하다 못해 텅 비어있었다. 영업 종료를 앞둔 시간이긴 해도 이런 경우는 드문데 오늘따라 운이 좋다고 해야 할까.
“왔니? 저녁 안 먹었으면 여기 와서”
주방에서 나오던 류태현의 어머니, 김수희의 표정이 움찔 굳었다. 홀딱 젖은 류태현 뒤에 새끼고양이처럼 숨은, 마찬가지로 홀딱 젖은 여자아이를 발견했기 때문.
이제껏 류태현이 집에 또래 여자아이를 데려온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기에 그것만으로도 놀랄 일인데. 하물며 여자아이의 행색도 평범하진 않았다.
군데군데 해진 옷가지. 그 위로 잔뜩 튄 붉은 피. 얼굴에 묻은 피는 얼추 닦아냈고 부어올랐던 뺨도 조금은 가라앉았지만 그래도 맞은 태가 꽤 났다. 그 모습에 김수희가 입을 턱 막는다.
“설마 이젠 하다하다 여자애한테까지 손찌검을…….”
“그럴 리가 없잖아. 밥이나 좀 줘요. 나랑 얘꺼까지. 2인분.”
류태현이 볼멘소리와 함께 권은하를 데리고 자리에 앉았다. 그러나 김수희의 표정은 여전히 좋지 못하다.
“다짜고짜 그게 무슨 소리야. 설명을 해야지 설명을. 어디서 잔뜩 다친 애를 데려와선 병원도 안 가고 밥이나 달라니….”
“사정이 있어서 그래.”
“그러니까 그 사정을 말해달라는 거잖니.”
그렇게 말하며 권은하를 살피는 김수희의 표정엔 경계심이 가득했다.
비록 류태현이 탈선을 하긴 했지만 그는 여전히 김수희의 아들. 아들이 걱정되는 건 부모로서 당연한 일이었다. 김수희는 류태현이 뭔가 불미스러운 일에 엮이게 된 게 아닌가 노심초사했다.
“너, 태현이 친구니? 이름은? 어쩌다가 그렇게 다친 거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그, 저기….”
그 불안한 물음들에 권은하는 대답하지 못하고 입술만 오물거렸다.
그녀가 속으로 작게 탄식했다. 류태현이 자기 집에 가자고 했을 때부터 이럴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역시 바깥세상에서 자신은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였다며.
“태현아. 나 그냥 돌아갈게. 아무래도 너무 실례인 것 같아서…….”
이에 권은하가 그렇게 말한 순간이었다.
“메뉴는? 그냥 순대국밥 2인분이면 되냐?”
상황을 지켜보던 류태현의 아버지, 류승철이 주방에서 걸어나오며 물었다.
“난 순대국밥. 그리고 얘는……. 너 순대 먹을 줄 알아?”
“어? 으, 응. 가리진 않아….”
“그렇다네. 그럼 순대국밥 2인분으로.”
“금방 나오니까 조금만 기다려라.”
류승철은 그렇게만 말하곤 홱 다시 주방으로 향했다. 김수희와는 달리 권은하의 정체나 사정에 대해 관심 하나 없다는 태도.
그 무심한 발걸음에 김수희가 빠르게 따라붙어 작게 나무랐다.
“여보…! 저 애가 어떤 애인지 알고 그래요…! 딱 봐도 수상한데”
“딱 봐도 말 못할 사정이 있어 보이잖아. 밥 한 그릇 먹이는 게 뭐 그리 어렵다고. 예전에는 태현이 친구놈들 놀러오면 자주 먹이고 그랬잖아.”
“아무리 봐도 친구로는 안 보이니까 그러죠…! 태현이 쟤, 요즘 슬럼에 자주 드나드는 것 같던데 설마 슬럼 출신인 건 아닐지…….”
“슬럼 출신이면 또 어때? 거기도 사람 사는 곳이야. 질 나쁜 범죄자만 아니면 됐지. 태현이 저놈도 생각이 있는데 설마 그런 애를 데려왔겠어?”
“그건 그렇지만…….”
두 사람의 대화에 권은하는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범죄조직 간부 후보생이던 자신은 류태현의 아버지가 말한 그 ‘질 나쁜 범죄자’ 그 자체였으니까.
“신경 쓰지 마. 나 걱정해서 그렇지 두 분 다 좋은 사람이니까. 이따 국밥 왔을 때 불쌍한 표정 좀 지어주고 고개 떨구고 그러면 바로 오구오구 하실걸.”
의기소침해하던 그녀에게 류태현이 괜찮다 말했지만, 그런 말을 들었다고 곧바로 ‘그래?’하고 납득할 수 있을 리가.
슬럼 출신 이방인이자 깊은 밤의 불청객인 권은하에게 있어 지금 앉은 자리는 가시방석이나 다름없었다. 특히 권은하를 수상쩍어하는 류태현 어머니의 반응을 본 뒤론 더더욱.
“……잠깐 기다리고 있어봐.”
고개를 숙인 채 말이 없는 권은하를 뒤로하고 류태현이 잠시 주방으로 향했다. 곧 주방 안쪽에서 자그마한 말소리가 새어나오기 시작한다.
‘돌아갈까….’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혼자 남은 권은하가 부담에 못 이겨 자리를 일어서려 할 때.
“자 순대국밥 2인분이요~!”
류태현이 장난스런 장사치 어조로 국밥을 들고 왔다. 한손에 뚝배기를 하나씩 능숙하게 쥔 모습이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었다.
“태현아, 나…….”
“괜찮다니까 그러네. 이제 부담 가지지 않아도 돼. 다 해결했으니까.”
“해결…?”
권은하가 의문에 빠진 찰나, 주방에서 류태현의 어머니가 쭈뼛쭈뼛 다가왔다. 권은하에게 경계심을 보이던 전과 달리, 그녀의 얼굴에는 연민과 미안함 같은 감정이 진하게 떠올라 있었다.
“저, 폐를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아주머니. 빨리 먹고 나갈 테니까”
권은하의 말에 김수희가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 얼굴에 떠오른 연민은 더욱 짙어진다.
“조금 전엔 아줌마가 미안했어. 천천히 먹고 필요한 거 있으면 더 말해. 오늘 하루 여기가 네 집이라 생각하고 편히 쉬렴.”
“…………네?”
“정말, 아무리 슬럼이라도 어떻게 그런 일이…….”
손으로 입을 탁 틀어막으며 울음을 삼키는 김수희.
조금 전과는 전혀 달라진 태도. 의문에 찬 권은하의 시선은 이내 류태현에게로 향했다. 그러자 그가 자랑스럽게 엄지를 척 올렸다.
“너 도대체 안에 가서 무슨 말을 한 거야…? 설마 내 사정을 곧이곧대로 말씀드린 건 아니지?”
“설마. 그냥 적당히 비슷하게 각색해서 이빨 좀 털었어. 대충 그 뭐냐, 가정폭력에 불륜에 빚쟁이에 뭐 이거저거 섞어서.”
“넌 진짜…….”
자기 부모에게 눈도 깜빡 않고 거짓말을 했노라 말하는 류태현을 보며 권은하가 미간을 찌푸렸다. 상당히 어이가 없다는 표정.
“뭐 어때. 서로한테 좋은 하얀 거짓말이잖아. 밥 식겠다. 얼른 먹자.”
먼저 밥술을 뜨기 시작하는 류태현. 결국 권은하도 마지못해 숟가락을 들었다. 뽀얗고 따스한 국물과 건더기가 그녀의 목구멍으로 스르륵 넘어간다.
“하! 아뜨! 뜨거!”
“뜨거우니까 천천히 먹어. 여기 물.”
“고마, 후릅! 고마워.”
“어때? 맛있어?”
그 물음에 권은하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밤늦게 얻어먹는 와중에 맛없다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지만, 그런 예의범절을 빼놓고 보아도 류태현네 부모님이 차려준 국밥은 정말 맛있었다.
“우리 집이 막 70년 전통 이런 집은 아니지만 국밥 맛 하나는 지리기로 이 근처에서 정평이 났거든.”
“응. 맛있어. 따듯하고 구수해서. 속이 꽉 차는 느낌이야.”
“얘가 국밥 맛 좀 아네. 더 필요한 거 있음 말하고.”
“으응. 괜찮아.”
달그락. 달그락.
두 사람 사이에 말이 없어지고, 수저를 놀리는 소리만이 작게 울려 퍼졌다. 고요해진 가게 안으로 바깥에서 쏟아지는 빗소리가 은은하게 새어 들어온다.
“…….”
권은하는 비어 있던 속이 차차 슬슬 이런저런 상념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자신이 현재 처한 상황이나,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같은.
‘도망쳤다간 분명 보복이 들어오겠지. 죽지 않으려면 반드시 돌아가야만 해. 그렇지만, 그렇게 돌아간 다음에는…….’
권은하의 미래는 정해져 있었다. 그녀를 탐내던 간부에게 순응하고 그 노리개가 되는 것. 그 생각하고 싶지 않은 미래가 그녀의 가슴을 묵직하게 짓눌렀다.
일주일 전만 해도 이렇게 될 거라곤 생각도 하지 못했는데.
간부 후보생에서 잘리는 것. 그것까지야 내심 예상하긴 했어도, 이렇게까지 상황이 나락으로 떨어질 거라곤, 상상조차 하지 못했었는데.
신도 무심하시지. 15년 동안 수많은 경쟁자들을 재끼며 아득바득 버틴 끝에 다다른 결말이 변태 같은 남자의 노리개라니.
“…………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따스한 눈물 한줄기가 뺨을 타고 또르르 흘러내렸다. 스스로도 알아차리지 못한 사이에.
권은하가 급하게 눈물을 훔쳤다. 그 얼굴에 진한 당혹감이 떠오른다.
이제 와서 뭘. 조직의 명령에 따르는 건 당연한 건데. 지금껏 줄곧 그렇게 살아왔는데. 이제 와서 뭘 새삼스럽게 눈물 따윌 흘리느냐고.
“……흑!”
그러나 한 번 흐르기 시작한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밥을 먹다 말고 고개를 푹 숙인 그녀가 애써 새어나오려는 설움을 삼켰다.
그 눈물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단순히 자신의 상황이 서러워서일 수도 있고, 긴장이 풀려서 뒤늦게 감정이 튀어나오는 것일 수도 있다. 어쩌면 류태현네 부모님이 그녀에게 베푼 호의에 감격해서,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느끼는 따스함과 자신이 처한 현실의 대비에 설움이 복받쳐 울음이 새어나온 것일지도 모르지.
허나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눈물을 흘려봤자 변하는 건 없다. 자존심을 굽히고 노예가 되느냐, 혹은 자존심을 살리고 조직의 보복을 당하느냐. 15살 소녀 권은하의 앞에 놓인 미래는 그 둘이 전부였으니까.
“야, 너 괜찮”
“괜찮아. 괜찮으니까. 미안, 신경 쓰게 해서. 나 진짜 괜찮으니까 신경 안 써도 돼.”
그렇기에 권은하는 애써 눈물을 닦았다. 지금 자신이 받은 이 호의조차 잠깐의 위안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 호의를 베풀어준 류태현이나, 그 가족에게 심려를 끼치고 싶지 않으니까.
허나 눈물을 흘린 시점에서 이미 그녀는 심려를 끼치고 있었다. 류태현에게도. 그리고 주방에서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던 그의 부모님에게도.
“…….”
류태현은 밀려오는 울음을 끅끅 삼키는 권은하를 말없이 지켜봤다. 곧 그의 머릿속에 하나의 의문이 떠오른다.
‘내가 뭔가 도와줄 수 있는 건 없을까.’
현재의 류태현이었다면 무언가 방법이 있었을 것이다. 현재의 류태현은 과거보다 훨씬 강해졌고, 또한 이럴 때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여러 인맥이 있었으니까.
허나 지금의 류태현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비교적 약했고, 또한 혼자였다. 고작해야 주먹 좀 쓰는 15살 소년. 그런 그가 슬럼의 범죄조직을 상대로 무얼 할 수 있을까.
할 수 있는 게 있을 리가 없다.
없다만.
15살의 류태현이 20살의 류태현보다 유일하게 앞서는 것이 하나 있었으니, 바로 용기였다.
혹은 치기어린 만용이라고 불러야 할까.
‘분명 C, B급 정도면 간부……라고 그랬지.’
류태현의 머릿속에, 그 나이 때 소년이 떠올릴 법한 무모한 계획이 하나둘 맞춰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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