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카데미 경비원으로 빙의당했다-228화 (229/266)

〈 228화 〉 227. (P)경계의 저편에서(3)

* * *

극한의 상황에서 사람은 가끔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 대표적인 예시가 바로 다음과 같은 상황이다.

‘꼼짝 마! 움직이면 쏜다! 손 들어!’

라고 말하며 강도에게 권총을 겨누는 경찰. 여기서 강도는 어떻게 해야 할까?

움직이면 쏜다 했으니 손을 들 순 없다. 권총에 맞긴 싫으니까. 그러나 손을 들지 않으면 경찰의 지시를 따르지 않은 게 된다. 잘못하면 지시불이행으로 권총을 맞을 수도 있는 상황.

진퇴양난에 빠진 강도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답은 간단하다.

알아서 기고 싹싹 빌어야지.

경찰은 손만 들라 했으나 어디 손만 머리 위로 들까. 무릎도 곧바로 꿇고, 고개를 푹 숙이거나, 혹은 경찰을 올려다보며 처량한 표정이라도 한껏 지어줘야 한다. 자신은 절대로 저항하지 않을 거라고. 그 의지를 온몸으로 표현해야 한다.

그래야 총에 안 맞을 테니까.

애초에 ‘움직이면 쏜다! 손 들어!’ 같은 모순된 지시를 내리는 경찰이 명확한 무언가를 바라고 지시를 했겠는가.

경찰은 그저 다급할 뿐이다. 허니 그 다급함이 임계점에 이르기 전에 강도는 재빠르게 저항의사가 없음을 피력해야 한다. 그것만이 답이요, 그것만이 살길이니.

바로 이 순간, 류태현에게 얻어맞기 직전인 남성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그 손 놔. 당장.”

이라는 말과 함께 날아드는 주먹. 어찌나 빠르고 무거운지 맞았다간 단번에 골로갈 것임을 남자는 곧바로 직감했다.

그렇다면 이 상황에서 남자가 취해야 할 행동은? 앞서 예시로 든 강도와 같다.

최대한 빨리, 자신에게 저항의시가 없음을 피력할 것.

권은하의 팔을 잡은 손을 놓음은 물론이요, 빠르게 무릎부터 꿇고 싹싹 빌었어야지.

­콰앙!!

그렇게 하지 않은 순간, 남자의 운명은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끅?!”

남자의 몸이 기역자로 꺾이며 벽에 박혔다. 어찌나 세게 날아갔는지, 남자가 부딪힌 빛바랜 콘크리트 벽에 와작! 하고 실금이 갔다.

“어, 어어?”

권은하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놀라자 미처 흐르지 않았던 눈물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그 눈물에 류태현의 주먹에 더욱 힘이 들어간다.

“…이 씨, 바알…! 너 이 새끼, 너 뭐하는 새끼야?! 여기가 누구 구역인 줄은 알고 지금­”

“그러는 넌 뭐하는 새낀데?”

“뭐? 이 개씨발 새끼가 뭐? 내가 뭐하는 새끼냐고? 야 이 새끼야! 내가 바로 용문 김덕철­”

­퍼억!!

남자, 김덕철의 말이 채 끝나기 전에 류태현의 주먹이 다시 한 번 뻗어졌다.

기술이라곤 하나도 없는, 힘만 잔뜩 실린 주먹.

“끄, 허억!”

허나 아직 채 여물지 않은 류태현의 주먹은 이미 살벌한 흉기였다. 턱이 돌아간 남자가 신음과 함께 입에서 핏물을 뚝뚝 뱉었다.

“이 새끼가아……! 내가 지금, 말하고 있는데…!”

“넌 뭐하는 새끼길래 내 친구 눈에서 눈물이 나오게 하냐.”

“그러니까, 지금 말하고 있었­”

­퍼억!!

다시 한 번 휘두른 주먹. 반대로 돌아간 턱. 방울방울 튀기는 핏물 사이로 새하얀 이빨 하나가 튕겨져 바닥에 나뒹굴었다.

“내가 묻잖아 씨발새끼야. 너 뭐하는 새끼길래 내 친구 울리냐고.”

“마, 말 좀 하쟈 좀!! 내가 마하고 있잔하 이 개새꺄­”

“이 씹새끼 태도가 불량하네. 일단 좀 더 맞자.”

“씨, 씨브아 새끼야…!”

­퍼억!! 퍼억!! 퍼어억!!

이미 너덜너덜해진 김덕철의 멱살을 쥐고 류태현이 연신 주먹을 날려댔다. 저항해보려 했지만 세 대가 넘어갔을 때 김덕철은 의식을 잃었고, 그 이후론 류태현의 주먹에 맞춰 힘없이 흔들거릴 뿐이었다.

“자, 잠깐. 태현아. 잠깐만…….”

그 광경에 망연자실하던 권은하가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태현아. 잠깐, 잠깐만 기다려봐. 기다려보라고 좀!!”

­터억!

류태현이 반응이 없자 권은하가 그의 팔을 뒤에서 붙잡았다. 주먹을 휘두르려던 힘에 권은하의 몸이 힘없이 끌려나와 바닥에 엎어졌다. 그제야 류태현은 권은하를 바라봤다.

“……미안. 괜찮아? 다친 곳은 없­”

“너, 너 지금 뭐하는 짓이야!”

뒤늦게 건넨 사과. 그러나 돌아온 것은 원망어린 말이었다. 류태현이 당황한 사이, 권은하는 피떡이 되어 쓰러진 남자, 김덕철을 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야, 류태현. 너 도,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네가 맞고 있던 것 같아서. 그래서 널 구하려고­”

“왜 쓸데없는 짓을 하는데! 이 사람은 간부 직속 부하야! 우리 조직 사람이라고! 그런 사람을 패버리면 어쩌자는 건데!”

권은하의 입에서 터져나온 외침에 류태현의 말문이 턱 막힌다.

“간부 직속, 뭐라고…?”

펄펄 끓던 머리가 차츰 식고, 뒤늦게 류태현은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실감했다. 천천히 떨어지던 그의 시선이 이내 자신의 발밑으로 향했다.

새하얀 운동화에는, 그가 저지른 행위를 보여주듯 붉은 피가 군데군데 튀어있었다.

“……미안. 그런 줄은 몰랐어. 나는 그냥, 비명 소리가 들려서 올라왔더니 네가 울고 있어서. 그래서, 그래서 그냥 구해야겠다고 생각한 건데…….”

“…….”

류태현이 후회 섞인 표정으로 제 머리를 신경질적으로 헝클어뜨렸다. 그 모습에 권은하는 더 이상 류태현을 책망할 수 없었다.

허나 그로 인해 상황이 악화된 것은 명백한 사실. 탓할 이를 잃은 권은하의 고개 또한 류태현처럼 지면으로 뚝 떨어졌다.

잠시 동안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붉은 피가 낭자한 층계참에서, 이제 겨우 열다섯이 된 소년소녀가 착잡한 표정으로 땅바닥만 바라보기를 1분여.

“……넌 지금 당장 떠나. 여긴, 내가 수습, 할 테니까.”

이윽고 권은하가 힘겹게 끊기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말에 곧바로 류태현이 반문한다.

“나만 떠나라니. 넌 어떡하고! 이 사람이 간부 부하면, 지금 엄청 큰일 난 거잖­”

“그러니까 가라고! 여기 남아봤자 네가 뭘 할 수 있는데! 내가 알아서 수습할 테니까! 다른 사람들이 오기 전에 얼른 가라고!”

이곳은 용문 간부 후보생들이 사는 숙소 건물. 후보생들이 사는 위층을 제외하곤 빈 건물이었지만 좀 전의 소란을 그들이 듣지 못했을 리가 없다.

이변을 느낀 후보생들은 조직에 연락을 넣을 거고, 곧 조직의 사람들이 이곳으로 몰려오겠지.

그러니 그렇게 되기 전에 도망치라고. 권은하는 류태현을 지키고자 애써 그렇게 말했지만, 류태현이 납득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수습.

말이 좋아 수습이지 후보생에 불과한 권은하가 무슨 힘이 있다고 이 상황을 수습하겠는가.

게다가 지금 상황은 온전히 류태현, 그의 잘못으로 벌어진 상황이었다. 그런 와중에 권은하를 내버려두고, 그 혼자 도망친다는 건 불가능한 일.

“……도망치자.”

“뭐?”

“도망치자고. 조직 사람들이 오기 전에. 너랑 나랑 같이.”

남겨진 권은하가 어떤 대가를 치르게 될지. 차마 상상조차 하기 싫었던 류태현이 그렇게 말했다. 그 제안에 권은하의 표정이 아주 잠깐 밝아진다.

그러나.

“아니, 도망칠 수 없어.”

권은하는 그 제안이 부질없는 희망임을 잘 알고 있었다.

“도망을 못 치긴 왜! 여기서 좀만 걸어가면 시내야! 슬럼 밖이라고! 일단 도망쳐서 경찰서든 뭐든 가면 되잖아!”

“가면? 경찰서 가서 자수라도 하라는 거야? 슬럼가 범죄조직의 일원입니다. 목숨을 위협받고 있습니다. 그러니 저 좀 살려주세요. 이렇게?”

“그래! 여기 남았다간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잖아! 어쩌면 죽을 지도 모른다고!”

“안 죽어.”

순간, 그렇게 대답한 권은하의 얼굴에 짙은 그늘이 졌다. 그 한 마디 이후로 한참 말을 잇지 못하던 그녀가 이내 힘겹게 덧붙였다.

“……………조직에서 날 죽이지는 않을 거야. 나름대로 벌은 주겠지만. 목숨은 부지할 수 있을 거라고.”

“그건 모르는 일이잖아. 조금 전 상황만 봐도 딱 너한테 문제 생긴 게 보이는데. 그런 와중에 간부 부하를 패버린 죄까지 네가 뒤집어쓰면­”

“차라리 죄를 인정하고 달게 벌을 받는 게 나아. 지금 도망치면 명백히 조직을 배신하는 꼴이니까. 경찰서에 자수하더라도, 미성년자랍시고 조사 끝나고 풀려나기라도 하면 곧바로 조직에서 보복이 들어올 거야. 살인청부는 용문의 전문분야니까.”

살인청부. 그 살벌한 단어가 류태현의 가슴을 꾸욱 짓눌렀다.

그저 은하를 도와주려 했을 뿐인데. 자신의 경솔한 행위로 은하는 목숨이 위협받는 지경까지 왔다고.

“……걱정하지 마. 조직에서 내게 무슨 벌을 내리든, 날 죽일 일은 없으니까. 아직은 그래도 나한테 ‘쓸모’가 있는 것 같거든.”

권은하는 조금 전, 간부의 부하가 류태현에게 얻어맞기 직전 말했던 자신의 ‘쓸모’에 대해 떠올렸다. 그 말을 들었을 땐 착잡하기 그지없었지만, 지금은 그 쓸모 덕에 목숨이나마 부지할 수 있다는 사실이 다행이었다.

“그러니까 얼른 가. 사람들 오겠다.”

“……은하야, 나는­”

“얼른 가라니까. 괜히 잡혔다가 진짜 좆되는 수가 있어. 넌 외지인이잖아. 슬럼은 잠깐 놀러 오는 곳이니까. 다 놀았으면 이젠 네가 돌아가야 할 곳으로 돌아가야지.”

다 놀았으면 이제 돌아가라.

권은하는 그 말에 은연중에 두 사람간의 관계의 종식을 담아냈다.

바깥의 소년과 슬럼가의 소녀, 그 둘의 위태로운 놀이는 이제 끝났노라고.

“그래도 꽤 재미있었어. 덕분에. 바깥세상 친구는 처음이었거든. 난 만족하니까 걱정 말고 얼른 가.”

그 작별인사에 류태현은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무언가, 이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없을까.

생각하고 또 생각했지만, 생각할수록 막막하기만 할 뿐이었다. 고작해야 주먹 좀 쓰는 15살짜리가 슬럼의 범죄조직을 상대로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게다가 권은하의 말대로, 류태현은 바깥세상의 사람이었다. 그에게는 돌아갈 집이, 반겨줄 부모가, 앞으로 살아갈 미래가 있었다.

그 모든 미래를 포기하고 여기에 남는다는 선택지는, 15살의 류태현에겐 너무나도 무거운 것이요.

즉, 겁이 났다.

“…………미안해.”

“사과할 거 없어. 이제 가봐.”

류태현은 단장의 심정으로 그곳을 떠났다. 가는 길 발걸음은 무겁기 그지없었지만, 타들어가는 양심을 외면하며 그는 애써 발을 놀렸다.

걷고, 걷고, 또 걸어서.

어느덧 슬럼의 외곽에 이르렀을 때. 하늘에선 비가 한 방울, 두 방울 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제야 류태현은 건물 앞에 우산을 두고 왔음을 떠올렸다. 소나기라도 내리는 건지 순식간에 쏟아지기 시작한 빗방울에, 그는 건물 아래로 피할 새도 없이 빗물에 젖기 시작했다.

­쏴아아아아아.

갑작스러운 비에 주위 사람들이 바쁘게 뛰어다니기 시작한다. 그러나 류태현만은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비를 맞고 있었다. 마치 시간이라도 멈춘 것처럼.

류태현은 망연자실 비가 내리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생각했다.

지금 그가 있는 곳은 권은하가 있던 숙소 건물과 그의 집 사이 딱 중간 지점이었다. 평소에 걸어서 두 시간 좀 안 걸리는 거리였으니, 권은하에게서 떠나온 지 한 시간 쯤 지났다는 것이리라.

즉, 집에 돌아가려면 앞으로 1시간은 더 걸어야 한다는 소리.

헌데 비가 이렇게 와서야 홀딱 젖어버릴 게 뻔했다. 비를 막으려면 우산이 필요했지만, 그 우산은 권은하네 건물 앞에 두고 온 상태.

­스윽.

곧 멈춰있던 류태현의 발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집으로 가는 방향이 아닌, 숙소 건물 쪽으로.

이제 와서 권은하에게 돌아간다거나, 그녀를 구하고자 한 건 아니었다.

그저 이대로 비를 맞기는 싫으니 우산만 챙기자고.

딱 건물 앞에 버려둔 우산만 회수하자며 그가 숙소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그 걸음은 뜀박질이 되고, 곧 전력질주가 되었다.

폭포처럼 쏟아지는 빗줄기를 뚫으며 류태현은 전력으로 달려나갔다. 올 때는 1시간이나 걸린 거리였지만, 되돌아가는 데에는 10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우산만, 딱 우산만 챙겨서 돌아가자.

“은하야!!”

달려오는 내내 그렇게 생각했지만, 건물 앞에 도착한 순간 그는 이미 그렇게 외치고 있었다. 허나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고, 겉으로 보이는 건물은 쥐 죽은 듯이 고요했다.

마치 이미 모든 일이 끝난 것처럼.

그는 재빠르게 층계참으로 올라갔다. 그러나 은하와 쓰러진 부하가 있던 자리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누군가 대충 닦은 핏자국만이 유일하게 그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말해주고 있었다.

권은하는 어디에도 없다. 그 사실에 류태현이 착잡한 표정으로 고개를 떨궜다.

“……어?”

그 순간 그의 눈에 핏자국이 들어왔다.

자신이 만들어낸 것이 아닌, 명백히 나중에 만들어진 또 다른 핏자국들.

그것들은 본래 권은하가 있던 자리에서 사방으로 튀어 있었다. 그 핏자국들은 류태현이 자리를 비운 사이 권은하가 무슨 짓을 당했는지를 암시하고 있었으나, 그가 주목한 건 그중에서도 가장 나중에 찍힌 것 같은 핏자국이었다.

방울방울, 드문드문 떨어진 채 계단으로 이어진 핏자국.

류태현은 홀린듯 그 핏자국을 따라 계단을 올랐다. 한 층을 오른 핏자국은 그 위로 향하는 일 없이, 그대로 건물 안쪽으로 향했다.

후보생 숙소는 아니었다. 그 층은 통째로 텅 빈 폐허였으니까.

습하고 먼지투성이인 회색 폐허에 유독 도드라지게 쭉 이어진 붉은 핏자국. 천천히 따라가자 이내 빗소리 사이로 이질적인 소리가 섞여들었다.

젊은 여자가 고통에 힘겨워 하는, 당장이라도 끊어질 것 같은 얕은 숨소리.

“은하야…?”

그 숨소리를, 그리고 핏자국을 따라 류태현이 건물 안쪽의 어느 방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은하야!!”

그곳에는 그가 그토록 찾던 권은하가 있었다. 단, 온몸에 피칠갑을 한 상태로.

“……뭐야, 왜 돌아왔어. 이 멍청, 아…….”

“어떻게 된 거야…? 그 피는, 그 상처들은 다 뭔데? 내가 없던 사이에 무슨 일이…….”

“무슨 일이 있었긴…. 좀 전 일의 책임을 물어 복날 개 패듯이 맞았지. 아니면 비가 오니까, 비 오는 날 먼지 나듯 맞았다고 해야 하나…?”

애써 너스레를 떠는 권은하의 상태는 빈말로도 좋다 할 수 없었다. 뺨은 시뻘겋게 부풀어올라 있었으며 코와 입에선 아직도 피가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목 아래 또한 어찌나 얻어맞고 뒹굴었는지 흙먼지와 피로 범벅이었다.

“……그래도 봐. 내 말대로 죽지는 않았지? 조만간 다시 데리러 올 테니까, 알아서 반성하고 있으라더라.”

“네가 반성할 게 뭐 있다고. 그 자식을 팬 건 난데…….”

“사실 그 전에도 살짝 잘못을 저질렀거든. 간부 명령으로 찾아온 부하의 말에 거스르고 반항했으니까. 항명죄란 거지.”

그 말에 류태현은 들이닥치기 전 계단에서 들려왔던 말소리를 떠올렸다.

­……깐만요! ……슨 말이에요? …………놓고 이야기를…!­

­반항하는 게 아니라요…! 납득이 되는 설명을 해달라고요! 어제까지만 해도 아무 일 없었는데, 왜 오늘 와서 갑자기 이런 식으로….­

“……내가 오기 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데?”

“…….”

그 질문에 권은하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류태현은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다 털썩 그녀의 옆에 나란히 앉았다. 그 편이 그녀가 말하기 더 쉬울 것 같아서.

과연 효과는 있었는지, 이내 권은하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나 있지. 간부 후보생에서 잘렸어. 약하다고. 기준에 못 미친다고.”

권은하는 그동안 류태현에게 말하지 않았던 자신의 사정에 대해 천천히 설명했다.

권은하는 그 자질을 인정받아 엄선된 간부 후보생이다. 허나 그 자리는 사실 위태로운 상태였다. 그녀의 성장세가 더뎌지고, 위에서 원하는 간부의 기준에 그녀가 번번이 부합하지 못했기 때문에.

초인의 신체능력은 대개 몸의 성장과 함께 향상된다. 성장이 끝난 성인 이후 시기에도 단련을 통해 강해질 수야 있다만, 노력을 통해 강해질 수 있는 한계는 성장기에 다 결정된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나, 올해 들어서 키가 1cm도 안 자랐거든. 그게 윗선에서는 내 몸의 성장이 끝난 걸로 보였나봐. 실제로도 아마 맞을 거야. 나 초경도 11살 때인가 왔고. 그 즈음 갑자기 1년에 10cm씩 쭉쭉 자랐거든.”

권은하는 아직 미성년이었지만, 그 몸은 성인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즉 권은하라는 초인이 강해질 수 있는 물리적 한계, 이른바 ‘자질’이 이미 결정되었다는 소리.

만일 권은하가 현재 시점에서 A급에 준하는 정도라면 능히 S급에 오를 수 있을 터이고, B급이나 C급 상위 정도라면 못해도 A급은 될 수 있을 것이다. C급 턱걸이 정도라면 B급, 노력 여하에 따라 아슬아슬하게 A급 정도는 노려볼 수 있겠지.

허나 권은하의 자질은 거기에 미치지 못했다.

D급.

슬럼가라 해서 초인의 등급 산정에 필요한 설비가 없는 건 아니었다. 권은하는 조직에서 확보한, 정부에서 사용하는 것과 동일한 측정 장비로 등급을 측정했고, 그 결과 D급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통상적으로 20살 기준 D급 초인의 성장 한계선은 C급으로 본다. 애초에 성인 이후에 등급이 오른다는 것부터가 어려운 일이지만, 이는 특히 낮은 등급에서 더욱 도드라지는 현상이었다. E급 초인이던 안수호가 평범한 C급 초인이 된 것만으로도 민채령이 놀란 것엔 이러한 배경이 있었다.

그리고 당연한 이야기지만, 평범한 D급 초인 권은하에게 안수호만큼의 운이나 기연이 따라줄 리가 없었다.

“조직은 내게 미래가 없다고 생각했나봐. 그래서 후보생에서 탈락시킨 거지. 오늘 네가 팬 조직원한테서 들은 따끈따끈한 소식이야. 처음 들었을 때 충격이긴 했지만, 사실 내심 알고 있었어. 다른 후보생들하고 점점 벌어지는 격차에 언젠가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거든.”

“……하지만 넌 그 소식을 들고 온 조직원한테 반항했다며.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다면 일부러 반항할 필요까진 없었잖아.”

“후보생에서 잘려도 그냥 평범한 조직원으로 남을 수는 있을 줄 알았거든. 근데 그 부하가 말한 내 처우가, 좀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이야기였어서…….”

잠시 숨을 고른 권은하가 이내 자조 섞인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게 있지. 조직 간부 중 한 명이 내 얼굴을 보고 관심이 생겼다 그러더라고. 나 하는 거 봐서 첩으로 삼아줄 수도 있다나.”

“첩…?”

그 말에 류태현은 당황을 금치 못했다.

아무리 은하의 몸이 다 자랐다 해도 그녀는 아직 15살 미성년자. 그런데 첩으로 들이니 마니 이야기한다는 게, 일반인의 상식을 지닌 그로선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슬럼에선 그리 드문 일도 아니야. 다만 말이 첩이지 사실상 노리개로 쓰이다 버려지는 게 대부분이지. 뻔히 알고 있는데 그 부하가 나한테 그러더라. 아양만 잘 떨면 간부의 뒷배로 평생 호위호식할 수 있으니 행운 아니냐고. 씨발. 내가 머릿속이 꽃밭인 술집 여자인 줄 아나 진짜…….”

“그래서 그 부하한테 반항한 거야?”

“어. 도저히 납득이 안 된다고. 차라리 일반 조직원으로 남게 해달라고 말했지만 명령에 따르라면서 때리더라. 그 직후에 네가 왔어. 그 다음은 뭐, 좀 전에 말했던 대로고.”

조만간 데리러 올 테니 반성하고 있어라.

그 말은 즉 권은하를 탐내는 간부가 아직 그녀를 포기하지 않았음을 의미했다.

“창녀 자식으로 태어난 인생. 그래도 줄 잘 타서 필 줄 알았더니만 결국 엄마 따라 가네. 맘 같아선 도망치고 싶은데 그랬다간 죽겠지. 꼴에 간부 후보생이었다고 비밀을 너무 많이 알아버렸으니까……. 씨이발. 진짜 좆같네.”

권은하가 담배 연기 내뱉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 류태현은 그녀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에 탄식했다.

­꼬르르륵.

그 순간 그녀의 배에서 울린 부끄러운 소리.

“…….”

“……뭐 임마. 조직 사람들한테 얻어맞느라 저녁 못 먹었다고. 소리 좀 날 수도 있지 그걸 가지고 꼽을 주네.”

가벼운 농을 섞은 그 말은 착 가라앉은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덕분에 류태현의 표정도 조금은 풀어질 수 있었다.

“누가 뭐랬나. 배고프면 일단 올라가서 밥이라도 먹고 와. 난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안타깝게도 숙소엔 못 들어가. 후보생 잘리고 쫓겨났거든. 아마 안에 있는 애들이 들여보내주지 않을 거야.”

“그럼 밖에서 먹어야­”

“그것도 안 돼. 카드도 지갑도 다 위에 두고 왔어. 애초에 내 돈도 아니고. 그래서 지금 나 무일푼이야. 그래서 말인데…….”

“밥 사달라고?”

“응. 염치 불구하고 부탁할게.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잖아?”

그야 권은하를 구하려고 생판 모르던 남자도 쥐어팼는데 그 정도를 못할까.

그러나 문제는 권은하와 마찬가지로 류태현 또한 무일푼이라는 점이었다. 애석하게도 그는 부모님이 주는 적은 용돈으로 생활하는 가난한 학생이었으므로.

허나 자신 때문에 얻어맞고 배를 주리고 있는 권은하 앞에서 ‘나도 돈이 없어서 밥은 못 사주겠다.’ 하고 말할 순 없는 노릇.

이에 류태현이 고민하려던 찰나, 그의 뇌리에 번뜩이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그래. 사줄게. 대신 좀 걸어야하는데 괜찮아?”

“얻어먹는 주제에 불평할 순 없지. 얼마나 걸어야 하는데?”

“……아마 두 시간 정도?”

“…………도대체 어디까지 가려고 그러는데?”

“우리 집.”

“뭐?”

그 대답에 권은하가 이제껏 지어본 적 없는 황당하단 표정으로 반문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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