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6화 〉 225. (P)경계의 저편에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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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 인간관계란 이해와 존중을 전제로 한다.
사람은 서로의 차이를 이해하고 이를 존중함으로써 관계를 맺을 수 있으며, 그렇게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이기에 비로소 인간(人?)이라 불리는 것이다.
허나 이는 지나치게 낙관적인 이야기다. 차이를 이해하고 존중해야 한다 부르짖는 건 쉽지만 실제로는 어떠한가? 사람들은 과연 서로의 차이를 이해하고 존중하는가?
아니, 그렇지 않다. 낙관적인 이상론과 달리 현실은 차갑기 그지없으니.
차이는 불이해를 낳고, 불이해는 두려움과 불쾌감으로 이어지며, 그것들은 곧 배척을 야기하는 법. 그 일련의 흐름이야말로 인간의 본능이며, 어쩔 수 없는 필연인 것이다.
그렇기에 인류의 역사란 곧 배척의 역사.
도덕과 양심으로 차이를 이해하고 존중하기 시작한 것은, 기껏해야 수십 년도 채 되지 않겠지.
인종, 피부색, 성별, 언어, 종교, 가치관, 문화, 재산, 계층, 계급, 신분에 이르기까지. 인간이란 동물은 온갖 종류의 잣대를 들이밀며 타인과 자신을 구분하고 배척했다.
때로는 강자가 약자를, 때로는 다수가 소수를.
그러한 배척과 차별이 이제는 옛말이라고 하는 자도 있을 것이다. 그 말대로, 오늘날에 이르러선 지금껏 배척당해왔던 이들의 고충이 대중에게 알려지고, 뒤늦게나마 그들에 대한 이해와 존중이 이뤄지기 시작하긴 했으니까.
허나 그건 배척받던 모든 이들에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니었으니.
선량한 양심, 올곧은 도덕, 깨어있는 시민의식이 이른바 반드시 갖춰야 할 교양으로 여겨지기 시작한 오늘날에도, 여전히 배척받는 이들은 있었으며.
그 대상은 이따금, 사람들이 전혀 예상치 못한 존재이기도 했다.
“저희 애가 다른 친구들을 때렸다고요……?”
류태현의 어머니, 김수희가 그 말을 들은 것은 류태현이 12살 때의 일이었다. 류태현이 초인 판정을 받은 것으로부터 약 4년 뒤의 일.
“네. 태현이 어머님. 태현이가 점심 시간에 친구들하고 싸워서 지금 다른 친구들이 많이 다쳤어요. 아시다시피 태현이는 평범한 아이가 아니라……. ‘초인’이잖아요?”
“우리 태현이가 어째서……. 태현이가 그럴 애가 아닌데…….”
“아이들 말로는 그동안 다른 아이들이 태현이가 초인이라는 이유로 몰래 험담하거나 따돌렸다고 하네요. 아이들도 그 부분은 잘못했다 반성하고 있고요. 그렇지만 좋게좋게 넘어가기에는 아이들의 부상 정도가 너무 심해서…….”
“…….”
“아이들 사이의 일을 미리 알아차리지 못한 제 불찰입니다 어머님. 죄송하다는 말밖에 드릴 말이 없네요.”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씁쓸한 표정만을 삼키는 두 사람의 모습은, 초인과 인간이 더불어 살아가는 오늘날 사회의 안타까운 단면이었다.
초인이라 하면 으레 대중에게 선망받는 유명 헌터 따위만 떠올리기 쉽지만, 그 이면에서는 이처럼 상대적 소수인 초인에게 행해지는 차별과 배척 또한 만연한 것이 오늘날의 현실.
특히 그러한 경향은 류태현의 가족이 사는 의정부에서 더욱 도드라졌다.
의정부 북부부터 양주, 포천, 동두천까지 이어지는 거대한 슬럼가. 그 대규모 우범지대에는 자연스레 범죄자들이 몰려들었고, 요즘 시대에 범죄자라 함은 또 대부분이 초인이었다. 때문에 슬럼 인근에 사는 ‘평범한’ ‘일반인’들에게 있어 초인이란 범죄자거나, 혹은 범죄자 예비군인 경우가 대부분.
그러한 그릇된 인식이 낳는 차별과 배척은 비단 어른 세대만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오히려 순수한 아이들이기에 더더욱, 어른들이 행하는 차별을 분별없이 받아들이곤 그대로 자신의 또래에게 투사하는 경우가 왕왕 있었으니.
그날 일어난 류태현의 폭력 사태는, 그러한 차별에 의해 벌어진 비극이었다. 비극이었다만, 결국 객관적인 상황은 류태현이 다른 학생들에게 폭력을 행사했다는 것.
죄는 그에게 있었으며, 다만 그는 아직 어렸기에 그 대가는 부모가 치를 수밖에 없었다.
수백 단위를 넘어서는 합의금과 치료비에 형편이 어려워졌고, 집안에선 웃음기가 차츰 사라져갔으며, 류태현이 비뚤어지기 시작한 것도 그 즈음부터였다.
탈선.
그의 탈선은 이른바 자신을 배척하는 사회에 대한 반항이었다. 마침 그가 살던 동네에는 그와 비슷한 또래의, 그리고 비슷한 경험을 겪은 초인이 몇 명 더 있었다. 지역에 만연한 초인혐오는 그런 그들을 하나로 뭉치게 만들었고, 류태현이 15살이 되었을 무렵 그는 지역에서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유명한 불량아로 거듭나 있었다.
한편 의정부의 불량학생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슬럼가를 제 집 드나들 듯 다녔다. 범죄의 온상인 슬럼가는 불량학생들에게 있어 비뚤어진 선망의 대상이었으니까.
그리고 그건 류태현네 패거리도 예외가 아니었다.
류태현에게 있어 슬럼이란 자신을 배척하기만 하는 바깥 사회의 안티테제였다. 초인이라는 사실이 단점이 아닌 장점이 되며, 오직 힘의 논리로만 돌아가는 슬럼의 모습에 류태현 패거리는 치기어린 동경을 품게 되었다.
결과, 그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슬럼가를 드나들었다. 때로는 학교를 빼먹거나 외박마저 불사하며. 딱히 슬럼에서 무언가 특별한 일을 하는 건 아니었지만, 답답한 학교나 사회에서 벗어났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들은 편안함과 즐거움, 자유로움을 느낄 수 있었다.
하여, 그런 식으로.
류태현이 여느 때와 같이 슬럼을 가로지르며 목적 없는 방황을 일삼던 어느 날.
그는 자신의 인생을 바꾸게 될 운명적인 만남을 마주하게 되었다.
“씨발. 좆됐네 이거. 도대체 여기가 어디야?”
류태현은 거미줄처럼 복잡하게 얽힌 골목을 헤매며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평소 어울리던 패거리들이 일이 있어 혼자 슬럼에 온 그는, 마침 잘 됐다며 평소에 가본 적 없는 슬럼의 깊숙한 곳까지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이처럼, 보란 듯이 길을 잃어버리고 만 것이다.
다행히 집으로 돌아가지 못할 걱정은 없었다. 방향만 남쪽으로 잘 잡고 쭉 내려가다보면 결국 시내로 접어들 테니까.
“…….”
다만 문제는 어째 주위 분위기가 흉흉하다는 것.
류태현은 자신에게 노골적으로 꽂히는 시선들을 사방에서 느꼈다. 건물 틈새, 골목, 혹은 창가 등. 마치 사냥감을 노리는 맹수와도 같은 눈빛으로 기회를 엿보는 저들은, 빈말로도 자신에게 우호적인 이들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류태현의 복장은 슬럼가 바깥에 있는 중학교 교복 차림이었다. 보란 듯이 ‘나 외지인이요’하고 말하는 듯한 그 복장은 슬럼가의 범죄자들에게 노려지기 딱 좋았다.
‘뭐, 여차하면 다 때려눕히고 가면 되겠지만…….’
그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 골목 어귀에서 건장한 청년 넷이 그를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밝게 염색한 머리. 드러난 피부 곳곳에 진하게 새겨진 문신. 바지 주머니 너머로 윤곽이 그대로 드러나는 나이프나, 혹은 아예 숨길 기색조차 없이 당당히 손에 들려있는 흉기들.
“씨발. 텄네, 텄어.”
그런 그들의 접근에 류태현이 주먹을 꽉 쥐었다. 그냥 서로 가던 길 가겠다면 지나치면 그만이지만, 만약 이쪽에 해코지를 하려 든다면 곧바로 주먹부터 날릴 심산이었다.
선수필승. 저들도 설마 새파랗게 어린 자신이 먼저 공격하리라곤 예상치 못할 테니.
그러는 사이에도 류태현과 불량배들 사이의 거리는 빠르게 좁혀졌다.
20미터. 10미터. 5미터.
이윽고 불량배 중 한 명이 비릿한 웃음과 함께 입을 열려던 순간.
“뭐야. 어디 갔나 했더니 이런 곳에서 뭐하고 있어?”
등 뒤에서 들린 어린 여자의 목소리에 류태현이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그곳에는 날카로운 인상의 소녀가 류태현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이는 류태현 또래 정도 되었을까.얼굴에는 아직 앳된 티가 남아있었지만 풍기는 분위기는 성숙하기 그지없었다.잔머리가 삐죽 튀어나온 헤어스타일이나 묘하게 헤진 곳이 많은 복장은 그녀가 류태현과 달리 이곳 슬럼가의 주민임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이런 곳에서 꾸물거리지 말고 얼른 돌아가자. 다들 집에서 기다리고 있으니까.”
그렇게 말하며 류태현을 향해 손을 내미는 소녀.
“뭐해? 얼른 가자니까?”
소녀는 머뭇거리고 있던 류태현의 손목을 덥석 쥐었다. 그쯤 되자 류태현도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눈치 챌 수밖에 없었다.
소녀는 자신을 구해주려고 하고 있었다. 어느새 자신의 앞까지 다다른 불량배들로부터.
“어이, 거기 꼬맹이들. 지금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이지? 엉?”
“우리한텐 신경 끄고 갈 길이나 마저 가지 그래.”
“그럴 수는 없지. 니들이 지금 밟고 있는 이 땅, 여기는 우리 ‘실버혼’의 구역이거든. 들어본 적은 있겠지?”
“실버 혼…?”
소녀가 잠시 골똘히 생각에 잠기더니 이내 그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떠올랐다.
“아니? 들어본 적 없는데? 지천에 널린 약소 크루들까지 일일이 외우고 다니진 않아서.”
“약소 크루라고…? 지금 말 다했냐!?”
“어. 다 했으니까 얼른 꺼져. 길 막지 말고.”
“이 건방진 년이 아까부터 계속 따박따박 말대꾸를…. 안 되겠다. 그냥 돈만 뺏고 보내주려 했는데, 오늘 송장 둘 묻어야겠다. 니들이 자초한 거다? 응?”
선두에 선 불량배가 허리춤의 나이프를 뽑아들었다. 그러자 나머지 셋도 저마다 무기를 뽑아든 채 위협적인 분위기로 두 사람을 둘러싸기 시작했다.
‘날 빼내주려 하는 줄 알았는데 오히려 지가 먼저 도발해댈 줄은. 덕분에 마찰 없이 지나간다는 선택지는 사라졌군.’
류태현이 주머니 속에서 주먹을 꽈악 쥐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야, 실버 혼. 니들 근데 감당할 수 있겠어?”
“무슨 감당? 슬럼 살면서 시체 한둘 만드는 게 무슨 대수라고”
“아니, 그게 아니라. 개새끼 주제에 니들 주인한테 이빨을 들이밀고도 무사히 넘어갈 자신이 있냐고.”
그 말과 함께 소녀가 상의의 가슴팍을 풀어헤쳤다. 그러자 뽀얀 살결 위로 그려진 붉은 문신 하나가 드러났다.
“!!”
직후 불량배들의 얼굴이 너나 할 것 없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마치 맹수를 마주한 초식동물들처럼.
“실버 혼. 사실 들어보긴 했어. 이번에 우리 밑으로 새로 들어온 크루. 인원은 총 이십에 초인이 아홉이던가? 듣자하니 헤드만 겨우 C급이고 나머진 D급 이하 떨거지라 그러던데.”
“…………너 같은 꼬맹이가 용문의 정식 조직원일 리가 없는데. 그 문신은 도대체…….”
소녀의 쇄골 아래에 새겨진 두 마리의 용이 태극 무늬처럼 서로를 마주보고 있는 문신.
그것은 이곳 슬럼가를 삼분하는 세력 중 하나인 ‘용문’의 조직원임을 나타내는 증표이자 권력의 상징이었다. 사법 체계가 무너진 슬럼에선 강한 세력을 지닌 무력조직이야말로 곧 법이었으니까.
“잘 아네. 정식 조직원은 성인만 될 수 있으니까. 미성년 간부 후보생은 엄밀히 말하면 정식 조직원은 아니거든. 물론 그래도 니들 같은 산하 크루 멤버들 보다는 높은 위치지만. 그러니…….”
소녀의 가녀린 손이 남자가 들고 있던 나이프를 거머쥐었다.
파캉!
그러자 얼음조각처럼 깨지는 나이프. 바닥에 후두둑 떨어지는 칼날 파편에 남자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주제를 알았으면 좋은 말로 할 때 말 높여.”
“예, 예! 죄, 죄송합니”
“알겠으면 저리 꺼져. 그리고 다음부턴 삥을 뜯어도 상대를 봐가면서 뜯고. 알겠어?”
“예! 알겠습니다!”
“어째 대답을 한 명만 하네?”
직후 골목 전체가 떨릴 정도로 우렁찬 대답이 네 명의 불량배 전원에게서 터져나왔다. 그제야 만족했다는 얼굴을 한 소녀가 류태현의 손을 잡곤 그대로 걸어 나갔다.
“저기…….”
“고맙다는 인사는 필요 없어. 그냥 내가 내키는 대로 한 것뿐이니까.”
“아니, 그게 아니라 지금 어디로 가는 건가 해서.”
류태현의 말에 소녀의 발걸음이 우뚝 멈췄다. 곧 돌아본 그녀가 황당하다는 얼굴로 류태현에게 묻는다.
“……너 되게 뻔뻔하다. 보통은 이쪽에서 사양했다 해도 일단 구해줘서 고맙다, 덕분에 살았다 이런 식으로 말해야 하는 거 아닌가? 예의는 밥 말아드셨어?”
“네가 도와주지 않았어도 그런 떨거지들 정도야 얼마든지 쓰러뜨릴 수 있었어. 쓸데없는 참견이었다고.”
“그랬다가 뒷감당은 어떻게 하고?”
“뒷감당이랄 게 있나. 한 번 쥐어패면 알아서 꼬리 마는 놈들뿐이던데.”
“그거야 슬럼 외곽에 있는 동네 양아치 수준인 놈들이나 그렇지. ‘3대 세력’이 지배하는 구역에서 조직원을 잘못 건드렸다간 슬럼을 나가기도 전에 죽을 거야. 더군다나 그런 눈에 띄고, 신원을 특정하기 좋은 복장으로는.”
소녀가 류태현이 입고 있는 교복을 가리켰다. 블레이저는 입고 있지 않았기에 이름까지 노출된 건 아니었지만, 넥타이나 바지 색만 봐도 어느 학교 교복인지는 뻔히 보였다.
만약 소녀가 나타나지 않고 류태현이 불량배들과 싸웠다면, 설령 이겼다 하더라도 머지않아 그들에게 보복당할 운명이었겠지.
“뭐, 말하는 거 들어보니 나름 실력에 자신은 있나 본데. 그런 객기로 슬럼에서 설쳐대다간 객사하기 쉬워. 널 위해서 충고해주는 거니까 새겨들으라고.”
“그래, 충고 고맙다. 좀 전에도 그렇고 처음 본 사람한테 엄청 친절하네. 용문이라 그랬나? 그쪽 조직 사람들은 다 이런 친절이 몸에 뱄나보지?”
“외지인이 슬럼에서 죽으면 우리도 좋을 게 없거든. 괜히 바깥 놈들이 슬럼을 들쑤실 명분만 주는 꼴이니까. 특히 피해자가 너처럼 피도 안 마른 어린애라면 더더욱.”
그 말에 류태현은 비슷한 나이인 주제에 유세라고 생각했으나 굳이 입으로 내진 않았다. 그러는 사이에도 두 사람은 계속 걸었다.
“뭐 그거야 그렇다 치고. 그래서 지금 어디로 가는 건데?”
“너 지금 길 잃었잖아. 아는 길 나올 때까지 같이 가줄게. 마침 가는 방향도 비슷할 것 같고.”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어느덧 주위 풍경은 류태현이 아는 익숙한 길거리로 바뀌어 있었다. 류태현과 그 패거리들이 줄기차게 오갔던, 소녀의 말을 빌리자면 ‘3대 세력’의 지배가 미치지 않는 슬럼 외곽.
“여기부턴 아는 길이야. 이제 안내 그만해줘도 돼.”
“그래? 마침 잘 됐네. 나도 딱 여기가 목적지였거든.”
소녀가 큰 길 안쪽에 자리한 5층짜리 콘크리트 건물을 가리켰다. 슬럼가의 건물이 다 그렇듯 그 건물 또한 얼핏 보면 폐허처럼 보였으나, 어둠을 뚫고 새어나오는 불빛은 그 안에 사람이 살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네 집이야?”
“집이라기보다는 숙소지. 나 같은 간부 후보생들끼리 모여 사는 곳. 즉 여기까지도 용문의 구역이란 소리야. 그러니 슬럼 탐방을 하고 싶거든 저 앞에 사거리까지만 다녀. 그 이상은 지나가다 칼 맞아도 본인 책임이니까.”
“번번이 감사합니다 가이드 님. 덕분에 슬럼에 대해 더욱 많이 알게 되었네요.”
류태현의 빈정거림에 소녀가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나 이내 될 대로 되라는 듯 고개를 홱 돌리곤 건물로 들어갔다. 어차피 류태현하고 자신은 다시는 만나지 않을 사이니까.
그러나.
“야.”
그런 소녀를 류태현이 불러 세웠다.
“이것도 인연인데 이름이나 알려주라. 난 류태현. 넌 이름이 뭐야?”
“인연은 무슨. 내 이름은 알아서 뭐하게? 어차피 다신 안 볼 사이인데.”
“그거야 모르는 일이지. 또 내가 슬럼에 놀러왔다가 너랑 마주칠 수도 있는 거잖아.”
“……좀 전에 내 충고는 귓등으로도 안 들었구나?”
한숨을 푹 내쉰 소녀가 잠시 고민하더니 이내 쏘아붙이듯 말했다.
“……권은하. 그게 내 이름이야. 이제 됐지? 궁금증 풀렸으면 얼른 가. 귀찮게 밍기적거리지 말고.”
“야, 권은하.”
“또 뭐!”
“좀 전엔 고마웠다. 구해줘서.”
그 갑작스러운 감사에 권은하의 표정이 흠칫 굳었다.
여기까지 오는 내내 툴툴대고 빈정대기나 하던 류태현이 이제 와서야 감사 인사를 할 줄은 미처 예상치 못했기에.
“……알았으면 됐어. 이제 가봐.”
“그래. 다음에 보자.”
“다음은 무슨! 이쪽엔 얼씬도 하지 말라니까”
권은하가 못마땅하다며 외쳤으나 류태현은 이미 한가롭게 손을 흔들며 발걸음을 돌린 뒤였다. 권은하는 그 뒷모습을 한참 바라보다가 한숨을 푹 내쉬며 생각했다.
‘괜히 구해줬나? 아무래도 귀찮은 애랑 엮인 거 같은데…….’
그런 권은하의 우려는 정확히 들어맞았다.
그로부터 이틀 뒤.
“오. 은하 하이.”
“씨발 네가 왜 여깄어.”
“그냥 놀러왔다가 너 보이길래 와봤지. 봉투는 뭐야? 편의점 다녀오는 길?”
“…….”
고작 한 번 마주친 사이면서 무슨 반 친구 대하듯 친근하게 다가오는 류태현을 보며 권은하는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정말, 어지간히도 귀찮은 놈과 엮여버린 것 같다며.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