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4화 〉 223. 그의 고향
* * *
“좋아. 오늘은 이쯤 하도록 하지. 수고했다 안수호. 오늘은 이만 돌아가라.”
“허억…! 허억…! 감, 사합니…….”
링 위에 대자로 드러누운 안수호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대답했다. 아침부터 오후까지 이어진 훈련 탓에 그는 땀이 비가 오듯 쏟아진다는 말조차 부족할 정도로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너도 느꼈겠지만 훈련 후반부에 접어들어선 초능력의 제어가 제대로 되지 않고 있다. 아마 신기술이라 아직 제어가 익숙하지 않아서 그런가 본데. 익숙하지 않은 기술은 실전에서 빈틈을 만드는 약점일 뿐이다. 무슨 말 하는지 알겠지?”
“…최대한, 많이, 연습하라는…….”
“그래. 연기 분사를 통한 가속, 그리고 폭발을 통한 타격 방어. 둘 다 꽤 좋은 발상이야. 이 일주일 안에 그 두 기술을 완성할 수 있다면 날 상대로 한 판 따내는 것쯤이야 식은 죽 먹기겠지.”
그렇게 말한 마르코가 아릿한 아픔이 남은 턱을 매만졌다.
마지막 대련에서 안수호에게 얻어맞은 일격. 그 일격을 상기하자 그의 입가에 자연스레 진한 웃음이 떠올랐다.
“안수호. 넌 내 예상보다 훨씬 가르치는 보람이 있는 놈이야. 너만 괜찮다면 이번 집체가 끝난 뒤에도 시간을 내서 가르쳐주고 싶을 정도로. 어때, 혹시 흥미 있나?”
“…그래주신다면 저야 감사하죠.”
“그래. 그건 차차 논의해보자고. 난 먼저 돌아갈 테니 편히 쉬다 나와라.”
마르코가 링 위에서 훌쩍 뛰어 바닥에 착지했다. 유유히 스파링장을 나서는 마르코에게 인사한 안수호는 그 뒤로도 한참 동안이나 링 위에서 휴식을 취했다.
‘진짜 뒤지는 줄 알았네.’
마르코는 괜히 특책과 최고의 근접전 스페셜리스트라 불리는 게 아니었다. 그는 류태현 못지 않게 강했으며, 류태현보다 훨씬 노련했다. 안수호의 페이스를 부추기며 능수능란하게 공방을 조절하던 그의 실력은, 과연 그가 지금까지 몇 번이나 집체 교관을 맡은 이유가 있구나 하고 자연스레 생각하게 될 정도였다.
‘이 짓거리를 매일 반복하면 강해지지 않을 수가 없겠지. 불평하는 게 아니라, 진짜 이건 내게 있어서도 좋은 기회야.’
신체능력에 비해 움직임이 조잡하다.
마르코가 안수호에게 말한 그 지적은 안수호 본인도 줄곧 생각해오던 것이었다.
빌헬름, 아이기스, 성유진. 그 외에 온갖 강자들과 맞붙었던 그는 ‘이방인’인 자신의 기술이 얼마나 부족한지 뼈저리게 실감하고 있었다.
매번 편리한 스킬이나 아티펙트를 있는 대로 동원함은 물론이요, 역설적이게도 결정적인 순간마다 천운이 따라주어 어찌어찌 이겨오긴 했지만, 그런 기적이 언제까지고 반복되리란 보장도 없으니.
슬슬 이처럼 자기 강화에 본격적으로 투자를 해야 하는 시기였노라고. 그렇게 생각한 안수호의 뇌리에 문득 잊고 있던 기억이 떠올랐다.
언젠가 경지에 이르렀을 때 다시 한 번 찾아오게나.
백두산 꼭대기 천지던전에서 여인혁에게 근골정렬을 받았을 때의 기억.
당시의 안수호는 워낙 비루한 스펙의 소유자였기에, 여인혁의 근골정렬로 겨우 평균적인 초인의 신체능력을 손에 넣는 정도밖에 이루지 못했다.
이에 여인혁은 그에게 그렇게 덧붙였다. 언젠가, 경지에 이르렀을 때 다시 한 번 찾아오라고.
그건 즉 안수호가 여인혁의 ‘본격적인’ 근골정렬을 받을 수 있는 수준이 되면 찾아오란 뜻이었다. 적어도 안수호 본인은 그렇게 받아들였다.
‘여인혁이 말하는 경지가 뭘 뜻하는 건지 정확하게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 당시에 비해서 내가 훨씬 강해진 건 사실이니까.’
곧 그의 뇌리에 세 명의 초인이 떠올랐다.
설아현과 진소월, 그리고 성유진.
자타공인 국내 최강의 반열에 선 그 S급 초인들의 공통점은 셋 다 여인혁의 은혜를 입은, 이른바 ‘여인혁 키즈’라는 것이었다.
모든 초인이 여인혁의 손을 거친다 해서 S급 초인이 될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들이 S급에 오를 수 있었던 건 기본적인 자질이 뒷받침되었기 때문.
허나 잠들어있던 그들의 자질이 보다 일찍 개화한 데에는 여인혁의 힘이 크게 작용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조만간 백두산에도 한 번 다시 가봐야겠는걸.’
지금 당장 자신이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문제는 기술의 부재였지만, 기실 충분한 힘만 있다면 기술의 부재는 어느 정도 커버가 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여인혁의 근골정렬은 그가 확실하게 지금 이상으로 강해질 수 있는 방법 중 하나였으니.
‘……문제는 여인혁이 과연 이번에도 날 도와주느냐는 건데. 그거야 결국 만나봐야 알 일이지.’
상념에 젖어 있던 안수호는 어느덧 자신의 호흡이 정상으로 돌아왔음을 알아차렸다. 링에서 내려온 그가 옷가지들을 주섬주섬 챙겨 밖으로 나섰다.
그렇게 그가 훈련장 건물을 나서자.
“형.”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던 류태현이 그를 맞이했다. 순간 안수호의 얼굴에 당혹감이 떠오른다.
“뭐야. 여기서 뭐해?”
“뭐하긴. 형 기다리고 있었지.”
“아침부터 지금까지 계속?”
“아니. 난 따로 위에서 훈련하고 있다가 형 교육 끝날 때 쯤 맞춰서 내려왔어. 한 2, 30분 기다렸나?”
“왜 기다린 건데?”
“할 이야기가 있어서.”
그 말에 안수호는 그런 일은 전화나 문자로 하면 되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그러나 류태현은 말없이 고개를 저어보일 뿐이었다.
“전화는 안 돼. 꼭 직접 만나서 해야 할 이야기라 생각했거든.”
그쯤 되자 안수호는 도대체 이놈이 무슨 이야기를 꺼내려고 하는 건지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직접 이야기하기를 고수하는 걸 보나, 착 가라앉은 태도로 보나 심각한 이야기임이 분명했다.
그러나.
“미안해 형. 아침 스파링 때, 나 형 몰래 반칙을 써서 형을 이기려 했어. 그래서 정식으로 사과하고 싶어. 진짜 미안.”
“…………엉?”
류태현이 꺼낸 말은 안수호의 예상을 상당히 빗겨가고 있었다. 애초에 구체적으로 무슨 이야기를 할 거라 예상했던 건 아니었다만, 적어도 그가 생각하던 심각하기 그지없는 이야기는 아니었기에.
“……반칙이라니? 네가 뭘 했는데?”
“스파링 마지막에 탈리스만을 썼거든. 나도 모르는 사이에 무심코 발동해서……. 아니, 변명하지 않을게. 그냥 내가 쓴 거고 내가 잘못한 거야. 정말 미안해 형.”
류태현이 면목이 없다며 고개를 푹 숙였다. 그 진정어린 태도에서 그가 느끼는 죄책감이 얼마나 무거운지 여실히 전해졌다.
그렇지만.
“뭐야. 무슨 심각한 이야기를 하나 했더니 겨우 그거였어? 별 것도 아닌 거 가지고 뭘. 됐어. 뭘 그런 걸로 사과를 해.”
“그렇지만”
“됐다니까 그러네. 네가 뭐 공식전에서 반칙을 쓴 것도 아니고. 그냥 연습용 스파링에서 실수 한 번 한 거 가지고 뭘. 오히려 그렇게 죽을 죄 지었다는 듯이 고개 숙이면 부담스러워. 그니까 고개 들어라.”
그 말에 류태현이 안수호의 눈치를 보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허나 여전히 얼굴에 떠올라 있는 초조함은 그가 아직 죄책감을 덜어내지 못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성격 좋은 것도 이정도면 병이군.’
아무리 주인공이라도 이건 좀 심한 거 아닌가. 그렇게 생각한 안수호가 탈리스만을 발동했다. 그의 오른손에 푸른빛이 아주 연하게 일렁이기 시작하고.
퍽.
이내 그가 주먹으로 툭 류태현의 팔뚝을 쳤다. 류태현의 얼굴에 의아함이 떠오른다.
“자. 됐지? 너도 한 대 나도 한 대니까 이걸로 퉁치자. 남자새끼가 쩨쩨하게 그런 거 가지고 하루종일 꿍해있어.”
“형…….”
“‘형…….’은 시발. 그 감동했다는 눈초리 집어치워. 징그러우려 그러니까.”
안수호의 말에 류태현이 멋쩍게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이내 부끄러운 듯 배시시 웃으며 그를 향해 다시 한 번 고개를 살짝 숙였다.
“고마워 형. 용서해줘서.”
“…….”
안심과 감사가 섞인 그 포근한 표정에 안수호의 뒷목에 한 줄기 소름이 저릿 하고 올라왔다.
‘시발. 설마 쾌락천마 이 새끼 나 좆돼보라고 BL로 노선 튼 건 아니겠지?’
아주 잠깐 그런 위기감이 그에게 엄습했으나 이는 오래가지 않았다. 쾌락천마에게 그런 짓이 가능할 능력이 쥐뿔도 없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놈이 류태현의 성격을 고쳐쓰는 게 가능했다면 진즉에 그를 빌런으로 만들어 자신과 대립하게 했으리라. 안수호는 쾌락천마를 증오했지만, 역설적이게도 그의 악의적으로 배배 꼬인 성격만은 신뢰하고 있었다. 참으로 기묘한 믿음이었다.
“이제 기숙사로 돌아가냐?”
“응. 그래야지. 형은?”
“나도 집 가야지. 마침 가는 길인데 중간까지 같이 가면 되겠네.”
두 사람이 나란히 서서 길을 걷기 시작했다.
저녁노을이 드리운 아카데미 풍경은 고즈넉한 분위기가 있었다. 외진 곳인데다가 방학인 덕에 오가는 사람이 없었기에 더더욱.
“그러고 보니 류태현 넌 방학 동안 뭐하냐? 계속 기숙사에 있을 예정?”
“응. 2학기 대비해서 훈련에 매진할 생각이야. 또 겨울이한테 질 수는 없으니까.”
‘또’라는 말에 묘한 강세가 붙어있었지만 안수호는 이를 눈치 채지 못했다. 그저 한겨울이나 류태현이나 참 열심이구나 하고 생각할 뿐.
“너도 참 고생이네. 보니까 1학년은 대부분 방학 때 고향으로 내려가는 것 같던데.”
“나도 이번 주말엔 본가로 갈 거야. 그래도 방학인데 부모님 얼굴은 한 번 뵈어야 하니까.”
“본가? 그러고 보니 너 본가가 어디더라?”
안수호는 새삼 자신이 류태현의 고향에 대해 모르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에게서 이야기를 듣지 못했음은 물론, 원작에도 그의 고향에 대한 내용이 단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는 것을.
‘웹소설에서 주인공 과거사를 얼버무리는 거야 흔하긴 하지만. 여긴 이제 진짜 세상이니까 류태현도 고향이 있겠지.’
일단 부모님을 뵈러 간다는 말을 들어보면 흔해빠진 주인공들처럼 부모가 죽었거나 해외에 나가있지는 않은 모양. 안수호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자 류태현이 답했다.
“경기도야. 경기 북부.”
“경기 북부 어디인데?”
“그게…….”
류태현이 말끝을 흐리며 잠시 뜸을 들였다. 그의 시선이 마치 안수호의 눈치를 보듯 그를 위아래로 훑는다.
“뭐 말하기 싫으면 말 안 해도 되고.”
“아냐 형. 말하기 싫은 건 아니고. 그냥 그…….”
고민하듯 입술을 오물거리던 류태현이 이내 단념한 듯 덧붙였다.
“…………의정부야. 내 본가. 의정부 구시가지 남쪽.”
“의정부 구시가지면…….”
“슬럼 경계에서 아슬아슬하게 벗어난 곳. 나 어릴 때는 거의 슬럼이나 다름없었어.”
그 말에 안수호가 놀란 듯 숨을 삼켰다. 그러자 류태현이 씁쓸하게 물었다.
“왜, 충격이야?”
“아니. 충격이라기 보단 그…….”
설마 주인공 류태현이 슬럼 지역 출신일 줄은 몰랐다고. 그렇게 곧이곧대로 답할 수 있을리가 만무한 안수호가 필사적으로 답변을 생각해냈다.
“……마침 나도 얼마 전에 의정부 쪽을 갔었거든. 어쩌면 네 본가 근처도 지나쳤을지 모르겠다 싶어서.”
“아하, 그럴 수도 있겠네. 부모님께서 효원동에서 국밥집 하시거든. ‘태현이네 국밥집’이라고 간판 걸려있는데 혹시 지나가면서 봤어?”
“……그런 이름이면 기억에 확 남았을 텐데 기억 안 나는 거 보면 못 봤나보다. 근데 설마 네가 요식업 집안인 줄은 몰랐네. 거기 국밥 맛있냐?”
“끝내주지. 다음에 한 번 와.”
그렇게 이야기하며 걷고 있자니 어느덧 기숙사 앞이었다. 인사를 나누고 헤어지려던 류태현에게 안수호가 마지막으로 물었다.
“주말에 본가로 간다 그랬잖아. 그럼 돌아오는 건 언제야?”
“월요일 아침 기차로 오려고. 그건 왜?”
“오늘 스파링. 시간제한 때문에 애매하게 끝났잖아. 마무리는 지어야 하지 않겠어?”
그 말에 류태현의 뺨이 움찔, 떨렸다. 안수호는 그것이 튀어나오려는 웃음을 가까스로 억누른 것임을 단번에 눈치 챘다.
“사실 오늘 썼던 기술들 그거 아직 다 미완성이거든. 일주일 동안 완벽히 마스터할 거니까 기대해.”
“……그거 참 기대되네. 좋아. 월요일 저녁. 확실하게 비워둘게 형.”
“그려. 이번엔 반칙 쓰지 말고.”
안수호의 너스레에 류태현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럼 다음에 보자고. 인사를 마친 그가 마침내 기숙사 안으로 들어갔다.
‘오늘 스파링에서 류태현이랑 나랑 거의 비등비등했으니까. 집체 훈련 성과 확인용으로 딱 안성맞춤인 상대지.'
이내 안수호 또한 발걸음을 돌렸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혼자 적적하게 걸어가는 그의 머릿속은 온통 류태현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그나저나 류태현 고향이 설마 슬럼 지역이었을 줄이야.’
정확히는 아슬아슬하게 슬럼이 아닌 경계지역이었지만. 그동안 모르고 있던 류태현의 고향이 원작에서 이상하리만치 다뤄지지 않던 의정부 쪽이라는 사실이 안수호는 결코 우연인 것 같지가 않았다.
‘분명 그쪽에도 뭔가 설정된 게 있었겠지. 다만 최신화까지 밝혀지지 않았을 뿐.’
주인공의 고향이 슬럼 인근이다. 이 매력적인 설정을 가지고 쾌락천마는 과연 어떤 안배를 준비해두었던 걸까.
‘……다음 주에 태현이랑 스파링 뛰고 나서 고향에 대해 넌지시 물어볼까.’
안수호는 그렇게 생각했으나, 그의 생각이 이루어지는 일은 없었다.
그로부터 일주일 후. 월요일 저녁.
류태현은 돌아오지 않았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