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9화 〉 218. 같은 사람이더라도
* * *
“그래서? 어떻게 할래?”
공허한, 힘이 없는, 그러나 여유로운 그 목소리에 안수호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지예원을 들먹인 박지현의 협박에, 안수호의 머리가 그 어느 때보다도 빠르게 돌아간다.
우선 상황을 정리한다. 협박. 박지현은 지금 자신을 협박하고 있다. 자신의 궁금증을 풀어주지 않는다면 지예원의 위치를 여명단에 알리겠노라고.
그 다음은 가능성을 검증한다. 박지현이 어제 밤 자신과 지예원의 만남을 엿보았을 가능성. 충분히 있을 법한 일이다. 원룸 주변에는 실비를 통해 감시망을 펼쳐두긴 했지만, 그래 봐야 실비의 시청각에 의존하는 것. 박지현이 안개로 변해 몰래 접근했다면 실비라 해도 알아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두 번째. 자신을 만나러 오기 전, 미리 지예원의 위치를 담은 이메일을 준비해놨다는 건 사실일까.
그 부분에 대해선 확답을 내릴 수 없다. 자신에 대한 습격, 이후의 제안마저 실패로 돌아갔을 때를 대비해 보험을 들어두었다 한다면…….
‘충분히 있을법한 일이야. 어쩌면 죽기 직전에 가까스로 떠올린 허세일지도 모르지만…….’
문제는 박지현의 말이 허세인지 아닌지 검증할 수단이 지금의 그에게는 없다는 점.
고로 협박이 허세든 사실이든 그로서는 그녀의 요구를 수용할 수밖에 없다. 그것이 짧은 고민 끝에 내린 그의 결론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그녀의 언행으로 미루어봤을 때, 적어도 그녀가 지금도 여명단에 적극적으로 가담하고 있는 건 아니라는 사실.
“……‘궁금증을 풀어달라’라. 그건 네가 하는 질문에 내가 답하기만 하면 되는 건가?”
“그래도 되긴 하지. 그렇지만 그래서야 시간도 너무 오래 걸리고 귀찮잖아?”
“그럼 어쩌라는 건데.”
“한 번에 쉽고 간단하게 끝낼 방법이 있는데 뭣하러 돌아가냐는 거지.”
박지현이 살며시 입을 벌리며 자신의 송곳니를 드러내보였다. 그 제스처에 안수호는 단번에 그녀의 요구를 이해했다.
“내 피를 빨고 싶다 그건가.”
흡혈. 그리고 그것을 통한 기억의 열람.
박지현의 말마따나 그녀의 요구조건은 안수호가 피를 내어주면 단번에 해결될 일이었다. 그녀가 이 세상에 대해 갖고 있는 의문과 미련은 안수호의 기억을 엿보는 것으로 대강 해결될 테니까.
다만 문제가 하나 있다면.
‘내 기억을 엿본 다음에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모른다는 거지.’
석 달 전과 달리 안수호는 이 세상에 대해 나름 많은 지식을 얻었다. 쾌락천마를 위시한 신들과, 그 휘하에 있는 천사들과, 그리고 수많은 다른 세상의 존재에 이르기까지.
무엇보다 안수호는 여러 증언으로부터 이 세상이 단순히 소설에 불과한 게 아닌, 진짜 세상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문제는 바로 그 지점이었다.
박지현은 이 세상이 가짜에 불과하다는 걸 알기에 삶을 포기했다. 허나 그런 그녀가 세상이 가짜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면, 당연히 포기했던 삶의 의지를 다시 붙잡지 않겠는가.
‘최악의 경우 다시 여명단 활동을 시작할지도 모르지. 만약 그렇게 되면 성가신 수준이 아니야. 그야말로 끝장이다.’
자신의 기억을 훤히 들여다 본 자가 적으로 돌아설 가능성.
안수호는 결코 그 가능성을 간과할 수 없었다.
“……한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얼마든지.”
“너는 상대의 피를 마시는 걸로 기억을 엿볼 수 있지. 그건 저번의 경험으로 알고 있어. 하지만 기억을 엿볼 수 있는 범위라든가, 한 번에 볼 수 있는 기억의 양 같은 건 나로선 알 수 없는 사실이야. 그 부분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해줬으면 해.”
“그런 질문을 하는 걸 보아하니, 보여줘선 안 될 기억까지 내게 보여주게 될까봐 걱정되나 보네?”
“그런 셈이지.”
이미 한 번 안수호의 기억을 본 적이 있기 때문일까, 박지현은 그의 심리를 훤히 들여다보듯 말했다.
“그 부분은 안심해도 좋아. 내가 엿볼 수 있는 건 그 사람이 그 순간 생각하고 있던 것에 대한 기억뿐이니까.”
그 이상의 기억을 엿보기 위해선 그 사람의 피를 전부 빨아야 한다. 그러나 박지현이 그렇게 할 동안 안수호가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
고로 안심해도 좋다고. 박지현의 말이 안수호의 귀를 솔깃하게 간질였으나, 적의 말만 믿고 섣불리 모험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기에 안수호는 신중에 신중을 기하며 질문했다.
“……넌 좀 전에 자기 요구를 들어주면 김민아를 찾는 데에 도움을 준다 했어. 구체적으로 어떻게 도와주려는 거지?”
“질문도 많네. 좀 전엔 하나만 물어보겠다 했으면서.”
“하나 물어보고 싶은 게 있다 그랬지 하나만 물어본다 한 적은 없어. 얼른 대답해.”
“그래 뭐. 김민아는 지금 본부에 잡혀 있고, 너희는 본부의 위치를 몰라서 곤란한 거잖아? 나도 본부가 어디 있는지는 모르지만, 본부 위치를 아는 사람이 어디 있는지는 알거든. 그걸 너한테 말해준다면 충분히 도움이 되지 않겠어?”
어째 지나치게 안수호의 사정에 좋은 이야기였지만, 그 말이 사실이라면 확실히 도움이 되긴 할 터였다. 이에 안수호가 고개를 끄덕이며 하나 더 물었다.
“만약 내가 네 거래를 받아들이면 지예원의 소재가 담긴 이메일은 곧바로 처리해줄 건가?”
“당연하지. 난 거래는 확실히 지키자는 주의거든. 메일은 당장 지워줄게. 지우려면 집으로 돌아가야겠지만…….”
“집?”
“의정부 슬럼에 작게 방을 구해서 살고 있거든. 이메일을 세팅해둔 컴퓨터도 거기 있고. 메일을 취소하려면 일단 집으로 돌아가야 해.”
“메일 정도야 스마트폰으로도 얼마든지 취소할 수 있잖아. 굳이 집으로 돌아가야 할 필요가 있나?”
“난 스마트폰 없어. 게다가 메일 프로그램도 조직에서 쓰던 특수한 프로그램이라. 발송 예정인 메일을 지우려면 반드시 집으로 돌아가야 해.”
“그런가.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그렇게 말한 안수호가 잠시 입을 다문 채 고민에 빠졌다. 여전히 실비에게 묶여있던 박지현은 그런 그를 올려다보며, 표정으로 드러나는 그의 의중을 살핀다.
‘의정부 슬럼이면 여기서 3, 4시간? 아니지, 실비가 있으면 그거보다 덜 걸려서 갈 수 있을 것 같은데…….’
고민하던 안수호가 이내 음, 하는 소리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겨우 결정을 내렸다는 듯이.
“저기, 고민하는 건 좋은데 나 좀 일으켜주면 안 될까? 여기 바닥이 딱딱해서 가슴이 너무 답답한”
“메일 발송 예정 시각은 언제지?”
“……사흘 뒤 00시인데….”
“여유가 꽤 있네. 지금 당장 갈 필요는 없겠다.”
그렇게 말한 안수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자 그의 오른손과 연결되어 있던 태초의 은이 뚝 끊어진다.
“근무 마무리하고 올 테니까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아마 1시간 정도 걸릴 거야.”
“기다리라니 그게 무슨…. 잠깐, 설마 너 의정부까지 직접 갈 생각”
“실비.”
휘리리릭!!
안수호의 명령에 박지현을 묶고 있던 실비가 촤라라락 몸을 펼쳤다. 가운데 묶인 박지현을 중심으로 거미처럼 뻗은 8개의 다리가 건물 벽에 달라붙더니, 이내 박지현과 함께 벽을 타고 오르기 시작한다.
“사람들 눈에 안 띄게 잘 숨어있어. 소리 못 내게 입도 막아두고.”
안수호의 명령에 실비가 박지현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자 줄곧 공허해보였던 그녀의 얼굴에 일말의 당혹감이 서리기 시작한다.
“얌전히 기다리고 있으라고.”
그 말을 마지막으로 안수호가 몸을 돌렸다. 시계를 확인한 그가 재빠르게 경비실로 뛰어갔다.
‘내 기억을 먼저 보여주는 건 리스크가 커. 기억을 본 다음 박지현이 무슨 반응을 보일지 모르니까. 안전을 기하려면 슬럼가로 가서 메일 취소를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본부 위치를 안다는 자의 정보까지 들은 뒤에 기억을 보여주는 편이 낫겠지.’
그것이 그가 당장 취할 수 있는 방법 중 가장 신중한 방법이었다. 마침 내일은 일요일이고 근무도 없으니, 늦은 밤에 서울로 올라가도 일정에 지장도 없으니 좋았다.
‘쓸데없이 손에 피 묻힐 일만 안 생겼으면 좋겠는데…….’
달려나가던 중 품은 그 덧없는 염원이 밤바람에 실려 저 멀리 흩어졌다.
***
2시간 뒤.
펄럭.
의정부 북부에 광활하게 펼쳐진 슬럼가. 그중 한 건물의 옥상에 한 쌍의 은빛 날개가 내려앉았다. 새보다는 벌레의 것과 비슷한 날개의 중심에는 안수호가 있었고, 그의 왼팔에는 팔다리가 묶인 박지현이 죄수처럼 매달려 있었다.
“집이 몇 층이라 그랬지?”
“……3층.”
“좋아. 어서 안내해.”
안수호가 박지현을 풀어주자 그녀가 잠시 불만스런 표정을 짓더니, 이내 터덜터덜 옥상 계단으로 향했다. 허름하기 그지없는 5층짜리 콘크리트 건물에선 미세한 인기척이 몇몇 느껴졌으나, 그들 중 누구도 아닌 밤중에 방문한 두 사람에게 관심을 갖지 않았다.
끼익.
어둡고 칙칙한 복도 끄트머리. 녹슨 철문을 열고 박지현이 안으로 들어섰다. 그곳이 그녀가 현재 머물고 있는 집이었다. 크기는 안수호의 원룸과 비슷했으나, 안쪽의 풍경은 살풍경하기 그지없었다.
있는 것이라곤 허름한 이불과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는 옷가지 몇 벌, 구석에 박아둔 쓰레기들, 그리고 컴퓨터 한 대가 전부.
‘민채령한테서 도망친 후로 거의 폐인처럼 지냈나 본데.’
그 풍경이야말로 박지현이 세상의 진실을 알아채고 삶의 의욕을 잃었다는 걸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안수호가 방을 둘러보는 사이 박지현이 컴퓨터 앞으로 가 전원을 켜고 메일 프로그램에 접속했다.
“자, 여기 보이지? 예약 전송 메일 하나 있는 거.”
안수호에게 화면을 보여준 박지현이 클릭 몇 번으로 메일 전송을 취소했다. 깔끔하게 텅 빈 화면을 보곤 안수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 말고는 더 없겠지?”
“없어. 정 걱정되면 직접 뒤져보든가.”
“……됐어. 뒤져볼 시간도 없고.”
안수호는 건성으로 대답하며 방의 구조를 살폈다. 입구는 두 사람이 들어온 문 하나밖에 없었으며, 한쪽 벽에는 반쯤 깨진 창문들이 줄줄이 늘어서 있었다.
“좋아. 메일도 지웠으니 이제 거래를 해보실까.”
앉을 곳을 찾던 안수호가 컴퓨터가 놓여있던 책상 위에 털썩 걸터앉았다.
“네가 말했던 본부의 위치를 안다는 조직원. 그 조직원이 누구고, 어디 가면 만날 수 있는지, 그 외에도 내가 알아야 할 게 있다면 전부 말해줘. 그게 다 끝나면 나도 내 기억을 네게 제공할게.”
“…………좋아. 어차피 뭐가 먼저든 달라질 건 없으니까.”
박지현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두 사람의 ‘거래’에 있어서 박지현은 줄곧 양보의 스탠스를 취했다. 거래 과정에서 얼마의 손해를 본들, 결과적으로 그의 기억에서 답을 찾을 수 있다면 그걸로 족하다는 듯 했다.
“쓸데없는 설명은 생략할게. 단장 직속 암살팀 중에 아이기스라는 멤버가 있는데, 혹시 알고 있어?”
“아이기스?”
그 말에 안수호가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알기야 안다만은, 설마 그 이름이 나올 줄은 상상치 못해서.
“알고 있지. 나랑도 두 번이나 싸워본 놈이니까. 근데 그녀석이 왜?”
“예전에 그 사람하고 같이 임무를 뛰어본 적이 있었는데, 그때 부상을 회복할 목적으로 그 사람의 피를 살짝 마셔봤거든.”
“설마 그때 본부의 위치를 알아냈다는 건가?”
“아니. 아쉽게도 그러진 못했어. 그렇지만 그 사람이 자주 드나드는……. 일종의 ‘별장’이 어디 있는지 알아냈거든.”
“별장이라고?”
“응. 암살팀이라고 해서 매일 본부에 죽치고 있는 건 아니거든. 임무가 있을 때마다 본부를 들락날락했다간 본부 위치가 사방에 알려질 테니까. 그래서 평소에는 다른 지부에 대기하거나 위장 신분으로 집을 하나 구해서 생활하는데, 내가 말한 별장이란 건 그중 후자를 말하는 거야. 잠깐 스마트폰 좀 빌려줄래?”
안수호가 폰을 건네자 박지현이 지도 어플에 접속해 어떤 주소를 적었다. 서울 종로구에 있는 주택가 한복판이었다.
“여기. 내가 본 기억에 의하면 아이기스는 일주일에 적어도 한 번은 이 별장에 들러. 그 사람 취미가 무슨 아이돌 가수 덕질인데, 관련 물품이 죄다 이 별장에 있거든. 남자들이 취미 생활하려고 와이프 몰래 방 하나씩 얻어두는 경우 가끔 있잖아? 딱 그런 느낌으로.”
“……즉, 이 장소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아이기스를 만날 수 있다는 거로군.”
“그래. 마침 넌 아이기스랑 마주친 적도 있다니 금방 알아볼 수 있겠지. 그 다음은 뭐, 그 사람을 잡아서 고문을 하든 뭘 하든 해서 본부 위치를 들어내면 돼. 어때? 충분히 도움이 됐어?”
도움이 됐느냐 아니냐를 따지자면 결정적인 도움이 된 건 아니었다. 그러나 신출귀몰한 암살팀의 소재를 알아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수확이었다. 게다가 박지현의 말처럼, 아이기스를 이용하면 본부의 위치를 알아내는 것도 불가능은 아니었으니까.
‘………정보의 수준이 기대보다 못하긴 하다만 뭐, 마침 막막하던 차에 이정도만 해도 감지덕지인가.’
그렇게 생각한 안수호가 소매를 걷었다. 핏줄이 두껍게 도드라진 팔뚝을 그가 박지현에게 내민다.
“정보 잘 받았어. 여기 거래 대금이야.”
“의외로 순순히 내주네? 정보를 들었으니 더는 볼일 없다고 잡아뗄 줄 알았는데.”
“상대가 적이든 아군이든 거래는 확실하게 하자는 주의라서.”
“마인드 하나는 좋네. 그럼 사양 않고, 어디…….”
안수호의 팔을 붙잡은 박지현이 살며시 입을 벌렸다. 날카롭게 드러난 송곳니가 그의 팔뚝을 살며시 눌렀다.
일순, 그녀의 눈동자에 망설임의 빛이 서린다. 세상의 진실이라는 거대한 진리를 앞에 뒀으니, 그야 망설일 수도 있겠지.
푸욱.
그러나 그 망설임은 오래 가지 않았다. 박지현은 송곳니로 그의 살갗을 찢었고, 흘러나오는 피를 탐했다.
“!!”
곧 달콤한 피와 함께 안수호의 기억이 그녀의 머릿속으로 흘러들어갔고, 그녀는 자신의 삶에 남았던 유일한 미련을 마침내 해소할 수 있었다.
스윽.
얼마 지나지 않아 박지현이 입을 떼었다. 시간으로 따지면 약 10초. 채 마시지 못한 피가 안수호의 팔뚝을 타고 뚝뚝 흘러내렸다.
“그 표정을 보니 내 기억이 제대로 전해진 것 같네.”
멍한 표정으로 말없이 바닥만 보던 박지현에게, 안수호가 이죽거리듯 말했다. 그러자 그제야 박지현이 고개를 들어 안수호를 바라본다. 그의 말마따나, 그녀의 표정에는 놀라움과 당혹감이 진하게 떠올라 있었다.
“이게, 사실이야? 내가 본 기억, 신과 천사들, 정령, 그리고 다른 세상이라니……. 이게 전부 다 사실이라고?”
“사실이고말고.”
안수호의 즉답에 박지현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우당탕탕, 급하게 일어선 탓에 쓰러진 의자가 요란한 소음을 일으켰다. 그러나 박지현은 그조차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반면 안수호는.
“그래서? 이제 넌 어떡할 거지?”
그는 태연하게 박지현의 모습을 살피며 물었다. 그 물음에 박지현이 눈에 띄게 당황한다.
“뭐? 어떡, 어떡할 거냐니…….”
“원래 죽어도 여한이 없는 삶이었다며. 그래서 죽기 직전에 나한테서 진실을 들어내려 한 거잖아. 그럼 이제 미련도 해결됐으니 죽을 건가?”
“그건…….”
혼란스러운 얼굴 그대로, 박지현의 고개가 살짝 돌아갔다. 오른편에 있는 창문을, 그리고 왼편에 있는 문을. 좌우를 살핀 그녀의 시선이 다시금 안수호에게 향하고, 이내 그녀의 입술이 살며시 벌어져 소리를 토해냈다.
“잠시, 잠시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역시.”
그때 안수호가 미간을 찌푸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갑작스러운 행동에 박지현이 주춤, 하고 한 걸음 물러선다.
“역시 내 걱정대로 삶에 미련이 생겼나보네. 그야 당연하지. 세상이 다 가짜고 의미가 없다 생각해서 삶의 의욕이 사라졌던 건데, 알고 보니 전부 가짜가 아니라 진짜였다네? 그럼 없던 의욕도 다시 생겨날 수밖에 없겠지. 삶은 물론이고, 부질없다고 여겼던 조직 생활에 대한 의욕도 말이야.”
“잠깐만.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방금 내 기억을 본 걸로 삶의 여한이 없어졌다면 지금 여기서 죽어. 자살하기가 겁난다면 내가 대신 죽여줄게. 널 이대로 살려두기엔 후환이 두렵거든. 애초에 너도 동의한 부분이잖아. 네 궁금증을 해소해준다면 그 뒤엔 얼마든지 죽여도 된다고. 안 그래?”
어두운 실내. 창밖에서 드리운 달빛에 안수호의 눈동자가 시퍼렇게 빛났다. 박지현은 그에게서 발해지던 압박감에 천천히 뒷걸음질치다, 이내 딱딱한 콘크리트벽에 등이 닿았다.
“그래서? 어떻게 할래?”
그 말은 수 시간 전, 박지현이 안수호에게 거래를 빙자한 협박을 건넸을 때 던졌던 말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반대로 안수호가 박지현에게 그 말을 던지고 있었다. 그리고 두 사람의 입장 또한, 몇 시간 전과는 전혀 달라져 있었다.
“나는…….”
박지현의 눈동자가 재빠르게 굴러간다. 왼쪽. 오른쪽. 두 군데를 살핀 그녀의 몸이 다음 순간, 곧바로 오른편으로 향한다.
투확!
도약과 동시에 안개로 변하는 몸. 그러나 기다렸다는 듯 뻗어진 은빛 그물이 그녀의 몸을 옭아맸다. 강제로 안개에서 물리적 실체로 돌아온 그 몸이, 창문까지 1미터를 남겨둔 채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하고 그대로 바닥에 고꾸라진다.
쿠웅!
“크윽! 자, 잠깐만! 기다려봐! 잠깐 나랑 얘기 좀”
파밧!
박지현이 다급하게 외쳤지만 안수호는 듣지 않았다. 재빠르게 달려들어 마운트를 점한 그가 오른손에서 단검을 뽑아들었다. 태초의 은으로 만들어낸, 아주 예리하고 날카로운 단검이었다.
“잠깐만 기다리라니까! 주, 죽이지 말아줘! 네가 시키는 대로 할게! 여, 여명단에 돌아가지도 않을 거고! 절대로 너나 그 배신자한테 위해를 끼치지 않을 테니까”
“미안. 난 적이 하는 말은 믿지 않는 주의라서.”
“자, 잠깐만! 기다, 기다려”
푸욱!
날카로운 단검이 박지현의 살을 파고들었다. 그러나 치명상은 아니었다. 박지현이 초인적인 힘을 발휘해 두 팔의 구속을 뿌리쳐 칼날을 막아낸 덕분이었다. 칼날은 그녀의 손바닥만 꿰뚫은 채, 아슬아슬하게 가슴 앞에서 멈춘 채였다.
꾸욱. 꾸우욱.
허나 상황은 여전히 안수호가 유리했다. 안수호가 두 손으로 단검에 체중을 싣자, 박지현이 더욱 다급해져선 외친다.
“기다, 기다리라니까! 제발, 제발 죽이지 말아줘! 너, 너도 알잖아! 난 소설 속 캐릭터가 아니야! 지, 진짜 사람! 너랑 똑같은 진짜 사람이라고!”
“그래. 나도 알아.”
“사람을, 같은 사람을 죽이려는, 거야…?”
극악무도한 범죄자인 여명단 간부가 그렇게 말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었다. 그러나 박지현은 필사적으로, 안수호의 내면에 자리했을 인간적인 양심과 도덕심에 애원했다.
그녀가 흡혈을 통해 엿보았던 안수호라는 인간은, 본디 평범하디 평범한 삶을 살던, 살인 따위 절대 저지를 리 없는 평범한 사람이었으므로.
그러나.
“같은 사람이더라도. 필요하다면 죽여야겠지.”
푸욱!!
그 말과 함께 단검의 날이 그녀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태초의 은으로 벼려진 단검은 손쉽게 초인의 살갗을 가르고 뼈를 꿰뚫어, 이윽고 요란하게 박동하던 심장에 다다랐다.
“커, 커흐! 허! 흐! 흐윽! 흐! 흐그…! 흐허어어어……!”
박지현의 입에서 풍선 바람이 빠지는 듯한 신음이 새어나왔다.
무기질적인 콘크리트 바닥에 붉은 피웅덩이가 번지고, 그 웅덩이의 크기가 커질수록 박지현의 저항 또한 점차 잦아들었다.
흡혈귀의 피라서 그런가, 안수호는 지면을 적시는 피가 유독 붉고 끈적하다고 생각했다.
“시, 시러. 죽기……, 죽기 싫………커헉!”
푸욱!
단검을 뽑아든 안수호가 확인사살하듯 다시 한 번 가슴에 칼날을 박아넣었다. 허나 그는 아직 모자라다는 듯, 두 번 세 번 계속해서 칼을 찔렀다.
그것은 철저한 필요에 의한 행동이었다. 박지현의 초능력은 흡혈귀화. 그 능력에는 일반적인 초인을 월등히 뛰어넘는 재생력 또한 포함되어 있다. 그렇기에, 그녀를 죽이기 위해선 확실하게 이 자리에서 목숨을 끊어야 한다고.
푸욱! 푸욱! 푹! 푸욱!
오직 그 일념으로 몇 번이나 단검을 내리찍었을까.
더 이상 미동조차 하지 않는 그 몸을, 더 이상 커지지 않는 붉은 웅덩이를 바라보던 안수호가 몸을 일으켰다.
“…….”
창밖에서 드리운 푸른 달빛이 무기질적인 방 안에 몽환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색채라곤 하나 없는 회색 방 안에 유독 도드라지는 시뻘건 피웅덩이.
그 한 가운데 쓰러진 박지현의 모습은 마치 이제 막 피어난 한 송이 꽃을 보는 것만 같았다. 그녀의 격렬한 저항에 의해 사방에 튄 핏자국 또한, 언뜻 보면 흩날리는 꽃잎처럼 그녀를 중심으로 수놓아진 것 같았다.
“후우우.”
안수호는 그 광경을 바라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달빛을 등진 채, 회한 섞인 표정으로 그가 피투성이가 된 자신의 제복을 내려다보았다.
‘이렇게 되지 않기를 바랐는데.’
쓸데없이 손에 피를 묻힐 일이 없었으면 했는데, 결국 이렇게 되어버렸다고.
참 이놈에 세상은 자기 생각대로 흘러가는 일이 한 번이 없구나. 그렇게 생각하며 안수호가 다시 한 번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