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8화 〉 217. 야밤의 습격자(2)
* * *
박지현.
그녀는 일찍이 안수호와 한 번 싸운 적이 있던 여명단의 전 간부였다. 탈리스만을 빼돌린 배신자 지예원을 잡기 위해 아카데미에 파견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당시 막 특수대책과에 배속된 안수호와 전투를 벌였고, 끝내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
……라는 것이 얼마 전까지의 안수호가 알고 있던 사실.
그러나 진실은 달랐다. 그날 분명 자신의 손으로 죽인 줄 알았던 박지현은 멀쩡히 살아있었다. 민채령이 죽기 직전이었던 그녀를 몰래 빼돌려 살려냈기 때문이다.
안수호는 왜 민채령이 그런 짓을 했는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아마 다급하게, 그리고 부자연스럽게 박지현을 죽여 버린 자신의 행동에서 무언가 냄새를 맡은 것이리라.
지금도 그렇지만 그 당시에는 자신과 민채령의 관계가 더 살벌했으니, 상대의 약점을 쥐기 위해 박지현을 어떻게든 이용해먹으려고 했을 것이다.
허나 그런 민채령의 시도는 불발로 끝났다. 목숨은 부지했지만 줄곧 의식불명 상태에 빠져 있던 박지현이, 어느 날 돌연 정신을 차리고 감금 장소를 빠져나와 사라져버린 것이다.
이는 민채령에게 있어선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안수호의 비밀을, 혹은 그의 약점을 캐낼 수 있을지도 모를 수단 하나를 잃은 셈이었으니.
반면 안수호 입장에서는 일장일단이 있었다. 박지현이 민채령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건 좋은 일이었지만, 그녀가 죽지 않았다는 사실 그 자체가 그에게 있어선 위험요소나 다름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박지현은 쾌락천마가 만들어낸 캐릭터 중 유일무이하게, 이 세상이 소설 속이라는 걸 알아차린 자였으니까.
박지현의 초능력은 흡혈귀의 능력을 사용하는 것. 그중에서도 특이할만한 능력은 흡혈 행위를 통해 상대의 기억을 엿보는 것이다. 박지현은 바로 그 능력으로 전투 도중 안수호의 기억을 엿보았다.
그리고 그 결과, 빙의자나 다른 차원의 존재를 제외하곤 유일하게 이 세상의 진실을 알아내버리고 말았다.
소설 속 캐릭터가 자신이 캐릭터임을 알아버렸다.
본래라면 일어나선 안 될 일. 당시의 안수호는 그 일이 자신의 미래에 어떻게든 악영향을 미치리라 생각했다. 설령 그게 아니더라도 자신의 기억을 읽은 빌런을 살려둬서 좋을 게 어디 있겠는가.
그렇기에 그녀를 죽였고.
그렇기에 그녀가 살아있다는 걸 알았을 땐 걱정이 앞서 노심초사했으며.
그리고 그렇게 도망친 박지현이 오늘, 자신의 눈앞에 이렇게 제 발로 걸어 돌아오자, 이게 웬 떡이냐 싶었다.
“기억났다. 박지현. 분명 박지현이란 이름이었지. 그래. 이제 기억났어.”
안수호는 은빛 촉수들에 묶인 채 쓰러져있는 적을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일찍이 자신의 목숨을 위협했던 적.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석 달도 더 전을 기준으로 한 이야기였다. 파워인플레가 난무하는 배틀물에서 일찍 등장한 적이 쩌리가 되듯, 박지현 또한 더 이상 안수호에게 있어서 그리 큰 위협이 되지 못했다.
허나 그건 어디까지나 무력에 한정했을 때의 이야기.
“무슨 꿍꿍이가 있어서 날 찾아온 건지는 모르겠지만…….”
박지현의 진정한 위험성은 무력이 아닌 그 초능력에 있었다.
흡혈을 통한 기억의 열람. 적으로 돌리면 성가시기 짝이 없는 능력.
그 능력으로 박지현이 세상의 진실에 대해 알아낸 것에 대해, 안수호는 더 이상 과민반응하지 않았다. 빌헬름이나 루엘의 선례에서 알 수 있듯, 쾌락천마는 은근 이런 쪽에서 관대했다. 적어도 ‘세상의 진실을 알아냈으니 죽여야겠다.’면서 직접 신의 권능 따위로 개입해 오진 않았다.
‘혹은 개입할 수 없는 것이거나.’
아무튼. 안수호에겐 더 이상 석 달 전처럼, 박지현을 통해 모종의 메타픽션적인 위기가 찾아올까 노심초사할 필요가 없었다. 허나 빙의자 입장에서 껄끄러운 건 사실이요, 애초에 기억을 엿본다는 능력 자체가 방치해두기엔 성가신 능력이었다.
“이렇게 다짜고짜 덤벼든 걸 보면 나랑 뭘 잘 해보려는 생각은 없어 보이네. 그치?”
그렇게 말하며 안수호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현재 그가 있는 곳은 건물과 건물 사이의 틈새.골목이라고 말하기도 애매한 작은 샛길이었다. 당연히 CCTV 따위는 없고, 기척으로 보아 목격자가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투화아아악!
안수호를 중심으로 시꺼먼 연기가 화악 퍼졌다. 순식간에 샛길을 가득 채운 연기에 한 치 앞조차 보이지 않았다.
“……날 죽일 생각이야?”
“맞아. 원래는 구속한 채로 경찰에 넘겨야 하는데. 네 초능력이나 네가 알고 있는 것들을 생각하니 좀 성가실 것 같아서. 그냥 여기서 깔끔하게 죽이려고.”
“명색이 경비원이라는 사람이 하는 말은 범죄자랑 다를 게 없네.”
“새삼스럽게 뭘. 너도 내 기억을 엿봤으면 이게 억지로 입혀진 옷이라는 건 알 거 아냐.”
안수호가 제 제복을 가리키며 냉소적으로 말했다. 주위를 가득 채운 연기의 농도는 두 사람의 주변만 살짝 옅었다. 덕분에 두 사람은 서로의 표정이나 행동을 어렴풋이나마 볼 수 있었다.
“아니, 몰라.”
그렇기에 안수호는, 태초의 은을 변형시킨 나이프를 꺼내들려던 순간 보고야 말았다.
박지현의 얼굴에 떠오른 공허한 표정을.
“내가 그날 읽었던 기억은 아주 단편적이었어. 그래서 난 너에 대해서도, 그리고 이 세상에 대해서도 잘 몰라. 뭐가 진실이고 도대체 어떻게 되먹은 건지, 하나도 모른다고.”
안수호는 딱히 종교를 가지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유명한 어느 종교의 말을 빌리자면, 박지현이 지은 표정은 그야말로 길 잃은 어린 양이나 지을 법한 표정이었다. 적어도 그 종교의 신이 박지현을 보았다면 분명, 그녀를 두고 그렇게 말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자기는 아무것도 모른다. 그러니 살려달라. 뭐 그런 건가?”
“아니. 죽여도 상관없어. 애초에 죽어도 좋단 각오로 왔으니까. 대신, 죽이기 전에 알려줬으면 해.”
“뭘 알려달라는 건데?”
“전부.”
그 짧은 단어를 시작으로 박지현의 목소리가 담담하게 이어졌다.
“너에 대해서. 이 세상에 대해서. 네가 원래 왔다는 세상에 대해서. 네 기억을 엿본 그날 이후로 계속 궁금했어. 그 질문에 대한 답을 해준다면, 그 다음에는 죽이든 말든 상관없어.”
“……죽여도 괜찮다니. 삶에 미련이 없는 건가?”
“그래. 미련도 여한도 없어. 어차피………………. 전부 다 가짜인데.”
박지현에겐 시간이 있었다. 민채령에게서 도망친 뒤, 안수호한테서 엿본 단편적인 기억을 곱씹으며 나름대로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그 남자의 기억이 과연 사실일까.
사실이라면 이 세상은 도대체 무엇인가.
정녕 이 세상은 소설에 불과한, 거짓된 것에 지나지 않는가.
그렇다면 그 가짜 세상에 종속된 자신이라는 존재는 도대체 무엇인가.
박지현. 그녀는 평생을 조직을 위해 헌신했다. 여명단의 이념이, 그 이념이 만들어낼 새로운 세상이 옳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으니까.
비록 세상은 그녀를 두고 범죄자라 질타했고 그녀 스스로 보기에도 자신은 수도 없이 많은 악행을 저질렀지만. 스스로 옳다고 믿는 신념을 실현하기 위해 그녀는 얼마든지 범죄자의 낙인을 뒤집어쓰고 손에 피를 묻힐 수 있었다.
헌데.
평생을 헌신했던 그 조직도.
평생을 믿어왔던 그 신념도.
그 모든 것을 아우르는 이 세상도.
그리고 자기 자신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것이 가짜고, 거짓된 존재라는 걸 알았을 때.
그 공허한 진실을 새삼스럽게 실감하고, 마침내 받아들였을 때.
박지현은 그 순간, 뜨거운 불꽃처럼 살아왔던 지난 28년간의 삶이 꿈이었던 것처럼 순식간에 삶의 의욕을 잃어버렸다.
강제적인 무념무상. 깨달음 없는 해탈.
쉴 새 없이 달려왔던 인생이니만큼 멈춰섰을 때의 반동은 더욱 심했다. 달리던 발이 멈추자 곧 무릎이 꺾이고 몸이 지면에 쓰러졌다. 이제껏 몇 번이고 넘어져왔던 인생이었지만은, 이번엔 다시 일어설 기력조자 없었다. 일어서야 할 이유조차 알지 못했다.
“원래는 네 기억을 다시 한 번 엿보고. 이 세상의 진실을 확실하게 안 뒤에 죽을지 말지 결정하려고 했어. 그런데 이렇게 돼버렸으니까 어쩔 수 없지. 죽여도 좋아. 대신 죽기 전에 납득만 시켜줘.”
“……다짜고짜 사람을 죽이려 든 주제에 바라는 것도 많네. 그렇게 말하면 내가 친절하게 ‘아 예 그렇군요. 다 설명해드리겠습니다.’ 할 줄 알았어?”
“너도 이 세상에 멋대로 납치당한 거라며. 살던 세상이 졸지에 가짜가 된 나나, 진짜 세상에 살다 가짜 세상에 던져진 너나 피차 마찬가지잖아. 너라면 내 심정을 알아주고 동정해줄 거라 생각했는데.”
“동정이라.”
그 말에 안수호의 뺨이 움찔 떨렸다.
확실히, 안수호는 박지현의 현재 심리에 어느 정도 공감할 수 있었다. 그녀의 말마따나, 낯선 세상에 던져진 자신이든 세상이 갑자기 낯설게 변한 그녀든 피차 마찬가지였으니까.
허나.
‘그게 인정을 베풀어줄 이유는 되지 못하지.’
안수호는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쓸데없는 짓을 하면 쓸데없는 변수가 생기는 법이니까.
만약 그녀의 요구를 듣고 진실을 말해줬다가 그녀가 변심한다면? 적극적으로 저항한다면? 그러다 예기치 못한 일이 터져 그녀가 도망쳐버린다면? 그로 인해 피할 수 있었던 위기가 닥쳐온다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걱정은 곧 하나의 결론에 도달했다. 놈을 살려줄 이유도, 인정을 베풀어줄 이유도 없다. 그러니 당초에 정한 대로 죽이자고.
“……글쎄. 내가 그렇게 정이 많은 성격은 아니라서.”
스릉.
안수호의 소매에서 흘러나온 태초의 은이 자그마한 단검으로 변했다. 그 모습을 본 박지현이 잠시 놀라더니, 이내 공허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가. 그럼 어쩔 수 없네.”
유언치고는 지나치게 평화로운 말이라고. 그런 감상을 품으며 안수호가 단검을 치켜들고, 이내 내리찍었다.
그러나
“김민아.”
그 순간 박지현의 입에서 새어나온 한 단어.
콰득!
그 단어에 안수호가 가까스로 단검의 궤도를 비틀었다. 쓰러진 박지현의 바로 옆, 아스팔트 바닥에 단검이 깊숙이 박힌다.
“……그 이름이 왜 나와?”
“네가 어제 배신자 지예원과 함께 나누던 이야기를 몰래 엿들었거든.”
“협박이라도 할 셈인가?”
“동정에 호소하는 게 통하지 않는다면 그래야지. 그렇지만 기왕이면 거래로 받아들여줬으면 해.”
그렇게 말하는 박지현의 표정은 여전히 공허했다. 적어도 안수호는 그녀의 눈동자에서 삶의 미련이라는 걸 한 치도 찾아볼 수 없었다.
다만.
“내 궁금증을 풀어줘. 그럼 김민아를 찾는 거에 협력해줄게. 반면 네가 여기서 날 죽인다면, 미리 준비해둔 이메일이 알고 지내던 여명단 단원에게 송신되어 조직이 배신자의 위치를 알게 될 거야.”
박지현의 눈동자에는 생존 욕구와는 다소 다른, 공허한 기분이 드는 감정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안수호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것이 텅 빈 마음의 바닥에 찐득하게 눌어붙은 그녀의 마지막 미련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더 이상 삶에 여한은 없다. 죽어도 좋다. 그러나 죽는다 하더라도 진실을 알고 가야 직성이 풀리겠노라고.
“그래서? 어떻게 할래?”
마치 그렇게 말하는 것만 같은 그 눈빛에, 안수호가 단검 손잡이를 더욱 꽈악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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