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3화 〉 212. 종강 파티(1)
* * *
“숨기고 있는 거……?”
안수호의 얼굴에 당혹감이 떠오른다. 그의 시선이 한겨울이 떠난 길 저편으로 향한다. 그곳에 있던 붉은 머리 소녀는 이미 떠나고 없었지만, 강하늘이 숨기는 게 없느냐 물은 이유는 분명 그 소녀임이 분명했다.
“혹시 한겨울 때문에 그래?”
“네. 왜 한겨울이 여기서 나와요? 이 좁은 초소에서 단둘이 뭘 한 거예요?”
“단둘이라니. 여기 소연이도 있는데…….”
“소연이 언니는…….”
강하늘의 시선이 슬쩍 채소연에게 향했다. 좀 전까지 졸고 있던 터라 비몽사몽한 채소연의 입가에는 미처 닦지 못한 침자국이 진하게 눌어붙어 있었다.
“……척 봐도 방금 깬 얼굴이잖아요. 소연 언니가 자는 사이 이 초소에서 무슨 일이 있었을지 어떻게 알아요?”
“무슨 일이라니. 네가 생각하는 그런 일은 없었어. 정말이야.”
“그런 일이 뭔데요?”
“불륜으로 해석될 수 있는 남녀 간의 그렇고 그런 일들.”
지난 한 시간 동안 초소에서 있었던 일이라고 해봐야 랭킹전 영상을 보거나 한겨울이 좋아하는 추리 소설 이야기를 들어준 것뿐이었다. 서로 손조차 맞잡지 않았는데 무슨 불륜 현장을 적발한 것처럼 쏘아보니, 안수호로선 다소 억울했다.
“한겨울하고 내 사이엔 아무 일도 없어. 좀 전에도 그냥 랭킹전 소식 전해주려고 온 것뿐이야.”
“정말요?”
“그럼 정말이지. 애초에 걔는 남자를 사귀어도 류태현이랑 사귀지 나랑 사귈 리가 없다니까? 당장 좀 전에만 해도 내가 말 좀 놓으려니까 칼 같이 안 된다고 하더라고. 그 정도로 철저한, 그 뭐냐, 그냥 비즈니스 관계 같은 거야. 걔랑 나는.”
그 말에 강하늘이 두 눈을 가늘게 뜬 채 안수호를 올려다봤다. 마치 그의 속내를 꿰뚫어보려는 듯이.
“……알겠어요. 오빠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죠.”
이내 강하늘이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며 말했다. 안수호가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미안해요 오빠. 추궁하듯이 말해서.”
“아냐. 충분히 오해할 법한 상황이었어.”
“그래도요. 생각해보면 의심할 필요가 없는 일인데. 오빠한테는 이미 과분한 여친이 둘씩이나 있는데 오빠가 그 이상을 넘볼 리가 없잖아요? 오빠는 의외로 자기 깜냥을 잘 아는 사람이니까.”
“야, 말을 해도 꼭 그렇게…….”
“사실인걸요. 오빠처럼 우유부단한 성격에 류 씨처럼 삼처사첩 거느렸다간 아마 스트레스로 머리털 다 빠질 걸요?”
“오늘따라 왜 이렇게 말이 맵냐.”
“여자친구를 오해하게 만든 벌이에요. 그러니 앞으론 이런 오해 안 생기게끔 여자들하고 거리를 좀 두……울 수는 없겠네요. 오빤 주변에 죄다 여자뿐이니까.”
“아하하하….”
연인이 있는 입장에서 불필요한 오해를 피하기 위해선 이성과의 접촉을 최대한 피하는 게 맞긴 하다.
허나 문제는 안수호가 그럴 여건이 되지 않는다는 점.
민채령, 채소연, 조유리, 설아현, 한겨울, 한여름에 이르기까지. 직장 상사나 동료는 물론이고 원활한 스토리 진행을 위해 만든 인맥들이 하나같이 여성인 이상, 무조건 이성을 멀리하라 닦달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도 조심은 해줘요. 오빠가 아무 생각 없어도 저쪽에서 멋대로 반할 수도 있는 일이니까. 괜히 친절하게 대해주고 그러지 말라는 거예요. 알겠죠?”
“그래. 무슨 말인지 알겠………….”
말끝을 흐린 안수호가 아, 하고 작게 탄성을 뱉었다. 그의 뇌리에 설아현의 존재가 스쳐 지나간다.
‘……설아현은 이미 늦은 것 같은데.’
100%의 확신은 아니다. 그러나 한없이 100%에 가까운, 99% 정도의 예감이 있었다.
설아현이 자신에게 반했노라고.
이는 소녀스러운 풋풋한 사랑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었다. 그런 사랑을 하기에 설아현은 이미 산전수전 다 겪은 어른이었으니.
그러나, 그렇기에 설아현이 안수호에게 품은 감정은 더욱 진하고 무거웠다. 안수호는 자신의 죽음을 두고 오열하던 설아현을, 그 눈물에서 전해져온 끈적한 감정을 떠올렸다.
‘100% 확실한 건 아니더라도, 일단 설아현에 대해선 두 사람한테 미리 말해놔야겠지.’
괜히 어물쩡거리다가 파국으로 치달을 수도 있으니 최대한 서둘러야 했다. 물론 지예원과 강하늘에게 ‘설아현과도 사귀겠다’고 통보하고자 하는 건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현 상황에 대한 보고와, 설아현에 대한 대책을 논하기 위함이었다.
문제는 그 타이밍을 언제로 잡느냐 하는 것이었으나.
‘오늘 밤이면 되겠지. 마침 셋이서 만나기로 했으니까.’
세 사람은 오늘 밤 안수호의 집에서 저녁식사 겸 술자리를 가질 계획이었다. 표면상으로는 강하늘의 종강을 기념하는 자리였으나 그 이면에는 안수호의 무사 귀환을 기리기 위함도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거의 두 달 가까이 쫓겨다니며 살았으니.
기쁘게 즐겨야 할 자리에 무거운 주제를 꺼내든다는 게 조금 양심에 찔리긴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가는 길에 마트 좀 들르자. 예원이가 술이랑 재료 부족한 거 좀 사와달라 그러더라.”
“머야. 술? 재료? 안수호 너 오늘 집에서 뭐 만들어 먹어?”
술과 음식 이야기가 나오자 그때까지 비몽사몽하던 채소연이 눈을 번쩍 뜨며 물었다.
앞에서 치정극을 할 때도 꾸벅꾸벅 졸던 주제에 먹을 것 냄새는 귀신 같이 맡는다고. 안수호가 그녀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딱 봐도 니네 집에서 술자리 있는 거네! 하늘이랑 예원이랑 셋이서! 그럼 나도 갈래! 저번처럼 넷이서 마시자!”
“오늘은 안 돼. 다음에 부를게. 다음에.”
“왜 오늘은 안 되는데? 왜 나만 따돌려?”
“니 말고 나머지 사람들이 무슨 관계인지 생각해보면 답이 나오지 않냐?”
아무리 눈치가 없어도 이렇게까지 말하면 알아듣겠지.
다행히 안수호의 생각대로 채소연은 곧 세 사람의 관계를 떠올리곤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자신이 낄 자리가 아니라는 걸 머리로는 알았지만, 납득은 되지 않는 듯한 모습.
“……야 안수호. 너 요즘 너무 파트너 따돌리고 너 혼자만 놀러다니는데, 그러면 못 쓴다? 무릇 경비대원이면 자신의 등을 맡길 파트너를, 그 뭐시냐, 연인보다 더 소중하게 대해야 하는 버”
“다음에 밥 한 번 살게.”
그 말에 일장연설을 늘어놓던 채소연의 입술이 뚝 멈췄다.
“……밥? 뭐 사줄 건데?”
“네가 먹고 싶은 걸로.”
“…………내가 먹고 싶은 거 아무거나?”
“먹고 싶은 거 아무거나.”
“……………………진짜?”
꼬치꼬치 꼬리를 물고 늘어지는 채소연을 보며 안수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아싸!!”
좀 전의 삐진 기색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채소연이 주먹을 치켜들며 쾌재를 불렀다.
“너 분명 말했다! 분명 말했어! 아.무.거.나! 내가 먹고 싶은 메뉴 뭐든 사준다고! 분명 말했다?!”
“아무거나라곤 했는데 먹고 싶은 거 전부라곤 안 했어. 딱 한 끼야.”
“알고 있거든! 쏘고기 사달라 할 거거든?! 최고급 고베 한우 꽃등심 티본스테이크!! 딱 1인분!! 무르기 없기!! 그럼 난 퇴근할게! 잘 있어! 안뇽!”
신나서 기뻐 날뛰던 기세 그대로 채소연이 초소 문을 박차고 퇴근길로 뛰쳐나갔다. 강하늘이 그 뒷모습을 멍하니 지켜보다 미간을 찌푸렸다.
“…………꽃등심 티본 스테이크…? 티본 스테이크는 안심 아니에요? 게다가 한우인데 고베…?”
“쟤가 하는 말 진지하게 생각해봤자 소용없어. 우리도 슬슬 나가자.”
짐을 마저 정리한 뒤 두 사람이 초소를 나섰다. 해당 초소는 18시 이후에는 사용하지 않는 초소였기에, 두 사람은 교대근무자를 기다리는 일 없이 마음 편히 떠날 수 있었다.
“아, 근데 하늘아.”
“네?”
“소연이한테 밥 사주는 거. 그것도 따지고 보면 여자랑 단둘이 밥 먹는 건데. 그건 괜찮아?”
“따지고 보면 그렇죠…….”
굳이 ‘따지고 보면’이라는 사족을 붙이는 부분에서 두 사람이 채소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가 여실히 드러났다. 질문을 던진 안수호도 딱히 진지하게 물어본 건 아니었다.
“……소연 언니랑 잘 해볼 생각 있어요?”
“있겠어?”
“그렇겠죠. 그럼 됐어요. 오빠가 대시할 생각도 없고. 언니 쪽에서 오빠한테 반한다는 그림도 상상이 안 되니까…….”
“끔찍한 소리 말아줘.”
채소연과 연인이라니 죽어도 사절이라고.
안수호는 우후죽순 돋아난 닭살을 문지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
치이이이익.
가열된 기름이 끓는 소리와 함께 이런저런 냄새가 방 안 가득 피어오른다.
달짝지근한 크림과 알싸한 마늘과 할라피뇨, 그리고 은은하게 퍼지는 올리브기름 향.
그 근원은 지예원이 선 주방이었다. 본래 있던 레인지 두 개에 휴대용 버너까지 들고 온 그녀는 세 개의 요리를 동시에 해내고 있었다. 그 능수능란한 솜씨를 구경꾼 두 사람이 신기한 눈으로 쳐다봤다.
그도 그럴 것이 지예원의 성장 배경은 결코 요리와는 어울리지 않았으니까.
어릴 적부터 시설에서 첩보원으로 길러진 그녀가 요리라니. 설마 스파이 노릇을 위해 익히기라도 했단 말인가.
“예원아. 혹시 뭐 도와줄 건 없어?”
“테이블 펴고 상 닦고 접시랑 식기 세팅해줘.”
“그거야 이미 다 끝났지.”
“그럼 됐어. 어차피 거의 다 끝나가니까….”
그 말이 빈말이 아니라는 듯, 곧 지예원이 커다란 접시에 세 가지 요리를 이쁘게 담아왔다. 두툼한 새우를 잔뜩 넣은 감바스와 버섯 리조또, 그리고 베이컨 크림파스타. 강하늘이 두 손으로 입을 가리며 놀라워한다.
“세상에, 대박. 언니 이걸 다 직접 한 거예요? 가게 여셔도 되겠다!”
“가게는 무슨. 요즘은 인터넷으로 어지간한 요리는 다 배울 수 있잖아. 나도 양식 쪽은 제대로 배운지 한 세 달? 그거 밖에 안 됐어.”
“그래도 대단한 거죠. 전 요리는 잼병이라 자취요리도 겨우겨우 하는 걸요.”
“다음 학기 땐 공부 가르쳐주면서 요리도 가르쳐줘야겠네.”
세 사람이 앉자 강하늘이 구석에 놓인 쇼핑백에서 술을 꺼냈다. 메뉴가 양식이다보니 술도 그에 맞춰 양주 위주로 준비했으나, 문제는 그 양이었다. 탁자 옆에 줄줄이 늘어서는 술병들을 보며 지예원이 경악했다.
“……오늘 아주 죽을 때까지 마시기로 작정했구나? 종강이라고 엄청 벼르고 있었나봐?”
“에헤헤. 사실 최근에 여자애들하고 놀러다니다 칵테일에 빠져버렸거든요. 소주는 이제 역해서 못 먹겠더라고요.”
“아무리 그래도 이건 양이 너무 많잖아. 아무리 메뉴가 양식이어도 그렇지. 그냥 적당히 와인이나 한 병 사오지…….”
“아, 물론 와인도 있어요! 혹시 이것도 좋아하실까 싶어서 브랜디도 한 병 기숙사에서 가져왔고요.”
희희낙락 병을 꺼내드는 강하늘을 보며 지예원이 어이없는 웃음을 피식 흘렸다. 안수호도 마찬가지였다.
“그래, 그래. 오늘 우리 하늘이 마시고 싶은 만큼 다~~ 마셔. 기숙사까지 바래다는 줄 테니까.”
“저 오늘 외박 신청했는데요?”
“엉?”
“뭐?”
“저도 종강했는데 숨 좀 돌려야죠. 게다가 모처럼 이렇게 셋이서 모였잖아요?”
외박 신청이라니 두 사람 다 금시초문이었다. 두 사람이 놀란 표정으로 강하늘을 바라보자, 그녀가 싱긋 웃으며 덧붙였다.
“오늘 밤은 신세 좀 질게요?”
가늘게 뜨여진 눈동자 사이로 비친 요염한 눈빛.
그 눈빛을 본 지예원이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아, 얘 오늘 정말
'단단히 작정하고 왔구나.'
라고.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