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2화 〉 211. 달밤의 천사와 여름날의 겨울꽃
* * *
천계.
판테온(Pantheon).
구름 위에 자리한 그 신전에는 은은하게 내리쬐는 푸른 달빛이 어지러이 흩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신전의 가장 높은 곳. 좌우로 늘어선 웅장한 기둥 가운데 자리한 옥좌에 백발의 미녀가 권태로운 표정으로 턱을 괸 채 앉아있었다.
곧 그녀의 입에서 착 가라앉은 음성이 토해진다.
“죄인 라미엘은 들어라.”
그 말에 옥좌 아래 부복하고 있던 천사, 라미엘이 작게 대답하며 고개를 숙였다. 라미엘의 다리에는 투박한 족쇄가 채워져 있었으며, 그 머리에는 천사라면 응당 가지고 있어야 할 헤일로가 보이지 않았다.
“내 본래 네가 저지른 실패의 죄를 물어 코큐토스 가장 춥고 깊은 지하에 너를 억겁의 세월 동안 가둬두려 하였으나, 네가 죄를 뉘우치고 반성하는 모습에 갸륵하여 특별히 그 죄를 사하여주고자 하노라. 따라서 죄인 라미엘은 현시간부로 즉시 천사의 업에 복귀하도록 하라. 그리고 창조주인 나, 쾌락천마를 위해 열과 성을 다해 일할 것을 이 자리에서 명하노라. 이의가 있는가?”
“없나이다. 창조주시여. 창조주께서 내려주신 대해와 같은 자비와 자애에 성은이 망극할 따름이옵나이다.”
“망극해야지. 죄인 라미엘은 이와 같은 사면 조치가 지극히 예외적인 일임을 알아야만 할 것이다.”
따악!
쾌락천마가 손을 튕기자 그녀의 발을 묶은 족쇄가 눈 녹듯 사라졌다. 동시에 텅 비어있던 머리 위에 금색 헤일로가 떠올라 다시금 찬란한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라미엘, 너는 내가 만들어낸 모든 천사들 중 가장 명석하고 뛰어난 천사였다. 부디 다시는 전과 같은 어리석은 실수를 범하지 않기를 내 바라고 있으마.”
“그리하겠나이다.”
곧 쾌락천마가 짜증에 겨운 표정으로 옥좌의 팔걸이를 한 번 두드렸다.
퉁.
그것은 무언의 축객령이었다. 볼일이 다 끝났으니 이제 나가보라고. 그 제스처에 라미엘이 다시 한 번 꾸벅 고개를 숙인 뒤 옥좌를 뒤로했다.
이윽고 라미엘의 몸이 게이트를 통과해 사라지자 쾌락천마가 기다렸다는 듯 혀를 쯧 찼다.
‘라미엘을 풀어주는 게 내키지는 않는다만, 워낙 손이 아쉬운 상황이니 어쩔 수 없는가…….’
쾌락천마가 손가락을 튕기자 그녀의 눈앞에 수많은 홀로그램 창이 떠올랐다. 그 창들에 표시된 것들은 각각 끝도 없이 이어지는 문자열이나, 어딘가의 풍경이거나, 혹은 너무 추상적이어서 알아보기 어려운 기묘한 도형 등 가지각색이었다.
‘차원 균열은 급하게 임시로 막아놨고. 시스템 점검은 뒤로 미뤄도 될 터. 지금 가장 급한 건 시나리오 퀘스트들의 수정 및 보완, 그리고 빙의자들의 감시인가.’
창들을 둘러보던 쾌락천마의 미간이 와락 찡그러졌다. 그녀의 시선이 향한 곳에선 안수호가 한겨울과 즐겁게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굴러들어온 엑스트라 자식이 주제도 모르고 설쳐대는 꼴이라니…!”
그녀가 손짓하자 안수호가 표시된 창을 중심으로 수십 개가 넘는 시스템 창이 추가로 떠올랐다. 그러나 무언가 하려던 쾌락천마는 이내 짜증이 역력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안 되지 안 돼. 더 이상 개입했다간 정말 신격이 하락할지도 모른다. 천신만고 끝에 겨우겨우 쌓아올린 격인데 그것만은 피해야지. 게다가 괜히 법칙을 어그러뜨렸다가 스카샤 그 녀석의 눈에 띌 수도 있으니.’
한 세계의 신인 자신이 언제부터 이리도 궁색하게 사정을 따져가며 행동하게 되었는지. 쾌락천마는 스스로의 처지를 자조하며 눈앞에 떠오른 홀로그램 창들을 지워버렸다. 직후 텅 빈 대전에 다시 한 번 진한 한숨이 작게 울려 퍼졌다.
한편 그 시각. 라미엘은 입가에 옅은 웃음을 머금은 채 자신의 창조주를 업신여기고 있었다.
‘하계 시간으로 세 달이라. 생각한 것보다 더 금방 풀려났군요. 하긴, 천사들 중 가장 많은 업무를 담당한 저를 언제까지고 지하감옥에 가둬둔 채로는 천계의 일이 돌아가지를 않을 테니. 그 높기만 한 자존심을 접고 절 빨리 풀어줄 수밖에 없었겠죠.’
만약 방금 그녀의 생각을 다른 천사가 듣는다면 어떤 반응일까.
가령 막내인 아라엘이라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쾌락천마님께선 완전하신 분이다. 라미엘을 사면해준 행위에도 분명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안배나 숨겨진 뜻이 있을 거라고.
‘퍽이나.’
그러나 순진한 아라엘과 달리 라미엘은 알고 있었다. 쾌락천마는 전지하지도 전능하지도 않다는 것을. 쾌락천마는 그저 자신이 만들어낸 모형정원에서 실컷 날뛸 뿐인, 조금 과분한 힘을 가진 어린아이에 지나지 않았다. 심지어 그 모형정원마저 점점 무너져가는 중이었다.
일찍이 라미엘이 저지른 의도된 실수.
아직 ‘준비’가 덜 끝났던 기사의 무덤을 억지로 이쪽 차원과 연결시킨 것으로 인해 발생한 차원의 균열은 쾌락천마를 확실하게 곤경에 빠지게 만들었다. 그 균열을 통해 스카샤, 빌헬름이 섬기던 다른 차원의 신이 쾌락천마의 흔적을 찾아내었고, 지금도 자신의 창조물을 도둑질한 자를 찾기 위해 온 차원을 들쑤셔대고 있었으니까.
쾌락천마가 요즘 하계에 직접 개입하지 못하는 것은 그녀가 속한 거대한 ‘시스템’의 제약도 있었으나, 상기한 신의 눈에 띄지 않으려고 알아서 사리는 것도 있었다.
그러니 그녀가 이전처럼 하계를 제 뜻대로 주무르기 위해선 우선 차원의 균열부터 손봐야 했다. 이는 라미엘이 보기에 최소 하계 시간으로 반년은 더 걸릴 일이었다.
반년.
그리 길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짧지도 않은 기간.
‘그 안에 안수호가 어디까지 성장할 수 있을지…….’
안수호는 지난 4달 동안 빙의자들 중에서 가장 괄목할만한 성장을 이뤄냈다. 태생부터가 가장 비루한 E급 초인이었는데도 지금은 조건부 S급을 달성했으니 오죽하겠는가.
허나 그 정도로는 아직 부족했다.
쾌락천마의 직접 개입이 가능해지는 시기는 대략 하계의 겨울 즈음. 그리고 그 시기는 본래의 스토리에서도 손에 꼽힐 정도로 가혹한 에피소드인 ‘피의 겨울방학’이 시작될 시기였다.
가뜩이나 가혹할 그 시련이 치졸한 창조주에 의해 얼마나 더 악의적으로 변할지 라미엘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비록 시련이란 게 사람을 보다 강하게 만드는 담금질과 같은 것이긴 하나, 견뎌낼 수 없는 시련은 담금질은커녕 칼날을 부러뜨리기만 할 테니.
‘요는 적절한 수준의 위기가 필요하다는 거죠. 그를 꺾을 수 없는 시련은 그를 강하게 만들어줄 테고. 그 칼날은 결국 가증스러운 창조주에게 향하게 될 테니까요.’
모형정원에 불과하다 한들 쾌락천마는 하나의 세계를 지배하는 신.
그런 신을 무너뜨릴 수 있는 건 오직 다른 세계에서 비롯된 이방인뿐이었다. 이방인이라면 안수호 외에 다른 빙의자들이나 루엘, 아인 등도 있었으나, 라미엘은 그중에서도 안수호에게 거는 기대가 가장 컸다.
그가 품고 있는 쾌락천마에 대한 증오는 그 어떤 빙의자들보다 강했으니까.
‘그 증오에 비해 심성 자체는 다소 여린 게 조금 흠입니다만, 그 부분은 경비율이 올라감에 따라 알아서 해결되겠죠.’
라미엘이 손가락을 튕기자 홀로그램 창이 눈앞에 떠올랐다. 직후 줄곧 닫혀 있던 눈꺼풀이 열리며 금색 눈동자가 드러났다.
홀로그램 창에 비친 것은 안수호의 모습.
라미엘은 하염없이 그의 모습을 관음하고 또 관음했다.
마치 사랑스런 자식이라도 보는 듯한 표정으로.
***
청명하던 하늘이 어느새 불그스름한 노을빛으로 물든 저녁.
그린하우스 안에 100개는 있을 경비초소 중 한 곳. 벌써 한 시간 째 초소 의자를 차지하고 있는 붉은 머리카락의 소녀를 보며 안수호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 한겨울 학생? 슬슬 근무 시간이 끝나서 돌아가봐야 합니다만…….”
“네?”
그 말에 한겨울이 깜짝 놀라 시계를 확인했다. 어느새 6시를 가리키고 있는 바늘에 그녀의 두 눈이 크게 뜨여진다. 그녀 자신이 좋아하는 추리소설 이야기에 너무 열중했던 탓인가, 너무나도 빠르게 흘러가버린 시간에 한겨울이 퍼뜩 자리에서 일어섰다.
“제, 제가 너무 오래 있었네요. 죄송해요. 일하는 중인데 이렇게나 시간을 빼앗아버려서…….”
“괜찮습니다. 어차피 자리를 지키고만 있으면 되는 일인걸요. 그리고 한겨울 학생하고의 이야기도 꽤 즐거웠고요.”
“즈, 즐거웠다니 다행…이네요…….”
한겨울의 얼굴에 부끄러움이 감돌았다.
자신과의 대화가 즐거웠다. 한겨울은 안수호의 그 말이 겉치레라 생각했다. 지난 1시간 동안 한겨울이 한 이야기는 랭킹전에 대한 게 15분 정도. 나머지는 어쩌다 나왔는지도 모를 추리소설 이야기였으니까.
코난 도일이니 애거서 크리스티니, 일반인 입장에선 하등 재미도 관심도 없는 이야기일 뿐이다. 그런데도 그만 흥분해서 눈치도 없이 너무 혼자서 떠들어버리고 만 자신의 행동에 뒤늦게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한겨울의 이런 모습을 보게 될 줄이야. 진짜 의외네.’
그러나 안수호의 감상은 전혀 겉치레가 아니었다. 한겨울이 추리소설을 포함한 자신의 속마음을 드러내기 시작한 건 2학년 즈음부터. 때문에 반년이나 빠른 이 시기에 그녀의 진심어린 모습을 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흥미로움 또한 재미라 본다면 안수호가 방금까지의 대화에서 재미를 느꼈다는 건 거짓말이 아니리라.
‘이런 상태면 태현이 하고의 관계도 금방 호전되겠네. 다행이야 다행.’
“그럼 전 이만 돌아가 볼게요. 그, 전 방학 중에도 학교에 자주 올 거라서. 혹시 괜찮다면 가끔 이렇게 찾아와도 될까요?”
“으음. 확답은 못 드리겠네요. 기본적으로 업무 시간에 누굴 마음대로 만나고 그럴 순 없으니까. 그렇지만 오늘처럼 초소 근무일 때 잠깐씩 만나는 것 정돈 괜찮겠죠 뭐.”
어차피 방학이 시작되면 경비대 업무도 널널해진다. 업무에 지장이 가지 않게끔 한다면 괜찮을 거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럼 조심히 들어가 보세요. 한겨울 학생.”
“네. 그쪽도요. 아, 그리고…….”
한겨울이 우물쭈물 입술을 오물거리더니 이내 새침하게 말했다.
“그 ‘한겨울 학생’이라는 호칭 말인데요. 듣는 입장에서 좀 많이 딱딱해? 보여서 그런데 그만 써주실 수 없나요?”
“그렇습니까?”
경비원 신분으로 학생을 하대하기도, 그렇다고 존칭을 쓰기도 애매해 사용하기 시작한 호칭이었지만 학생 입장에선 그렇게 느낄 수도 있겠군.
그렇게 생각한 안수호가 고민하더니 그녀에게 물었다.
“그럼 그냥 겨울이라고 부를까?”
“…………네?”
안수호 입장에선 그녀와 꽤 친해졌다 싶어 건넨 물음이었다. 류태현하고도 말을 놓은 지 꽤 되었으니 한겨울과도 괜찮겠다 싶어서. 살짝 장난을 섞은 가벼운 물음.
그러나 한겨울 입장에선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다.
“아, 아아아무리 그래도 그건 좀 아니죠!! 다짜고짜 이름으로 부른다니…! 지, 직원이랑 학생 사이에는 지켜야 할 선이라는 게 있는 거라고요!!!”
“그렇…습니까? 저는 우리 둘 사이가 나름 친해졌다고 생각했는데…….”
“그렇긴 하지만…….”
말끝을 흐린 한겨울이 입을 다문 채 상상에 빠졌다. 안수호가 자신을 향해 ‘겨울아’하고 친근하게 불러대는 모습을.
“……읏.”
곧 그녀의 두 뺨이 화악 하고 붉어졌다. 이유 모를 부끄러움이 엄습해온 그녀가 그 부끄러움을 떨쳐내고자 일부러 크게 소리쳤다.
“아무튼 이름은 안 돼요 이름은! 좀 더 거리감이라고 해야 하나, 겨, 격식 있는 호칭을 쓰는 편이 좋을 것 같네요!”
“격식 있는 호칭이라고 해도……. 그럼 그냥 지금처럼 한겨울 학생, 하고 부르면 되는 거 아닙니까. 아니면 생각해둔 바라도 있습니까?”
“그건…….”
잠시 고민하던 한겨울이 이내 그의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한겨울 씨……라든가?”
‘한겨울 학생’이라는 호칭은 척 봐도 자신을 어리게 보는 안수호의 태도가 묻어나오는 호칭이었다. 한겨울은 그와 동등한 관계가 되고 싶었다. 그러나 서로 허물없이 이름을 부르는 건 아직 이른 것 같아, 겨우 꺼내든 고육지책이 바로 ‘한겨울 씨’였다.
그러한 결심의 기저에는 서로를 ‘씨’로 호칭하던 설아현과 안수호의 관계에 강한 인상을 받았던 기억이 깔려있었으나, 한겨울은 거기까진 미처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한겨울 씨라…….”
한편 안수호는 그 어색한 호칭을 몇 번이고 곱씹어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불러 봐도 입에 감기지 않는지 미간을 찌푸렸다.
“……뭐 한겨울 학…. 한겨울 ‘씨’가 그걸 원한다면야 그렇게 불러줘야죠.”
“좋아요. 저도 그럼 안수호 씨라고 부를게요.”
“그거야 원래부터 그랬”
안수호가 말끝을 흐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고 보니 한겨울에게 이름을 불려본 기억이 거의 없었다. 대부분 ‘당신’이나 ‘그쪽’이라고 돌려 지칭당했으니까.
“그럼 이만 정말 가볼게요. 안수호 씨. 다음에 시간 되면 또 봐요.”
안수호가 생각에 잠겨 있던 사이 한겨울이 새침하게 손을 흔들더니 초소 문을 열고 나갔다. 뒤늦게 그가 인사했지만 한겨울은 듣는 체도 하지 않은 채 떠나버렸다.
다만, 떠나기 직전 보였던 그 옆모습이 어째 웃고 있지 않았던가.
잠시 고민하던 안수호는 이내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시계를 본 그가 슬슬 자기도 퇴근할 시간이라며, 졸고 있던 채소연을 깨운 뒤 나갈 채비를 했다.
바로 그때.
똑똑.
창문에서 들린 노크 소리. 안수호가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하늘아?”
오빠. 들어가도 돼요?
안수호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가 거침없이 초소 안으로 들어왔다. 어째선지 묘하게 어두운 표정을 지은 채.
“여기까진 웬 일이야? 내가 그쪽으로 가려고 했는데 기다리고 있지. 시험은 잘 보고 왔어?”
“그럭저럭 보고 왔어요. 근데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응?”
“한겨울. 걔가 왜 초소 안에서 나와요?”
“아.”
그제야 안수호는 강하늘의 표정이 어두운 이유를 알아차렸다. 그 순간 강하늘이 안수호의 손을 꽈악 붙잡았다.
햇볕이 쨍쨍한 여름인데도 불구하고 얼음장처럼 차가운 손이 안수호의 손을 감싼다. 안수호의 손에서부터 전해지는 약한 떨림에 강하늘이 눈매를 날카롭게 세운 채 물었다.
“오빠. 혹시 저한테 뭐 숨기는 거 있어요?”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