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5화 〉 204. 비상사태(3)
* * *
제3 격리연구소에는 괴수 격리 실패 시를 대비한 프로토콜이 준비되어 있다.
그것은 일차적으로는 자체 경비대를 통한 괴수의 재격리 및 초동대처요, 이차적으로는 인근에 있는 모든 군부대와 A급 이상 길드에 긴급 지원 연락을 보내는 것이었다. 본래는 군부대에만 연락이 들어갔었지만 ‘괴수를 잡아넣는 건 평소에도 괴수와 싸우는 헌터 길드의 헌터들이 가장 잘 한다.’는 이번 소장의 의견 덕에 헌터 길드 또한 비상연락망에 추가될 수 있었다.
그리고 현재, 5구역을 제외한 모든 격리 구역의 괴수가 풀려난 순간 상기한 비상 프로토콜은 문제 없이 작동했다. 보안 프로그램은 그 작동을 완전히 멈추기 직전 성남시를 포함한 수도권에 위치한 모든 A급 이상 길드에게 긴급 지원을 요청했다.
“……격리연구소에서 격리 실패 발생……이라고?”
그리고 그중에는 한창 S급 던전 공략 준비 중이던 흑룡회도 있었다. 예카테리나의 보고에 설아현의 뇌가 빠르게 돌아간다.
‘제3 격리연구소라면 수호 씨가 격리될 예정인 장소 아닌가?’
설아현이 아는 건 딱 거기까지였다. 그녀는 아직 고속도로에서의 습격 사건에 대해서도 파악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미 한 번 그 능력으로 끔찍한 미래를 엿보았던 그녀의 머리는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을 순식간에 상정했다.
“카챠. 지금 당장 출발해야겠어. 흑룡회는 지금부터 제3 격리연구소를 지원하러 갈 거야.”
“회주님. 안 그래도 당장 내일모레인 공략 준비로 바쁜 와중에 괜한 전력 손실을 낼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어차피 저희가 안 가더라도 다른 길드에서 갈 텐데, 그냥 넘겨도 되지 않을까요?”
“아니. 격리 실패는 1초를 다투는 시급한 상황. 여유가 되는 우리가 당장 지원을 나가야 해. 전력 공백이 문제라면 이번 공략에 참가하는 팀들을 제외해서 출동하면 되겠지.”
자리에서 일어난 설아현이 자신의 장비를 집어들었다.
방호 소자를 무려 20겹으로 도포한 그녀 전용의 디펜시브 코트. 그리고 투박한 디자인의 묵빛 건틀릿. 그 둘을 걸친 것만으로도 설아현은 전투에 필요한 모든 준비를 끝마쳤다.
“본사 대기 중인 4팀과 5팀에게 즉시 출동할 수 있도록 준비하라 전해줘. 정확히 10분 뒤 나랑 같이 제3 연구소로 출발할 거라고.”
“…………회주님께서 직접 가신다고요? 회주님이야말로 이번 공략의 핵심 전력이신데…….”
“내가 고작 연구소에 잡혀있던 괴수들 상대로 다칠 것 같아? 그것들은 나한테 게이트 공략 전 몸풀기용밖에 안 돼.”
그렇다면 더더욱 설아현이 직접 갈 필요는 없는 것 아닌가.
예카테리나는 목구멍까지 올라온 그 의문을 다시 삼켰다. 설아현이 파악하고 있는 사실은 그녀 또한 파악하고 있었다. 제3 격리연구소와 안수호와의 상관관계를 기억해낸 그녀가 설아현 몰래 한숨을 푹 내쉰다.
‘늦게 시작한 사랑이 더 무섭다더니. 딱 회주님을 두고 하는 말이군요.’
예카테리나의 걱정스런 시선을 뒤로한 채 설아현이 집무실을 나서려 했다. 그러나 잠시 멈칫한 그녀가 자기 자리로 돌아오더니, 서랍 안에 들어있던 흰색 병 하나를 꺼내 품에 집어넣었다.
“먼저 올라가있을게. 카챠, 팀원들한테 최대한 빨리 준비하라 전해줘.”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회주님. 부디 조심히 다녀오시길.”
그 말을 마지막으로 설아현이 이번에야말로 정말로 집무실을 나섰다.
***
……텅. ……터엉. ……터엉! ……터어어엉!
제3 격리연구소 외벽 인근. 지하에서부터 올라온 환풍구의 ㄱ자 모양 출구.
그 안에선 조금 전부터 금속이 부딪히는 소리가 불규칙적으로 울리고 있었다. 처음에는 멀리서 들리던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더니, 이내 환풍구에서 시꺼먼 연기가 투확! 하고 뿜어져 나왔다.
터엉!!!!
직후 입구의 창살이 떨어져나가며 안수호와 연구소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두 사람 다 지친 기색이 역력한 얼굴. 특히 소장은 아직 두려움이 채 가시지 않았는지 두 다리를 후들후들 떨고 있었다.
“……안수호 씨. 제가 그렇게 만류했는데도 절 데려가신다기에 자신이 있으신 줄 알았는데……. 지금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죄송합니다. 그냥 한 번 솟구치는 거랑 안정적으로 나는 거는 난이도가 이렇게 차이가 날 줄은…….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네요.”
그 큰일이란 게 빠르게 돌아가는 팬에 머리부터 박아 갈려나가거나 200미터짜리 수직 절벽 아래로 떨어져 곤죽이 돼버릴 뻔한 수준이었지만 두 사람 모두 굳이 입에 담지는 않았다. 이미 끝난 일을 논해봤자 의미도 없고, 애초에 두 사람에겐 그보다 중요한 일이 있었으니.
“대피소는 여기서 어느 방향이죠?”
“지금 나온 곳이 연구소 서쪽면이니 오른쪽으로 돌아가면 보일 겁니다.”
“좋습니다. 서두르죠.”
대피소는 연구소 뒤쪽에 격리 구역과는 별도로 마련된 지하공간이었다. 비상시를 대비한 일종의 벙커 역할을 하는 그곳은 바로 위에서 항공폭탄이 터져도 멀쩡한 내구도를 자랑했다.
“어……?”
그러나 두 사람의 시야에 대피소의 모습이 보였을 때. 견고하게 닫혀있어야 할 대피소 문은 종잇장처럼 찢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물씬 풍겨오는 비릿한 혈향.
안수호는 소장을 내버려둔 채 다급히 대피소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찰팍.
그 순간 발치에서 울린 물소리.
안수호는 고개를 내리지 않고도 그것이 피웅덩이를 밟은 소리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고개를 내리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그의 시야가 닿는 모든 곳이 피와 살점 천지였으니까.
흰색 가운을 입은 연구원과 장비를 착용한 경비대를 가릴 것 없이,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평등하게 잘게 썰린 육편이 되어 널브러져 있었다. 안수호는 그 모습이 꼭 벙커 안에 거대한 믹서기 날이 들어와 사람들을 통째로 갈아버린 것 같다 생각했다.
‘한겨울은 어디에…….’
그녀가 죽었을 리는 없다. 그녀가 죽었다면 안수호 또한 페널티로 곧바로 죽었을 테니까.
허나 부상을 입은 채 죽어가고 있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었다. 이에 안수호가 다급히 고개를 돌리며 한겨울을 찾았다.
“한겨울 학생!”
그리고 곧 그는 입구쪽 벽 모서리에 머리를 박은 채 꿇고 있던 한겨울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가 다급히 다가가자 움찔 어깨를 떤 한겨울이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한겨울 학생! 괜찮습…….”
안부를 물으려던 안수호의 말끝이 흐려졌다. 한겨울은 여전히 바닥에 주저앉은 채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 입가에는 아직 마르지 않은 침과 위액이 흐르고 있었으며 바닥에도 시뻘건 피 위로 누런 토사물이 번져 있었다.
“아…….”
안수호와 마주친 한겨울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공포에 절어있던 그 눈동자의 아주 작은 안도의 기색이 피어올랐으나, 여전히 대부분은 공포로 물들어있었다.
그럴 만도 하지. 제아무리 한겨울이 강단 있는 성격이라 한들 그녀는 결국 20살 먹은 새내기 학생에 불과했다. 눈앞에서 수십에 달하는 시체를 목격했는데 덤덤할 수 있을 리가.
비척비척 일어선 한겨울이 벽을 짚은 채 안수호에게 다가왔다.
“당, 신……. 아래 있다고 들었, 는데……. 괜찮으신…….”
“전 멀쩡합니다. 그보다 한겨울 학생이야말로 어디 다친 곳은”
“어, 어어? 안 돼, 안 돼! 안 돼!!! 으아아아아아!!”
그때 뒤늦게 뛰어온 연구소장이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그 참상을 목도했다. 그 자리에 힘없이 주저앉으려던 그가 가까스로 꺾이려던 무릎을 붙잡곤 비틀비틀 시체의 웅덩이로 뛰어들었다.
“누구…! 누구 살아있는 사람은 없나! 살아있다면 대답, 대답을…….”
그러고는 그 시체 사이를 누비며 쓰러진 얼굴들을 하나하나 살피기 시작했다. 그러나 하나의 시체를 살필 때마다 그 표정은 한없이 일그러져만 갔다. 그의 눈에 남아있던 일말의 희망이 순식간에 꺼져가기 시작한다.
“안 돼, 이럴 순 없어……! 이게, 이게 도대체 무슨, 아아아아……!!”
이내 실성한 사람처럼 오열하기 시작한 연구소장을 안수호가 측은하게 바라보았다. 허나 아무리 소장에게 동정이 간다 한들, 우선 살펴야 할 건 그거 아닌 한겨울 쪽이었다.
“……한겨울 학생은 어디 다친 곳 없습니까?”
“…………네. 전 괜찮아요. 그, 저는 대피소에 늦……게 와서, 제가 왔을 때는 이미 이, 이렇게…….”
“알겠습니다. 그 이상 말하지 않아도 됩니다. 우선 바깥으로 나가죠. 제 손 꽉 잡고, 주변은 보지 말고 저만 따라오세요.”
한겨울이 안수호의 손을 붙잡은 채 천천히 걸었다. 그러나 쉴 새 없이 떨리기만 하던 다리는 불안하기 그지없었고, 결국 그녀는 미끄러운 지방을 밟곤 발을 헛디뎌 앞으로 고꾸라졌다. 그런 그녀의 몸을 안수호가 급하게 받아든다.
“조심하세요. 발밑이 별로 그……. 아무튼 헛디디기 쉬운 상태니까.”
“네, 네…….”
“힘들면 잠시 이대로 있을까요?”
안수호의 품에 안긴 한겨울이 잠시 망설이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파르르 떨리는 두 어깨를 보며 안수호가 그녀의 등을 살며시 토닥였다.
안수호는 새삼 한겨울도 결국 평범한 여자애에 지나지 않는구나 싶었다. 초인으로서의 강함만큼은 류태현에 필적할 정도로 강해진 그녀였으나, 멘탈까지 류태현처럼 단단해진 건 아니었다. 특히 온실 속에서 자란 아가씨인 한겨울에게 있어 지금의 광경은 상당한 충격으로 다가왔으리라.
‘그나마 한겨울이 늦게 와서 다행……이라고 말하기엔 상황이 처참해도 너무 처참하군.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누가 이런 짓을 저지른 거야?’
안수호는 대피소의 상황에 대해 아는 게 하나도 없었다. 그나마 괴수에 의한 습격이란 경우의 수를 생각해보았지만, 그렇다면 습격한 괴수는 어디에 갔단 말인가.
게다가 애초에 기껏해야 A급에 불과한 이곳 괴수들이 한여름이 함께한 경비대를 뚫고 대피소까지 올라왔으리란 것부터가 말이 안 되었다.
이에 안수호는 다른 가능성을 도출했다.
‘여명단. 혹은 성유진이 또 무슨 짓을 저지른 건가? 그렇다면 아마 여명단이겠지. 아무리 성유진이라 해도 민간인 수십을 이렇게 학살해댈 정도로 미치진 않았을 테니까.’
대략 상황을 추측한 안수호는 그 사이 조금 진정된 한겨울을 이끌고 대피소 바깥으로 나갔다. 시야에 더 이상 시체가 보이지 않자 한겨울은 긴장이 풀렸는지 그대로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좀 진정 됐나요?”
“……네. 이제 괜찮아요.”
“좋습니다. 그럼 뭐 하나만 물어볼게요. 혹시 대피소에 오기 전후로 한여름 학생과 만났습니까?”
“아뇨. 언니는 제가 오기 전에 진압팀이랑 같이 격리 구역으로 갔다고 그 경찰분한테서 들었어요. 그 이후로는 저도 아직…….”
“경찰이라면 정지민 경위님을 말하는 겁니까? 그분은 지금 어디 계시죠?”
“그건…….”
질문한 순간 안수호는 자신이 실수했음을 알아차렸다. 한겨울이 입술을 머뭇거리며, 다만 그 눈으로 대피소 안쪽을 흘긋 바라보았다. 이에 그가 됐다며 그녀의 고개를 다시 자신에게 돌렸다.
“한겨울 학생. 전 안쪽에 다른 생존자가 없나 살피고 오겠습니다. 잠시 여기 혼자 있게 될 텐데 괜찮죠?”
“괜찮아요. 이제 진정했으니까.”
“좋습니다. 무슨 일이 생기거나 제가 필요하면 곧바로 부르세요. 잠시 다녀오겠습니다.”
안수호가 다시 대피소에 들어섰다. 그는 곧바로 정지민을 찾아 헤맸다. 다행히 혼자만 눈에 띄는 경찰 제복을 입고 있어서 그런가, 그는 곧바로 정지민을 발견할 수 있었다.
“…….”
정지민은 한겨울이 주저앉아있던 곳보다 조금 옆, 벽에 기댄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복부에는 날카로운 것으로 베인 듯 커다란 상처가 있었으며 거기서 새어나온 피가 그녀의 상반신 전체를 붉게 물들인 상태였다. 안수호는 그녀가 죽었으리라고 생각했으나, 다음 순간 미약하게 오르내리는 두 어깨를 발견하곤 다급하게 그녀의 곁으로 뛰어갔다.
“경위님! 살아계십니까? 정신 좀 차려보세요! 경위님!”
“…………으, 으.”
“……상처를 지혈하겠습니다. 조금 차갑겠지만 참아주세요.”
정지민의 상처를 살핀 안수호가 서리정령의 증표를 발동했다. 그의 손에서 새어나온 냉기가 흐르는 피를 얼리고 상처를 지혈했다.
그러나 생살이 얼어붙는 감각에도 불구하고 정지민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결코 좋은 징조는 아니었다.
“안수호, 씨…….”
“말씀하지 마세요. 상처가 심합니다. 병원에 갈 때까지 최대한 안정을 취해야”
“……저, 다리에 감각이 없어서, 그런데. 일어, 서는 것 좀 도와, 주실래요……?”
“…….”
그 말에 안수호는 입술을 잘근 씹을 수밖에 없었다. 정지민의 다리에는 자잘한 자상이 가득했다. 그럼에도 감각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건 둘 중 하나였다. 척추를 다쳐 하반신이 마비되었거나, 피를 너무 많이 흘려 정신이 오락가락하거나.
혹은 둘 다이거나.
“………………아.”
안수호의 어깨를 붙잡은 채 잠시 일어서려 용쓰던 그녀가 이내 두 팔을 툭 떨어뜨렸다. 그녀의 입에서 탄식 섞인 한숨이 새어나온다.
“……도로에서, 습격도 그렇고. 좀 전에 괴물……도 그렇고. 뭐가 뭔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하나도 모르겠어요. 아무래도 오늘, 마가 끼어도 단단히 낀 것 같, 네요…….”
“경위님……”
“그러니까 수호 씨는 조심……히 잘, 도망쳐요. 저는……. 좀 피곤해서 쉬다가, 따라갈 테니까…….”
“쉰다니요. 경위님. 경위님?! 정신 차리세요! 눈 감으면 안 됩니다! 경위님!”
“…………저 원래 오늘 근취, 인데. 수호 씨 때문에 잠도 못 자고, 출동한, 거라고요……. 그러니까…………. 잠깐 눈 붙이는 것, 정도는. 봐주……세…………요………….”
한숨 자겠다던 정지민은 그 말 그대로 잠들듯이 평온한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안수호는 호흡이 멎은 채 차갑게 식어가기 시작한 그녀의 모습을 말없이 두 눈에 담았다.
“……김 주임! 정신 좀 차려 봐요……! 김 주임!! 망할……. 제발 누구든 좋으니까 대답 좀 해보라고요……!”
적막한 대피소에 소장의 애원만이 서글프게 울려 퍼졌다.
그때.
“어, 언니?”
대피소 바깥에서 들린 그 단어에 안수호가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대피소 입구에 한여름이 전신에 피칠갑을 한 채 힘겹게 서있었다.
“한여름 학생!!”
안수호가 외치자 소장 또한 그녀를 돌아보았다. 곧 침울하게 잠겨있던 그 눈에 희망의 불씨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한여름 학생! 괜찮으십”
“경비대! 경비대는 어떻게 됐습니까? 다른 직원들은 어디 있죠? 같이 온 게 아닌가요?!”
소장이 헐레벌떡 달려가 물었다. 그러나 한여름은 침묵한 채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저 말곤 전부 죽었어요.”
“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아무리 괴수들이 전부 푸, 풀려났다 해도. 우리 경비대 직원들이 그렇게 쉽게 죽을 리가”
“데이터베이스에 등록되지 않은 정체불명의 괴수였어요. 대피소를 습격한 그놈은 곧바로 비상계단에 있던 저희 쪽을 습격했죠. 그리고 저 말고는 전부 죽었어요.”
“하, 하지만 생존자, 생존자 한 명 정도는 있을 거 아닙니까…….”
“소장님. 제 몸을 봐요.”
한여름이 과시하듯 두 팔을 벌렸다. 그녀의 몸은 살아있는 게 용할 정도로 상처로 가득했다. 온몸에 그어진 자상과 관통상을 붉고 희끄무레한 얼음들이 틀어막고 있었다. 안수호가 정지민에게 한 것과 동일한 지혈 방식이었다.
“S급 초인인 저조차 이지경인데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겠어요. 전부 그 괴수한테 죽었어요. 제가 다 확인했고요. 안타깝지만 그게 현실이에요.”
“그럴 수가…….”
한여름의 말을 들은 소장이 고개를 젓더니 비척비척 걷기 시작했다. 한여름이 그의 손목을 홱 낚아채며 묻는다.
“지금 어디 가시는 거예요?”
“……아가씨께서 확인하셨다고 하셨지만……. 혹시 살아있는 사람이 있을 지도 모릅니다. 하다못해 제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
“소장님. 제가 분명 말했죠. 제가. 이 두 눈으로. 직접. 전부. 확인했다고.”
한여름이 소장의 멱살을 낚아채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제가 여기 온 건 제 동생이랑, 혹시 있을지 모를 생존자들을 데리고 여길 나가기 위해서예요. 아래로 내려간 그 괴물이 언제 다시 돌아올지 모르는데 이 이상 지체할 시간 없어요. 뻔히 알면서도 소장님을 사지로 보낼 수는 더더욱 없고요.”
“그렇지만…….”
잠시 말끝을 흐리던 소장이 심호흡을 크게 하더니, 이내 조금 떨림이 멎은 목소리로 말했다.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아가씨께서 확인을 하셨다니 아마 생존자는 없겠죠. 그리고 대피소 안에도…….”
잠시 대피소를 바라보던 소장이 두 눈을 질끈 감으며 힘겹게 말했다.
“……대피소 안에도, 살아있는 사람은 없었지요. 생존자는 저와 안수호 씨. 그리고 두 아가씨분들이 전부……인 것 같습니다.”
“그럼 얼른 이동하죠. 대피소 꼴을 봐선 어디 숨는다 해서 안전하진 않아 보이니, 아예 연구소 바깥으로 도망쳐야겠어요.”
한여름은 지하주차장에 자신이 타고 온 차가 있다며 그쪽으로 가자고 했다. 소장은 좀 전의 대화로 미련을 접었는지 힘없는 발걸음으로 그녀의 뒤를 따랐다. 안수호 또한 한겨울과 함께 곧바로 따라붙었다.
“……한여름 학생. 도대체 무슨 일이 있던 겁니까?”
주차장으로 향하는 길. 안수호가 한여름 옆에 따라붙어서 물었다.
“좀 전에 설명한 대로예요. 연구소 데이터베이스에 등록되지 않은 비식별 괴수가 나타나 먼저 대피소를 습격했고, 곧바로 저희 쪽으로 와서 진압팀까지 전멸시켰어요. 그 다음 괴수는 아래쪽으로 내려갔고요.”
“비식별 괴수라면 혹시 외형이나 등급 같은 건…….”
“외형은 검은 털을 가진 늑대. 등급은 최소 S급. 적어도 기사의 무덤에서 만났던 그 사방기사란 놈들보단 강했어요. 제가 별 쪽도 못 쓰고 당할 정도였으니까.”
“최소 S급이라니……. 그런 괴수가 도대체 어디서 튀어나왔단 말입니까?”
그 말에 한여름이 순간 우뚝 정지했다. 이내 다시 걷기 시작한 그녀가 안수호에게만 들릴 정도의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 늑대. 왠지 저랑 눈이 마주쳤을 때 시선을 피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마치 뭔가 들키기 싫은 게 있는 것처럼.”
“그게 무슨 말씀……잠깐, 설마.”
“확신은 아니지만 의심은 충분히 가는 상황이죠. 마침 성유진의 능력도 검은 털의 웨어울프로 변신하는 거니까.”
비록 괴수의 모습은 반인반수인 웨어울프가 아니라 완전한 늑대 형상이긴 했지만, 성유진이 그 모습으로도 변신할 수 있을지 누가 아는가.
그런 이야기를 나누던 그들은 어느새 지하주차장에 도착했다. 한여름은 품에서 차키를 꺼내 버튼을 눌렀으나 반응은 돌아오지 않았다. 곧 그녀는 자신의 차키가 전투의 여파로 박살나버렸다는 걸 발견했다.
“큰일 났네 이거……. 소장님? 혹시 차키 가지고 계세요?”
“예. 제 차라면 바로 아래층에 주차되어 있습니다.”
“좋아요. 그럼 얼른 그쪽으로 가죠. ……뭐해요 당신? 왜 멍하니 서서 그러고 있어요?”
아래층으로 향하려던 한여름은 우두커니 정지한 안수호를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나 안수호는 지금 그녀의 말에 일일이 반응할 여유가 없었다.
“지하주차장…….”
“네? 지금 뭐라고”
한여름의 질문이 아득히 멀어져갔다. 주위의 풍경도, 소리도, 시간조차 느껴지지 않는 극도의 긴장감 속에서 안수호는 언젠가 들었던 자신의 미래에 대해 떠올렸다.
지하주차장에서 오른팔이 잘린 채 쓰러져 있었노라고.
자신의 미래를 엿본 설아현은 분명 그렇게 말했었지. 그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
……저벅.
안수호의 등 뒤에서 발소리가 울려 퍼졌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