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4화 〉 193. 자진출두(2)
* * *
“시발…….”
취미 생활을 방해받아 분노한 아이기스에게 한참 동안 시달린 여명단 단원 석파랑은 깊은 한숨과 함께 아이기스의 방을 나섰다.
석파랑은 아이기스가 서울지부에 머무는 동안의 수발을 맡은 단원이었다. 때문에 그는 조금 전 상부에서 내려온 ‘아이기스에게 태초의 은 재탈환 임무를 전달하라.’는 명령에 따라 한창 덕질 삼매경이던 그에게 그 소식을 전했다.
그 말은 즉 전달하는 내용에도, 그 방식이나 절차에도 문제는 없었다는 소리.
그럼에도 돌아오는 건 형형한 살기가 뚝뚝 묻어나오는 위협과 욕설이었다. 한창 좋아하는 가수의 노래를 감상하던 와중에 말을 걸어 기분이 상한 거야 백 번 양보해서 이해한다 쳐도, 그저 상부의 명령에 따랐을 뿐인 자신에게 왜 그리도 원망을 쏟아내는지. 석파랑은 억울해 미칠 지경이었다.
‘아이기스 그 자식도 이번 임무가 얼마나 중요한지 뻔히 알고 있는 주제에. 왜 나한테만 신경질이냐고.’
본래 여명단은 안수호에게 태초의 은을 가로채인 뒤 곧바로 재탈환 작전을 준비했다. 허나 문제는 그가 경찰에게 잡혀 경비가 삼엄한 격리 구역에 갇혀버렸단 점이었다.
때문에 여명단은 그의 행방을 알면서도 손가락만 빨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안수호가 풀려났다는 소식을 접하고 드디어 그를 습격하려 했으나, 직후 성유진 때문에 여론과 경찰의 이목이 전부 그쪽으로 쏠린 탓에 이번에도 작전은 불발.
심지어 잠잠해지길 기다리고 있었더니 어느새 안수호는 사라져버리고 없었다. 여명단 입장에선 미치고 팔짝 뛸 노릇.
그러다가 마침내 안수호의 자진출두소식을 듣게 된 것이었다. 허나 이번에도 여유는 없었다. 자수한 안수호는 곧바로 격리기지로 이동될 것이고, 경비가 삼엄한 그곳에 이송되어버렸다간 저번처럼 손가락만 빨게 될 테니.
‘다른 팀원들은 이미 다 명령 받고 출동 대기 중일 텐데. 그깟 아이돌 노래가 도대체 뭐가 중요하다고 저 지랄인 거야?’
석파랑이 불만으로 가득 찬 표정으로 방문을 노려보았지만, 그 안에서 새어나오는 음악 소리는 멈출 줄을 몰랐다.
***
한편 그 시각. 서울종로경찰서.
안수호는 남들의 이목을 피해 조심스레 지하의 취조실로 이송되었다. 그를 데려온 형사는 곧바로 나갔으며, 그로부터 한 시간이 넘게 취조실 안으로는 아무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여일과 민채령의 협상 덕에 수사본부는 거의 해체된 것이나 다름없는 상태였다. 그나마 남아있는 형사들조차 다른 사건에 대부분 차출된 상태였고, 안수호 건은 그대로 미제 사건으로 묻히게 되리란 것이 그곳 경찰들의 공통 인식이었다.
헌데 그런 와중에 안수호가 자진해서 출두하리라고 누가 예상이라도 했겠는가. 지상에선 현재 다른 현장으로 나간 기생괴수 사건 수사본부 인원들을 속속들이 불러들이며 담당자를 찾아대고 있었다.
벌컥!
그렇게 안수호가 방치되고 있기를 약 1시간 하고도 30분.
“……안수호 씨?”
마침내 나타난 이는 털털한 인상의 여성 경찰이었다. 목에 걸린 공무원증에 적힌 ‘정지민 경위’라는 이름에 안수호가 빵긋 웃으며 말했다.
“오랜만이네요 경위님.”
정지민 경위.
그녀는 네버랜드에서 안수호와 아이기스가 싸울 당시 제일 먼저 현장에 도착한 경찰들 중 한 명으로, 당시 무전기로 특임대 급파를 요청한 장본인이었다. 그 인연이 줄곧 이어져 이따금 안수호와 몇 번 마주치기도 했고, 현재는 사람이 거의 빠져나가다시피 한 기생괴수 수사본부에 남은 몇 안 되는 형사이기도 했다.
“……오랜만이고 자시고 지금 이게 뭐하자는 겁니까?”
“보시다시피 자수하러 왔습니다. 애초에 제가 죄인은 아니지만요. 기생괴수에게 기생당한 피해자이자 참고인, 이라는 신분은 아직 유효한 거죠?”
“그걸 알고 있는 사람이 경찰의 눈을 피해 한 달이나 도망쳐 다니나요?! 당신 한 명 찾는다고 저희가 그동안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기나 해요?!”
정지민 경위는 태연하게 앉아있는 안수호의 모습에 화가 머리끝까지 차오른 모습이었다. 반면 안수호는 그런 그녀의 반응을 보면서도 여전히 무덤덤했다.
“그건 죄송합니다. 그치만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거든요.”
“그럴만한 이유가 뭔데요?!”
“무서웠거든요.”
“네?”
그가 꺼낸 의외의 대답에 정지민 경위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야 그렇잖아요. 전 분명 제대로 안전검사랑 이런저런 실험 다 받고 풀어준대서 집에 갔는데. 주말 지나고 일어나보니 집 앞 골목은 매스컴으로 가득하질 않나, 뉴스에서는 저를 두고 무슨 테러리스트네 범죄자네 떠들어대질 않나. 이대로 있다간 무슨 일이 나도 단단히 나겠다는 생각에 무서워서 일단 도망쳤죠.”
“……도망치는 중에도 저희 연락은 받으실 수 있었을 텐데요.”
“네. 받긴 받았죠. 근데 분명히 저보고 검사 다 끝났으니 풀어준다던 사람들이 여론 의식해서 절 다시 잡아들이려는 게 느낌이 좀 많이 쎄해서.”
“그래서 기자들한테서도, 그리고 경찰한테서도 도망치셨다 그건가요?”
“제가 겁이 좀 많아서요. 그래도 지금 이렇게, 늦게나마 자진해서 경찰서로 왔잖습니까. 그러니 그 부분은 어떻게 좀 봐주실 수 없을까…….”
멋쩍게 웃으며 고개를 숙이는 안수호를 보며, 정지민은 지금껏 그녀가 수사본부에서 들였던 노력들이 마치 주마등처럼 지나쳐가는 걸 느꼈다.
뭐? 이제나마 자진해서 나왔으니 봐달라고?
정지민 경위는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그를 감옥에 처넣고 싶었다. 허나 그럴 수도 없는 것이, 안수호의 말마따나 그의 현재 신분은 어디까지나 참고인이지 피의자가 아니었다.
고로 안수호에게는 ‘수사기관에 강제로 소환당하거나 진술을 강요당하지 않을 권리’가 있었다. 애초에 기생괴수 은닉 사건의 수사본부부터가 안수호 개인의 범죄 사실보다는 그가 풀려나게 된 과정에 있는 미심쩍은 부분들, 특히 경찰 관계자의 비리나 외압에 관해 더욱 집중했으니.
“으, 으으으……!”
때문에 정지민 경위는 한 달이나 지나 버젓이 나타난 안수호를 보며 이를 갈고 치를 떨며 주먹을 꽉 쥐었지만, 그 이상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채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한 분노와 한탄이 그녀의 입 안에서 소용돌이쳤다.
“…………하아아아.”
깊은 한숨과 함께 정지민 경위가 고개를 숙였다가, 이내 고개를 들며 안수호에게 말했다.
“여기서 잠시만 기다리고 계세요. 지금 호송차량이랑 경호 인원을 준비 중이니까. 성남에 있는 제3 격리연구소로 이송되실 거예요. 저번에 가보셨으니까 기억하시죠?”
“어떻게 잊겠어요? 보름 동안 갇혀있던 곳인데. 제 식사 챙겨주시던 연구원분이 박사과정 3년차라는 것도 기억하고 있다고요.”
“그런 쓸데없는 건 기억하지 않으셔도 돼요. 아무튼. 2시간 정도만 더 지나면 아마 준비가 끝날 것 같으니까. 그때까지 얌전히 기다려주세요.”
“핸드폰 해도 되나요?”
“하시던지요. 피의자가 아니라 참.고.인.이시니까. 제가 막을 권리는 없죠.”
정지민의 허락에 안수호는 줄곧 주머니 속에 봉인해뒀던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거의 한달 만에 만져보는 자신의 폰에 그가 희희낙락하자, 정지민의 얼굴이 더욱 썩어들어갔다.
“그럼 이송 때 뵐게요. 필요한 게 있으시면 문에다 노크하세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정지민이 방을 나서려다, 문득 생각난 의문에 다시 돌아섰다.
“저…….”
정지민의 말에 안수호가 고개를 든다. 취조실에 갇힌 것치고 너무나도 평화로운 그 얼굴을 보며, 정지민이 불안에 찬 표정으로 묻는다.
“당신 오른팔에 있는 기생괴수. 정말 안전한 거 맞죠?”
실은 기생괴수가 전혀 안전한 상태가 아님에도 상부가 몰래 그를 풀어주었다. 그런 의심은 수사본부 설립 시점부터 계속해서 제기되어왔다. 그렇기에 정지민은 안수호의 태연한 모습을 보면서도 불안감을 감출 수 없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절대 안전하니까.”
그렇게 말하며 안수호가 은색으로 물든 오른손등을 내보이며 휘휘 저었다. 마음 같아선 실비보고 직접 나와서 재롱이라도 떨어보라 시키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소스라치게 놀란 정지민이 무슨 반응을 보일지 모르니.
“…….”
안수호의 확답에 입술을 오물거리던 정지민은 결국 미련이 가득한 얼굴로 취조실을 나섰다.
혼자 남겨진 안수호는 웹서핑 따윌 하며 시간을 죽였다. 안수호의 자진출두 건은 당연하다면 당연하지만 뉴스거리조차 되지 못했다. 포털 사이트 헤드라인을 가득 채운 연예인 열애설 기사에 안수호가 안도의 웃음을 피식 지었다.
그때.
끼이익.
취조실 문이 열리며 누군가 들어왔다. 이번에는 정지민이 아닌, 안수호도 처음 보는 낯선 사내였다. 행색을 보면 경찰인 건 맞는 것 같지만, 목에 걸린 공무원증이 뒤집어져 있어 이름은 알아볼 수 없었다.
“형사님? 무슨 일로…….”
“이거.”
어딘가 묘하게 초조해 보이는 형사는 안수호의 말을 끊으며 전화를 건넸다. 요즘 시대에 보기 드문 폴더폰.
“……?”
안수호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그러자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
……오랜만입니다 안수호 씨. 성유진입니다.
성유진이라는 소개를 듣기도 전에 안수호는 그의 정체를 단번에 알아차렸다. 풀어져있던 안수호의 표정이 단숨에 굳으며 그가 자세를 바로했다.
“형사를 통해서 전화기를 건넨다니 쓸데없이 복잡한 방법을 쓰셨군요. 그래서, 무슨 일로 전화주신 거죠? 여일은 이제 이 건에서 손 떼기로 한 걸로 알고 있는데?”
……알고 있습니다. 안수호 씨의 말씀처럼, 여일은 이 건에서 손을 떼기로 했죠. 물론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고로 저나 여일이 더 이상 안수호 씨한테서 강압적으로 ‘물건’을 빼앗을 일은 없을 겁니다.
“그럼 왜 제게 전화를?”
강압적인 수단은 사용하지 않겠지만, 아직 협상의 여지는 남아있다 생각했으니까요.
안수호는 묘하게 착 가라앉은 성유진의 목소리가 꼭 제 감정을 숨기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물론 성유진이야 본래부터 매사에 능숙하게 감정을 숨기는 게 일상이었으나, 이번에는 어째 평소랑 달리 말투나 호흡 중간중간 불안한 낌새가 역력했다.
마치 가까스로 감정을 숨기고 있는 것처럼.
“협상이라…….”
성유진의 갑작스런 제안에 안수호는 그의 말을 곱씹었다. 이 타이밍에서의 협상이라면 분명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던져보는 말일 것이다.
고로 대화를 풀어나가기에 따라선 협상을 통해 상당한 이득을 취할 수도 있겠지.
그러나…….
“죄송하지만 협상의 여지는 없을 것 같습니다.”
……아직 제 말을 들어보지도 않았잖습니까.
“그래도 없는 건 없는 겁니다.”
안수호는 그 요구를 단칼에 거절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어째서입니까?
“댁들이 이 ‘물건’으로 ‘무슨 짓’을 할지 뻔히 알고 있으니까요.”
원작 중후반부에 등장하기 시작한 다중능력을 지닌 빌런들. 안수호는 태초의 은을 가로챔으로써 본의 아니게 그 빌런들의 출현을 억제했다. 헌데 여기서 태초의 은을 넘겨주었다간 기껏 억제한 빌런의 출현을 그 스스로 풀어주는 꼴이 되지 않는가.
‘게다가 실비도 날 잘 따라주고 있으니까. 이해득실만 따지고 넘겨주기엔 아무래도 양심이 찔리지.’
설령 양심이 아니더라도 실비를 통한 전투력 상승은 안수호 입장에서 어지간해선 포기하기 힘든 부분이었다. 하물며 성유진에게 그만한 전투력을 보충해줄 수단이 있을 리도 만무하니.
“좀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이 건에 대해선 이미 제 상사랑 그쪽 상사랑 해서 마무리가 된 걸로 압니다. 그러니 그만 포기하시죠. 저도 이 이상 그쪽을 피곤하게 만들진 않을 테니까.”
그 선택, 후회하지 않으실 자신 있으십니까?
“후회는 익숙합니다. 그래서 설령 후회하더라도 만회할 기회가 있다는 것도 알고요.”
…….
듣는 귀가 있어서 애매하게 던진 거절. 그러나 성유진은 안수호의 의지를 분명하게 알아들었다. 한참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던 전화가 성유진의 주도로 끊기자 안수호가 힘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요.”
그가 전화를 건네자 형사가 말없이 폰을 받고는 그대로 취조실을 나섰다. 나가기 직전 보인 옆얼굴은 척 봐도 마지못해 명령을 들었을 뿐, 이 건에는 조금도 엮이기 싫다는 표정이었다.
그 뒤로 안수호는 웹서핑을 하거나 주변 사람들에게 상황 보고를 하는 등의 일로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두 시간 정도 지나자 마침내, 안수호는 정지민의 예고대로 호송차량에 오르게 되었다.
“…….”
말이 차량이지 반쯤 장갑차나 다름없는 트럭 컨테이너에 오르자, 안에는 익숙한 복식을 한 무장대원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일전에 상대한 특임대 대원들이었다.
“하하하. 안녕하세……요?”
대원들은 안수호의 인사를 들은 채도 하지 않은 채, 다만 그를 빤히 노려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머쓱해진 안수호는 그대로 컨테이너 제일 안쪽, 딱 봐도 그가 앉아있어야 할 구속 의자에 자진해서 앉았다.
‘인원은 총 여섯인가.’
그 말대로 컨테이너에 탑승한 인원은 고작해야 한 개 분대, 6명밖에 되지 않았으나 안수호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들이야말로 만에 하나 태초의 은이 폭주했을 때를 대비한 방호책, 정예 중의 정예 대원이라는 것을.
‘바깥에도 보니까 특임대는 아니더라도 경찰이다 뭐다해서 꽤 요란하게 모여있던데. 뭔가 미안하네.’
지금 모인 이들의 태반은 네버랜드 사태를 기억하며, 특임대를 반파시킨 희대의 괴수를 운반하나는 심정으로 긴장에 빠져 있을 것이다.
그런 저들이 응석받이처럼 안수호에게 시도 때도 없이 엉기는 실비를 보면 무슨 표정을 지을까. 문득 든 생각에 안수호가 피식 웃었다.
“뭘 웃고 그래요?”
그때 정지민이 컨테이너에 탑승함과 동시에 컨테이너 문이 굳게 잠겼다. 창백한 조명 아래로 뚜벅뚜벅 걸어오는 정지민 경위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전무장한 상태였다.
“경위님도 저랑 함께 가십니까?”
“수사본부 인원 대부분이 다른 사건에 차출돼서. 임시긴 해도 제가 당신 담당자를 맡게 되었거든요. 성남시의 격리기지까지 저, 정지민 경위가 안전하게 모셔다드리죠.”
“총구 들이밀면서 그렇게 말씀하셔도 설득력 전혀 없는데요.”
“당신의 안전을 위해서 여차하면 그 괴수가 잠든 오른팔을 쏴버려야 할 때가 올지도 모르니까요.”
전혀 농담으로 들리지 않는 그 말에 안수호의 오른팔에 숨어있던 실비가 움찔 떨었다. 안수호는 마음 같아선 안심하라며 쓰다듬어주고 싶었지만, 이미 그의 양팔은 구속 의자 팔걸이에 팔뚝만한 수갑으로 구속된 상태였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풀 수 있겠지만…….’
그랬다간 정말 정지민의 총알이 그의 오른팔에 꽂히게 되리라. 어쩌면 실수를 가장해서 다른 부위에 꽂힐 지도 모르고.
“참고인 구속 완료. 선두 차량 출발해주세요.”
정지민의 무전이 울리고 잠시 뒤, 부르릉 소리와 함께 일련의 차량 행렬이 출발하기 시작했다.
목표는 성남시에 위치한 제3 격리연구소.
게이트에서 빠져나온 괴수나 일부 위험한 아티펙트를 격리해두고 연구하기 위한 대한민국 최고의 보안을 자랑하는 연구시설이었다.
‘거기를 또 가게 되다니…….’
안수호의 뇌리에 저번 구속 당시의 기억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하루에도 몇 번이나 이루어지는 채혈이나, 용도를 알 수 없는 수많은 주사들. 그 외 이런저런 실험 기억을 떠올린 그가 질린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뭐, 그래도 이렇게 해서라도 사회에 복귀할 수 있다면야…….’
여일은 더 이상 그에게 손을 대지 못한다. 실비도 자신의 명령을 완전히 따르고 있으니 연구소에서 위험하다는 판정이 내려지지도 않을 것이다.
고로 잘 풀릴 거라고. 안수호는 애써 그렇게 생각했지만 가슴 한 구석에 피어오르는 불안감은 도저히 무시할 수 없었다.
잘 풀릴 거다. 잘 될 거다.
지금껏 이 세상을 살아오며 매번 그렇게 생각했지만, 마치 그를 비웃듯 이 빌어먹을 세상은 매번 그의 예상을 배신했으니.
이번에도 그러지 않으리란 법이 어디 있겠는가 하며. 안수호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