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3화 〉 192. 자진출두(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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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의 논리란 무엇인가. 그 질문을 기업가들에게 던지면 아마 여러 가지 답이 나오겠지만, 그 답들은 자연스레 하나의 원칙으로 귀결될 것이다.
기업이란 결국 손익과 득실에 따라 움직이는 법이라고.
그런 의미에서 여일은 민채령의 협박에 대해 지극히 ‘기업적인’ 대책을 들고 왔다.
그녀의 요구를 일단은 수용해주는 한편, 이를 통해 번 시간으로 범죄 사실을 은폐하고 흔적을 지운다. 그러는 한편 민채령과 안수호에 대해 보다 면밀히 조사하고, 그녀가 그만한 범죄 사실들을 어떻게 알아냈는지 파헤치고 또 파헤쳤다.
그러는 사이, 여일의 요구 수용에 따라 안수호에 대한 경찰의 수사 상황도 크게 변화했다.
수사에 배정된 인원이 줄어든다든가. 다른 사건을 우선시하라는 상부의 지침이 내려온다든가. 혹은 이미 안전검증을 마치고 풀어준 그를 재구속할 필요가 애초에 없다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나오는 등.
겉으로 드러나진 않지만 내부적으로는 분명히 보이는 그 변화에 일선 형사들은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텄다고.
이 건은 윗선에서 대충 묻으려고 결정했나보다고.
‘초인’이라는 존재 때문에 본래 지구보다 강력 범죄율이 높게 나타나는 세상에서 경찰력의 부족은 보다 두드러지는 문제였다. 때문에 그 부족한 인원을 배정하다보면 어떤 사건은 상대적으로 소외되기 마련이고, 그렇게 남들의 관심이 멀어진 사이 스리슬쩍 종결되는 사건도 많았다.
그리고 그런 점을 이용해 윗선에서 사건을 묻으려는 시도도 왕왕 일어났고. 형사들 또한 이런 일이 특별한 일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하다못해 이번 건이 누가 봐도 극악 범죄임이 분명한 건이었다면, 몇몇 정의감 넘치는 형사들이나마 자체적으로 수사에 힘쓰거나 했겠지.
허나 이번 건은 어쨌든, 일단은, 아무튼 간에 한 번 종결된 건이었다. 재구속을 촉구하는 대중의 목소리와는 별개로, 경찰 내부에는 이미 안수호와 실비에 대한 여러 검증 자료가 있었다.
실비가 완전히 안수호의 지배하에 있으며, 더 이상 폭주할 염려는 없다는 전문기관의 검증.
즉 경찰 입장에서는 이미 끝난 일을 다시 들쑤시는 상황이란 것이었다. 수사에 참여한 이들 중에는 안 그래도 바쁜 와중에 쓸데없는 인력 낭비를 한다 생각하는 이들도 있었고, 윗선의 태도 변화는 그런 이들의 의욕을 더욱 떨어뜨리는 기폭제가 되었다.
덕분에 안수호에 대한 수사는 여일이나 민채령의 예상보다 빠르게 유명무실해져갔다. 유명무실해져갔으나…….
“재수사가 일단 시작된 이상, 없던 일로 하는 건 불가능하겠죠.”
“잘 알고 계시네요. 여일이 무소불위의 권력 기관도 아니고. 마른 장작에 불을 지피거나 번지는 방향을 조절할 수는 있어도, 이미 활활 타버린 불을 마음대로 끌 수는 없어요.”
한여름의 말에 안수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또한 정확히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경찰 안에는 2주째 행방이 묘연한 절 여전히 수상하게 여기는 부류도 있을 겁니다. 고로 의심을 벗고 원래 생활로 복귀하기 위해선 일단 한 번 붙잡혀주는 편이 낫겠지만…….”
“자진출두할 생각이라면 1, 2주 정도는 더 기다리는 편이 좋아요. 그때쯤 되면 경찰은 물론이고 언론이나 대중도 슬슬 관심이 식을 대로 식었을 테니까.”
“안 그래도 여일 쪽에서도 그렇게 말하더군요. 일단 형식적으로만 구속된 뒤 간단한 검사나 실험만 마치고 풀어주는 방향으로 유도하겠다고. 아마 처음 구속됐을 때 받았던 절차의 반복이겠죠.”
“여일이 말을 바꿀 가능성은?”
“기업가로서 생각이 제대로 박혀있다면 안 그러겠죠. 듣자하니 이번 사태에 대한 징계로 성유진의 이사직도 박탈한다고 그러던데, 아마 괜찮지 않을까요?”
“하긴. 그만한 리스트를 들먹였는데 쫄지 않을 수가 없겠죠.”
한여름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걸렸다.
민채령이 여일에게 협박용으로 제시한 리스트는 한여름도 가지고 있었다. 고로 민채령이 했듯 그녀 역시 여일을 상대로 협박질이 가능하단 소리.
물론 여일은 그 사이 범죄 흔적을 최대한 은폐하겠지만, 민채령이 협박에 사용한 건 전체 리스트의 절반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남은 절반은 오직 안수호와 한여름만이 알고 있었으며, 안수호는 이를 사용할 생각이 없었으므로 전부 한여름의 손패나 다름없었다.
“그나저나 오늘부터 2주 정도 더 기다린다고 하면……. 당신이 여길 떠났을 즈음 아카데미는 학기가 끝나있겠네요.”
그 말에 안수호는 벌써 시간이 그렇게 흘렀나 싶었다. 한가로운 별장에 은거하고 있으니 시간 감각이 사라진 모양.
‘그럴 만도 하지. 지금껏 바쁘게 살아도 엄청 바쁘게 살아왔으니까.’
안수호의 삶은 빙의 이후로 줄곧 사건과 사건의 연속이었다. 이른바 세상이 그를 중심으로 돌아갔다 해도 과언이 아니리라. 허나 최근 한달여 동안 안수호가 있던 곳은 대부분 구치소 안이나 별장처럼, 세상의 중심에서 빗겨나간 곳이었다.
물론 안수호가 없다 해도 세상은 알아서 움직인다.
한여름의 말마따나 아카데미는 기말고사 기간에 돌입했고, 이에 따라 강하늘도 기말 시험 준비에 열심이었다. 강하늘은 하루에 한 번은 무조건 안수호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그녀가 꺼내는 화제는 대부분 고되고 고달픈 시험 준비 이야기였다. 특히 이론 과목의 범위가 너무 방대해서 머리가 터질 지경이라던가.
그런 그녀를 도와준 건 이번에도 지예원이었다. 지예원은 매스컴 노출을 경계하며 성실히 아르바이트에 임하는 한편, 이따금 시간이 날 때마다 강하늘의 공부를 봐주었다. 그때마다 강하늘은 자존심이 상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지예원에게 의존했고, 지예원은 매 전화 때마다 그 사실을 생색내며 언젠가 두 배 세 배로 받아내겠다고 호언장담하곤 했다.
한편 설아현은 5월 20일경 서울 한복판에 나타난 S급 던전 공략 준비에 한창이었다. 그녀는 여전히 안수호를 걱정하고 있었지만 길드마스터로서 마냥 안수호만을 신경 쓸 수는 없었다. 그래도 이틀에 한 번은 안부를 물어주는 것이 격오지에 홀로 은거한 안수호로서는 그저 감사할 따름이었다.
그 외에도 한 자리에 멈춰선 안수호와 달리, 다른 이들은 모두 저마다의 삶을 살고 있었다.
샤오메이는 며칠 전 마침내 일본으로 가는 밀항편에 올랐으며, 한여름은 며칠에 한 번 안수호를 보러 올 때를 제외하곤 아카데미와 길드 인턴 생활, 그리고 회사 업무로 바쁜 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민채령은 계속해서 여일을 상대로 협상을 빙자한 협박을 통해 여러 이권을 뜯어내고 있었으며, 안수호라는 파트너를 잃은 채소연은 일단 임시로 이태호와 투맨셀을 결성해 잘 지내고 있었지만, 이따금 그립다는 듯 안수호의 빈자리를 보며 울상을 지었다.
“그럼 전 이만 가볼게요. 다음에 오는 건 아마 주말 즈음일 것 같네요.”
그때 상념에 젖어있던 안수호를 뒤로하고 한여름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밤이 깊었으니 오늘은 여기서 자도 될 텐데, 그녀는 내일 오전부터 업무가 있다며 곧바로 서울로 올라간다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수호를 만나기 위해 계속 시간을 내어주는 건 그녀 나름의 배려일까, 혹은 그를 탐내고 있다는 관심의 표출일까.
“아, 그러고 보니 겨울이가 전해달래요. ‘두고 봐요. 이번에는 정말 이길 거니까.’라고. 그런 말 정도야 직접 전화로 하면 될 텐데 왜 굳이 저한테 전해달라는지, 그 애도 참 알다가도 모르겠다니까요.”
그 말로 마침내 정말 볼일이 끝났다는 듯, 한여름은 미련 없이 손을 흔들어보이며 별장을 나섰다. 안수호는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한겨울의 전언을 곱씹었다.
‘이번에는 정말 이긴다라…….’
한겨울이 좌절에서 빠져나온 것 같아 다행이라 생각하면서도, 안수호는 정말 세상은 그를 놔두고 바쁘게 돌아가고 있다는 실감이 들었다.
그리고 그런 와중에 멈춰있는 건 오직 그 본인밖에 없다는 생각도.
물론 안수호라고 마냥 소일거리나 하며 시간을 죽인 건 아니었다. 은거하는 와중에도 기본적인 트레이닝은 하루도 빼먹지 않았고 거기에 태초의 은을 다루는 연습도 추가했다. 서리정령 쪽은 여전히 묵묵부답이었지만, 2주 간의 은거 기간 동안 안수호는 분명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다만 그럼에도 그가 초조함을 느끼는 건 속절없이 흘러가는 그 시간의 흐름이 너무나도 빠르기 때문이리라.
‘1학기 기말고사까지야 그리 위험한 이벤트는 없지만, 방학 즈음부터는 본격적으로 빌런들이 활개치기 시작할 테니까.’
여름방학 여행에서 괴수들과 마주친다든가. 아카데미에 잠입한 외국 스파이와의 대결이라든가.
그중에서도 화룡점정은 바로 ‘피의 겨울방학’ 에피소드였다.
원작 기준 213화부터 시작되는, 가 본격적으로 드리프트를 갈기기 시작하는 시발점.
현재 안수호가 하는 모든 행동은 과장 섞어서 그 겨울방학을 위한 준비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가뜩이나 사람들이 잔뜩 죽어나가는 에피소드가 쾌락천마 때문에 얼마나 더 미쳐 돌아갈지, 안수호로서는 쉬이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아무리 전개 내용을 알고 있다 해도 놈이라면 날 엿맥이려고 없던 사건도 일으킬 테니까. 생각해보면 내가 여기 있는 동안 아카데미 쪽이 잠잠했던 것도 기적이나 다름없지.’
구치소 생활과 은거 생활 동안 이상하리만치 조용하던 퀘스트 창.
안수호는 그 사실에 안도하면서도 이것이 앞으로 다가올 거대한 위기의 전조, 폭풍 전의 고요는 아닐까 걱정되었다. 게다가 별장에 은거한 지금이야 여차할 때 아카데미로 달려갈 수 있었지만, 경찰에 구속되면 당분간 그것조차 불가능할 테니.
‘혹시 모르니 하늘이한테 미리 여름방학까지의 전개나 주의사항이라도 알려줘야 하나.’
그렇게 생각한 안수호가 스마트폰을 들었다. 곧 강하늘의 이름 석 자가 그 화면 위에 떠오른다.
‘상황이 이대로 잘만 풀린다면야 7월 전에 풀려나겠지만 혹시 모르니까.’
스멀스멀 올라오는 불안감을 삼키며 안수호가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시간은 흘러.
그로부터 2주 뒤. 6월 15일.
기생괴수 은닉 사건에 대한 수사본부가 설치된 서울종로경찰서 앞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다. 마스크에 모자를 푹 눌러 쓴 안수호는 바쁘게 오가는 사람들 사이를 지나쳐 경찰서 안으로 들어섰다.
안수호의 수상쩍은 행색에 몇몇 경찰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그러나 그 시선은 오래가지 않았다. 대부분은 안수호가 자잘한 경범죄로 출석당한 피의자거나 혹은 사건 진술을 위해 온 시민이라 생각했기에.
덕분에 안수호는 아무한테도 방해받지 않고 경찰서 접수처에 다다를 수 있었다. 수상쩍어보이는 그의 등장에 접수처에 앉아 있던 남경이 물었다.
“무슨 일로 오셨나요?”
“자진출두입니다.”
“네?”
깜짝 놀라 반문하는 경찰을 내려다보며 안수호가 마스크와 모자를 벗었다.
“어, 잠깐, 당신 설마!”
얼떨떨한 반응을 보이던 경찰이 한 달 전 즈음 떠들썩했던 사건의 용의자 얼굴을 기억해내기까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
띠리리리리.
겨울동맹 본사에 위치한 성유진의 집무실.
시끄럽게 울려대는 휴대전화에 의자에 몸을 푹 파묻은 채 눈을 감고 있던 성유진이 살며시 몸을 일으켰다. 며칠 사이 음울한 기운이 물씬 풍기기 시작한 그가 힘없는 동작으로 전화를 받았다.
“……무슨 일이죠 인호 씨?”
이사님. 안수호가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벌떡!!
박인호의 말에 성유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장소는 어디죠?”
서울종로경찰서입니다. 관계자 말로는 본인이 직접 자수하러 왔다더군요.
“자수라……. 그렇겠죠. 한 번 시작한 수사를 아예 덮을 수 없는 이상, 사회로 복귀하려면 그럴 수밖에 없을 테니까.”
대충 상황을 가늠한 성유진이 곧바로 외출할 채비를 했다. 그 기색을 느낀 박인호가 조심스레 묻는다.
이사님. 정말 안수호에게 손대실 생각이십니까? 저번 이사회에서 안수호에 대해선 더 이상 개입하지 않겠다고 결정나지 않았습니까.
“인호 씨. 제가 지금껏 겨울동맹이나 여일에 해가 되는 짓을 한 적이 있던가요?”
결단코 한 번도 없었죠. 그렇지만 이사님, 이번만큼은 경우가 다릅니다. 비밀 이사회에서의 결정을 거스른다는 건 항명이나 다름없는 일이잖습….
“회사에 피해만 끼치지 않는다면 그분들도 묵인해주실 겁니다.”
박인호의 만류에도 성유진의 의지는 확고했다. 그가 집무실을 나서며 박인호에게 명령했다.
“인호 씨. 저는 지금부터 연구소로 가겠습니다. 당신은 저번에 말했던 것들을 차질 없게 준비해두세요.”
……이사님께서 왜 그렇게까지 태초의 은에 집착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이사님의 명령이 그러시다면 따르겠습니다.
“지하주차장에서 보도록 하죠.”
그 말을 마지막으로 통화가 종료되었다. 성유진은 거침없는 발걸음으로 지하주차장으로 향했다.
‘내가 저지른 실수는 내가 만회한다.’
그 눈동자는 비밀 이사회가 끝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이글거리는 의지로 타오르고 있었다.
***
한편 같은 시각. 성유진처럼 부하로부터 안수호가 나타났음을 보고받은 이가 또 있었으니.
“……아이기스 님. 타깃이 나타났다고 합니다.”
조명이라곤 밝게 빛나는 모니터 하나밖에 없는 어두운 방 안. 아이기스의 수발을 명령받은 여명단 단원은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한 그에게 조심스레 말했다. 그러나 아이기스의 시선은 모니터에서 떠날 줄을 몰랐다.
……! …………!!
모니터에는 아이기스가 열렬한 팬으로 활동하고 있는 가수 미야의 라이브 녹화 영상이 재생되고 있었다. 헤드셋 사이로 새어나오는 시끄러운 음악 소리에 부하는 혹시 그가 자기 말을 듣지 못한 건 아닐까 싶어 다시 한 번 그에게 말했다.
“아이기스 님. 태초의 은을 탈취한 타깃이 나타났다고 정보부에서 연락이”
“야.”
재촉하듯 말하던 부하는 그의 입에서 새어나온 스산한 목소리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아이기스가 영상 재생을 멈추더니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으로 부하를 돌아봤다.
“방해하지 마라. 죽고 싶지 않으면.”
헤드셋도 벗지 않은 채 위협한 아이기스는 그대로 다시 화면에 시선을 집중했다. 기세는 살벌한데 하는 짓은 영락없는 오타쿠나 다름없는 그 모습에, 말단 단원이 그 모르게 한숨을 푹 내쉬었다.
‘시발. 못해먹겠네 진짜.’
불타오르는 사명감에 따라 여명단에 투신한 그가 처음으로 조직 생활에 회의감을 느낀 순간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