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카데미 경비원으로 빙의당했다-192화 (193/266)

〈 192화 〉 191. 이사회

* * *

우리 중에 배신자가 있다.

여일그룹의 참모 오은수의 그 말은 비밀 이사회의 임원들에게 썩 달갑게 들리지 않았다. 그 자리에 모인 이들은 누구나 여일을 위해 한 몸 바친 충신들. 그런 자신들을 배신자 취급하는데 불쾌하지 않을 리가 없을 테니.

허나 그들의 기분과는 별개로, 그의 지적은 나름대로 일리가 있는 지적이었다.

민채령이 그들에게 제시한 범죄 기록.

그 안에는 비밀 이사회의 멤버가 아니면 도저히 접근할 수조차 없을 정보가 산재해 있었고, 그게 아니더라도 그만한 규모의 광범위한 뒷조사를 할 수 있는 인원은 한정될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오은수는 생각한 것이었다. 자신들 사이에 배신자가 있어도 이상하지 않다고. 오히려 자신들 사이에 배신자가 있는 편이 더 상황을 잘 설명한다는 걸.

물론 가능성은 100%가 아니었다. 그렇지만 오은수는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보이면 일단 과감하게 추진하는 타입이었다.

배신자가 이 안에 있다면 여기서 잡아내고 없다면 그만.

그것이 오은수의 생각이었고, 이사회의 다른 임원들 역시 그 속내를 금방 간파해냈다.

“우리 중에 배신자가 있다라…….”

그중에서도 신성호는 특히 오은수의 그러한 속내를 불쾌해했으나, 그와는 별개로 비밀 이사회 멤버들의 결백 문제를 짚고 넘어가야 한다는 점에는 일단 동의했다.

자글자글한 주름 사이로 드러난 날카로운 눈빛이 좌중을 훑는다.

“확실히, 인생만사 새옹지마라고. 우리 중에 배신자가 있을 지도 모를 일이지. 그렇지만 어떻게 배신자를 색출할 생각인가.”

“그거야 간단한 문제지요. 나주용 소장 딸내미. 그 애를 쓰면 된다 아닙니까.”

그 말에 임원들 사이에 술렁임이 번졌다. 그들은 전원 여일의 어두운 면을 깊게 알고 있는 자들이니만큼, 나은주의 능력에 대해 모르는 자는 없었다.

“다들 그 딸내미 능력은 알 거라 믿습니다. 그러니 깔끔하게들 사상검증 한 번씩 가시지요. 뭐 세뇌해서 조종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암시를 통해 진실만 말하게 하는 정도면 거부감도 덜할 것 아닙니까.”

“오은수 사장님. 말씀 중에 죄송합니다만…….”

그때 그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던 성유진이 조용히 손을 들었다.

“……무슨 일이지? 성유진 이사.”

내로라하는 계열사 사장이나 부사장급 인사들이 모인 이 자리에서 한낱 사외이사에 불과한 성유진의 발언권은 거의 없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특히 이번 사태의 원인은 상당부분이 그에게 있었으니, 다른 임원들의 시선이 곱지 못한 건 당연지사.

허나 성유진은 그런 시선 따위 아랑곳 않았다.

“사장님께서 말씀하신 방법은 현재로선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지?”

“현재 나주용 소장의 딸 나은주는 무리한 능력 사용으로 인해 병원에 입실한 상태입니다. 의사 소견으로는 최소 한 달은 초능력을 쓰지 않고 요양해야 하는 상태라 하더군요.”

“그래도 초능력을 아예 못 쓰는 상태는 아닐 것 아닌가.”

“아뇨. 안타깝게도 요양 기간 동안에는 절대 안정이 필수입니다. 자칫 잘못하다간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배신자 색출에 그 아이를 영영 잃게 될 지도 모릅니다.”

여일에게 있어서 나은주라는 장기말은 없어선 안 되는 비장의 수였다. 상대가 일반인이라면 거의 무조건적인 세뇌나 조종이 가능하고, 설령 초인이라 해도 등급이 낮다면 단시간 정도의 조종은 무리가 없었으니까.

물론 그 대가로 그녀의 수명을 갉아먹게 되겠지만, 그 정도야 자그마한 희생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기에.

“성유진 이사. 자네가 말한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배신자 색출. 그것이야말로 지금 이 순간 여일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다. 안 그런가?”

“그거야 그렇습니다만. 나은주는…….”

“그깟 능력자 애새끼 하나가 뒈진다 해서 뭐 얼마나 손해라고. 정신조종 능력 따위 없어도 사람은 얼마든지 다루고 조종할 수 있어. 돈과 권력만 있으면 말이지. 안 그런가?”

오은수의 머릿속에 나은주에 대한 배려는 눈곱만큼도 없었다. 지금 당장 그에게 있어 나은주는 그저 편리하고 확실한 검증 수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오은수 사장. 놈이라면 그렇게 생각하겠지. 놈은 나은주가 어떤 존재인지 전혀 모르고 있으니까.’

허나 성유진은 나은주에게서 오은수 이상의 무언가를 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현재의 그녀가 아닌 미래의 그녀에게 지대한 가치를 두고 있었다.

다만 그 가치는 여일 안에서도 성유진과 나주용을 포함한 극히 일부만 아는 것이었으니. 다른 이들이 알 턱이 없었다.

‘확실하지도 않은 배신자 색출 따위로 나은주를 잃을 순 없다. 그렇지만 이 자리에 있는 임원들에게 나은주의 진짜 가치를 알렸다간, 지금처럼 그 애를 내 아래에 둘 수 없을 거야. 아마 이 자리의 전원이 당장이라도 그 애를 뺏으려 들겠지.’

비록 성유진이 나은주의 안위를 걱정해준다고는 하나, 그 역시 철저한 손익계산에 따라 그리 행동했을 뿐. 본질적으로는 오은수와 별반 차이가 없었다.

“왜 대답을 못 하는 거지, 성유진 이사? 수상하군 그래. 설마 자네가 내가 말한 배신자인 건 아니겠지?”

“당치도 않습니다. 저는­”

“백 마디 말 들어봤자 검증되는 건 하나도 없다. 그러니 깔끔하게 그 꼬맹이를 쓰자고. 이럴 때 쓰라고 길러낸 장기말 아닌가.”

오은수의 강경한 태도에 성유진은 마른 침을 삼켰다. 그는 어떻게 해서든 이 자리에 있는 전원의 흑백을 당장 확정하고 싶어 했다. 고로 성유진이 나은주를 온존하기 위해선 나은주를 쓰지 않는 다른 방법으로 그를 납득시켜야 했다.

하지만, 어떻게?

그런 의문이 성유진의 뇌리를 가득 채운 순간이었다.

“잠시 내가 이야기해도 되겠나.”

회의실 전체에 스산하게 퍼지는 음울한 목소리.

그 목소리에 자리에 앉은 임원 전원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길게 뻗은 테이블 끄트머리. 다른 자들로부터 조금 떨어진, 이른바 상석이라는 곳에 앉은 백발의 노인을 향해.

노인은 이 자리에 있는 그 누구보다도 건장한 체격의 소유자였다. 기업가라기보다는 백전노장이라는 수식어가 어울릴법한 분위기. 위에서 내려오는 조명 때문에 그 얼굴에 드리워진 그림자는 안 그래도 압박감이 강한 그의 인상을 더욱 위압적이게 만들었다.

“회장님…….”

그 노인의 정체는 여일그룹의 지주회사인 여일홀딩스의 회장이자, 그룹 전체를 이끄는 그룹의 총수 임성국이었다. 노인의 입에서 스산한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한창 설전을 나누는 중에 미안하네. 그렇지만 이건 꼭 지금 말해야만 할 것 같아서.”

“아닙니다. 회장님. 지금 이 자리에서 회장님 말씀보다 중요한 게 어디 있겠습니까. 부디 말씀해주시죠. 어떤 일이십니까?”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내가 하려는 말 역시 배신자에 관한 걸세.”

회장의 시선이 아주 잠깐 손에 들고 있던 서류로 향하고, 이내 그가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 이 자리에서 단언하지. 우리 중에 배신자는 없네. 물론 남들 모르게 뱃속에 칼을 품고 있는 자야 꽤 있겠다만은, 적어도 이 건과 연루된 배신자는 우리 중에 존재하지 않아.”

확신에 찬 그 말에 임원들이 일제히 술렁이기 시작했다. 그중 가장 회장과 가까운 신성호가 조심스러운 태도로 물었다.

“회장님.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어떤 연유로 그렇게 판단하셨는지 여쭈어보아도 되겠습니까?”

“물론이지. 이유는 간단하네. 민채령이란 여자가 넘긴 이 범죄 목록 중에 이 자리의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사실이 적혀 있기 때문일세.”

“그게 무슨…….”

“4페이지 중간 부분. 남궁혁 의정부 시장에 대한 로비 부분을 보게나.”

그 말에 임원들이 일제히 서류를 넘겼다. 파라라락 종잇장이 넘어가는 소리가 잠시 회의장에 가득 울려 퍼진다.

‘남궁혁 시장이라…….’

성유진은 그 이름을 곱씹으며 그 인물상을 떠올렸다.

남궁혁.

그는 이번 년 초 의정부 지역 보궐선거에서 뽑힌 신임 시장이었다. 전 시장이 범죄조직과 연루된 불미스러운 일로 경질된 뒤 혜성처럼 부상한, 여야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은 무소속 정치인.

서류에는 그러한 남궁혁 시장에 대한 여일의 로비가 이루어졌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정부에서 추진 중인 의정부 지역 슬럼가의 재개발 사업과 관련해 사업이익권을 따내기 위한 접대였다.

‘나름 큰 규모의 사업이 얽힌 로비긴 하지만 그래봤자 일개 시장을 상대로 행해진 로비다. 다른 건들에 비하면 주목할 필요도 없는 자잘한 일인데…….’

어째서 회장은 이 부분을 보라고 한 걸까. 성유진을 포함한 다른 임원들이 그렇게 생각한 순간, 회장이 그들에게 물었다.

“혹시 이 안에 이 건을 맡아서 추진한 자가 있는가?”

그 말에 임원들은 고개를 돌리며 서로를 바라봤다. 그러나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 건에 대해서 사전에 알고 있던 자는?”

거듭된 질문에도 마찬가지였다. 그쯤 되자 임원들도 슬슬 이상한 낌새를 느끼기 시작했다.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여일의 진정한 실세들. 그들 전체가 곧 여일 전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헌데 아예 지엽적인 것이라면 모를까, 정치적 뒷배가 없다곤 해도 명색이 시장에 대한 로비에 대해 아는 이가 아무도 없다니.

‘그럴 리가 없어. 적어도 이중 누군가는 알고 있어야 할 텐데.’

“무얼. 모르는 게 당연한 일이지. 이 건은 내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직접 추진하려 했던 건이었으니.”

“예?”

“회장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말 그대로의 의미네. 의정부 재개발 사업을 따내기 위한 남궁혁 시장에 대한 로비는, 오직 나 혼자 결정하고 나 혼자 추진하려 한 일이란 말일세.”

“왜 굳이 회장님께서 직접 움직이려 하신 겁니까? 재개발 사업이라면 여일건설 쪽에 일임하시면 될 것을…….”

신성호의 물음에 임원들의 시선이 여일건설의 부사장을 맡고 있는 남자에게 향했다. 그러나 회장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내 부하에게 시켜 알아낸 것이다만, 남궁혁 시장은 겉으로는 건실한 사업가지만 뒤로는 슬럼가의 범죄조직들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더군. 들리는 소문으로는 의정부 최고의 브로커로 통하는 ‘마사장’과도 연관이 있다고 하던가.”

그런 자에게 어설픈 로비를 했다간 자칫 큰 코 다칠 수 있으니 신중에 신중을 기하려 했다고. 그렇기에 회장은 그 건을 자신이 직접 추진하려고 했다.

“잠깐, 추진하려고 했다……입니까?”

그때 이야기를 듣던 성유진이 이상하다는 듯 반문했다. 그러자 회장이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를 우리 편으로 만들 계획만 짜두고 아직 실행에 옮기지를 않았지. 그리고 그 계획은 오직 내 머릿속에만 있지. 지금 시점에서 우리가 남궁혁 시장과 접촉한 부분이라고 해봐야, 우리 재단이 연 의정부 자선 행사에 그를 초청한 게 전부네. 그마저도 아직 행사 이틀 전이고.”

본래는 그 행사 중에 믿을만한 부하를 통해 그와 접촉, 별도의 약속을 잡을 생각이었다. 즉 남궁혁 시장에 대한 로비는 이제 막 진행되려는 상태로, 아직 진행된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헌데 민채령이 넘긴 서류에는 이렇게 적혀있더군. 여일이 의정부 시장 남궁혁과 비밀리에 접촉, 그의 연줄을 통해 슬럼가의 범죄자들을 대거 동원하여 의정부에서 실시될 여러 이권 사업을 독점하려 했으며 나아가 지하 범죄조직의 사조직화를 꾀했노라고. 이게 내가 그리고 있던 의정부와 관련된 청사진일세. 문제는, 그 청사진이란 게 아직 누구한테도 설명해주지 않아 내 머릿속에만 존재한다는 거지.”

다른 범죄들과 달리 남궁혁 시장에 대한 로비는 아직 계획 단계.

그렇기에 증거랍시고 제시된 것들도 하나같이 빈약하기 그지없었다.

회장으로부터 청사진을 들은 임원들이야 그 빈약한 증거와 회장의 계획을 연결하며 그럴듯하게 끼워 맞출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반대는?

“헌데 이걸 보게나. 빈약한 증거로 용케 내 계획을 정확하게 파악해냈어. 마치 내 머릿속을 훤히 들여다본 것처럼 말이야.”

계획의 전모를 아는 건 임성국 회장뿐.

그가 직접 알려주지 않은 이상 빈약한 정황에서 이 정도로 정확하게 계획을 파악하는 건 불가능했다.

그렇다면 지금 이 서류에 적혀 있는 글자들은 도대체 뭐란 말인가.

사건의 전말은 이러했다.

남궁혁 회장에 대한 여일의 로비는 원작 중후반부에 진행된 의정부 에피소드에서 밝혀진 내용이었다. 작품 설정집이나 지나가는 언급 등으로 나온 다른 범죄 사실들과 달리 이 건만은 다중능력 연구와 마찬가지로 원작에 상세한 전말이 드러나 있었다.

의정부 에피소드가 원작에서 여일의 본격적인 등장을 알린 효시 격인 에피소드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

그렇기에 안수호는 오판했다.

일리아나가 제대로 된 증거를 가져오지 못했음에도, 자신이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는 원작의 내용이기에 그 건이 이미 검증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여일이 남궁혁에게 접근한 정황은 있으니까. 아마 일리아나가 바빠서 제대로 파악을 하지 못해 결정적인 증거를 잡아내지 못한 것에 불과할 거라고.

설마 아직 계획이 본격적으로 개시되지 않은 것으로도 모자라, 계획의 전모가 회장의 머릿속에만 존재하여 그 건에 대해 여일 안에서 아무도 모를 거라고는 차마 생각지 못했다.

만약 회장이 다른 이에게 계획을 설명해주었다면 그는 이상함을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그저 자신이 계획을 알린 누군가가 배신하여 정보를 누설했구나 했겠지.

허나 회장의 조심성 많은 성격 때문에 안수호의 오판이 수면 위로 드러나버리고 말았다.

안수호 입장에서는 정말 억울할 정도로 운이 따라주지 않은 일.

반면 여일 입장에서는 자칫 서로를 의심하며 자멸할 뻔한 운명에서 겨우 구사일생으로 빠져나온 격이었다.

“즉 배신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놈은 이 범죄 사실들은 누군가의 누설로 얻어낸 게 아니야. 그 외의 다른 방법을 통해 얻어낸 거지.”

“다른 방법이라면 어떤…….”

“생각나는 가능성이야 여럿 있지. 원하는 미래를 정확하게 짚어내는 미래예지든. 혹은 원하는 사람의 머릿속을 원거리에서 정확하게 읽어내는 독심술이든. 아무튼간에 일반적인 상식이 통하지 않는 정보 확보 수단을 가지고 있는 것 아니겠나. 그런 수단이 있었으니 태초의 은도 빼돌릴 수 있었던 것이겠지.”

“민채령 그 자가 그런 수단을 숨기고 있었을 줄은­”

“아뇨. 이건 민채령의 힘이 아닙니다.”

신성호의 중얼거림에 성유진이 고개를 저었다.

“민채령이 원래부터 이 정도의 정보력을 쥐고 있었다면 가만히 썩혀뒀을 리가 없습니다. 즉 이 건에는 그녀 외의 조력자가 있었다고 보는 편이 타당할 겁니다.”

“조력자라고 하면……?”

“조사를 해보지 않는 이상 누군지는 모르겠죠. 그렇지만 정보력 하나만큼은 저희가 아는 그 누구보다도 뛰어난 자일 겁니다.”

그렇게 답한 성유진의 뇌리에 문득 안수호의 이름이 스쳐 지나갔다.

‘정보력이라……. 그러고 보니 저번 비밀회담 때 안수호가 내게 제시한 거래품도 정보였지.’

겨울동맹 간부의 정체를 들먹이며 당돌하게 거래를 제안하던 안수호. 그 모습을 떠올린 성유진은 설마 의문의 조력자가 안수호 본인이 아닐까 의심했다. 그러나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겠지. 놈을 조사했을 때 그만한 능력을 지녔을법한 배경이나 경력은 없었어. 단기간에 E급 초인에서 괄목할만한 성장을 보인 게 수상하긴 하지만, 초인으로서의 강함과 이런 정보력은 전혀 별개의 영역이니까.’

“아무튼. 그런고로 우리 중에 배신자는 없네. 고로 쓸데없는 일에 힘쓰지 말고 앞으로의 대책을 논의해보는 게 맞겠지.”

성유진이 생각에 잠긴 사이 회장이 이야기했다.

“신성호 사장. 자네는 이번 건을 우리가 어떻게 대처해야 한다 생각하나?”

“……아직 민채령 쪽의 전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바, 일단 그쪽에서 제시한 요구사항을 수용하면서 그 자의 저력을 파악할 시간을 버는 게 급선무라고 생각됩니다.”

“내 생각도 그러하네. 민채령의 전력을 파악하든, 그리고 이 목록에 적힌 범죄 사실들의 흔적을 은폐하든. 당장 우리에게 필요한 건 시간이니까.”

회장과 신성호의 말에 논의의 방향은 일단 민채령의 요구사항을 수용하는 쪽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일부는 이에 불만을 품은 듯한 눈치였지만 그룹의 1, 2인자가 주도하는 흐름에 감히 거스르려는 자는 없었다.

“회장님. 외람됩니다만 한 마디만 올려도 되겠습니까?”

단 한 사람. 성유진을 제외하고.

“……그래. 말해 보게나.”

“다른 조건을 수용하는 건 괜찮습니다. 그렇지만 태초의 은만은 반드시 회수해야 합니다. 지금 태초의 은을 포기했다간 성공을 눈앞에 둔 다중능력의 실현을 그대로 포기해야만 하게 될 겁니다.”

“다중능력이라. 확실히 그 건은 그대로 포기하기 아깝긴 하지.”

회장의 말에 성유진의 표정이 아주 잠시 밝아졌다.

그러나.

“하지만 그렇다 해도 그룹의 미래와 저울질할 것은 못 돼.”

“……예?”

“게다가 듣자하니 꼭 태초의 은이 있어야만 연구가 성공하는 것도 아니잖나. 그건 그저 수많은 방법들 중 하나에 불과하니, 이참에 연구의 활로를 다른 곳에서 찾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겠지.”

“회장님. 외람됩니다만 현재로서는 태초의 은을 이용한 방법이 가장 확실합니다! 그리고 그룹의 미래라고 하셨는데, 다중능력 연구만 성공한다면 분명 여일은 대한민국뿐 아니라 전세계를 선도하는 위치에 오를 수­”

“한낱 사외이사 따위가.”

­쿵!

회장이 주먹으로 살짝 테이블을 치며 말했다. 분명 그리 강한 힘을 주어 친 게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 울림은 회의장 전체에 울려 퍼지며 모두의 심장을 꽈악 조여맸다.

“……한낱 사외이사 따위가 그룹의 미래를 논하는가. 오만하기 그지없군. 기껏 해야 제 힘에 빠져 날뛰는 것밖에 못하는 헌터 나부랭이 따위가…….”

“회장님?”

“그러고 보니 성유진 이사. 이번 사태에 대해 자네가 질 책임에 대해 이야기하는 걸 깜빡했군. 다중능력 연구가 분명 커다란 프로젝트이긴 하나, 거기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적으로 돌려선 안 될 자를 적으로 돌리고 말았으니.……”

회장이 잠시 생각하듯 눈을 감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작게 읊조렸다.

“……겨울동맹의 서브마스터이자 여일홀딩스 사외이사로서 가지고 있던 자네의 이사회 등기이사직 박탈. 그 정도면 적당하겠군. 표면적으로는 길드 업무에 주력하기 위해 물러나는 형태로 하면 체면도 살릴 수 있을 테고.”

등기이사직 경질. 그것은 즉 성유진이 여일그룹 이사회에 참가할 자격을 박탈하겠다는 뜻이었다.

표면적인 이사회는 물론이고, 지금 그들이 모인 비밀 이사회에서마저도.

­빠득!

그 결정에 성유진은 어금니를 꽈악 다물었다. 자신은 여일을 위해 힘쓴 것밖에 없는데 부당하다 생각했다.

그럼에도 그는 그러한 감정들을 필사적으로 억누르며 그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항변했다.

“……처분은 달게 받겠습니다. 그렇지만 다중능력 연구를 위해서 태초의 은만은 반드시 회수해야 합니다. 연구의 성공이 눈앞인데 그걸 포기했다간 앞으로 몇 년이 더 걸릴지­”

“처분을 달게 받겠다면 더 이상 내 말에 토 달지 말게. 알만한 사람이 왜 좀 전부터 그리 어린애처럼 구는가?”

그러나 회장은 그런 성유진의 항변을 한낱 어린애의 생떼로 치부했다.

그 냉정한 말에 성유진의 얼굴에서 표정이란 게 사라졌다.

그 뒤로도 회장과 임원들은 한참 동안 구체적인 대책에 대해 논의했으나 성유진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이윽고 회의가 끝난 뒤, 성유진은 힘없는 발걸음으로 회사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그의 차량에 탑승했다. 운전석에는 그의 수행비서인 박인호가 운전대를 잡고 있었다.

“이사님. 회의는 잘 끝나셨습니까?”

“…….”

박인호의 질문에 성유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어딘가 넋이 나간 듯이, 혹은 무언가에 홀린 듯이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며 입술을 달싹이기만 할 뿐.

“……이사님?”

그 모습에 심상치 않음을 느낀 박인호가 다시 한 번 묻자, 그제야 성유진이 고개를 들었다.

“……초인재활연구소로 가지.”

“연구소 말씀이시죠? 알겠습니다.”

세단이 부드럽게 출발하고 성유진은 힘없이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그러나 축 처진 몸과 달리 그 두 눈동자는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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