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1화 〉 190. 반격, 그리고 협상(2)
* * *
전화를 마친 안수호는 정원 벤치에 앉은 채 따사로운 햇살을 만끽했다. 5월 하순에 접어들어 푸르게 물든 하늘에는 하얀 뭉게구름이 솜사탕처럼 흘러가고 있었다.
쐐애애액!!
그리고 그 흰색과 파란색의 배경을 가로지르는 반짝이는 새가 한 마리.
파다닥! 파다다닥!
빠른 속도로 활공해 내려온 제비 정도 크기의 새가 안수호 앞에 체공한 채 날갯짓했다. 현존하는 어떤 새와도 닮지 않은 그 새는 전신이 은색의 금속질이었으며, 거울처럼 주변 풍경을 아름답게 비추고 있었다.
철퍽!
다음 순간, 체공하고 있던 새가 금속이 녹아내리듯 형태를 잃고 바닥에 떨어졌다. 직후 영상을 역재생하는 것처럼 녹은 금속이 형태를 이루더니 이내 안수호가 익히 아는 실비의 모습으로 변했다.
다녀왔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실비가 손을 내밀었다. 안수호가 군말 없이 오른손을 뻗자 실비가 그 손을 꼬옥 잡았다.
키이이이잉.
그러자 탈리스만이 발동됨과 함께 주변 공간에 산재한 마력이 안수호에게로, 그리고 그대로 실비에게로 흘러들어갔다. 체내의 혈액이 바깥쪽으로 빠져나가는 듯한 느낌을 받으며 안수호가 실비에게 물었다.
“생각보다 빨리 돌아왔네. 어째 점점 빨라지는 것 같다?”
비행 형태를 최적화하고 있으니까요. 좀 더 연습하면 더 빨라질 거예요.
“두 사람은 별일 없고?”
네. 분신이랑 같이 잘 지내고 있었어요. 마력도 가득 채우고 왔어요.
그 대답에 안수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안수호가 지예원과 강하늘 두 사람에게 호위로 붙여준 실비의 분신은 2, 3일에 한 번 본체와 결합해 마력을 보충해줘야 했다. 물론 부득이하게 마력을 보충하지 못하더라도 노트북의 슬립 모드처럼 마력을 아끼며 며칠 더 버티는 것도 가능했고, 정 급하면 두 사람에게서 직접 마력을 공급받을 수도 있긴 했다.
허나 둘 다 불안하기 그지없는 임시방편에 불과했다. 전자의 경우 행여 두 사람에게 무슨 일이 생겨 분신이 전투에 돌입하면 순식간에 마력이 고갈날 것이며, 후자의 경우 두 사람의 한정된 체내 마력으로 분신의 연료를 충당했다간 순식간에 마력이 고갈되어 쓰러질 테니까.
이에 안수호는 분신들의 마력 보충을 위해 실비의 본체를 정기적으로 두 사람에게 보내기로 했다.
실비가 안수호에게 들러붙어 있는 건 전적으로 그의 탈리스만을 마음에 들어 해서이지 물리적으로 몸이 묶여 있는 게 아니었으니까.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그로부터 떨어질 수 있었으므로, 포항에서 속초까지 마력 보충을 위해 다녀오는 건 시간이 좀 걸릴 뿐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그마저도 처음에는 반나절씩 걸리던 게 이제는 2, 3시간 밖에 안 걸리고 말이지.’
그것은 실비가 거듭된 비행 경험으로 비행에 가장 적합한 모습으로 점차 자신을 최적화해간 덕분이었다. 덕분에 안수호는 두 연인의 안전을 위해 자신이 무방비로 노출되는 시간을 최소화할 수 있었다.
“뭐야. 엄청 빨리 돌아왔네?”
그때 정원 저편에서 샤오메이가 터벅터벅 그에게 다가왔다. 샤오메이의 접근에 실비가 안수호의 체내로 순식간에 모습을 감췄다.
마치 그녀에게서 도망치려는 것처럼.
“어째 실비는 널 볼 때마다 도망치는 것 같아. 혹시 무슨 일 있었어?”
“글쎄. 엽사관리국 창고에서 빼돌릴 때 좀 험하게 다루긴 했는데 그거 때문이려나.”
“그러고 보니 내일이지? 네가 여기를 떠나는 거.”
오늘 날짜는 5월 25일 월요일. 그리고 샤오메이는 5월 27일 수요일 새벽에 부산에서 출발하는 밀항편을 통해 일단 일본으로 넘어갈 예정이었다. 그 다음 행선지는 공안의 개입이 힘든 미국 남부였고.
“맞아. 거의 보름 넘게 별장에만 처박혀 있으니 좀이 쑤실 지경이었는데, 이 생활도 이제 오늘내일로 끝이네.”
“나 때문에 괜히 이런 일에 말려들게 돼서 미안해. 물론 내가 없었으면 지금쯤 너는”
“여명단한테 태초의 은을 빼앗기고 진즉에 죽었거나, 아니면 공안이나 겨울동맹 둘 중 한쪽에게 책임을 물으라며 협박당하고 있겠지. 너랑 같이 살면서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들어댔어. 이제 네 탓 따위 안 하니까 그만 말해도 돼.”
“그렇다면야 뭐…….”
“그나저나 네 쪽은 어때? 그 일리아나인가 하는 탐정 통해서 검증한 범죄 기록들로 놈들을 협박할 거라며? 잘 풀릴 것 같아?”
“글쎄…….”
일이 잘 풀릴 것 같으냐. 그 질문에 안수호는 섣불리 대답할 수 없었다.
“내가 낙관주의자는 아니지만, 난 늘 계획을 짤 때 나름 그럴듯하게 짠다고 생각했거든? 근데 어째 이놈의 세상에 내 생각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더라.”
“그래서 이번에도 잘 안 풀릴 것 같다?”
“또 내가 미처 생각지 못한 변수가 튀어나와 훼방 놓는 게 아닐까 걱정되긴 해. 그래도 잘 풀리기를 빌어야지.”
“잘 풀리기를 빈다라. 누구한테?”
샤오메이의 질문에 안수호는 순간 흠칫 하고 표정을 굳혔다.
‘누구한테 비냐고?’
종교를 가진 이라면 자신이 믿는 신에게, 라고 답할 것이고 그런 게 아니라면 그저 막연하게 ‘신’이라는 대상에게 빌 거라고 대답할 것이다.
허나 안수호는 두 경우 모두 아니었다. 그는 신의 존재를 명백하게 알고 있었지만, 그 신에게 두 손 모아 비는 일 따위 추호도 없을 테니까.
‘쾌락천마 놈한테 빌어 봤자지. 오히려 놈 성격을 생각하면 무조건 내가 원하는 반대로 소원을 이뤄줄 게 뻔해.’
“혹시 믿는 신이라도 있는 건가? 그렇게 보이지는 않았는데.”
“설마.”
안수호가 막 구치소에서 풀려났을 무렵, 그는 다른 세계에서 온 정령 루엘에게서 이 우주의 진실에 대해 들었다. 그가 사는 세상이 수많은 차원과 수많은 신들이 존재하는, 흔해빠진 판타지 웹소설에나 나올법한 그런 세계관이라는 것을.
그렇기에 안수호는 신의 존재를 앎에도 신에게 의지할 수 없었다.
소설 속 신적 존재들이 능력만 뛰어날 뿐 결국 인간과 비슷한 불완전한 존재로 등장하는 것처럼, 이 세상을 관리하는 신이란 것들도 대개 그런 나사 빠진 놈들이란 걸 알아버렸기에.
하물며 이 세상을 관장하는 신은 그가 그토록 증오하는 쾌락천마였으니.
“난 신 같은 거 전혀 안 믿어. 그러니 내가 신한테 무언가를 바라는 일은 죽어도 없을 거야.”
이상하리만치 감정을 담아 그렇게 말하는 안수호를 보며, 샤오메이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럼 왜 ‘잘 되길 빌어야지.’ 따위의 말을 한 거냐며.
***
여일그룹을 이끄는 지주회사인 여일홀딩스 본사 빌딩.
그 지하에는 평범한 사원들은 전혀 모르는 비밀스런 회의실이 준비되어 있었다. 그곳은 평상시에는 아무도 사용하지 않지만, 이따금 그룹의 미래를 논해야만 할 때 이사회 임원들이 몰래 모이곤 했다.
이른바 비밀 이사회라는 것이었다. 정규 과정을 밟지 않은 이사들 간의 회의야 뭐 흔하디 흔한 일이었으나, 이곳에서 벌어지는 비밀 이사회는 격이 전혀 달랐다.
이곳에 모이는 이사들은 여일에서도 손에 꼽히는 권력자임과 동시에, 여일의 비밀스럽고 더러운 뒷면까지 알고 있는 진정한 의미의 실세들이었으니까.
그런 그들이 오늘 이 자리에 모인 건 바로 안수호 때문이었다. 정확히는 안수호에게서 받은 정보로 여일을 협박하려 한 민채령 때문에.
“……하아아아.”
회의장에 둘러앉은 실세들 중 한 사람이 진한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사람들 또한 한숨만 내쉬지 않았다 뿐이지 느끼는 심정은 거진 비슷했다.
민채령이 여일의 범죄 사실을 빌미로 내건 요구사항은 심플했다.
여일이 안수호로부터 태초의 은을 빼앗기 위해 실시한 모든 공작을 당장 그만두고 태초의 은을 포기할 것. 그리고 이에 대해 보복하지 말 것.
거기까지는 안수호의 안위를 위한 기본적인 요구사항이었다. 민채령은 거기에 더해 자신이 여일로부터 이득을 뜯어낼 수 있는 크고 작은 요구사항을 A4 20장에 달하는 분량으로 적어서 건넸다. 안수호가 민채령에게 쥐어준 패는 그 정도로 강력한 패였다.
“……우리 쪽 장한수 이사의 아동 성매매에 겨울동맹 간부의 여명단 스파이 건. 용인 연구소에서 실시 중인 다중능력 연구. 이번에 분할 상장한 여일모바일의 분식회계. 대충 굵직한 건은 이 정도로군. 그 외 의원들한테 한 뇌물 수수나 접대 이런 것들이야 뭐 자잘한 문제들이고…….”
조금 전 한숨을 내쉬웠던 임원이 서류를 뒤적이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는 여일그룹에서 가장 많은 순이익을 올리는 여일전자의 사장으로, 사실상 회장의 오른팔이나 다름없는 남자였다. 한참이나 서류를 보며 끙끙 앓던 그가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이건 도저히 어쩌는 수가 없어. 이것들이 밝혀지면 수습하는 데에 천문학적인 돈과 시간이 들겠지. 심지어 수습할 수 있을지조차 현재로선 불투명해. 고로 이번에는 우리가 접어줄 수밖에 없어.”
“접어준다니. 그 말은 설마…….”
“민채령 그 여자의 요구조건을 전면 수용해야겠지.”
“그게 무슨 소리요! 신성호 사장!”
그때 반대편에 있던 남자가 책상을 쾅! 치며 소리쳤다. 그가 신성호라 불린 노인을 향해 삿대질하며 외쳤다.
“지금 당신이 하는 말은 우리 여일이 일개 개인에게 굴복한다는 소리나 다름없소! 그게 말이나 되는 일이요?! 남들이 알았다간 분명 우리를 겁쟁이라 비웃을 거요!”
“그럼 뭐 어쩌자는 건가?”
“짓밟아야지! 다시는 우리한테 대들 생각조차 하지 못하게! 아주 철저하게! 아니면 까짓거 그냥 죽여버리든가!”
“이정도 협박을 해오는 상대가 자신의 죽음조차 대비하지 않았을 거라 생각하나? 순간의 감정에 휘둘려 멍청한 짓을 하는 것도 정도가 있지.”
“뭐?! 멍청하다고?! 지금 말 다했소!?”
“거거 노인네들 일단 진정들 좀 합시다. 지금 중요한 게 그게 아니라고요.”
그때 서로 목소리를 높이던 두 노인들보다는 다소 젊은, 그래봤자 장년에 불과한 사내가 두 사람을 말렸다. 그가 안경을 바로 쓰며 말했다.
“이거이거. 이 범죄 사실들. 이것들 딱 보면 내부자가 아니고서야 절대 알아낼 수 없는 것들만 있다 아닙니까. 그렇다는 건 뭐냐? 즉 우리 내부에 배신자가 있다는 소리 아닙니까. 안 그래요?”
“100% 확실한 건 아니지만 그렇겠지. 그래서?”
“민채령인가 하는 그 여자의 요구 사항을 들어주냐 마느냐도 물론 중요한 문제죠. 그렇지만 그것만큼 중요하게 다뤄야 할 게 바로 배신자의 색출 아닙니까.”
“그거야 일단 사태를 수습한 뒤에 천천히 하면…….”
“어허. 이 노인네가 지금 사태의 심각성을 모르네.”
장년의 사내가 쓰고 있던 안경을 벗으며 신성호 사장을 바라봤다.
“이정도로 비밀스럽고 대량인 정보를 유출한 내부고발자가 평범한 과장 부장급일 것 같습니까? 딱 봐도 임원급 중에 배신자가 있을 거 아뇨.”
“하고 싶은 말이 뭔가.”
“어쩌면 지금 이 안에 그 배신자가 있을지도 모를 일이라는 겁니다.”
그 말에 회의장에 있던 임원들이 전원 숨을 삼켰다. 그 반응에 썩 만족한 사내가 좌중을 쭈욱 훑어봤다.
그의 이름은 오은수.
여일그룹 산하 여일생명의 사장이자 회장의 참모로 통하는 이로, 그 뛰어난 통찰력과 과감한 추진력으로 지금껏 수많은 위기와 난관을 극복해온 역전의 기업가였다.
다만.
“어차피 그 민채령이란 여자가 기한도 나름 넉넉하게 줬다 아닙니까. 그러니 앞으로의 일을 결정하기에 앞서, 화끈하게 배신자부터 색출하고 가는 게 맞다고 봅니다. 안 그렇습니까? 이사님들?”
고장 난 시계도 하루에 두 번은 맞듯, 제아무리 뛰어난 사람이라도 가끔은 실수를 하기 마련이요.
지금의 오은수가 딱 그러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