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카데미 경비원으로 빙의당했다-190화 (191/266)

〈 190화 〉 189. 반격, 그리고 협상(1)

* * *

한여름은 안수호가 자신만만하게 넘긴 목록을 쭈욱 살폈다. 성유진(을 포함한 여일)의 범죄 목록이라던 그 메모에는 그녀도 어렴풋이 알고 있던 내용도 있는가 하면 이게 정말 진짜인지 믿기 어려운 허무맹랑한 내용도 있었다.

'의원 뇌물 수수나 헌터 장비 밀수 같은 거야 그렇다 쳐도……. 장한수 이사가 페도필리아라 의정부를 통해 불법 성매매를 일삼는다거나, 겨울동맹 간부 중 한 사람이 여명단 스파이라거나 하는 건 도대체 어떻게 알아낸 거야?'

엄밀히 말하자면 안수호는 그 사실들을 알아낸 게 아니라 이미 알고 있던 것이었다. 원작 자체의 내용이나 작품 외적으로 쓰인 설정집 등을 통해서.

라는 작품에 한때 진심이었던 그는 작가 쾌락천마를 제외하면 그 누구보다 의 세상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자였다.

그러나 그가 알고 있는 건 어디까지나 그런 식으로 언급된 '사실'뿐.

안수호의 메모에는 그가 어떻게 그러한 사실들을 알아냈는지에 대해서는 적혀 있지 않았다. 애초에 앞서 말했듯 그는 그 정보들을 알아낸 게 아니라 읽어서 알고 있던 것뿐이니까.

때문에 한여름이 보기에 그의 메모는 마치 풀이과정은 생략한 채 답만 덜렁 던져둔 반쪽짜리 답안지 같았다. 미심쩍게 느끼는 것도 당연한 일.

“지금 여기 적어둔 것들 다 사실이라 그랬죠? 어떻게 알아낸 거예요?”

“방법은 말씀드리기 좀 곤란합니다.”

“그래요 뭐. 말하기 곤란한 방법으로 알아냈을 수도 있으니까요. 그렇지만 이 범죄 목록들이 사실이라는 구체적인 물증은 있는 거죠?”

“아뇨. 지금 당장은 없습니다.”

“네?”

그 말에 한여름의 미간에 잡힌 주름이 더욱 깊어졌다. 그녀가 이해하기 어렵다는 듯 되묻는다.

“물증도 없고 정보를 알아낸 방법도 말할 수 없다. 그래놓고선 지금 저한테 이것들을 믿으라는 건가요?”

“저도 무리한 요구라는 건 압니다. 그렇지만 거기 적힌 것들은 전부 틀림없는 사실이에요. …………아마도.”

그의 기억은 정확하다 자부했지만 혹시 원작과 달라진 부분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 혹시 몰라 소심하게 덧붙인 ‘아마도’ 세 글자에 한여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당신이 허튼 소리를 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건 알아요. 그렇지만 아무런 증거도 없이 이 목록을 믿으라는 건 무리에요.”

“그건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증거는 이제부터 찾으려고요.”

“……그건 또 무슨 말씀일까요.”

한여름은 아까부터 영문 모를 소리만 해대는 안수호의 모습에 머리가 지끈거릴 지경이었다. 그럼에도 최대한 예의를 차리는 건 앞서 말했듯, 안수호는 결코 허튼 소리를 할 사람이 아니라고 그녀가 믿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 믿음마저 이미 무너져내리기 직전이었지만.

“앞서 말했듯 이 메모의 범죄 사실은 전부 사실입니다. 사실입니다만, 증거는 없죠. 그래서야 이 목록으로 성유진이나 여일을 협박하는 건 불가능할 겁니다.”

“당연히 그렇겠죠. 증거가 없으면 이게 아무리 사실이라도 단순 주장에 불과하니까. 설령 안수호 씨가 언론에 이것들을 알린다 해도 망상병 환자의 허무맹랑한 헛소리로 취급할 거예요.”

“그렇지만 어찌 되었든 사실이긴 하죠. 즉 증거만 갖추면 훌륭한 협상 카드가 된다는 겁니다.”

“그 증거를 어떻게 찾을 건데요?”

“일리아나 파우스트.”

안수호가 돌연 꺼낸 이름에 한여름의 표정이 흠칫 굳었다. 그 이름은 그녀도 잘 아는 이의 이름이었기에.

그야, 한여름과 안수호의 인연이 시작된 게 그녀가 일리아나에게 안수호의 뒷조사를 의뢰하면서 부터였으니까.

“제가 아는 범위 내에서 가장 뛰어난 실력을 가진 탐정입니다. 그녀라면 이 범죄 사실들의 증거를 손쉽게 찾아낼 수 있을 거예요. 문제가 뭔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맨땅에 헤딩하는 것과 이미 답을 아는 문제의 풀이를 유추하는 것. 둘 중 당연히 후자가 더 쉬울 테니까요.”

“즉, 여일의 범죄 사실을 캐내는 게 아니라 이러한 범죄가 실제로 벌어졌다 가정하고 그 흔적을 캐내겠다?”

“그런 셈이죠.”

“말씀은 알겠어요. 알겠는데…….”

한여름은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메모를 다시 한 번 읽어내려갔다. 읽으면 읽을수록 그녀는 안수호의 행동이 더더욱 이해가 되지 않았다.

“……도대체 왜 이렇게 빙 돌아가는 방법을 택해야 하는 거죠? 당신은 이미 이 범죄들의 증거를 쥐고 있을 거 아니에요?”

메모에 적힌 범죄들은 하나같이 민감하기 그지없는 것들이었다.

길드 간부의 반정부단체 스파이 혐의나 불법 성매매, 거기에 국가에서 금지한 다중능력 연구와 관련된 인체실험과 인신매매까지.

하나라도 터지면 겨울동맹이나 여일의 앞날을 송두리째 뒤집어버릴 수 있는 강력한 패들.

그렇기에 당연히 그러한 범죄들은 철통 보안 속에서 비밀리에 이루어졌을 것이고, 겨울동맹이나 여일 내부에서도 극소수의 사람만이 그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지금 당장 제가 보여드릴 수 있는 증거는 없습니다.”

헌데 그럼 안수호는 도대체 이것들을 어떻게 알아냈다는 말인가.

‘무슨 선무당도 아니고. 물증도 없이 이런 범죄들이 벌어졌다고 확신하는 건 말이 안 돼. 그렇다는 건 즉…………. 안수호는 증거가 없는 게 아니야. 증거를 나한테 말하지 못하는 거지.’

지금 당장 보여줄 수 있는 증거가 없다. 그건 단순히 증거가 없다는 말과는 조금 다른 의미로 해석할 수 있었다. 증거가 있기는 한데 보여줄 수는 없다는 뜻으로.

가령 범죄 사실을 안수호에게 알려준 내부자의 신상을 보호해야 해서 부득이하게 증거를 내보일 수 없다든가. 혹은 가지고 있는 증거를 제출하면 그것이 곧 안수호 자신의 불이익으로 이어진다든가.

이 세상에 이른바 ‘밝힐 수 없는 증거’라는 건 얼마든지 있었다. 그렇기에 안수호는 새로운 증거를 찾아내려 하는 거라고. 한여름은 그렇게 생각했다.

‘여러모로 미심쩍은 부분이 많은 건 사실이지만, 만약 이 사람의 말이 정말 사실이라면…….’

겨울동맹과 여일의 수뇌부와 관련된 각종 범죄 기록들.

만약 이것이 그의 말처럼 거짓 하나 없는 진실이라면 그 가치는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아진다. 안수호는 이 패를 단순히 성유진과의 협상 카드로만 쓸 생각인 모양이지만, 한여름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잘만 하면 범죄와 관련된 여일 수뇌부들을, 혹은 아예 여일 그 자체를 내 마음대로 좌지우지 할 수 있을 지도 몰라.’

그러기 위해선 이 메모를 뒷받침할 증거를 찾는 게 필수불가결했다. 그리고 그 작업을 맡을 이는 안수호의 말마따나, 세계에서 손에 꼽히는 탐정인 일리아나 파우스트가 제격이겠지.

‘실패 시의 리스크는 거의 없고 성공시에는 막대한 리턴이 돌아온다. 나쁘지 않은 이야기야. 아니, 내 입장에선 마다할 이유가 전혀 없는 이야기네.’

한 가지. 안수호가 왜 뻔히 있는 증거를 없다고 부인했는지 그 이유가 궁금하긴 했으나, 그 부분은 일단 덮고 넘어가기로 했다.

지금 당장 굳이 알아야 할 필요도 없었고, 굳이 파헤치지 않는 편이 그와의 관계를 원활히 유지하는 데에도 도움이 될 테니.

“……좋아요. 일리아나 파우스트에게 이 건을 의뢰해보죠. 당신이 준 메모를 토대로 성유진과 여일의 비리나 범죄를 조사해보라고. 그렇게 전해두면 되겠죠?”

“그래주시면 감사하죠. 의뢰 보수는 제쪽에서 그녀와 따로 이야기를­”

“됐어요. 보수는 제가 지불하죠. 대신, 만약 이 정보들이 전부 사실로 밝혀졌을 경우 제게 이 정보를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게 해주세요.”

“저랑은 따로 여일을 협박이라도 하시려는 겁니까?”

“유용한 패가 손에 들어왔는데 쓰지 않는 건 멍청한 짓이니까요.”

“좋습니다. 그렇게 하시죠.”

안수호의 동의를 받아낸 한여름은 그의 메모를 잘 갈무리에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일리아나에게는 지금 바로 연락할게요. 가능하다면 성유진이 움직이기 전에 먼저 선수를 치는 편이 당신한테도 이로울 테니까요.”

말을 마친 한여름이 한 손으로는 스마트폰을 조작하며 반대 손으로는 커피 잔을 들었다. 그러나 한창 대화를 주고받으며 계속 마셔댄 탓에 잔은 텅텅 비어 있었다.

‘시간이 늦긴 했지만 아직 할 이야기가 많이 남았으니까…….’

성유진에 대한 대책은 이 건으로 일단락되었다고 해도, 경찰과 언론을 동원한 그가 이제부터 어떻게 나올지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눠봐야 했다. 그렇게 생각한 한여름이 안수호에게 물었다.

“혹시 커피 한 잔 더 하실래요? 아무래도 이야기가 좀 더 길어질 것 같은데.”

그 물음에 안수호가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달콤쌉싸름한 커피향과 함께, 두 사람의 대화는 밤이 깊어질 때까지 계속 이어졌다.

그로부터 2주 뒤.

그린하우스 경비대 특수대책과 2팀 팀장실.

“……안수호. 지금 도대체 이게 뭐가 어떻게 된 상황이야?”

민채령이 노트북 화면에 떠있는 PDF 파일을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그간 여러모로 격무에 시달린 그녀의 눈가에는 옅은 다크서클이 어물쩍 내려앉아있었다.

“방금 도착한 이 이메일, 이거 네가 보낸 거 맞지?”

­예. 제가 보낸 메일 맞습니다. 아이디는 1회용 가계정이고요.

“그래. 그랬으니까 이렇게 타이밍 좋게 전화를 줬겠지. 참나, 2주 동안 그 시골 구석에 처박혀서 무슨 짓을 꾸미고 있나 했더니…….”

민채령은 테이블 위에 굴러다니던 초콜릿 사탕 하나를 아그작 깨물어 먹었다. 그녀는 스트레스가 쌓일 때마다 습관적으로 초콜릿을 먹는 버릇이 있었기에.

허나 당장 그녀의 표정은 그리 나빠보이지 않았다. 미간에는 분명 진한 주름이 잡혀 있긴 하나, 그 입가에는 왠지 모를 옅은 웃음기가 조금씩 피어오르고 있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물을게. 이거 다 사실이야?”

­사실이죠. 이미 검증도 다 끝났습니다.

“너 미쳤구나 진짜? 도대체 이걸 다 어떻게 알아낸 거야? 혹시 여명단 때처럼 여일 수뇌부에도 연줄이 있는 거니?”

­그건 대답 못 드리죠. 그 정보력이 제 밥줄이니까요. 입사 면접 때 말씀드렸잖아요?

“그래, 그랬었지. 영업비밀이 어쩌고저쩌고. 그 말에 혹해서 널 뽑지만 않았어도 지금 이렇게 고생하고 있진 않았을 텐데.”

­저도 압니다. 그래서 이렇게 지금 선물을 보내드린 거잖아요.

“선물?”

민채령이 피식 웃으며 PDF 파일을 살펴보았다. 파일에는 지난 2주 동안 안수호가 일리아나를 통해 검증을 마친, 성유진과 여일의 범죄 목록의 절반이 담겨 있었다. 안수호가 기억하고 있던 범죄 목록은 그게 전부가 아니었으나, 그 외 나머지는 아직 검증이 채 끝나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나 그 절반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훌륭한 협상 카드이자 협박 재료였다.

‘이사진의 뇌물 수수, 무기 밀수, 성매매, 성접대, 이권 사업 개입에 여명단 스파이 노릇까지. 아주 야무지게도 물어왔네 정말.’

안수호는 이걸 두고 선물이라고 했던가. 그렇다면 이 정보들은 자신에게 무상으로 주는 것일까.

민채령이 그렇게 생각하던 찰나, 전화 너머의 안수호가 짧게 덧붙였다.

­그 정보들은 팀장님께 드리겠습니다. 일단 제 선에서 검증이 끝난 것들이긴 하지만, 정 불안하시면 팀장님께서 추가로 조사해보셔도 무방해요. 그 대신…….

“대신?”

­제 부탁을 하나만 들어주셨으면 합니다. 그리 어려운 부탁은 아니에요.

“보통 그렇게 말하는 사람치고 쉬운 부탁을 하는 사람은 없더라. 그래서? 부탁이란 게 뭔데?”

­저 대신 성유진을 만나주세요. 그리고 이렇게 말해주세요. 태초의 은에서 손을 떼라고. 절 가만 내버려두라고. 그럼 이 범죄 사실들이 세간에 공개되는 일은 없을 거라고.

성유진이 태초의 은을 원하는 건 다중능력 연구를 진척시키기 위함.

그리고 성유진과 여일이 국가에서 금지한 다중능력을 연구하는 건, 이런저런 이유가 있겠지만 결국 기업의 이익으로 직결되는 일이기 때문일 거라고.

그렇기에 안수호는 딜을 건 것이다. 풀려나는 순간 여일에 막대한 손해를 끼치게 될 정보를 협박 재료로 삼아, 자신의 안위와 태초의 은의 소유권을 놈들에게서 따내기 위해.

­제 조건은 그게 전부입니다. 그 외 조건은 팀장님께서 알아서 해주세요.

“네 안전만 확보하면 나머지는 나보고 알아서 더 뜯어내라는 거지?”

­그렇죠. 그런 짓은 팀장님 전문이잖아요.

“이게 상사한테 못하는 말이 없네…….”

그렇지만.

그렇게 덧붙인 민채령이 초콜릿 사탕 하나를 더 아그작 씹어 먹으며 답했다.

“네 말이 맞아. 이런 짓이 내 전문분야긴 하지.”

동시에 그 입가에 그녀 특유의 뱀 같은 미소가 떠올랐다.

안수호가 포항으로 내려간 이후 처음으로 짓는 진심어린 미소였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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