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9화 〉 188. 은둔생활(3)
* * *
나은주.
여일 산하 초인재활연구소 소장 나주용의 딸인 그 아이는 올해로 딱 10살이 되었다. 키나 몸무게는 그 또래 여자아이들의 평균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으나, 지능 쪽은 아버지의 유전자 덕분인지 평균을 아득히 상회하고 있었다.
흔히 똑똑한 아이를 사람들은 영재라고 부른다. 그러나 나은주의 비범한 지성은 영재라는 단어로 표현하기에는 다소 부적합한 부분이 있었다.
영재라는 말이 대개 ‘OO영재’ 같은 식으로 하나의 분야에 국한되는 것에 비해, 그 아이의 지적 능력은 모든 방향을 향해 골고루 발달되어 있었으니까. 남들이 그 아이에게 어떤 과제를 건네든 그 아이는 또래에 비해 능숙하게 그 과제를 풀어냈다.
설령 주어진 과제가 그 아이가 처음 접해보는 것이라 하더라도. 나은주는 또래에 비해 지나치게 빠른 속도로 과제에 적응했다. 마치 성인의 정신이 어린아이의 몸에 들어간 것처럼.
그것은 그녀가 날 때부터 가지고 있던 정신감응 초능력의 영향이었다. 그리고 그 자질을 누구보다 빨리 알아차린 아버지 나주용은 그 자질을 꽃피우기 위해 다방면의 조기교육을 실시했다.
덕분에 나은주는 훌륭하게 자라날 수 있었다.
그의 훌륭한 딸이자,
조수이자,
그리고 장기말로서.
“이번에 네가 힘을 써줘야 할 사람들이다.”
나주용은 자상한 아버지의 목소리로 나은주에게 두 손을 내밀었다.
왼손에는 타깃의 사진이 떠오른 스마트폰이, 오른손에는 그녀의 능력을 인위적으로 폭주시키는 막대사탕 모양의 능력강화제를 쥔 채.
“……이 3명이 전부 이번 목표예요?”
“그래.”
“기한은요?”
“가능한 한 빨리. 다른 두 사람은 몰라도 경찰청장은 오늘 안에 끝내야 한다.”
“잠깐잠깐씩만 조종하면 되는 거예요?”
“아니, 그래서야 조종당할 동안 내린 명령을 번복할지도 모르니까. 능력이 풀리더라도 우리에게 유리한 판단을 하게끔, 그들의 머릿속 깊은 곳에 암시를 심어줘야 해.”
앞서 말했듯 나은주는 똑똑한 아이였다. 그렇기에 그녀는 아버지의 요구를 단번에 이해했다. 거기에 더해서, 그 요구대로 할 경우 자신의 몸 상태가 죽기 직전까지 몰릴 거라는 점도.
나은주의 초능력은 본래 가벼운 암시나 최면 정도가 한계였다. 애초부터 그렇게 정해져 있었고, 그나마도 아직 나이가 어린 탓에 초능력이 제대로 여물지 않았기 때문에.
나주용이 함께 건넨 강화제는 그런 한계를 억지로 돌파하는 일종의 도핑 약물이었다.
그녀의 건강과 수명을 대가로 하는.
“…….”
단발적인 조종은 한 번의 능력 발동으로 끝나는 일이다. 그러나 타깃의 머릿속에 세뇌에 가까운 암시를 심어주기 위해서는 거의 한나절 동안 몇 번이고 계속해서 능력을 쓸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그만큼 나은주의 몸에 가해지는 부담 역시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할 터.
나은주는 자기 나름대로 머리를 굴리며 능력의 부작용을 계산해보았다.
낙관적으로 봐도 두어 달은 병원 침대 신세. 어쩌면 뇌나 신체에 영구적인 장애가 남거나, 혹은 아예 죽어버릴지도 모른다. 어린 나은주조차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고 그렇기에 나주용이 이를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나주용은 선택한 것이었다.
성유진을 위해,
여일을 위해,
그리고 자신의 연구를 위해, 딸 나은주에게 죽을 지도 모를 부담을 지워주겠다고.
“괜찮겠니?”
거듭 말했지만 나은주는 똑똑한 아이였다. 그러나 결국 아이에 불과하기도 했다.
“괜찮아요 아빠! 아빠의 부탁인걸요! 저 열심히 할게요!”
아이에게 부모란 절대적이다. 하물며 지난 10년 간 나주용의 체계적인 밀착 교육을 받아온 나은주에게, 아버지의 말을 거역한다는 선택지는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고맙구나. 역시 내 딸이다. 내겐 너밖에 없단다.”
나주용이 자상한 표정으로 팔을 벌리자 나은주가 도도도도 달려가 그 품에 안겼다. 모양새만 놓고 보면 영락없는 화목한 부녀지간이었으나, 그 실상은 180도 달랐다.
“이번 일은 아주 중요한 일이야. 혹시라도 저번처럼 실패하면 안 된다.”
“네. 아빠. 이번엔 반드시 실패하지 않을게요.”
나은주의 머릿속에 저번 일이, 안수호의 정신 조종에 실패했을 때의 일이 스쳐 지나갔다.
이따금 높은 등급의 초인이 그녀의 능력에 저항하는 일은 있었지만 안수호는 기껏 해야 C급 나부랭이에 불과했는데 왜 실패했는지.
그 이유는 여전히 오리무중이었지만 나은주는 이번에야말로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겠노라고 다짐했다. 지난 10년 동안 짐승을 훈련하듯 그녀의 머릿속에 각인된 보상체계에는 오로지 아버지 나주용의 인정만이 절대적인 가치로 자리잡아 있었다.
‘난 절대로 언니처럼 버려지지 않을 거야. 실패작인 언니랑 달리, 나는 성공작이라고 아빠가 말씀하셨으니까.’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에 버려진 언니를 생각하며, 나은주가 나주용의 품에 더욱 깊이 안겼다.
***
그날 저녁.
안수호는 저물어가는 태양을 등진 채 정원 구석 벤치에 앉아 있었다. 그 손에는 한여름의 부하를 통해 건네받은 임시전화가 쥐어져 있었다.
“예.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여기 있는 이상 당분간은 안전할 거라고 한여름이 말했습니다.”
그는 한창 주변 지인들에게 생존신고를 하는 중이었다.
가장 먼저 지예원과 강하늘, 이후 그에게 화가 단단히 났을 게 뻔한 민채령을 거쳐 류태현에게 짧은 안부를 남긴 뒤, 지금은 설아현과 통화 중이었다.
다행이네요. 성유진 쪽 움직임도 수상하고 안팎으로 시끄러운 와중에 연락이 안 돼서 많이 걱정했거든요. 앞으로는 연락해야 할 때 이 번호로 전화하면 되는 거죠?
“네. 그렇게 하시면 됩니다. 아, 혹시 오늘 밤이나 내일 중에 좀 길게 통화할 시간이 있을까요? 제 쪽에서 어떻게든 꼭 전해야 할 말이 있어서.”
전해야 할 말이요……?
“네. 중요한 이야기에요.”
안수호는 설아현에게 태초의 은과 관련된 모든 사실을 이야기할 생각이었다. 여일의 다중능력 연구를 포함해서 말이다. 그는 성유진과 본격적으로 대립하게 된 이상 믿을만한 아군에게는 정보를 전부 오픈할 생각이었다.
‘한여름에게도 말해두는 편이 낫겠지. 그 편이 그녀의 도움을 구하기도 더 쉬울 테니까.’
안수호는 설아현의 스케줄을 고려해 내일 점심 즈음에 전화하기로 약속한 뒤 통화를 종료했다.
“이봐.”
그때 그의 등 뒤로 샤오메이가 다가왔다. 안수호가 고개를 돌리자 그녀가 스마트폰(안수호와 마찬가지로 한여름이 준비해준)에 떠오른 통화 내역을 보이며 말했다.
“그 한여름이라는 여자한테서 연락 왔어. 오늘 저녁에 이쪽으로 올 거래. 중요한 할 이야기가 있다고.”
“그래? 근데 왜 그쪽으로 전화했지? 나한테 안 하고.”
“네가 계속 통화 중이어서 그랬겠지. 그래서, 여친들한테 안부는 잘 전했고.”
두 사람은 서로를 대할 때 어색한 반말로 대했다. 첫 만남 이후 다시 만났을 때 샤오메이가 감정이 격해져 먼저 반말을 던져댄 탓이었다.
샤오메이 입장에서는 친한 사이도 아닌데 쓰는 반말이 어색하긴 했으나 이제 와서 존대를 하기에도 애매했고, 안수호 또한 자신을 하대하는 그녀에게 굳이 예의를 갖출 필요가 없다 생각했다. 덕분에 두 사람은 허물없이 서로에게 편하게 말했으나, 그 때문에 오히려 어색한 상태였다.
“대충은. 그러는 너야말로 동료 브로커가 알아봐준다던 밀항편은 어떻게 됐어?”
“준비는 다 끝났대. 다음주 금요일 부산 아니면 다다음주 토요일 울산. 문제는 내가 거기까지 안전히 잘 갈 수 있냐는 거지.”
“지명수배자 신세니까. 나도 곧 별반 다를 게 없어지겠지만.”
“나야 이 나라를 뜨기만 하면 그만이지만 넌 그러지도 못할 거 아니야. 이제부터 어떻게 하려고?”
“그거야 뭐…….”
안수호가 품에 넣어둔 종이를 꺼내들었다. 오늘 하루 동안 혼자 작성한 메모를 스윽 훑어보며 그가 말했다.
“이제부터 논의해봐야지. 앞으로 어떻게 할지.”
그로부터 한 시간 뒤. 별장에 도착한 한여름까지 세 사람은 어젯밤처럼 거실에 둘러앉았다. 전날과 똑같은 자리에 앉아 전날과 똑같은 잔에 똑같은 커피를 따른 채로.
“일단 안수호 씨께서 궁금해하실 바깥 상황부터 말씀드리죠.”
격무에 시달렸는지 반쯤 녹초가 된 표정으로 한여름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일단 안수호 씨 집 앞에 몰려왔던 기자들은 대부분 철수했어요. 이틀째 두문불출하니 당연한 일이죠. 뭐, 그래도 몇몇 기자들은 남아서 잠복해있긴 하지만요.”
“다행이네요. 옆집 사는 여자친구가 기자들 때문에 꽤 곤란해 했었는데.”
“이런 상황에도 여친 걱정이라니 아주 태평하시네요. 뭐, 다음 말을 들으면 전혀 태평하지 못하시겠지만.”
“무슨 문제라도 생긴 겁니까?”
“오늘 오후에 형사 둘이 당신 집에 방문했어요.”
그 말에 안수호의 표정이 흠칫 굳었다. 옆에서 듣고 있던 샤오메이도 마찬가지였다.
“수사가 시작된 겁니까?”
“네. 제 예상보다도 조금 빠르지만요. 경찰 내부에서 일단 안수호 씨랑 오른손의 그 기생괴수를 안전하다 판단한 이상, 그런 기존 결정을 번복하는 데에 꽤 시간이 걸릴 거라 생각했는데. 이렇게 빨리 자기들 잘못을 인정하고 움직일 줄은 몰랐어요.”
아마 성유진 쪽에서 수를 쓴 거겠죠. 그렇게 덧붙이며 한여름이 커피를 홀짝였다.
“이번 사태에 관해 관망적인 태도를 보이던 서울지방경찰청장이 갑자기 수사 재개 쪽으로 의견을 바꿨더라고요. 그분이 돈으로 매수될 사람은 아닌데, 도대체 뭘 어떻게 한 건지…….”
설마 성유진의 휘하에 정신조종 능력자가 있고 이를 통해 청장을 세뇌하다시피 했을 거라곤 감히 예상치 못했다. 그나마 안수호는 나은주의 존재를 알고 있긴 했으나, 그 짧은 순간에 거기까지 발상이 미치지는 못하였다.
“저에 대한 수사가 시작됬다면……. 확실히 그리 좋은 상황은 아니네요.”
“당신이 여기에만 박혀 있으면 당장 들킬 염려는 없어요. 성유진이든 경찰이든 이 사태에 제가 개입했다는 걸 알아차리는 데엔 꽤 걸릴 테고, 설령 알아차린다 해도 이 별장의 위치를 알아낼 순 없을 거예요. 애초에 이런 상황을 대비해서 만들어둔 은신처니까. 그렇지만…….”
한여름의 시선이 잠시 샤오메이에게 머물렀다가 이내 안수호에게로 돌아간다.
“그쪽 브로커 분과 달리 안수호 씨, 당신은 도망치기만 하는 게 능사가 아닐 텐데요.”
“그렇죠. 언제까지고 숨어있을 순 없으니 결국 성유진하고 결판을 내야”
“그런데.”
그때 한여름이 안수호의 말을 가로막으며 책상을 탁 두드렸다.
“생각해보니 저, 당신이란 인재가 탐이 났고, 또 곤란해 보여서 일단 도와주기는 했지만 당신이 왜 이런 위기에 빠진 건지는 아직 잘 모르는 상태거든요. 슬슬 이야기해주실래요? 도대체 당신과 성유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런 난리가 벌어진 건지.”
“안 그래도 말씀드리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안수호는 태초의 은과 관련된 일련의 사태에 대해 모두 이야기했다. 태초의 은이 사실 아티펙트라는 부분까지는 그나마 평정을 유지하던 한여름이었으나, 여일의 다중능력 연구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하자 차츰 얼굴에 당혹감이 번지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한 말들, 정말 사실이에요?”
“예. 거짓 하나 없는 사실입니다. 성유진이 이번 일을 벌인 건 제게서 태초의 은을 빼앗기 위해, 그리고 그 목적은 태초의 은을 통해 놈들이 비밀리에 하고 있는 다중능력 연구를 완성하기 위해서예요.”
“그게 정말, 저어어엉말 사실이라면 좀, 많이 충격이네요. 여일이 다중능력 연구에 손을 대고 있었다니, 전혀 모르고 있던 일이라…….”
“조금 의외네요. 한여름 학생이라면 짐작 정도는 하고 있을 줄 알았는데.”
“아무리 저라도 정보의 한계는 있는 법이에요. 경쟁 기업인 여일이 작정하고 숨기는 사실까진 알아낼 수 없어요.”
“하긴. 그것도 그러”
적당히 고개를 끄덕이던 안수호의 뇌리에 문득 의문이 스쳤다.
‘어라? 그럼 민채령은 어떻게 그걸 알아낸 거지?’
민채령의 정보력이 한여름보다 뛰어나기라도 하다는 걸까. 혹은 성유진과의 개인적인 인연으로 어쩌다 알게 된 건가. 잠깐 떠오른 의문은 그의 머릿속을 맴돌았으나 곧 담배 연기처럼 흩어졌다.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으니.
“아무튼. 성유진의 목적을 생각하면 태초의 은은 절대 넘겨줄 수 없습니다. 고로 전 어떤 형태로든 놈과 결판을 지어야 해요. 놈이 다음 수를 꺼내기 전에.”
“결판이라면 어떤 식으로요?”
“그건”
“설마 성유진을 죽일 생각……은 아니겠죠? 에이, 설마.”
한여름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혹시라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면 단념하기를 추천드릴게요. 당신이 아무리 강하다 한들 성유진을 죽일 수는 없을 거예요. 겨울동맹이니 여일이니 하는 배경을 다 차치하고 놓더라도, 그 이전에 그는 대한민국 최강의 헌터이자 최강의 초인이니까.”
“그건 저도 알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그런 방법도 고려해보긴 했지만 곧바로 무리라는 걸 깨달았어요. 그래서 다른 방법을 준비했고요.”
“다른 방법이요?”
한여름의 되물음에 안수호가 품에서 종이뭉텅이를 꺼냈다. 조금 전에 그가 살펴보던 메모 뭉치였다.
“한 번 읽어보시죠.”
메모를 건네받은 한여름은 미심쩍은 눈으로 그 메모를 하나씩 읽어내려갔다. 곧 그녀의 얼굴에 점차 경악에 찬 표정이 번져나간다.
“…………이게 도대체 뭐죠?”
“놈과의 협상에 쓸 비장의 카드죠.”
“이게 다 사실이라고요?”
“그럼 제가 거기 거짓말을 써두었겠습니까?”
안수호의 말에 한여름은 다시 한 번 메모를 살폈다. 그러나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은 여전했다.
안수호가 건넨 메모.
거기에는 성유진 개인이 저지른 범죄부터 그가 속한 겨울동맹과 여일이 저지른 온갖 비리와 범죄 사실이 적혀 있었다. 심지어 그중에는 내부자가 아니라면 결코 알 수 없는 정보도 있었다.
그렇기에 한여름은 의심의 눈초리를 거둘 수 없었다. 그러나 그녀가 간과한 사실이 하나 있었으니.
바로 그가 원작의 내용을 훤히 꿰고 있는 빙의자라는 점이었다.
“제가 알고 있는 건 그게 전부지만, 그 정도면 충분히 협상 카드로 쓸 수 있겠죠.”
안수호의 입가에 떠오른 웃음에 한여름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새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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