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8화 〉 187. 은둔생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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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채령과 한여름이 한창 인성질로 서로를 헐뜯으며 압박해대고 있을 때.
안수호는 고급스러운 별장 거실 한가운데서 소파에 앉아 한가롭게 아침 햇살을 쬐고 있었다.
한 손에는 평소에 마셔본 적 없는 고급 원두로 내린 아메리카노. 푹신한 소파에 등을 기댄 채 즐기는 커피에 그는 꼭 휴양이라도 온 것만 같았다. 그에게 닥친 상황을 생각하면 한가롭게 있을 때는 아니었으나, 딱히 혼자 전전긍긍한다고 한들 당장 상황이 나아지는 것도 아니었으니.
‘샤오메이는 잠시 혼자 생각할 게 있다고 방에 틀어박힌 채 나오질 않으니. 나도 그 생각이란 거나 좀 해볼까.’
평온한 분위기는 사색에 잠기기 딱 좋았다. 안수호는 창밖의 풍경을 신기하다는 듯 바라보는 실비의 ‘활동체’를 눈으로 쫓으며, 앞으로의 일에 대해 생각했다.
현재 안수호의 상황은 물 위로는 가십거리를 찾는 기자와 대중에게 쫓기고 물 아래에서는 그를 재구속하려는 경찰에게 위협받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 배후에는 당연히 성유진의 암약이 있었고.
‘성유진이 왜 태초의 은에 이렇게까지 집착하는지는 회담이 끝나자마자 민채령에게서 들었어. 다중능력 연구 때문이라던가.’
원작에서 성유진이 태초의 은을 탐내던 이유는 일종의 맥거핀으로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만약 원작에서도 연구가 이유였다면 안수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추후 수많은 빌런을 양산할 여일의 다중능력 연구에 제대로 엿을 맥인 셈이었다.
‘문제는 성유진이 이렇게 대대적으로 수를 쓸 정도로 태초의 은을 빼앗고 싶어 한다는 거지.’
기껏해야 뒷골목에서 싸움 정도나 붙을 줄 알았던 그로서는 예상외의 사태였다. 그러나 언제까지고 예상외라며 전전긍긍하기만 할 수는 없는 노릇.
‘싸워야 하나.’
그렇기에 안수호는 성유진과 정면으로 싸울까 고민하고 있었다. 물론 물리적인 싸움의 이야기였다.
성유진은 원작의 빌런 중 하나. 여명단과 달리 직접적으로 아카데미와 적대하는 관계는 아니지만, 원작의 행보를 생각하면 결국 아카데미 학생들을 지켜야 할 안수호와는 사사건건 대립할 운명이었다.
그렇기에 차라리 그와 대립하기 시작한 지금, 이 이상 상황이 악화되기 전에 마무리하자고. 남들의 눈이 닿지 않는 곳에서 그와 싸워 결판을 내자고 안수호가 생각했다.
결판.
즉 성유진을 죽이겠노라고.
‘성유진을 죽인다라. 내가 할 수 있을까?’
그렇게 생각한 안수호의 입가에서 곧바로 너털웃음이 새어나왔다. 그게 가당키나 한 일인가 하며.
성유진은 S급 초인이자 국내의 모든 헌터들 중 한 손 안에 꼽히는 강자였다. 당장 그가 기사의 무덤 공략 당시 빌헬름과 싸울 태스크 포스의 일원이었던 걸 잊어서는 안 된다.
물론 안수호 또한 태스크 포스로서 빌헬름과 싸우긴 했으나, 그가 한 건 여러 뛰어난 헌터들 사이에서 기회를 엿보다 마지막 일격을 가한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반면 성유진은 처음부터 끝까지 빌헬름의 공격을 정면으로 받아내며 동료들을 지키지 않았던가.
그런 성유진을 물리적으로 죽이는 건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다. 그러나 권력도 재력도 없는 안수호가 사회적인 힘으로 그를 찍어 누를 수도 없잖은가.
‘아무리 실비가 있다 해도 정면으로 붙어서 이길 수 있을 거란 보장은 없어. 놈은 빌헬름조차 버텨낸 녀석이니까. 실비가 아무리 강하다 한들 빌헬름만큼은 아닐 테고.’
게다가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성유진은 빌런이다. 그러나 여명단과는 달리 사회적 입지가 탄탄한 캐릭터였다. 설령 안수호가 그를 죽이는 데에 성공한다 해도, 그 사실이 바깥에 알려지는 순간 안수호는 두말할 것도 없는 범죄자가 되어버린다.
‘이래서 성유진과의 대립은 최대한 나중으로 미루고 싶었던 건데…….’
원작에서 성유진이 본격적으로 빌런의 행보를 드러내기 시작하는 건 아카데미 졸업 후를 다루는 2부. 시기상으로는 3년 뒤였다. 그렇기에 안수호는 그때를 대비해 성유진에 대항하기 위한 여러 연줄과 인맥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설아현이나 한여름과의 관계도 그 일환이었다.
허나 지금은 시기가 빨라도 너무 빨랐다. 그가 빙의한지는 이제 겨우 석 달. 작중 시점으로는 입학 후 두 달밖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지금 시점에서 한여름이 나 때문에 성유진과 완전 척을 질 리는 없어. 설령 내가 완전히 한성의 산하로 들어간다 한들 손해밖에 안 되는 장사니까. 설아현도 이번 일에 대해선 가능한한 중립을 지키려는 입장이고…….’
머릿속이 막막해진 안수호는 생각의 방향을 조금 바꾸었다. 자신 쪽에서 먼저 성유진을 배제하려는 게 아닌, 성유진의 요구를 조금씩이나마 들어주며 시간을 버는 건 어떨까 하고.
‘놈의 요구라…….’
그 생각에 안수호는 거실 창가에 앉아있는 실비를 바라보았다. 전체의 50%에 해당하는 본체는 어린아이들이 껴안는 곰인형 정도 크기였다. 시간이 갈수록 표현이 디테일해져가는 탓에 풀썩 앉은 뒷모습은 색깔만 제외하면 진짜 어린 여자아이로 착각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차라리 실비를 순순히 놈에게 넘긴다면…….’
성유진은 태초의 은을 얻기 위해 언론과 대중, 그리고 경찰까지 이 일에 끌어들였다. 그런 그에게 수상한 뒷공작으로 안수호 한 명쯤 죽여버리는 거야 어려운 일도 아니겠지.
그렇다면 차라리 태초의 은을 순순히 넘기는 건 어떨까.
설령 그로 인해 여일의 다중능력 연구에 박차가 가해지고, 먼 미래에 안수호 본인이나 주변 사람들을 위협할 빌런이 만들어진다고 해도, 어차피 나중 일인데.
‘시간만 번다면 대비할 시간은 얼마든지 있어.’
안수호는 냉정하게 상황을 파악했다.
실비가 비록 자아를 가지고 있고, 또한 지금 이 순간도 사람의 감정을 학습하며 보다 사람다워지고 있기는 하지만 어차피 그것은 아티펙트에 불과하다.
탈리스만이나 샛별의 숨소리와 마찬가지로.
이용할 수 있다면 이용하고, 여의치 않다면 거래 재료로 써버려도 무방한.
강하늘이나 지예원 같은 사람이 아닌, 단순 물건에 지나지 않는다고.
…….
그렇게 생각한 순간, 줄곧 창밖만 바라보던 실비가 슬쩍 그에게 시선을 돌렸다. 안수호는 순간 아차 싶었다.
‘생각이.’
실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실비의 두 눈동자는 파르르 떨리고 있었고, 안수호는 실비가 느끼는 감정적 동요를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정신이 연결된 덕에 실비의 감정은 안수호에게 그대로 전해졌고
버, 버릴 꺼예요?
그것은 반대도 마찬가지였다.
실비 버려요…? 주인님 실비, 이제 필요 없어요?
햇살을 등진 실비가 처량한 얼굴로 안수호를 올려다보았다. 그것의 커다란 눈망울에서 은색 액체가 한 줄기 또르르 흘러내린다.
눈물, 이라고 부르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그러나 눈물로밖에 보이지 않는 그 현상에 안수호는 등줄기가 오싹해졌다.
저 진짜 버릴 거예요……?
떨리는 목소리, 불안정한 시선, 꽉 쥔 주먹, 당장이라도 목 놓아 울 것 같은 얼굴.
그 표상들을 보고 느끼며 안수호는 실비에게 죄책감과 측은지심을 느꼈다. 그러나 동시에 오싹한 소름이 돋기도 했다.
안수호는 실비의 과거를 기억한다. 실비가 아직 지금처럼 여자아이의 형상을 취하지 않았던 시절을. 그것이 아직 인간의 감정을 따라하지 않던, 비록 자아를 가지고 있었으나 한없이 기계 같던 시절을 기억한다.
그로부터 오늘까지 고작해야 3주.
그 사이 실비는 몰라볼 정도로 인간의 감정을 학습하고 인간다워졌으나, 안수호가 보기에는 그것이 과연 진실된 변화인지, 혹은 그의 호감을 사기 위해 인간의 감정과 모습을 모방한 것에 불과한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아니, 이 감정은 진짜야. 그저 살아남기 위해서 울음소리를 따라하던 그때랑은 달리, 지금은 분명 실비가 느끼는 감정이 나한테도 느껴지니까.’
안수호는 마른세수를 하며 심신을 다잡았다.
아티펙트에 불과하다 생각한 실비가 너무 인간다운 반응을 보여서 잠시 당황했다. 그러나 자아가 있다는 건 바로 이런 것이다. 제아무리 처음엔 기계 같았다 해도 다른 사람과 부대끼다 보면 그야 배우는 것도 있고 변화도 있을 테지.
그 변화가 지나치게 빠른 감은 있었지만.
저, 저 의심하지 말아주세요……. 버리지 말아주세요…….
“버리지 않을게. 그러니까 울지 마.”
진짜요……?
그런 의문은 둘 사이에 의미가 없었다. 정신적으로 연결된 두 사람은 감정의 대부분과 생각의 일부를 공유한다. 설령 안수호가 실비에게 숨기고 싶다 한들, 실비는 안수호가 진실을 말하는지 거짓을 읊는지 정도는 어렵지 않게 구분할 수 있었다.
히끅!
그렇기에 실비는 아직 안수호의 마음속에 약간 남아있던 의심이나, 여차하면 성유진에게 실비를 넘기자는 생각을 느끼곤 훌쩍였다. 울음과 감정의 격화로 인한 딸꾹질까지 재현한 그 모습은 누가 봐도 그 나이또래 여자아이 같았다.
주인님…? 실비 버릴 거예요…? 아니죠…? 안 버릴 거죠……? 실비 버리지 마요. 제가 잘할게요. 버리지 마, 흑, 흐에엥…….
“안 버려. 안 버린다고. 안 버린다니까? 내가 몇 번을 말해야 믿겠냐.”
그치만,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게 전해져요. 여차하면 저 버리겠다는 거…….
“그러니까 최대한 안 버리겠다고 말하잖……. 에휴 됐다. 말해봤자 뭐해. 어차피 감정이고 생각이고 다 통하는데.”
그가 입으로 얼마나 열변을 토한다 한들, 그의 마음속에 자리한 다른 생각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 이상 소용없는 일이었다. 안수호가 한숨을 푹 내쉰다.
‘진짜 죽겠네 시발.’
흐에에엥 죽지 마여어……. 주인님 죽으면 안 돼요…….
안수호의 발치로 다가온 실비가 그와 연결된 오른손등을 탁탁 때렸다. 아이가 부모에게 투정부리듯. 그나마도 실비는 안수호에게 해를 입힐 수 없었기에 강도는 약하기 그지없었다. 그래서 더 죄책감이 들었다.
‘실비를 놈에게 넘기는 건 최후의 수단……이 아니라 아예 논외로 치고, 다른 방법을 찾아봐야겠어.’
다른 방법, 이라고 해봤자 곧바로 기책이 떠오르는 것도 아니었다. 그 혼자 생각할 수 있는 범위에는 한계가 있었으니까. 그렇기에 안수호는 다시 한 번 생각의 방향을 바꾸어보았다.
‘근데 놈은 도대체 어떻게 나오려는 거지?’
경찰이 자신을 재구속하게 만든 거야 뭐 그렇다니 그러려니 했다. 허나 자신이 구치소에 갇히기라도 하면 성유진 입장에선 오히려 손을 대기 더 어려워질 게 뻔했다.
‘생각해보니 이상하네. 아무리 경찰에 연줄이 있다고 해도 구치소 안까지 들어와서 나한테 손을 댈 수는 없을 텐데.’
그래서야 공권력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꼴이니까. 아무리 성유진이라도 그렇게까지 막 나가진 않을 텐데.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안수호가 의문을 품었다.
‘이 빌런 자식, 도대체 뭘 꾸미고 있는 거야?’
***
한편 그 시각.
성유진은 자신의 집무실에서 부하들이 올린 보고서를 천천히 읽고 있었다. 물론 평시 업무가 아닌, 안수호와 태초의 은에 관련된 보고서였다.
‘안수호의 재구속 쪽은 어떻게든 가능할 것 같군. 그렇지만 채령 선배까지 엮어서 잡는 건 역시 무리였나.'
보고서에는 민채령이 안수호를 어떻게 구치소에서 빼돌렸는지에 대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민채령은 안수호를 빼돌린 게 아니었다. 그녀가 무소불위의 권력자도 아니고. 공권력을 상대로 그런 권력남용이 가능하겠는가.
그녀가 한 것은 그저 연줄과 인맥을 동원한 설득, 내지는 조언에 불과했다. 안수호의 오른손에 남은 태초의 은이 더 이상 위험하지 않다고, 그것이 안수호의 완벽한 제어 아래 놓여있다고 윗사람들을 설득한 것.
그 덕분에 안수호는 비교적 간단한 2주 간의 검사 끝에 구치소에서 나올 수 있었다. 그 과정에 비록 민채령이라는 외압이 있었을지언정, 눈에 띄는 범법은 존재하지 않았다.
‘채령 선배한테 좀 더 권력이 있었다면, 그래서 선배가 아예 막나가자는 식으로 안수호를 빼돌렸다면 차라리 편했을 텐데. 덕분에 안수호를 다시 잡아들이는 데에 시간이 예상보다 더 걸리게 생겼어.’
성유진의 계획은 이러했다.
우선 미심쩍게 풀려난 안수호의 행적을 언론에 공개, 여론의 압박을 이용해 안수호에 대한 재수사를 성사시킨다. 그로 인해 그가 재구속되면 그 후 태초의 은의 제거에 관해 헌터 자문역으로 그에게 접촉할 생각이었다.
아티펙트든 기생괴수든 헌터의 전문분야였고, 여일의 힘을 쓰면 그 정도 편법이야 어렵지 않았으니까.
게다가 여일은 경찰이 경계하는 태초의 은의 폭주에 대해서도 이미 대책을 어느 정도 세워두었다. 애초에 그것을 이용하기 위해 밀수한 것이 여일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문제는 경찰 내부의 움직임이 지지부진하다는 거로군. 제아무리 여론의 압박이 있다 해도, 안수호 건은 일단 경찰 내부에서 풀어주자고 자발적으로 결정이 난 사항이니까. 자기 자리보전에만 급급한 양반들이 그걸 쉽게 번복할 리가 없지. 적들에게 약점을 쥐어주는 꼴이니까.’
성유진은 경찰 내부에 연줄이 있다. 그러나 사외이사로 있는 여일 쪽과 달리, 그쪽은 정말 연줄에 불과했다. 부하에게 하듯 명령할 수는 없었고, 오히려 성유진 쪽에서 그들의 눈치를 보고 비위를 맞춰줘야 하는 경우도 많았다.
이에 성유진이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전화기를 내려다보았다.
‘결국 그 수를 써야 하나…….’
가능하면 쓰고 싶지 않았다. 효과는 확실하지만 몇 번이고 남용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니었으니까.
그렇지만 태초의 은은 어떻게 해서라도 회수해야했다. 태초의 은의 회수에 여일의 비원인 다중능력자의 탄생이 걸려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니까.
이에 성유진이 단축키를 눌러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길게 이어지던 신호음 끝에 이윽고 전화기 너머의 상대가 전화를 받는다.
“나주용 소장?”
전화 받았습니다. 이사님. 무슨 일이십니까?
전화 상대는 초인재활연구소의 소장 나주용이었다. 동시에 여일의 다중능력 연구 프로젝트를 도맡은 책임자이기도 했다.
“안수호의 재구속과 관련해 경찰 내부의 움직임이 지지부진해서요. 아무래도 소장님의 도움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제 도움이라면…….
잠시 뜸을 들이던 나주용이 이내 그 의미를 깨닫는다.
목표는 누구입니까?
“서울지방경찰청장. 그리고 저번 수사 책임자였던 특임대장과 테러대응과장. 이 셋이면 될 겁니다.”
단발적인 조종입니까. 아니면 영구적으로 남는 암시입니까?
“후자로 하지요.”
예. 곧바로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대답한 나주용이 앉아 있던 자리에서 시선을 돌렸다.
그 시선 끝에는 아빠를 만나러 왔다는 명목으로 연구소에 찾아온 그녀의 딸, 정신조종 능력자인나은주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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