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6화 〉 185. 은둔생활(1)
* * *
한여름은 안수호를 지금껏 상당히 고평가하고 있었다. 그가 보여준 능력이 출중한 건 사실이었으니까.
그랬던 그녀였기에 안수호가 당당하게 자신이 양다리를 걸치고 있노라고 선언한 걸 들었을 때는 그 평가를 재고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녀의 사상은 철저한 능력지상주의였다. 안수호의 사생활이 어떻든 그가 뛰어난 능력을 지녔고 이를 자신이 활용할 수 있다면, 그걸로 족했다.
물론 경영자이자 야심가이기 이전에 한 사람의 여성으로서 그의 행태가 썩 달갑게 보이지는 않았지만.
‘……뭐, 영웅호색이라는 말도 있으니까. 고랭크 헌터들 중에 여자관계 지저분한 사람이 한둘인 것도 아니고.’
한여름은 그러려니 납득하기로 했다. 불륜도 아니고 서로가 공인한 관계라면 자기가 참견할 부분은 아니었으니까.
이에 한여름은 부하직원을 통해 안수호의 두 연인, 지예원과 강하늘에게 그의 소식을 전했다. 물론 구체적인 장소 따위는 말하지 않은 채, 그저 그가 자신이 준비한 거처에서 잘 지내고 있다는 내용만 담아서.
그러나 안수호의 안위가 걱정이던 두 사람에게는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띠링!
깊은 밤중에 도착한 문자에 강하늘은 다급하게 핸드폰을 집어들었다. 번호가 안수호의 것이 아닌 걸 알았을 때는 실망한 기색이 엿보였으나, 곧 문자 내용을 확인한 뒤에는 얼굴 가득 안도의 미소가 피어올라 있었다.
“다행이다……!”
안수호가 한여름을 만나러 간다 해놓고 거의 너댓시간 가까이 연락두절이었기에 강하늘은 계속 가슴을 졸이고 있었다. 그 긴장과 불안감이 단번에 해소되자 그녀는 잔뜩 풀어진 표정으로 한숨을 푹 내쉬며 침대에 대자로 풀썩 누웠다.
뭐가, 다행이에요?
그런 그녀의 옆에 안수호가 두고 간 실비의 분신이 찰싹 달라붙었다.
강하늘의 안위를 최우선으로 여기라는 명령 덕에 분신은 강하늘의 일거수일투족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강하늘은 그런 분신이 꼭 귀여운 애완동물 같아서 기분이 좋았다.
“오빠가 무사하다고 연락이 왔거든. 지금 한여름이란 사람이 준비한 은신처에서 잘 지내고 있대.”
문자에는 안수호와 한여름의 거래에 대해서는 적혀있지 않았다. 그렇기에 강하늘은 한여름이 안수호에게 던진 제안은 물론이요, 안수호가 그 제안에 불응할 시 은신처를 떠나야 한다는 것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아, 그렇지만 오빠가 어디 있는지 모르는 건 좀 아쉽네. 여차할 때 찾아갈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저, 주인님이 어디 계신지 알아요.
“응? 진짜??”
강하늘의 물음에 분신이 앙증맞게 고개를 끄덕였다.
본체하고 연결은 끊어졌지만, 어느 방향에 있는지는 어렴풋이 느낄 수 있어요. 이 느낌을 따라가면, 주인님 계신 곳에 도착할 수 있을 거예요.
“진짜? 그거 진짜지? 진짜진짜진짜지!?”
진짜진짜진짜……인데요?
“그럼 언제든 보러갈 수 있겠네! 다 실비2 네 덕이야! 고마워!”
강하늘이 실비의 분신을 볼에 부비며 한껏 기뻐했다. 실비는 주인의 관심을 부담스러워하는 강아지처럼 이리저리 버둥거렸다.
‘주인님께서 잘 지내라고 했지만, 이 여자 너무 달라붙어서 부담스러워요…!’
분신이라 해도 실비의 힘이면 강하늘에게서 벗어나는 건 어렵지 않지만, 안수호는 실비에게 강하늘에게 어떠한 위해도 끼치지 말라 명령했다. 실비는 머릿속으로 강하늘을 뿌리치는 게 위해인가 아닌가 잠시 고민하다, 이내 포기한 듯 앙증맞은 팔을 축 늘어뜨렸다.
‘지예원이라는 여자는 얌전해보이던데, 제가 그쪽으로 갈 걸 그랬어요…!’
강하늘과 함께한 분신은 고작 하루이틀 사이 상당히 인간다운 사고가 가능해졌다. 강하늘이 원체 감정표현이 다채로운 덕에 그 영향을 깊게 받은 것이다.
반면 상대적으로 겉으로 드러내는 감정이 적은 지예원과 함께한 분신은 그러한 영향의 정도가 훨씬 덜했다.
왜냐하면 분신을 애완동물처럼 귀여워하던 강하늘과 달리, 지예원은 분신을 경계하며 그것과의 대화를 최대한 자제했으니까.
지예원……님?
한참동안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던 지예원에게 실비의 또 다른 분신(강하늘식 작명법에 의하면 실비3에 해당하는)이 살며시 다가왔다. 실비3는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기본적으로 지예원과 접촉하지 않았다. 그녀가 그렇게 명령했기 때문이다.
표정이 많이 안 좋아 보여요. 혹시 무슨 일 있으세요?
그 말에 지예원이 살며시 핸드폰에서 시선을 떼었다. 그녀는 한여름의 부하로부터 받은 문자에 이런저런 생각이 많아진 차였다. 그 속내가 얼굴에 드러난 것이었지만, 그녀는 굳이 그 사실을 분신과 나눌 필요가 없다 여겼다.
“아무것도 아니야.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정말 괜찮은가요?
“그래.”
네…….
대답을 들은 분신은 터덜터덜 방구석으로 가 털썩 앉았다. 자그마한 인형 사이즈의 여자아이가 그러고 있으니 꼭 길가에 버려진 인형 같았다.
‘주인님과 달리 반응이 차가워요. 강하늘한테 간 제 분신도 이런 취급을 받고 있을까요?’
감정 교류가 적다보니 영향도 적다고는 하지만, 실비3는 실비2와는 다른 방향으로 영향을 받기 시작했다. 주로 외로움이나 서글픔 같은 부정적인 쪽으로.
분신의 인격은 본체의 복제에 불과하다. 분신과 복제가 합쳐지면 자연스레 사라질 운명.
허나 고작 하루이틀만에 원본과의 차이가 점점 벌어지기 시작한 두 분신이 훗날 어떤 영향을 초래하게 될지. 그것은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 다음날인 화요일 아침.
포항에 있던 안수호는 한여름에게 전날 제안한 거래를 받아들이겠다 대답했다. 이로 인해 둘 사이에는 나름대로의 협력관계가 구축되었고, 안수호는 한여름이 준비한 은신처에서 앞으로의 타개책을 생각할 시간을 벌게 되었다.
“저 한여름 학생. 혹시 여기 있는 동안 연락이라든가 그런 거는…….”
“오늘 안에 연락용으로 쓸 핸드폰을 준비해줄게요. 그때까지는 불편하더라도 조금만 참아줘요.”
“아…….”
한여름의 말에 안수호는 무언가 할 말이 있다는 듯 말끝을 흐렸다. 이에 한여름이 고개를 갸웃하며 묻는다.
“혹시 급하게 연락하실 곳이 있나요?”
“예. 생각해보니 안부를 전해둘 사람이 더 있었거든요.”
“……설마 세 번째나 네 번째 연인이 있다는 건 아니겠죠?”
한여름의 의심어린 눈초리에 안수호가 고개를 홱홱 저으며 부정했다. 허나 강한 부정은 긍정이 아니던가 싶던 한여름은 좀처럼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마십쇼. 그런 상대 정말 아니니까. 저희 팀장님이랑 설아현 헌터한테 연락하려고 그런 거예요.”
“아, 그러고 보니 그 두 사람이 있었죠.”
안수호의 해명에 한여름은 그제야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던 그녀의 얼굴에 돌연 의미심장한 미소가 피어오른다.
“그 둘한테도 당신이 잘 지내고 있다 전해두면 되는 거죠?”
“예? 아, 예. 어차피 연락용 폰을 받으면 제가 연락하긴 하겠지만, 그래도 일단 생존신고는 빨리 해둬야겠다 싶어서요.”
“알겠어요. 그럼 그 둘한테는 제가 전해둘게요. 설아현 헌터야 면식 있는 사이고. 민채령 팀장하고도 한 번 이야기해보고 싶었으니까.”
“저희 팀장님하고요? 왜죠?”
“그런 게 있어요. 그럼 저녁에 뵙죠.”
그 말만 남기고 한여름은 기사가 몰고 온 차에 타 별장을 나섰다. 멀어져가는 자동차를 보며 안수호가 생각했다.
‘한여름하고 민채령이라. 생각해본 적 없는 조합인데.’
직장 상사인 민채령과 한겨울의 언니인 한여름.
평범하게 생각해선 엮일 건덕지가 없는 조합이었지만, 막상 붙여놓으니 의외로 공통점이 많은 조합이었다. 둘 다 발이 넓다는 점이나, 나름대로의 권력이 있다는 점이나, 혹은 인재 욕심이 많다든가 하는 부분이.
‘비슷한 사람끼리는 서로 알아본다 그런 건가? 어쩌면 한여름 쪽에서 이참에 민채령한테 연줄을 대려는 걸지도…….’
나름대로 한여름의 의도를 유추하며 안수호는 별장 안으로 들어갔다. 샤오메이와 함께 앞으로의 일이나 논의해봐야겠다 생각하며.
그러나.
안수호의 예상과 달리, 한여름이 민채령에게 ‘직접’ 연락하고자 한 이유는 그렇게 건전한 의도가 아니었다.
“…….”
그 시각 속초의 그린하우스 경비대 사무실에서는 민채령이 엄지 손톱을 씹으며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원인은 두말할 것도 없이 안수호의 연락두절이었다.
‘이 미친새끼가 나한테는 보고 하나도 없이…….’
그녀가 안수호와 연락이 안 되는 걸 처음 알아차린 건 오늘 아침 8시. 당장 그녀에게 닥친 일들을 해결하느라 미처 연락할 타이밍이 없던 탓이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가 지예원에게 연락해 사정을 파악한 게 8시 30분.
30분이라는 시간은 그리 긴 시간이 아니긴 하나, 그 사이 그녀가 얼마나 불안에 떨고 노심초사했는지는 이루 말할 수 없으리라.
안 그래도 성유진이 여론전이라는 예상외의 수단을 꺼내왔는데 갑자기 연락이 안 되니 오죽하겠는가. 앞서 말한 그 30분 사이에 민채령은 납치부터 시작해 성유진이 꺼낼 수 있는 온갖 가능성을 떠올리며 혼자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그런데 설마 한여름 쪽에서 먼저 안수호를 도와준답시고 나올 줄이야. 나조차도 내 앞가림에 바쁘던 차에 마침 잘 된 일이긴 하지만. 그 둘의 관계가 그 정도로 깊을 줄은 전혀 몰랐는데…….’
안수호와 한여름은 한 차례 던전 공략을 함께 한 인연이 있다고는 하나 기껏 해야 그 정도 인연에 불과할 터였다. 설아현도 그렇고 한여름도 그렇고, 민채령은 왜 이리 안수호 주변에 예상외의 인맥이 많은지 이해가 안 될 지경이었다.
띠리리리리!
그때 민채령의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화면에 표시된 이름에 그녀가 흠칫 놀랐다.
‘한여름(한성그룹 장녀)’
둘 사이에 번호를 교환할 인연이 있던 건 아니었다. 그저 민채령 본인인 한성그룹과, 정확히는 현 한성그룹의 회장인 그녀의 아버지와 인연이 있었기에 혹시 몰라 번호를 입수한 것뿐.
“여보세요?”
민채령 씨?
“네. 그린하우스 경비대 특수대책과 2팀 팀장 민채령이라고 합니다. 무슨 일로 전화주셨죠? 한여름 학생?”
고로 둘 사이의 대화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의 목소리를 들은 그 순간, 본능적으로 상대방이 자신과 비슷한 동류라는 것을 예감했다.
단번에 저인 걸 알아맞히시네요. 제 번호를 알고 있으셨나 보죠?
“한용수 회장님과는 이런저런 인연이 있어서요. 어쩌다보니 알게 됐네요.”
어쩌다보니는 무슨. 여차할 때 빨대 꼽으려고 미리 알아둔 거겠죠. 제 아버님께 그랬듯. 제 말이 틀렸나요?
“하.”
초장부터 당돌하게 들어오는 그 태도에 민채령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웃었다.
“빨대라뇨? 회장님과 제 사이는 서로의 필요에 따라 맺어진 비즈니스 관계랍니다. 아무래도 한여름 학생이 아직 어리셔서 잘 모르시나 본데”
모르긴 뭘 몰라요. 다 알고 있는데. 저희 아버님이랑 그린하우스 현 이사장이 친구 사이고 민채령 씨는 그 이사장님 의붓딸이잖아요. 아, 혹시 요즘 사회에서는 ‘아빠 친구’나 ‘친구 딸’이라는 관계를 비즈니스 관계라고 부르던가요?
“…………처음 알게 된 계기야 이사장님을 통해서지만, 지금은 개인적으로 연락을 주고받는 사이랍니다. 근데 왜 아까부터 계속 시비죠? 제가 학생한테 뭘 잘못한 기억은 없는데?”
어머나, 시비조로 들리셨다면 죄송해요. 저희 아버님께 달라붙는 젊은 꽃뱀들이 워어어어어낙 많아서, 순간 민채령 씨도 그런 부류인가 싶어서 말이 헛나왔네요. 아, 이것도 말실수예요. 사과할게요?
“…………업무시간이라서요. 같잖은 인신공격이나 하려고 전화한 거면 이만 끊겠습니다.”
아, 잠시만요. 용건 있어서 전화드린 거니까 잠깐만 기다려 봐요.
한여름의 말에 민채령은 끓어오르는 화를 삭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평범한 상대였다면 이따위 인신공격을 가만히 받아줄 이유가 없지만 상대는 한성그룹 회장의 장녀. 여기서 괜히 발끈해서 따박따박 대꾸해봤자 좋을 게 없었다. 게다가 안수호의 일도 있으니.
‘……좆같네 진짜.’
어지간하면 늘 갑의 위치에 있던 민채령은 오랜만에 당해보는 갑질에 기가 찰 노릇이었다. 그때 한여름이 입을 열었다.
민채령 씨 부하 중에 안수호라고 있잖아요? 그 사람을 지금 제가 데리고 있는데…….
드디어 본론인가 싶어 민채령이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이 사람, 혹시 괜찮으시다면 제가 좀 받아가도 될까요?
“뭐?”
이어지는 다음 말에 민채령의 미간에 진한 주름이 새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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