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카데미 경비원으로 빙의당했다-185화 (186/266)

〈 185화 〉 184. 기업과 싸우려면(3)

* * *

한편 그 시각.

속초에 위치한 한성그룹의 저택.

그 2층의 어느 창가에서는 붉은 머리칼의 소녀가 달밤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왜 아닌 밤중에 궁상이냐 하면 별 이유는 없었다. 그저 싱숭생숭하고 초조한 기분에 책도 읽어보고 침대도 뒹굴어보고 하다 끝내 다다른 곳이 창가였을 뿐.

허나 그 초조한 기분은 여전히 나아지지 않았다. 한겨울은 진한 한숨을 토해내며, 그녀의 의식은 벌써 몇 번째일지도 모를 회상 속으로 천천히 흘러들어갔다.

몇 시간 전.

한겨울은 안수호에게 닥친 위기에 대해 이미 소상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뉴스에도 대서특필되고 있었고 류태현이나 다른 지인한테서도 이야기를 들었으니까.

무엇보다 그녀의 언니 한여름이 가진 연줄의 태반은 기본적으로 한겨울도 사용할 수 있었다. 평소에는 학교생활에 전념하느라 쓸 일이 없긴 하다만, 하려고만 한다면 한겨울 또한 한여름처럼 여러 민감하고 비밀스런 정보에 접근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정오가 지났을 즈음 이미 알아버렸다.

안수호가 위험하다는 걸.

그 사실을 마침내 깨달았을 때 그녀는 곧바로 생각했다. 자신이 그를 도와줘야 하는 게 아닐까 하고.

허나 과연 그래도 되는 걸까. 그런 생각이 그녀의 머리를 묵직하게 짓눌렀다.

작금의 상황은 부외자인 한겨울이 보기에도 복잡하기 그지없었다. 아마 여러 진영의 이해관계가 얽히고설킨 복잡한 상황이겠지.

그런 와중에 비록 한성의 후계자라곤 해도, 20살밖에 되지 않은 미숙한 자신이 끼어들어도 되는가.

……제 앞가림조차 제대로 못하는 반쪽짜리 후계자가 자칫 그룹의 미래에 피해를 끼치는 건 아닌가.

한겨울은 본래 넘쳐나는 자신감과 자존심의 소유자였다. 허나 요 근래 계속된 패배의 경험에 그녀의 자신감은 이미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뒤였다.

그렇기에 불안했다.

실패밖에 하지 않던 자신이 또다시 실패해버리는 건 아닐까 하고.

그리고 그렇기에 생각했다.

그런 위험 부담을 안으면서까지 안수호를 도울 필요는 없지 않느냐고.

안수호와 자신은 남남.

기껏 해봐야 몇 번 우연히 마주쳤을 뿐이고.

고작 해봐야 두어 번의 대련과, 그리 길지도 않은 대화 몇 번만을 나눈 사이일 뿐이라고.

그렇게 애써 매정하게 내치려 했지만.

그 초능력만큼이나 불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던 그녀는, 또 그만큼 은근히 따듯한 마음씨를 가지고 있기도 했다. 가만히 있으면 떠오르는 그와 함께했던 기억들에, 한겨울은 차마 안수호를 매정하게 내치지 못했다.

그녀가 안수호에게 특별한 감정을 품은 건 아니었다.

다만 찝찝했다.

안수호와 자신의 관계는 이른바 서로 돕고 돕는 그러한 관계일 텐데, 여지껏 그에게 받기만 하고 정작 자신이 돌려준 건 없다는 사실이 조금 찝찝한.

딱 그 정도 감정이었다. 그리고 한겨울은 그 찝찝함을 해소해야만 했다. 류태현과의 다음 대련을 대비해 그녀는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해야 했다. 아무리 사소하다고 해도 자신의 기량에 영향을 줄지 모를 감정적 문제를 경시할 수는 없었다.

그것이 자신감은 사라졌지만 자존심만은 남은, 그녀 나름의 합리화였다.

하지만 돕는다 해도 어떻게 도와야 할까.

한겨울은 자신의 능력과 그 한계를 명확하게 알고 있었다. 그녀가 아무리 아카데미에선 뛰어나다 한들 결국 아직 학생에 불과했고, 사회적으로는 이제 갓 성인이 된 햇병아리일 뿐.

그런 그녀는 어른들의 세상이 돌아가는 법칙에 대해 거의 알지 못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힘을 어떻게 휘둘러야 할지조차 모를 정도로.

힘이란, 권력이란 익숙한 자가 휘둘러야 비로소 진가를 발휘하는 법.

미숙한 한겨울조차 그 사실만은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주변에 누가 그러한 힘을 가장 잘 다루는지도.

결과, 한겨울은 안수호를 돕기 위해 자신의 언니 한여름을 찾아갔다.

평소에는 그녀에게 지지 않으려고 기를 쓰고 안간힘을 썼지만.

내심 그녀에게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인정받고 싶어 아득바득 노력하며, 결코 그녀에게 의존하려 하지 않았지만.

곤란에 빠진 안수호를 돕기 위해, 그녀는 그나마 남은 자존심마저 내던지고 한여름에게 도움을 구했다.

왜 그렇게까지 행동했는지 당시의 그녀는 알지 못했다.

그리고 몇 시간이 흐른 지금도 여전히.

한겨울은 싱숭생숭한 기분에 휩싸인 채 애먼 달만 올려다보며 한숨을 푹푹 내쉴 뿐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나마,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난 지고 싶지 않았던 거야.’

안수호에게 언제까지고 빚을 진 채로 있고 싶진 않았다.

그와 대등한 관계로 있고 싶었다.

승패라든가 경쟁이라든가 하는 것들과는 무관계한, 그저 수평적이고 대등한 관계.

그것은 그녀가 류태현에게서 바라는 것과는 조금 다른 관계였다.

***

한여름은 안수호에게 한겨울과 있었던 일에 대해 설명해주었지만, 제아무리 언니라 한들 한겨울의 속내까지 소상히 파악하고 있는 건 아니었다. 때문에 안수호는 그녀의 설명을 다 듣고 난 뒤에도 왜 한겨울이 이토록 자신을 신경써준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한겨울이 도대체 왜…….’

그가 기억하길 한겨울은 본래 이런 성격이 아니었다. 성격이 철저하다고 해야 하나, 결코 심성이 나쁜 건 아니지만 적어도 류태현처럼 고난에 빠진 이를 자진해서 도우려 나서는 타입은 아니었다.

‘……뭐, 이유가 뭐든 간에 일이 잘 풀렸으니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되겠지……가 아니군.’

무심코 안심하려던 안수호가 다시금 정신을 붙잡았다. 그는 한여름에게 왜 자신을 도와주었냐 물었고 그녀는 나름 대답을 했지만, 아직 말하지 않은 부분이 있었으니까.

“한여름 학생. 절 돕기로 한 이유 두 개 중에 첫 번째가 분명, 제 상황이 생각보다 더 급박해보여서 라고 했었죠?”

“그렇죠.”

“그렇지만 그건 부차적인 거잖습니까. 애초에 늦든 빠르든 제가 손을 벌리면 도와주려고 했다 말씀하셨고, 그렇다면 제게 원하는 게 따로 있었다는 뜻이잖아요.”

“그것도 그렇죠.”

“그럼 다시 묻죠. 제게 원하는 게 뭡니까? 뭐, 사실 반쯤은 짐작하고 있지만…….”

“아마 그 짐작이 맞을걸요?”

한여름의 말에 안수호는 역시나 싶었다. 돈도 빽도 없는 그에게 한여름이 바라는 거라고 해봤자 하나밖에 없으니.

“저번에 말씀해주신 길드 건입니까?”

“네.”

즉답이었다. 한여름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말했다.

“안수호 씨. 제가 줄곧 당신을 눈독들이고 있었다는 건 예전에도 말씀드렸죠?”

“그랬었죠.”

“그럼 문제. 오늘 아침에 안수호 씨 관련해서 대서특필된 거 보고 제가 어떤 생각을 했을 것 같아요?”

그 질문에 안수호는 생각했다. 현재 뉴스에서 떠들어대는 자신은 수상한 용의자이자 기생괴수를 은닉한 채 사회로 숨어든 범죄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여름이 자신을 도우려고 했다는 건…….

“……전보다 제가 더 탐나게 되었다. 뭐 그런 뜻입니까?”

“탐스럽기 그지없죠. 독이 든 사과가 되어버리긴 했지만, 그 독 때문에 당신도 아쉬운 처지가 됐으니 나름 잘 됐다고 생각해요. 그도 그럴 게, 제가 무슨 대가를 요구할지도 모르는데 이렇게 덥썩 제 도움을 받겠다고 찾아왔잖아요?”

한여름은 안수호의 현재 처지를 훤히 꿰고 있었다. 덕분에 그녀는 도움을 빌미로 일방적으로 안수호에게 자신의 요구를 밀어붙일 수 있게 되었다.

“긴 말하지 않을게요. 추후 제가 길드를 만들면 곧바로 그 길드 소속 헌터로 뛰겠다고 각서 한 장만 써요. 그럼 이번 일과 관련해 전폭적인 지원을 해드리죠.”

“…….”

“표정 좀 펴요. 이미 예상했던 일이잖아요? 어떻게 저번에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권유하자마자 얼굴에 싫은 기색이 그렇게 곧바로 피어오르는지…….”

한여름의 지적에 안수호는 뒤늦게 표정을 가다듬었다. 그 모습을 본 한여름이 피식 웃는다. 이번에는 늘상 짓던 차가운 미소였다.

“뭐, 방금 말씀드린 건 어디까지나 제안 A고. 수호 씨가 싫어할 걸 대비해서 B도 준비해놨어요. 서로 부담은 덜 지고 실리만 챙기는 방법으로요.”

말을 마친 한여름이 커피를 마시다 문득 샤오메이를 바라보았다.

“너무 저희끼리만 이야기해서 미안해요. 피곤하시면 먼저 들어가 계셔도 되는데.”

이 뒤의 이야기는 네가 낄 자리가 아니라고 완곡히 돌려 말하는 것이었다. 브로커로 눈칫밥만은 상당히 먹은 샤오메이는 그 말에 별말 없이 2층의 침실로 향했다.

“……샤오메이는 C급 초인입니다. 집 안에서 하는 말 정도는 마음먹으면 다 들을 수 있을 겁니다.”

“저도 알아요. 그래도 이렇게 말해두면 지금부터 할 이야기를 어디 가서 함부로 떠벌리고 다니진 않겠죠. 더 눈치가 있다면 아예 일부러 안 들으려고 할 테고. 어쨌든…….”

한여름은 샤오메이가 올라간 계단을 슬쩍 노려보았다. 안수호가 보기에는 그 모습이 꼭 벽을 넘어 귀를 기울이고 있을 샤오메이에게 무언으로 경고하는 것처럼 보였다.

“저번에 보니까 안수호 씨, 경비대라는 직업에 남다른 애착을 가지고 계시더라고요? 그게 그때 말했던 것처럼 사명감 때문인지, 아니면 경비대라는 명함 때문에 포기를 못하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요. 혹시 직장 상사 때문에 그러시나? 알아보니까 당신네 팀장분께서 여기저기 꽤 이름 좀 날리셨던데….”

민채령의 비호를 받기 위해 안수호가 경비대라는 직업을 포기하지 못하는 거라고.

이유는 다소 달랐지만 한여름은 안수호가 경비대를 떠날 수 없는 몸이라는 걸 나름 정확하게 짚어내었다. 애초에 스킬의 존재를 모르는 그녀로서는 그 정도까지 유추하는 것이 최대였겠지만.

“그거야 뭐, 마음대로 생각하시죠. 그보다 제안 B라는 것에 대해서 설명해주셨으면 하는데요.”

“서로 한 발씩 물러나는 거죠. 제 쪽에선 당신의 길드 소속 헌터 영입을 포기하는 대신 프리랜서 계약을 제시할게요. 그렇게 하면 당신도 경비대라는 직업을 포기하지 않아도 되겠죠.”

“과연. 확실히 그렇군요.”

말하자면 기사의 무덤 공략 때 그가 객원 멤버로 끼어들었던 걸 명문화하자는 뜻이었다. 그 경우 편법을 동원했던 기사의 무덤 때와 달리 안수호가 합법적으로 헌터 면허를 딸 필요가 있었지만, 그거야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그럼 제 쪽에선 어느 부분에서 물러서야 하죠?”

“간단해요. 당신이 완벽하게 제 사람이 되는 게 아니니까, 조금 전에 말했던 전폭적인 지원은 철회할 거예요. 이곳을 거처로 제공하거나 당신에게 불리한 가짜뉴스 선동을 잠재우는 것 정도는 해주겠지만 그 이상……. 가령 공권력에 개입해서 당신의 체포를 무마한다든가 하는 일은 없을 거예요.”

“원래는 그렇게까지 해주려고 했습니까?”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죠. 어디까지나 당신을 종신 계약으로 묶어둔다는 전제 하에.”

종신 계약이라는 말에 안수호가 속으로 치를 떨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한여름이 제시한 제안 B라는 게 썩 괜찮게 느껴지기도 했다.

안수호는 공간이동으로 집에서 나온 뒤 미리 준비된 차량에 탑승해 여기까지 왔다. 경찰이 설령 그를 체포하려 한다 해도 쉽사리 찾아낼 순 없겠지.

고로 안수호 입장에서는 사태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관망하기 위한 안전한 거처를 얻은 시점에서 충분한 이득을 본 셈이었다. 프리랜서 계약 건이야 기사의 무덤 때를 생각하면 그리 부담이 되는 일도 아니었으니까.

“어때요? 이만하면 당신 입장에서도 꽤 괜찮은 이야기인 것 같은데.”

“지금 바로 결정해야 하는 겁니까?”

“제 성격 급한 거 아시잖아요? 그렇지만 전 당신이 마음에 드니까, 특별히 오늘 밤 하루 정도는 시간을 드리죠.”

한여름이 비어버린 잔을 든 채 자리에서 일어섰다. 반면 안수호의 잔은 거의 줄어들지 않은 채였다.

“내일 오전에 포항 시내에서 회의가 있거든요. 여기서 아침 9시에는 출발할 테니까 그때까지 대답을 정해두세요. 제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여기가 그대로 당신의 은신처가 될 테고, 아니라면 제가 떠날 때 같이 떠나주시면 돼요.”

한여름은 빈 잔을 대충 싱크대에 올려두고 자신의 침실로 향했다. 안수호나 샤오메이와 달리 1층 깊숙한 곳에 있는 방이었다.

“한여름 학생.”

그때 안수호가 그녀를 불러 세웠다.

“왜 그러시죠? 벌써 정한 건가요?”

“그건 아니고. 혹시 전화 한 통만 빌릴 수 있을까 해서요.”

“민채령 팀장에게 의논하려고요?”

“아뇨. 절 걱정하는 사람들이 있거든요.”

그 말에 한여름이 의외라는 듯이 눈을 크게 떴다. 그러나 이내 알만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연인이 걱정되시나 보네요. 그렇지만 전화는 안 되겠어요. 역탐지로 이곳 위치가 들통날 수도 있으니까. 뭐, 제 부하들을 시켜서 안부 정도는 전해줄 수 있지만요.”

“그럼 그거라도 부탁드립니다.”

“알겠어요. 하아, 저는 나름 긴장해가면서 건넨 제안인데 정작 당신은 가장 먼저 신경 쓰는 게 연인이라니. 서러워 죽겠네요.”

연인분께는 잘 지내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전해두라 시킬게요. 그렇게 덧붙인 한여름이 이번에야말로 침실로 들어서려 했다.

“잠깐만요.”

그러나 이번에도 안수호가 그녀를 불러 세웠다. 또 뭐가 남았냐는 듯 눈을 부라리는 그녀에게 안수호가 멋쩍게 말했다.

“그, 가능하다면 제 옆집에 사는 여자한테도 안부를 전해줄 수 있을까요? 예지원이라는 사람인데.”

“……그 사람은 또 누군데요? 내연녀라도 되나요?”

“아뇨. 제 여자친구입니다.”

“네?”

그 말에 한여름이 잠시 놀랐다가, 이내 미간을 찡그리며 물었다.

“…………제가 지금 잘못 들은 건가요? 당신 연인은 강하늘이라는 아카데미 1학년 학생이잖아요?”

“둘 다 제 여자친구예요. 한쪽이 바람 상대라든가 그런 게 아니라 그, 공인된 양다리 같은 거라서.”

“…………………………에?”

다음 순간, 그녀의 표정이 더욱 썩어들어갔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