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2화 〉 181. 닥쳐오는 위험
* * *
그로부터 하루 전. 일요일.
전날 성유진과의 협상은 겉으로 보기에는 원만하게 끝난 것 같았다. 허나 안수호는 그렇다 해서 마냥 안심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비록 성유진이 자신의 제안을 받아들이긴 했지만 사람의 생각은 언제든지 바뀔 수 있는 것이고.
어쩌면 태초의 은에 대한 대가로 제시한 정보를 다 넘긴 뒤에 뒤늦게 그를 배신할 수도 있는 것이며.
되도록이면 그러지 않기를 바라지만, 실은 거짓말로 제안을 받아들인 척 하는 것일지도 몰랐기에.
어쩌면 지나친 걱정일지도 몰랐다. 그렇지만 유비무환이라고,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할 수 있는 준비는 다 해두는 것이 상책이었다. 특히 안수호 자신에 대해 노골적으로 악의적인 이 세상에서는 더더욱.
그리하여.
안수호는 협상으로부터 하루 지난 일요일 아침, 자신의 두 연인들과 만났다. 지금까지의 상황을 직접 설명해주고, 만약을 대비한 보험을 들어두기 위해.
“…………그래서 이게 그 보험이라는 거지?”
지예원의 물음에 안수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미심쩍은 눈으로 안수호를 보던 지예원은, 이내 더욱 미심쩍은 눈을 하며 방바닥에 펼쳐진 탁자 위를 바라봤다.
안녕하세요.
탁자 위에는 귀여운 4등신 여자아이 형상을 한 실비가 있었다. 사이즈는 스마트폰 정도로, 주머니에 넣으면 딱 들어갈 크기.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안녕, 하세요?
그러나 문제는 그게 하나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탁자 위에 똑같이 생겨먹은 세 명의 여자아이가 각자 손을 흔들고 있는 진풍경에 지예원이 허탈하게 묻는다.
“도대체 뭐야 이게?”
“태초의 은. 저번에 해보니까 이렇게 일부를 떼어놔도 자아를 유지한 채 알아서 잘 움직이더라고.”
실비는 나눌 수 있다. 이미 어제 회담 장소로 향하기 전 실험을 통해 확인한 부분이었다. 이후 회담에서 돌아온 그는 추가적인 실험을 통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아내었다.
1. 실비의 본체에서 떨어져나간 부분은 기본적으로 평범한 은으로 돌아간다. 단, 떨어진 덩어리가 전체 질량의 20% 이상일 경우 자아를 유지한 채 독립된 분신으로 기능한다.
2. 본체와 분신의 자아는 기본적으로 동일하다. 단, 분리 이후의 경험은 서로 공유하지 않으며 이에 따라 분리 시간이 길어질수록 조금씩 자아에 차이가 생기기 시작한다. 또한 분리된 분신은 안수호와의 정신적 연결이 끊어진 상태다.
3. 본체와 분신이 다시 합쳐질 경우 본체는 분리되었던 분신의 기억과 경험을 습득하며, 이에 따라 안수호 또한 그와 연결된 본체를 통해 분신이 보고 들은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 외에도 실험을 통해 알아낸 자잘한 사실들을 안수호는 조리 있게 설명했다.
“지금 탁자 위에 있는 실비는 각각 본체 하나랑 분신 둘이야. 분신의 질량은 전체의 25%. 이 둘을 너희 두 사람한테 호위 역할로 붙여줄 생각이야.”
혹시 성유진이 그와 관련된 두 사람에게 해코지를 할 수도 있으므로, 그에 대한 보험책으로써.
안수호가 명령하자 분신 둘이 뽈뽈뽈 걸어가 지예원과 강하늘 앞에 멈춰 섰다.
“와, 진짜 귀엽네요. 꼭 잘 만든 인형 같아요.”
강하늘의 반응은 무척 호의적이었다. 손바닥 위에 분신을 올린 그녀가 신기해하는 눈으로 분신을 콕콕 찌르거나 쓰다듬거나 했다. 분신 또한 사람의 손을 탄 애완동물처럼 그녀의 손길에 엉기며 귀여움을 발산했다.
“끄응…….”
반면 지예원은 누가 봐도 껄끄러워하는 게 눈에 보였다. 강하늘처럼 핸들링은커녕 손가락 하나 대지 않으려는 모습. 이에 그녀에게 할당된 분신이 시무룩한 표정으로 탁자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 모습을 본 지예원은 조금 애처롭다는 생각도 들었으나, 그렇다고 강하늘처럼 분신을 마냥 살갑게 대할 수는 없었다.
“왜 그래 예원아? 혹시 뭐 걸리는 점이라도 있어?”
“아니 그냥. 이게 놀이공원에서 날뛰었던 그 괴물이라 생각하니 좀 껄끄러워서.”
“더 이상 폭주할 염려는 없으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얘는 이제 내 명령에 무조건 복종하니까.”
맞아요. 나, 주인님 명령 잘 들어요.
“들었지?”
“끄응…….”
아무리 주인이 ‘우리 개는 물지 않아요.’라고 말한다 한들, 개 자체를 무서워하는 사람이 그 두려움을 쉽게 극복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지예원의 상황이 딱 그랬다.
“나한텐 네가 준 이 십자가도 있으니까 괜찮은데…….”
“냉염의 십자가가 가진 방어 능력은 일회용이잖아. 그거 가지고는 안심이 안 돼서 그래.”
“내 한 몸 정도는 스스로 지킬 수 있어.”
“그렇겠지. 그렇지만 만약이란 게 있는 거잖아.”
그 확고한 태도에 지예원은 결국 한 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슬쩍 손등을 내밀자 분신이 기쁜 표정을 지으며 그녀의 팔을 타고 올랐다.
“……히익.”
지예원의 어깨가 한 차례 부르르 떨렸다. 그 모습을 보며 안수호가 안도의 숨을 뱉는다.
“실비 말로는 분신은 떨어진 채로 사흘 정도 지나면 활동을 멈출 거래. 그러니 여유 잡아서 이틀에 한 번 씩은 날 만나러 와.”
실비의 연료가 탈리스만의 마력이기 때문이었다. 안수호의 말에 두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네요. 오빠 자주 볼 명분도 생기고. 사실 오빠가 예원 언니네서 당분간 살겠다고 말했을 때 좀 배 아팠거든요. 사정이 사정이니 마지못해 허락하긴 했어도.”
그 말에 안수호가 멋쩍게 고개를 돌렸다. 샤오메이가 그의 집에 들어선 지 이제 이틀째. 그 말은 즉 지예원과 안수호의 동거가 시작된 지도 이틀째라는 소리였다.
“그래서, 절 따돌리고 즐기는 알콩달콩 동거 생활은 즐거우신가요?”
“그럴 줄 알았는데 별 거 없더라. 애초에 뭘 즐길 상황도 아니고.”
강하늘의 짓궂은 질문에 지예원이 힘없이 대답했다.
두 사람의 동거가 시작된 건 금요일 밤.
허나 당일은 살림살이 이사 때문에 바빴고 그 다음날은 아침부터 설아현과 예카테리나가 찾아왔다. 알콩달콩한 동거 생활을 즐길래야 즐길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애초에 동거가 처음인 것도 아니니까.’
동거 생활은 한창 지예원이 안전가옥에 구금되어 있을 시절에 이미 질릴 대로 겪어보았다. 물론 그때는 지금과 달리 연인 사이가 아니었지만.
“그래도 부럽네요. 하루 24시간 내내 오빠랑 같이 있을 수 있다니…….”
강하늘이 부러움 반 불만 반의 표정으로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그래도 그 정도에서 불평을 멈춘 건, 그녀 또한 작금의 상황이 위험하게 돌아가고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리라.
‘나중에 다같이 어디 여행이라도 갈까.’
안 그래도 강하늘과 잡혀 있던 여행이 이번 사태로 인해 취소됐었으니. 사태가 마무리되면 제대로 여행 계획을 잡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것도 다 사태가 잘 마무리되었을 때의 일이었지만.
‘일이 이대로 잘 풀려야 할 텐데.’
안수호는 두 연인에게 찰싹 달라붙은 분신을 바라보았다.
비록 4분의 1에 불과한 분신이라 해도 태초의 은은 태초의 은. 저것들이 있으면 어지간한 물리적인 위협으로부터는 안전할 거라고. 안수호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안수호의 예상과 달리, 그들이 가장 먼저 마주한 난관은 물리적인 적이 아니었다.
그로부터 하루 뒤, 현재.
“으음.”
이른 아침. 방 바닥에 이불을 편 채 자고있던 안수호는 자신의 감각에 전해진 위화감에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위화감의 정체는 집 전체를 감싸고 있던 실비가 그에게 보낸, 일종의 경고였다.
“무슨 일인데 그래……?”
사정을 묻던 안수호의 얼굴이 이내 경악으로 물든다. 아직 침대 위에서 새근새근 잠들어있던 지예원을 뒤로하고 그가 창가로 향했다.
그러자.
“이게 뭐야 씨발…….”
다음 순간 그는 자신의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좁은 골목에 꽉꽉 들어찬 방송국 차량들. 그리고 그 사이를 바쁘게 오가는 기자와 카메라맨.
이른 아침에 벌어진 때아닌 난리통에 주변 주민들이 안수호처럼 창문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과 안수호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으니.
바로 그 소란의 당사자냐 아니냐의 차이였다.
‘왜 우리 집 앞에 기자들이 모여 있는 거지?’
그 광경에 안수호는 묘한 데자뷰를 느꼈다.
그래, 채소연이 미국에서 벌였던 난리 때문에 온갖 매스컴에서 그녀를 취재하러 왔을 때. 아카데미 정문 상황이 딱 지금과 같았노라고.
허나 채소연은 지금 이곳에 없었다. 그렇다는 건 즉 저 기자 무리의 원인은 다른 사람이란 뜻.
불안해진 안수호는 곧바로 스마트폰을 켰다. 뉴스라도 검색해볼 생각이었지만 그럴 필요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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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버랜드 사태’ 용의자는 아카데미 경비원? 용의자 A씨의 정체에 네티즌 충격 잇달아…
“기생괴수 제거되지 않았다.” 경찰 발표와 상충. “내부 조사 통해 진상 규명할 것.”
최초 제보 올라온 익명게시판 수사 착수. 그러나 서버 소재지 문제로 난항.
용의자 A씨는 무허가 헌터?! 게이트 관리국 직원의 충격 폭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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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털 사이트 메인에 떡하니 박혀있는 뉴스 헤드라인들. 그것들을 본 순간 안수호는 단번에 사태를 이해했다.
‘성유진이다.’
성유진이 손을 쓴 거다. 자신의 오른손에 아직 실비가 남아있음을. 그리고 자신이 민채령을 통해 찝찝한 방법으로 풀려났음을 그가 언론에 알린 거라고.
그게 아니고서야 구치소에서 나오고 며칠 간 잠잠하다 이제 와서 난리가 날 리가 없었으니.
삐리리리리리!
그때 안수호의 스마트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민채령으로부터의 전화.
화면에 표시된 이름 석 자에 아주 잠깐 안수호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가 재빨리 전화를 받았다.
“예. 팀장님.”
……아직 이른 시간인데 깨어있었네. 그럼 혹시 지금 무슨 상황인지도 알고 있니?
“예. 아무래도 성유진이 언론에 정보를 흘린 것 같습니다.”
아마 지금 집 앞에 기자들 잔뜩 깔려있을 거야. 절대로 밖에 나가지 말고 집 안에만 박혀있어. 모르는 번호로 오는 연락은 전부 무시하고. 나도 지금 뭐가 정확히 어떻게 된 건지 알아보는 중이니까…….
갑작스러운 상황에도 침착한 그 목소리에 안수호가 실낱같은 희망을 품었다.
분명 상황은 심각했다. 그렇지만 민채령이라면 무언가, 방법이 있지 않을까. 안수호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하아아아……. 망할.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온 막막한 한숨에 그 기대는 단번에 무너져 내렸다. 불안해진 안수호가 그녀에게 묻는다. 이제 어떡해야 하냐고.
그 간절한 물음에 민채령이 힘없이 대답했다.
……어떡하긴 뭘 어떡해. 끝났지 뭐. 보도가 터지기 전이라면 모를까, 이미 이렇게 터져버렸는데.
안수호의 기대와는 180도 다른, 그녀답지 않게 무력한 대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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