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8화 〉 177. 회담 전(1)
* * *
한겨울과의 대화가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실습 또한 끝이 났다. 안수호는 그 길로 곧장 류태현과 강하늘에게 향해 샤오메이의 거취에 관해 이야기했다.
샤오메이를 자신의 집에 들이고, 자신은 지예원의 집에서 당분간 살겠노라고.
그 결정에 류태현은 피식 웃었고 강하늘은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 표정으로 안수호를 노려봤다. 그러나 사정이 사정인만큼, 결국 두 사람 다 안수호의 결정을 존중해줬다. 그 외에 방법이 없었으니까.
그리하여.
끼이이익.
안수호가 운전하는 검정 세단이 그의 집 앞에 멈췄다. 시간은 주위가 완연한 어둠에 잠긴 오후 9시.
“여기야?”
뒷좌석에 타고 있던 샤오메이가 실망한 눈초리로 원룸을 올려다본다. 그야 척 봐도 부실해보이는 시설에 실망하지 않는 게 이상하겠지.
“이래서야 차라리 호텔 전전하는 게 훨씬 안전하겠는데.”
“그 부분은 안심해도 돼. 최고의 경비 시스템이 있거든.”
영문 모를 표정을 한 샤오메이를 데리고 안수호가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문 앞에 선 그가 오른손 장갑을 벗었다.
“실비.”
그의 부름에 오른손 손등에서 태초의 은, 실비가 뽈록 소리와 함께 튀어나왔다. 철퍽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흘러내린 은색 덩어리가 천천히 형상을 갖춰나가기 시작한다.
“……응?”
헌데 그 형상이 조금 예상 외였다. 안수호가 미간을 찌푸리며 묻는다.
“뭐야 그 모습은.”
안수호에게서 떨어져나간 실비는 중학생 정도로 보이는 여자아이의 형상을 취했다. 형상만 취했다 뿐이지 겉은 여전히 번쩍이는 은색 일색이었으나, 그것만 아니면 사람이라 착각할 정도로 세세한 디테일까지 제대로 구현되어 있었다.
주인님. 거미. 싫다 했어요. 그래서 바꿨어요. 좋아하는 모습으로. 이 모습이면. 안 징그럽죠?
그 말에 안수호가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뒤늦게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저번에 실비가 거미 모습으로 돌아다닐 때 다른 모습으로 변신해달라 말했던 것 같다고.
허나 아무리 그렇다 한들 굳이 여성의 형상을 취할 건 뭔가. 게다가 왜 굳이 ‘주인님이 좋아하는 모습’ 따위의 수식어를 붙이는가. 더불어 왜 하필이면 성인 여성이 아닌 딱 봐도 어려 보이는 모습인가. 오해 사기 딱 좋게.
“미친…….”
안수호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자 아니나 다를까, 사정을 모르던 샤오메이가 질색하는 표정으로 실비와 안수호를 번갈아 바라봤다.
“취향이 참 남다르네. 이런 거 하려고 나한테서 태초의 은을 뺏어간 거야?”
“……지금 이건 나도 모르는 일이야. 이 녀석이 멋대로 이런 모습으로 변한 거라고.”
“당신이 좋아하는 모습이라던데? 게다가 뭐? 주인님? 너 설마 아티펙트한테 자기를 주인님이라 부르게 시킨 거야?”
“…….”
변명하기도 귀찮아서인지. 혹은 변명의 여지가 없어서인지. 안수호는 샤오메이의 말에 답하지 않은 채 실비에게 손짓했다. 그러자 실비가 작게 고개를 끄덕인다.
다음 순간.
철퍼억.
실비의 형상이 그대로 녹아내리더니 사방으로 얇게 퍼져나갔다. 일부는 안수호의 방 안으로. 일부는 지예원의 방 안으로. 벽이나 바닥의 틈새로 들어간 부분이 있는가 하면 난간이나 지붕 위로 올라간 부분도 있었다. 마치 건물 전체에 자신의 몸을 뻗으려는 듯이.
그 심상치 않은 광경에 샤오메이가 묻는다.
“지금 뭘 한 거야?”
“태초의 은을 건물 전체에 배치해놨어. 이래두면 만에 하나 침입자가 와도 곧바로 알아차릴 수 있어. 태초의 은의 감각은 나랑 연결되어 있으니까.”
거기에 더해 안수호가 대응하기 전에 실비가 알아서 침입자에 대해 대응할 수도 있다고. 안수호의 설명에 샤오메이는 신기하다는 눈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일단 들어가자. 예원이 퇴근하려면 아직 1시간 정도 남았으니까. 그 사이에 정리할 거 정리하고 좀 쉬고 있자고.”
안수호는 샤오메이를 데리고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크흠.”
눈앞에 펼쳐진 날 것 그대로의 자취방 풍경에 샤오메이의 미간이 다시 한 번 찌푸려졌으나, 좀 전처럼 대놓고 불만을 입에 올리진 않았다.
“일단 짐부터 풀자.”
두 사람은 샤오메이가 가지고 온 짐부터 풀기 시작했다. 그러나 짐이라고 해봐야 한국에서 급하게 산 옷가지 몇 벌과 생활용품 정도가 끝이라, 채 10분도 걸리지 않았다. 주거시설 또한 자그마한 원룸이다보니 설명할 것도 없었다.
할 일이 없어지니 두 사람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안수호가 멋쩍게 물었다.
“뭐라도 마실래?”
“혹시 차 있어?”
“마트에서 산 싸구려 녹차 티백은 있는데.”
“……됐어 그럼. 그냥 물이나 줘.”
샤오메이가 침대에 털썩 걸터앉았다. 안수호는 그런 그녀에게 물을 건네준 뒤 맞은편 방바닥에 앉았다. 그가 샤오메이를 올려다보며 묻는다.
“그래서 이젠 어떡할 거야? 당분간은 여기서 지내도 상관없지만, 그렇다고 영원히 계속 있을 건 아니잖아. 앞으로 계획은 있어?”
“당연하지. 태현 씨 방에 박혀있던 2주 동안 내가 아무런 준비도 안 해뒀을 줄 알아?”
자신만만한 말씨와 달리 그 얼굴에는 언뜻언뜻 불안감이 엿보였다. 계획이야 있긴 해도 본인 스스로도 그 계획에 확신이 없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일단 확인차 묻겠는데. 나나 겨울동맹한테 태초의 은을 돌려줄 생각은 추호도 없는 거지?”
“그 건은 이미 이야기 끝났잖아. 실비가 나한테서 떨어지고 싶어 하질 않아서 돌려주고 싶어도 돌려줄 수가 없다고. 너나 성유진이 실비를 설득한다면 모를까.”
안수호의 뻔뻔한 대답에 샤오메이는 기가 찰 노릇이었다. 그러나 이미 결론이 난 문제를 더 따지고 들어봐야 시간 낭비였다. 그녀가 한숨을 푹 내쉬며 말을 이었다.
“저번에 당신이 그랬잖아. 무슨 정보?를 제공해서 겨울동맹하고 협상하겠다고. 그 협상이 잘 끝난다면야 이대로 한국에 있는 편이 안전하겠지만……. 만약 아니라면 외국으로 튀어야지. 겨울동맹이나 공안이 힘을 못 쓰는 제3국으로.”
“공안이 댁을 쫓는다는 건 중국에서 범죄자 신세가 됐다는 거잖아. 그럼 여권 같은 것도 다 막힌 거 아니야?”
“아마 그렇겠지. 거래에 엮인 상무위원 눈치 보느라 공개적으로 수사하진 못해도, 그럴듯한 죄목 뒤집어 씌워서 인터폴에 수사 협조를 요청하는 것 정도야 쉬운 일이니.”
샤오메이의 예상대로 중국 공안은 이미 인터폴을 통해 국제적인 규모로 샤오메이의 도주로를 차단한 상태였다. 그런 그녀가 한가롭게 여권을 들고 공항에 가봤자 곧바로 체포되어 공안의 손에 끌려가게 되겠지.
허나 거래 때문에 밀입국을 밥먹듯이 하는 그녀에게 그 정도는 아무런 방해도 되지 못했다.
“여권이 막혀도 이 나라를 나갈 방법은 얼마든지 있어. 위조 여권을 사용해도 되고 위장 신분으로 어디 여객선의 선원으로 위장하는 수도 있지. 뭣하면 동료 브로커를 통해 밀항하는 방법도 있고. 물론 뭐든 100% 안전한 방법은 아니지만…….”
“갈 나라는 정했어?”
“우선은 일본으로. 그 다음에는 태평양 건너 미국이나 멕시코로 튀어야지.”
나름대로 활로를 모색하는 그녀의 모습에 안수호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내심 걱정했는데 어떻게든 살아나갈 방법이 있긴 한가보구나 하고.
그때.
띠리리리리리.
안수호의 주머니 속에서 휴대전화가 요란하게 울렸다. 설아현으로부터의 전화였다.
“여보세요?”
수호 씨. 지금 통화 가능하세요?
“예 괜찮습니다. 무슨 일로 전화 주셨죠?”
갑작스런 전화에 샤오메이의 표정에 살짝 경계의 빛이 서렸다. 안수호는 그런 그녀에게 괜찮다고 눈짓했다.
수호 씨. 혹시 내일 시간 비어 있으신가요?
“내일……이면 하루종일 비어있긴 합니다. 그렇지만 당분간 서울로 올라가진 못할 것 같은데요.”
낮의 일 때문에 그렇죠? 걱정하지 마세요. 내일은 제가 그쪽으로 갈 거니까.
“일은 괜찮으신가요?”
토요일이잖아요. 저희 회사 주말에도 일 시키는 그런 악덕 기업 아니에요.
안수호는 사장이란 사람이 그렇게 말하는 것도 참 웃기다 싶었다. 전화기 너머에 들리지 않게 피식 웃은 그가 이어서 말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이쪽에 오시는 거죠?”
급하게 의논할 게 있어서요. 그게…….
잠시 말끝을 흐리던 설아현이 이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성유진한테서 연락이 왔어요. 내일모레 일요일에 다같이 한 번 만나자고.
“예? 성유진한테서 말입니까? 아니, 그보다 다같이라는 건…….”
저랑 수호 씨, 그리고 성유진 이렇게 셋이서 삼자대면하자는 거죠. 뭐, 저도 카챠를 데리고 갈 거고 성유진 쪽도 혼자 오진 않을 테니 삼자대면은 아니겠지만.
설아현의 말에 안수호는 적잖이 놀랐다. 타이밍이 워낙 공교로워서.
성유진 쪽 사람으로 보이는 침입자가 샤오메이의 납치를 시도한 게 오늘 낮이었다. 헌데 그 시도가 실패하자마자 곧바로 설아현에게 직접 연락하다니. 안수호는 성유진 쪽이 급해도 어지간히 급하구나 싶었다.
혹은 그만큼 태초의 은이 그들에게 중요한 물건이거나.
“회담 장소랑 시간은요?”
시간은 일요일 저녁. 장소는 저희 쪽에서 정하라 그랬어요. 수호 씨가 서울로 올라올 여건이 안 되니까 아마 그쪽에서 만나게 되겠죠.
“그거 참 반가운 소리네요.”
안수호는 당분간 멀리 나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민채령의 권고도 권고지만 샤오메이가 그의 집에 머물고 있었으니까. 언제 공안이나 겨울동맹 쪽에서 해코지를 할지 모르는 이상 가능하면 집 주위를 떠나지 않는 편이 좋았다.
‘잠깐.’
그때 안수호의 뇌리에 하나의 의문이 떠올랐다.
“아현 씨. 회담 시간은 일요일이라면서요. 근데 왜 아현 씨는 내일 내려온다는 거죠?”
그야 일요일을 대비해서 최대한 준비해야하니까요.
“준비……요?”
멋쩍게 되물은 안수호가 잠시 후 아! 하고 탄성을 뱉으며 그제야 설아현의 말뜻을 알아차렸다.
“준비라고 해서 뭔가 했더니, 미래시를 말씀하시는 거군요.”
그래요. 그거 말고 뭐가 있겠어요. 회담까지 이틀밖에 안 남았으니까 그 전에 최대한 많이 관측해봐야죠.
바로 어제. 설아현은 안수호에게 닥쳐올 끔찍한 미래를 목격했다. 어두운 지하 주차장에서 오른팔이 잘린 채 쓰러져있는 그의 모습을.
그 끔찍한 미래를 막기 위해 설아현은 어제 안수호의 손을 붙잡은 채 미래시를 수십 번씩 반복해댔다. 랜덤하게 떠오르는 단편적인 장면들 속에, 어쩌면 그 미래를 타파할 수 있는 힌트가 숨어있지 않을까 하며.
비록 그날의 시도는 무의미한 미래만을 관측하며 결국 실패로 돌아갔지만…….
……제발 이번에는 좀 쓸만한 미래가 보였으면 좋겠네요.
그렇게 말하는 설아현의 목소리에서는 미세한 불안감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고 있었다.
***
그로부터 이틀 뒤. 일요일.
성유진은 속초역 플랫폼을 나서며 찌뿌둥한 몸을 풀며 있는 힘껏 기지개 켰다. 그 뒤로 이번 회담을 함께 할 그의 부하직원이 따라붙었다.
“차량은 준비되어 있습니까?”
“예. 20분 전부터 역 앞에서 기다리는 중이라고 합니다.”
그 말에 성유진은 계단 위에서 역 앞 대로변을 살폈다. 역전 광장 너머에 넓게 뻗은 6차선 도로. 그 갓길에 선 검정 세단을 발견한 그가 그쪽으로 바삐 발걸음을 옮겼다.
‘여기도 참 오래간만에 와보는군.’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3년만인가. 오랜만에 밟아보는 속초 땅에 성유진은 감회가 새로웠다. 그의 머릿속에 이제는 추억의 한 페이지로 장식된 학창시절의 기억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그때.
“어머? 이게 누구야? 우리 귀여운 후배님이잖아?”
한창 추억에 젖어있던 그의 귓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마침 아카데미 시절을 회상하고 있던 터라 더욱 익숙할 수밖에 없는 목소리.
성유진이 고개를 돌리자 건물 기둥 그늘에서 민채령이 모습을 드러냈다. 마치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회사 일이다 길드 일이다 한창 바쁠 시기에 네가 여긴 웬 일이래?”
“채령 선배…….”
“약속 시간까지 아직 좀 남았지? 괜찮으면 나랑 잠깐 어디서 이야기 좀 할까?”
그렇게 말한 민채령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떠올랐다. 노을을 등지고 있어서 그런가 묘하게 섬뜩해 보이는 미소.
그 미소를 보며 성유진이 생각했다.
3년이나 지났건만 저 미소는 지금도 그때 그 시절 그대로라고.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