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7화 〉 176. 한겨울(2)
* * *
“성장의 여지가 있다……?”
안수호의 말을 곱씹는 한겨울. 이내 그녀의 미간에 진한 주름이 잡히기 시작한다. 성장의 여지가 있다니, 그건 꼭 자신을 얕잡아보는 사람이 할법한 말이지 않은가.
“……지금 저한테 시비거는 거예요?”
“시비라뇨. 진심으로 하는 말입니다. 저는 한겨울 학생이 아직 충분히 더 강해질 수 있다 생각하거든요.”
한겨울이 지적한 건 말의 사실 여부가 아니라 그 태도였지만 안수호는 눈치 채지 못했다. 그녀의 표정이 더욱 일그러지려 할 때, 안수호가 작게 덧붙였다.
“저번 랭킹전. 마침 퇴근 시간이랑 겹쳐서 저도 직관했습니다. 개인적으로 막상막하였다고 생각해요.”
“……그게 막상막하로 보였다니, 보는 눈이 없어도 한참 없네요.”
“답지 않게 겸손한 말이네요. 한겨울 학생이라면 당연히 아슬아슬하게 졌다고 자부할 줄 알았는데.”
그 말에 한겨울이 째릿 눈을 흘겼다. 그러나 안수호에 대한 짜증보다도 속에서 끓어오르는 자조가 먼저 그녀의 정신을 적셨다.
한숨을 푸욱 내쉰 그녀가 무릎을 더욱 꽈악 끌어안는다. 마치 힘없는 벌레가 구석에서 웅크리듯이.
“……입에 발린 위로는 집어치워요. 별로 위로도 안 되니까.”
“입에 발린 위로가 아니라 진심으로 하는 말입니다. 한겨울 학생이 태현이한테 진 거는 순전히 랭킹전이라는 틀 안에서 싸웠기 때문이니까요.”
근접전 메인인 류태현과 달리 원거리 화력전 위주로 싸우는 한겨울은 랭킹전에서 여러 가지 제약이 따른다.
우선 모든 공격에 있어서 상대방이나 관중의 피해를 우려해 화력을 제한해야 하는 것은 물론, 경우에 따라선 기술 자체를 사용하지 못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또한 장외 판정 때문에 무조건 근, 중거리전이 강제되며 히트 앤 런 전술을 구사하기도 힘들다.
“만약 랭킹전이 아니라 진짜 싸움이었다면, 하다못해 제가 겨울 학생하고 대련했던 탁 트인 공간에서 싸우기라도 했다면 이긴 건 한겨울 학생이었을 겁니다.”
실제로는 어떨지 모르지만 안수호는 일부러 그렇게 말했다. 한겨울의 의기소침함을 조금이라도 덜어내고자.
“……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요. 어차피 제가 류태현하고 싸우는 건 랭킹전에서만인데.”
퉁명스럽게 뱉는 한겨울은 여전히 차가운 표정이었지만, 새침하게 고개를 돌리는 그 입가에는 아주 작은 기쁨의 미소가 번지려 하고 있었다.
설령 입에 바른 칭찬에 불과하더라도, 누군가가 자신을 인정해주었다는 사실이 순전히 기뻐서.
“한겨울 학생 말이 맞아요. 두 사람이 싸우는 건 랭킹전 안에서죠. 날 것 그대로의 싸움이 아닌 규칙이 정해져 있는 대련. 그 안에서 이기려면 우선 수 싸움에서 이겨야 해요.”
“수 싸움이요?”
“두 사람의 스타일은 각각 근접전하고 원거리전으로 극명하게 갈리고, 각자 영역에서는 확실하게 우위를 점할 수 있죠. 그렇기에 수 싸움이라는 겁니다.”
어떻게든 상대방을 자신이 유리한 영역으로 끌어들이는 수 싸움.
저번 랭킹전에선 그 수 싸움에서 류태현이 이긴 것이라고. 안수호의 말에 한겨울은 ‘그래서 뭐 어쨌다는 거냐’는 표정으로 다음 말을 재촉했다.
“……한겨울 학생은 원거리에서는 이미 류태현을 확실하게 압도하고 있습니다. 원거리전 능력을 더 갈고닦는다 한들 큰 효과는 없겠죠. 그렇다면 차라리 약점을 개선하는 편이 나을 거란 이야기입니다.”
“그래봤자 근거리에선 절대 류태현을 이길 수 없어요.”
“이기진 못해도 발목 정도는 잡을 수 있겠죠.”
현재는 근접전에 있어선 류태현이 그야말로 압도적인 우위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한겨울의 근접전 능력이 조금이라도 성장한다면.
최소한 류태현의 맹공을 어느 정도 버틸 수 있는 수준으로. 그러다 틈을 만들어 다시 거리를 벌려 원거리전을 재개할 수 있을 정도 수준만 되어준다면.
분명 전투의 양상은 상당히 달라지리라. 그리고 어쩌면 류태현에게 이길 수 있을 지도 모른다고.
“…….”
나름 격려랍시고 한 말이었으나 한겨울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그녀가 어이가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무슨 대단한 말을 하나 했더니 뻔하디 뻔한 탁상공론이네요. 싸움에 변수가 얼마나 많은데 당신 말처럼 잘 풀리기만 하겠어요?”
“변수가 많으니까 보완할 수 있는 건 하나라도 보완해야죠. 말했잖아요. 랭킹전은 수 싸움이라고.”
안수호의 말에 한겨울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말은 뻔하디 뻔한 말이었으나, 그렇기에 틀린 구석이 하나도 없는 옳은 말이었다.
허나 그것을 인정해버렸다간 조금 전 자신이 한 말을 스스로 부정해버리게 된다.
이제 와서 근접전을 보완해봤자 아무런 소용도 없다던 자신의 말을 부정해버리게 되고.
그 말이 곧 류태현과 비교당하는 상황이 싫어 도망치기 위해 뱉은 치졸하고 구차한 변명임을 들켜버리게 되리라.
“…….”
그렇기에 한겨울은 입을 꾹 다문 채 토라진 아이처럼 고개를 푹 숙였다. 안수호는 그런 그녀를 말없이 지켜봤다.
‘본인도 알겠지. 류태현을 이기기 위해선 근접전 능력을 연마하는 게 급선무라는 것쯤은.’
그럼에도 이렇게 혼자 실습을 빠져 견학하고 있는 건 앞서 말했듯이 류태현과 비교당하고 싶지 않은 마음 때문.
허나 그것이 전부는 아닐 것이라며. 안수호는 한겨울의 속내를 예측해보았다. 원작에 드러났던 그녀의 심리와, 직접 그녀와 마주하며 느낀 한겨울이라는 인간에 대해 생각하며.
‘두려운 건가. 패배를 딛고 다시 한 번 노력해도 또 져버릴까봐.’
이번 랭킹전에 임하면서 한겨울은 이번에야말로 류태현을 이길 수 있으리라 자신했다. 실제로 나름 승산이 보이기도 했고.
허나 결과는 여느 때와 같은 패배.
그리고 그 패배는 한겨울에게 진한 무기력함을 안겨주었다.
어차피 안 될 거라고. 다시 한 번 노력해봤자, 약점을 보완하고 또 도전해봤자 아마 이길 수 없을 거라고.
‘………………그래서 뭐 어떡하라고요. 이제 와서 대인격투술을 연마해봤자, 류태현의 반의 반도 못 따라갈 텐데.’
그 학습된 무기력함은 조금 전 그녀의 말과 태도에서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지난 랭킹전으로부터 약 3주. 안수호가 잠시 눈을 뗀 사이 한겨울은 그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힘들어하고 있었다.
“그, 한겨울 학생.”
안수호는 뭐든 간에 한겨울이 기운을 낼 수 있을만한 이야기를 해야겠다 싶었다. 고민하던 안수호가 이내 입을 연다.
“저번에 저랑 태현이가 놀이공원에서 여명단 암살팀 놈들하고 싸웠거든요. 혹시 이야기 들으셨나요?”
“……건너건너 듣긴 했어요. 근데 그건 왜요?”
“그때 태현이가 싸운 상대가 한겨울 학생이랑 비슷한 스타일이었거든요. 원거리전 위주로 싸운다든가. 방출계 능력자인 점도 비슷하고. 그 외에도 또…….”
안수호가 말하는 이는 여명단 암살팀 9위, 코드네임 ‘큐브’였다. ‘에너지 탄환’이라는 이름의 초능력을 지닌 그 남자의 전투스타일은 분명 한겨울과 닮은 구석이 상당히 있었다.
“아무튼. 태현이가 그 남자랑 싸우면서 꽤 고전하더라고요. 근데 제가 보기에 단순 화력만 놓고 보면 그 암살팀 남자보다 한겨울 학생 쪽이 훨씬 강해 보였거든요?”
“……하고 싶은 말이 뭐예요?”
“한겨울 학생은 충분히 류태현을 이길 수 있을 거라는 이야기에요. 화력은 이미 충분하니까요. 물론 좀 전에 말했듯 근접전은 보완해야겠지만…….”
지리멸렬하게 말을 이어가면서 안수호는 자신이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가 싶었다. 뭐라도 위로의 말을 해주려고 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또 훈수 따윌 두고 있지 않은가.
허나 어쩔 수 없었다. 그저 힘내라는 알맹이 없는 위로 가지고는 한겨울의 마음을 조금도 움직일 수 없을 테니까. 물론 그렇다고 훈수질이 좋은 방법인 것도 아니었지만.
“아무튼! 다음엔 무조건 이길 수 있을 거예요! 태현이 걔 그거 강해보이지만 알고 보면 별 거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그렇게 계속 침울해하지 말고, 조금만 더 노력해보죠. 혹시 제가 뭐 도와드릴 수 있는 일 있으면 얼마든지 도와드릴 테니까. 가령 뭐, 또 같이 대련해준다든가, 아니면 태현이한테 은근슬쩍 약점이라도 물어본다든가…….”
횡설수설 말을 잇던 안수호는 결국 멋쩍게 입을 다물며 고개를 숙였다.
안수호가 생각했다.
소설 속 주인공들은 이런 장면에서 곧잘 히로인을 위로하고 잘 보듬어주곤 하던데. 그게 글로 읽을 땐 쉬워보여도 막상 직접 해보려니 여간 어려운 게 아니라고.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 안수호 본인부터가 진심으로 그녀를 걱정하고 있는 게 아니지 않은가.
물론 걱정하는 마음이 없지야 않다만은, 인간 대 인간으로 그녀를 염려하는 한편 소설의 전개를 따지며 그녀를 스토리의 톱니바퀴로 보는 시각도 여전히 존재했으니.
“……저기요.”
그때 한겨울이 그를 불렀다. 두 눈동자에 의문의 빛을 가득 담은 채.
“예전부터 궁금했던 건데, 왜 당신은 이렇게까지 저한테 잘해주려고 하죠?”
“네?”
“좀 이상하다 생각했거든요. 류태현하고야 나름 친한 것 같지만, 저랑은 거의 남남이나 다름없고. 우리 둘 사이에 인연이라고 해봐야 우연히 동아리실에서 마주친 거나, 제 쪽에서 일방적으로 대련을 부탁한 것밖에 없는데…….”
헌데 왜 이렇게 자신에게 잘 해주냐고. 그 질문에 안수호는 말문이 턱 막혔다.
그가 한겨울을 위해 물심양면 힘쓰는 이유.
이유 자체는 단순명쾌했다. 그녀가 원작의 주요 캐릭터요, 히로인이었으니까. 앞으로 류태현의 곁에서 온갖 사건에 휘말릴 그녀가 조금이라도 빨리 성장했으면 했으니까.
“그게…….”
허나 그렇게 곧이곧대로 답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메타픽션 개그소설도 아니고, 빙의물에서 캐릭터에게 그런 사실을 밝히는 건 금기 중의 금기였으니.
그렇기에 안수호는 고민했다. 한겨울이 납득하고 넘어갈 수 있을만한 변명을.
“……굳이 이유를 대자면 일종의 개인적인 욕심이죠.”
“개인적인 욕심……이요?”
고개를 갸웃하며 되묻는 한겨울을 보며 안수호가 입술을 달싹였다. 급하게 생각해낸 변명에 한겨울이 과연 납득할까 고민되었지만, 일단 말을 꺼낸 이상 물러설 수는 없었다.
“네. 개인적인 욕심으로 저는 한겨울 학생이 잘됐으면 좋겠거든요. 구체적으로는 한겨울 학생이 류태현을 이겨줬으면 해요.”
“왜 그래줬으면 하는데요?”
“한 번쯤은 류태현 그놈이 누구한테 지는 꼴을 보고싶어서요.”
“네……?”
그 대답에 한겨울이 당황을 금치 못했다. 그런 그녀를 앞에 두고 안수호가 이어서 말한다.
“류태현은 강합니다. 그것도 더럽게 강하죠. 그래서 그런가, 애가 좀 자기 강함에 취해서 기고만장한 감이 없잖아 있어요. 은연중에 다른 사람들을 자기보다 약한 존재로 본다고 해야 하나. 물론 성격은 착하고 예의도 바른 좋은 동생이지만, 그런 낌새가 조금씩 느껴지더라고요.”
안수호가 말하는 감상은 실제로 그가 느낀 바가 아니라, 원작에 서술되었던 류태현에 대한 한겨울의 심리를 그대로 옮긴 것이었다. 즉 약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지금 한겨울이 가지고 있는 감상과 대동소이했다.
그랬기에 한겨울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안수호가 마치 자신의 머릿속을 들여다 본 것처럼, 자신이 생각하는 그대로를 말하고 있었으니까.
“뭐 그만큼 강하니까 남들을 자기보다 아래로 보는 게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에요. 그렇지만 좀 아니꼽긴 하잖아요. 그래서 한 번쯤 누가 그 녀석 콧대를 콱! 밟아줬으면 했거든요.”
그리고 현재 류태현의 주변에서 류태현을 짓밟을 가능성이 가장 높은 이가 바로 한겨울이라고.
안수호가 말한 질 나쁜 농담 같은 이유에 한겨울은 당황을 금치 못했다.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어이없는 탄성이 작게 새어나오고.
“……푸흣! 아핫! 아하하하하하!”
이내 그 탄성은 자그마한 웃음으로 바뀌었다. 무엇이 그리 웃긴지, 혹은 하도 어이가 없던 것인지, 한겨울이 어깨를 들썩이며 웃어댔다.
“……이게 그렇게 웃깁니까?”
“흐흣! 아뇨, 그, 조금 예상 외라서요. 설마 이런 이유로 저한테 잘해주고 있었을 줄은. 저는 뭐 경비원으로서의 의무라든가 그런 대답이 나올 줄 알았는데.”
“아.”
‘그러게. 그냥 저렇게 답할걸.’
한겨울이 꺼낸 모범답안에 안수호는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것 같았다. 그러나 이미 버스는 떠난 뒤였다.
“뭐, 그래도 충분히 이해되는 이유네요. 확실히 류태현 그 사람이 그런 면이 있긴 하죠. 남들을 자기 아래로 보는 거. 저도 비슷한 인상을 받아서 당신하고 비슷하게 생각했어요. 언젠가 반드시 그 기고만장한 콧대를 꺾어버리고 싶다고.”
허나 한겨울은 안수호의 대답을 조금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오히려 이렇게까지 자신과 비슷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줄 몰랐다며 신기해하는 눈치.
그 반응에 안수호는 다행이라며 한시름 놓았다. 그런 그를 바라보며 한겨울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후우. 줄곧 기분이 별로였는데 한바탕 웃으니까 좀 낫네요. 고마워요.”
“별말씀을. 기운을 차렸다니 다행이네요.”
“예. 기운 차려야죠. 언제까지고 의기소침해있을 순 없으니까…….”
한겨울이 멀리서 실습 중인 류태현을 바라봤다. 그녀의 얼굴에 떠오른 복잡한 감정들.
“제가 류태현을 밟아버리는 모습이 보고 싶다 그랬죠?”
허나 다음 순간 그 감정들은 다 사라지고 이내 진한 미소만이 남았다. 뒤늦게 일어선 안수호를 돌아보며, 그녀가 자신만만한 얼굴로 말했다.
“기대하세요. 다음번 랭킹전에는 반드시 제가 이길 거니까.”
그 환한 미소에 안수호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