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6화 〉 175. 한겨울(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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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름지기 회사 생활에선 직급이 깡패다.
평소 툭하면 대립하기 일쑤였던 안수호와 민채령은 그날따라 같은 생각을 머리에 담았다. 비척비척 아카데미 바깥으로 걸어 나가는 이름 모를 침입자를 보며 둘이 동시에 짜증 섞인 한숨을 뱉는다.
“팀장님. 이게 지금 말이 되는 일입니까?”
“……말이 안 되지.”
“경비대장님이 성유진하고 한패인 걸까요?”
“…….”
민채령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담벼락에 등을 툭 기댄 채 품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막 불을 붙이려던 그녀를 안수호가 만류한다.
“여기 금연입니다. 정문 바로 옆이잖아요.”
“……한 대 정돈 괜찮잖아.”
“경비대 팀장이라는 사람이 금연구역에서 담배를 뻑뻑 피워대면 다른 사람들이 뭐라 그러겠습니까? 좀만 걸어가면 흡연실 있으니 거기서 피우죠.”
두 사람은 학생들이 바쁘게 오가는 정문을 뒤로했다. 대로변 구석, 나무그늘 아래 작게 마련된 흡연실로 향하며 민채령이 말한다.
“좀 전에 김수현이랑 성유진이 한패일 거냐고 물었잖아.”
“예.”
“아마도. 정황상 그렇겠지. 그게 아니고서야 김수현이 이런 이해 안 되는 지시를 내릴 리가 없으니까.”
흡연실에 들어온 민채령은 기다렸다는 듯이 담배에 불을 붙이고 안수호에게도 한 대 권했다. 그러나 진즉에 담배를 끊은 안수호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민채령이 쓸쓸한 표정으로 담배를 빨아들인다. 비단 안수호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김수현은……. 경비대장이라는 직함에 딱 들어맞는 사람이었어. 성격도 올곧았고. 아카데미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물불 안 가리는 사람이었지. 그러면서도 일에 있어서는 각 팀의 재량권을 존중해주는 좋은 상사였고.”
그렇기에 이상했다. 뻔히 범죄를 저지른 침입자를 풀어주는 것도, 민채령과 안수호가 맡은 사건에 직급을 내세우며 개입해댄 것도. 무언가 이상해도 단단히 이상했다.
김수현답지 않았다.
그렇기에 민채령은 생각했다. 답지 않은 일을 하는 데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요, 아마 김수현이 성유진과 연결되어 있을 거라고.
“김수현은 나랑 다를 줄 알았는데…….”
경비대 팀장이란 명함을 달고 온갖 범죄에 손을 대는 자신과 달리, 우직하고 올곧게 앞으로 나아가는 정의로운 사람일 거라 생각했다며.
민채령은 희뿌연 담배 연기와 함께 진한 탄식을 허공에 흩뿌렸다. 두 사람의 관계를 모르는 안수호는 왜 그녀가 그토록 침울해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비통한 그녀의 심정만은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힘내십쇼 팀장님.”
안수호가 착잡한 얼굴로 한숨을 뱉었다. 그가 흡연실 의자에 걸터앉으며 말한다.
“계급을 앞세워 부하를 강압적으로 핍박하는 상사에게 휘둘리는 기분이 어떤지 저도 잘 압니다. 착잡하시겠죠. 그렇지만 너무 침울해하지 마세요. 이 또한 지나갈 일이니까. 전 늘 그렇게 생각하며 버텨왔거든요.”
“…………너 지금 그거 나 들으라고 하는 소리니?”
“그럼 위로를 벽에다 대고 합니까? 당연히 들으시라고 하는 소리지.”
하여튼 힘내세요. 그렇게 덧붙인 안수호가 피식 웃었다. 민채령도 따라 웃었다. 짓궂은 농담이 기분 나쁠 법도 하건만, 그 농담이 안수호 나름의 위로라는 걸 알기에 나름 괜찮게 느껴졌다.
“경비대장님과 성유진이 한패라면 아카데미 안도 안전하지는 않겠네요.”
“그렇겠지. 생각해보니 그 남자가 가지고 있던 학생증도 겉보기에는 진짜 같았는데. 그것도 김수현을 통해 얻은 거려나?”
“경비대장님이든, 아니면 다른 연줄이 있든 했던 거겠죠. 겨울동맹 수준의 길드가 아카데미에 연줄이 없을 리가 없으니.”
범죄조직인 여명단마저 쁘락치를 심어두었는데 정규 길드는 오죽하겠는가. 비단 김수현이 아니더라도 아카데미 안에는 성유진과 긴밀한 사이인 자들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었다.
“팀장님. 업무용 차량 좀 빌려도 되겠습니까?”
“어디에 쓰려고?”
“샤오메이를 빼내려고요. 원래 주말 전까지 기회를 보다 몰래 빼내려고 했는데, 이미 들켰다면 이 이상 조심해할 필요는 없겠죠.”
“네 집으로 데려갈 거지?”
“예. 다만 데리고 가기 전에 먼저 하늘이한테 말해두려고요. 사정이 있다곤 해도 집에 다른 여자를 들이는 거니까…….”
“공처가 납셨네. 아주 부러워 죽겠어.”
“팀장님은 남자친구 안 사귀십니까?”
“날 감당해줄 수 있는 남자가 있다면. 근데 없잖니? 아무리 둘러봐도.”
자신을 감당해줄 남자라니. 평범한 여자가 말했다면 그저 그럴 말이었지만 민채령의 입에 담기면 전혀 다른 의미가 되었다. 안수호는 류태현 정도가 아니고서야 민채령의 모든 걸 감당할 수 있는 남자가 과연 있겠냐며 내심 혀를 내둘렀다.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어디로? 하늘이한테?”
“예. 직접 가서 말하려고요. 마침 곧 수업도 끝날 테니까…….”
“그래. 가서 잘 설득해보고 겸사겸사 내 안부도 전해주렴.”
“팀장님 안부요? 뭐라고 말입니까?”
“감시하기 귀찮게 여기저기 싸돌아다니지 말고 기숙사 안에 콕 박혀있으라고. 그리고 조만간 한 번 얼굴 좀 봤으면 하는데.”
“팀장님이 하늘이랑 왜…….”
앞에 건 이해가 돼도 뒤에 건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며. 안수호가 고개를 갸웃하자 민채령이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그냥. 궁금한 게 몇 개 있어서?”
“궁금한 거라니…….”
안수호가 그게 뭐냐고 물으려 했으나 민채령은 손을 휘휘 내저으며 그를 내보냈다. 어차피 물어봐도 제대로 대답해주진 않을 거라며, 안수호는 강하늘을 만나러 떠났다.
‘시간표에 지금 과목이 대인격투술이라 나오니까, 그럼 체육관에서 실습 중이겠네.’
강하늘이 준 시간표를 살피며 안수호가 체육관으로 향했다. 체육관은 그린하우스 안에 수십 곳이 넘게 있었지만 안수호는 능숙하게 1학년 1분반이 수업 중인 체육관을 찾을 수 있었다.
그가 찾은 체육관 바닥에는 복싱 경기 따위에 쓰일 법한 사각 링이 잔뜩 늘어서 있었다. 학생들은 그 위에 두 명씩 올라가 한창 실습 중이었다.
‘하늘이는…….’
안수호의 시선이 주위를 훑었다. 곧 그는 링 위에서 어설픈 자세로 관절기를 연습하는 강하늘을 찾을 수 있었다.
파트너는 그녀의 옆방에 사는 류설이었는데, 강하늘이 팔을 비틀고 있는 와중에도 친절하게 이런저런 설명을 덧붙이며 그녀의 실습을 돕고 있었다.
‘수업 끝날 때까지 10분 정도 남았으니 좀 기다릴까.’
그렇게 생각한 안수호가 체육관 구석으로 향했다.
“응?”
그러자 저 멀리 혼자 실습에 참가하지 않은 학생이 보였다. 붉은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채 힘없이 벽에 기대어 있는 여학생.
안수호는 성큼성큼 그 여학생에게 다가갔다. 여학생 쪽도 곧 그런 그의 존재를 알아차렸다. 날카로운 눈매로 안수호를 흘긴 여학생이 깜짝 놀라더니, 이내 홱 고개를 돌리며 그를 외면했다.
그러나 안수호는 굳이 여학생에게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이네요 한겨울 학생. 그동안 잘 지냈나요?”
“아뇨.”
한겨울은 날 선 태도로 짧게 툭 내뱉곤 다시 고개를 돌렸다. 안수호와 대화하고 싶지 않다는 제스처.
“겨울 학생은 실습 안 하나요? 다른 학생들은 다 하고 있는데…….”
“…….”
허나 안수호는 물러서지 않았다. 저번 대련 이후 한겨울의 상태를 걱정하던 그였기에 이참에 그녀의 상태를 볼 심산이었다.
안수호가 결코 물러서지 않을 거라는 낌새를 느꼈는지, 한겨울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대답한다.
“……컨디션이 안 좋아서요. 오늘 실습은 교수님께 말씀드리고 견학으로 빠졌어요.”
“컨디션이요……?”
그 말에 안수호가 의아함을 내비친다. 한겨울은 결코 그런 애매한 이유로 연습을 빠지는 캐릭터가 아니었는데.
‘저번 패배 때문에 실의에 빠진 건가? 하긴, 류태현도 한겨울이 계속 자길 피해댄다 그랬으니.’
썩 달가운 상태는 아니었다. 안수호가 원했던 건 패배를 통해 한겨울이 자신의 오만함을 되돌아보는 것이지, 실의에 빠져 무기력하게 시간을 보내는 게 아니었으니.
넌지시 운을 띄우며 위로나 격려라도 해줄까 싶었던 안수호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한겨울의 자존심을 생각하면 그런 같잖은 위로는 오히려 독이다. 그녀에게는 보다 가혹하게, 냉정하게 현실을 짚어주는 게 효과적이었다.
“저번 패배가 어지간히 충격이었나 보군요.”
“네?”
순간 안수호의 말에 반응하지 못한 한겨울의 표정이 이내 찡그려지기 시작한다. 안수호가 왜 저런 말을 꺼냈는지 파악한 그녀가 불쾌함을 내비친다.
“……당신이 상관할 바 아니에요.”
“너무하군요. 랭킹전을 대비해서 같이 대련까지 한 사이인데 상관 좀 해도 되지 않습니까. 패배 한 번에 실의에 빠져 이렇게 무기력해지는 모습을 보면 저도 마음이 편치만은 않다고요.”
“착각하지 마요. 누가 실의에 빠지고 누가 무기력해졌다는 건가요? 왜요, 설마 제가 실습 빠진 것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는 건가요?”
한겨울이 하! 하고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뱉었다.
“그럼 왜 실습에 참가 안 한 겁니까?”
“도움이 안 되니까요. 대인격투술은 저한테 전혀 쓸모없는 과목이에요. 쓸데없이 실습에 시간을 낭비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오후 훈련에 대비해서 컨디션을 조절하는 편이 훨씬 나아요.”
“대인격투술이 쓸모없긴 왜 없습니까. 오히려 겨울 학생이 가장 시급하게 보완해야 할 부분이 거기인데.”
한겨울 딴에는 나름대로 잘 변명했다 싶었지만 안수호가 보기엔 기가 찰 노릇이었다. 제아무리 한겨울이 원거리전 위주로 싸우는 초인이라 해도 근접 격투술이 쓸모가 없을 리가 없다. 오히려 류태현이 근접전 위주이니만큼 그에게 대항하기 위해서라도 실습에 열심히 임해야 할 입장이었다.
안수호가 그 부분을 지적하자 한겨울은 말을 잇지 못했다. 기실 그녀도 자신이 근접전 기술을 보완해야 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습에 빠진 이유는 간단했다. 바로 류태현과 비교당하는 상황 자체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당신이 뭘 안다고 그래요? 고작 경비원 주제에…….”
애써 외면하고 있던 그 사실을 상기시킨 안수호의 말에 한겨울이 신경질적으로 답했다.
“언제 한 번 운 좋게 저한테 이겼다고 당신이 저보다 위인 줄 아시나 본데, 착각하지 마세요. 이제 당신 따위는 제 발 끝에도 미치지 못하니까. 그런 주제에 기고만장해서는 별 같잖은 조언을 조언이랍시고…….”
“같잖은 조언이라. 하지만 한겨울 학생도 사실 내심 알고 있잖아요? 원거리전 능력을 극한까지 단련했는데도 류태현한테 번번이 지는 건 결국 근접전투 능력이 부족해서라는 걸.”
원거리전에 한해 한겨울은 자신이 당장 끌어낼 수 있는 포텐셜을 사실상 전부 끌어낸 상태였다. 그 이상 성장하기 위해선 그 외의 분야에서의 개선이 필요한 건 자명한 이치.
거듭 말하지만 한겨울은 그 사실을 뻔히 알고 있었고, 다만 외면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안수호는 그녀가 외면한 사실을 가감 없이 드러내며 그녀의 연약한 부분을 가차 없이 찔러댔다.
“뭘 잘난 듯이 말하고 있는 거예요. 저보다 약한 주제에…….”
“분명 전 겨울 학생보다 약하죠. 그렇지만 약하다 해서 조언을 못하는 건 아니에요. 오히려 겨울 학생보다 약한 저조차 눈치를 챌 정도로 지금 겨울 학생이 품고 있는 약점이 명확하다는 거겠죠.”
“그러니까 당신이 뭘 안다고 그딴 식으로 말하느냔”
“계속 이야기가 뱅뱅 도는데 그만 인정합시다. 한겨울 학생이 류태현보다 근접전에서 밀리는 건 사실이고, 지금 당장 발전시킬 수 있는 여지가 큰 분야도 근접전이잖아요. 안 그렇습니까? 제 말이 틀렸어요?”
“…….”
사정없이 쏘아대는 안수호의 팩트에 한겨울은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벽에 등을 기대고 있던 그녀가 천천히 무릎을 굽히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러고는 제 무릎을 끌어안으며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그래서 뭐 어떡하라고요. 이제 와서 대인격투술을 연마해봤자, 류태현의 반의 반도 못 따라갈 텐데.”
그 말에 한겨울이 이처럼 실의에 빠진 진짜 이유가 담겨 있었다.
자신의 근접전 능력이 약하다는 걸 한겨울이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러나 애써 그 사실을 외면해온 건, 외면해올 수 있었던 건 순전히 그녀의 막강한 원거리전 재능 덕분이었다.
발화능력이라는 축복 받은 초능력. 거기에 더해 노력 여하에 따라 S급 초인의 반열에 오를 수 있는 남다른 자질까지.
그러한 여건 덕에 한겨울은 그동안 자신의 약점을 외면하고 강점만 갈고닦아 왔음에도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다. 주위 학생들은 물론이고 어지간한 프로 헌터들조차 한겨울의 상대가 되진 못하겠지.
허나 그 성장도 이제는 한계에 다다랐다. 앞서 말했듯 한겨울은 원거리전 능력에 있어서 이미 최대한의 포텐셜을 끌어낸 상태였으니까.
단련을 거듭한다면 그야 더욱 성장하기는 하겠다만은, 어디까지나 군더더기를 덜어내고 기술을 숙달하는 수준이지 이 이상 드라마틱한 성장은 불가능할 터.
그런 그녀가 더욱 강해지기 위해선 이제 그간 외면했던 자신의 약점과 마주해야 했다. 허나 그녀의 자존심이 그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하물며 그 약점이 경쟁 상대인 류태현이 가진 가장 큰 강점이기도 했으니 오죽하랴. 시작하기도 전에 실의에 빠지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자신이 아무리 노력해봤자 근접전에선 류태현을 이길 수 없을 거라고.
이기기는커녕 발끝에도 미치지 못할 거라고.
앞선 랭킹전 패배와 더불어 그런 부정적인 생각들이 겹치자 그녀는 비탈길을 굴러내려가는 바위덩이처럼 빠르게 무기력해졌다. 그 결과가 바로 작금의 상황이었다.
그렇기에.
“반의 반도 못 따라가면 뭐 어떻습니까. 한겨울 학생이 근접전만으로 류태현한테 이기려도 하는 것도 아닌데.”
안수호가 한겨울 옆에 풀썩 주저앉았다. 가까이 다가서는 그를 보며 한겨울이 무슨 소리를 하려는 거냐는 듯 눈을 부라린다.
그런 한겨울을 보며 안수호가 생각했다.
“중요한 건 한겨울 학생한테 아직 성장의 여지가 남아있다는 거잖아요. 안 그런가요?”
채찍질은 충분히 했으니, 이제는 격려하고 보듬어줄 차례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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