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3화 〉 172. Home sweet home(2)
* * *
그날 밤.
구치소에서 나온 기념으로 두 연인들과 함께 식사를 마친 안수호는 그날 심야 아카데미로 향했다. 류태현과 샤오메이를 만나기 위해서.
만남의 장소는 류태현이 살고 있는 1학년 남자기숙사 A동 옥상.
외부인인 샤오메이는 아카데미 안을 마음대로 나다닐 수 없다. 얼핏 보면 평범한 학생처럼 보이니 괜찮지만, 혹시라도 수상하게 여긴 경비원이 학생증을 요구하거나 신원을 밝히라 할 수도 있으니까.
하물며 통행인원이 줄어드는 한밤중이라면 더더욱 눈에 띌 위험이 높아지리라.
그런 맥락에서 옥상은 밀회 장소로 딱 좋았다. 남의 눈에 띌 염려도 적고, 류태현의 방이 최상층이었던 덕에 창문을 통해 금방 오갈 수 있었으니까.
“잠시 안쪽 좀 살펴볼 수 있을까요?”
그리고 안수호의 경우는 당당하게 정문으로 들어가면 그만이었다. 정문을 지키던 경비원에게 대원증을 제시한 그는 여유롭게 옥상으로 향했다.
끼이이익.
옥상 문을 열자 두 남녀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정확히 오전 0시 정각이었다.
“형…….”
류태현이 반갑다는 목소리로 그에게 다가섰다. 그의 입장에선 안수호가 그렇게 체포된 이후 처음 만나는 것이었으니까.
“댁이 안수호야?”
그러나 류태현이 반가움을 나타낼 새도 없이 샤오메이가 그 앞을 막아섰다. 그녀가 앙칼진 목소리로 다짜고짜 안수호에게 고했다.
“태초의 은. 당장 내놔.”
협상의 여지 따위 없다는 듯 단호한 목소리.
만나자마자 본론부터 꺼내는 그 모습에서 안수호는 샤오메이가 얼마나 급한 상황에 놓였는지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녀의 청을 들어줄 수 없었다. 그가 은색으로 물든 자신의 오른 손등을 내보이며 말했다.
“그건 안 되겠는데요. 태초의 은은 이미 저한테 귀속되어버려서.”
“허튼 수작 부리지 마. 태초의 은은 귀속 아티펙트가 아니야. 이미 중국 정부에서 실험했거든.”
“……원래는 귀속 아티펙트가 아니긴 하지. 근데 이젠 귀속이나 다름없거든.”
샤오메이의 날선 태도에 존댓말을 그만두며 안수호가 실비에게 명령했다. 그러자 그의 손등에서 뽈록, 하고 자그마한 은색 슬라임이 튀어나왔다.
“태초의 은이 자아를 가진 아티펙트인 건 알고 있지? 저번 폭주사태 이후로 이 녀석이 나한테 단단히 반해버려서. 누가 뭐라 해도 절대 나한테서 떨어지려 하지 않을 거야.”
맞아요. 난 주인님한테서 안 떨어질 거야. 주인님한테 붙어있으면. 계속 배부르게 지낼 수 있으니까.
“들었지? 그쪽 사정 생각하면 나도 돌려주고는 싶은데, 사정이 여의치 않네.”
“사정이 여의치 않기는 무슨! 그걸 말이라고 해?!”
샤오메이가 불같이 화내며 외쳤다. 적막한 밤중에 퍼지는 목소리에 류태현이 노심초사하며 주위를 살폈다. 다행히 기숙사 건물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샤오메이 씨. 조금만 조용히”
“제가 지금 조용히 있게 생겼어요?! 태현 씨도 이 사람 말하는 꼬라지 봤잖아요! 뭐? 사정이 여의치 않아서 못 돌려줘?! 자기가 나한테서 일부러 훔쳐갔으면서 이제 와서 그딴 식으로 말하는 건 무슨 심보야?!”
“내가 가로채지 않았으면 여명단이 가로챘겠지. 그때 당신 노리고 덤벼든 놈들 여명단 암살팀 놈들이야. 그건 알고 있었어?”
여명단 암살팀, 이라는 말에 샤오메이의 표정이 살짝 굳는다. 그녀의 뇌리에 하마터면 죽을 뻔했던 그날의 기억이 재생된다. 허나 이내 그녀가 고개를 가로젓는다.
“……꼭 내가 무조건 물건을 빼앗겼을 거라고 단정하듯이 말하네. 뭐 미래라도 보고 왔나봐?”
“뻔한 일이니까. 그쪽이랑 거래할 예정이었던 겨울동맹 소속 헌터는 같은 시각에 여명단 놈들에게 습격당했고. 거래 정보를 알아낸 놈들은 그 많던 군중 사이에서 당신을 특정해서 접근했지. 만약 내가 한가람으로 위장해서 물건을 받아내지 않았더라도 당신은 결국 놈들에게 태초의 은을 빼앗겼을 거야.”
“그래서? 그놈들 대신 당신이 태초의 은을 가져가서 다행이다, 뭐 그런 말이야?”
“특급 아티펙트가 테러리스트 손에 떨어지는 것보단 낫잖아?”
두 사람은 한걸음도 물러서지 않은 채 팽팽하게 맞섰다. 그 사이에 낀 류태현은 그야말로 가시방석에 앉은 것 같았다.
“……차라리 테러리스트 손에 떨어지는 게 낫지. 덕분에 난 당장 죽을 판이라고………….”
샤오메이가 힘없이 뇌까렸다.
공안과 겨울동맹. 그 양 세력을 적으로 돌리게 된 샤오메이의 목숨은 지금 경각에 달해 있었다. 그나마 지금은 보안이 철저한 아카데미에 숨은 덕에 무사하지만 류태현이 숨겨주는 것도 며칠이지, 언젠가는 아카데미를 떠냐아 할 터.
그리고 그때가 바로 샤오메이의 운이 다하는 때이리라. 국가재산 반출에 대한 공안의 처벌. 혹은 40억을 날리게 된 겨울동맹의 사적재제. 어느 쪽이든 샤오메이의 미래는 한없이 어둡기만 했다.
“……형. 형이 하는 말이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지만 샤오메이 씨 사정도 헤아려줄 수 없을까? 이유가 어쨌든 간에 형이 아티펙트를 가로챈 건 사실이니까. 난 형이 샤오메이 씨를 도와줘야 한다고 생각해.”
명색이 주인공이라고 하는 말이 아주 올곧았다.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어. 그래서 지금 이렇게 나온 거 아니야. 태초의 은을 돌려주는 건 안 되겠지만, 그 외에 내가 할 수 있는 게 있다면 최대한 도와줄게.”
선뜻 한 발자국 물러서는 안수호의 태도에 샤오메이가 의외라는 듯 눈을 커게 떴다. 그러나 바로 다음 순간 다시금 그녀의 표정이 어두워진다.
“당신, 혹시 현찰로 40억 있어?”
“아니.”
“아니면 공안에 연줄이라든가?”
“없지.”
“그럼 그쪽이 도와줘봤자 해결되는 건 아무것도 없겠네.”
비관적인 샤오메이의 말에 안수호가 생각에 잠겼다. 그가 머릿속으로 현 상황을 정리한다.
“……지금 당신에게 적대적인 세력이 공안이랑 겨울동맹, 그 둘뿐인가?”
이윽고 그가 꺼낸 질문에 샤오메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아티펙트를 빼돌린 당 위원은 진즉에 돈 받아먹고 내뺐으니까. 아, 아니다. 태초의 은이 한국으로 반출된 사실이 만천하에 알려졌으니 입막음한답시고 죽이려들지도 모르겠는데.”
“그렇지만 공안이든 당 위원이든 한국에선 크게 힘을 못 쓸 거 아냐? 당신이 중국으로 돌아간다면 모를까.”
“맞아. 대신 여기 있다간 40억을 날린 S급 길드 간부들이 날 재제하겠지. 협박해서 그만큼 돈을 뜯어내거나, 아니면 복수 내지는 본보기로 죽이려들지도.”
“중국 쪽은 몰라도 겨울동맹 쪽이라면 내가 손을 쓸 수 있어.”
안수호의 말에 샤오메이가 고개를 갸웃했다. ‘너 따위가? 어떻게?’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
“겨울동맹이 왜 태초의 은을 원한 건지는 모르지만, 그 이유에 따라선 협상의 여지가 있을 지도 몰라.”
“협상? 너 40억 없다며. 그런데 어떻게 협상하게?”
“돈은 없지만 정보는 있거든. 놈들에게 유용한 정보를 대가로 건네거나, 혹은 약점이 될만한 정보로 되려 협박할 수도 있지.”
제아무리 원작을 읽었다 해도 세계관을 전부 꿰차고 있는 건 아니다. 그러나 이번 사태의 배후로 보이는 ‘성유진’에 한한다면, 안수호는 제법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잘만 하면 성유진도 아군으로 끌어들일 수 있을지 몰라. 그게 아니더라도 최소한 척을 질지언정 귀찮게 굴지는 못하게 막을 수 있겠지.’
안수호는 새삼 다행이구나 싶었다. 성유진이 원작에서도 빌런이었던 캐릭터가 아니었다면, 즉 어느정도의 비중을 받은 캐릭터가 아니었다면 이런 대책은 세우지 못했을 테니까.
“……고작 정보 따위로 겨울동맹이 태초의 은을 포기한다고?”
“‘이유에 따라서는’이라고 했잖아. 겨울동맹이 단순히 지들 쓸 무기가 필요했던 거라면 협상하지 못할 것도 없지. 그게 아니라 어떤 이유에서든 태초의 은 자체가 필요했던 거라면 협상할 수 없겠지만…….”
“…….”
“그래서? 놈들은 왜 태초의 은을 사려고 한 거지? 그것도 웃돈까지 지불하면서.”
안수호의 질문에 샤오메이가 입을 다물었다. 말문이 막혔다, 라 표현할 수도 있으리라.
“……뭐 말하기 힘든 이유라도 있나?”
“아니. 나도 몰라서 그래. 브로커는 원래 필요 이상으로 캐묻지 않거든.”
“잘 생각해. 지금 괜히 숨겼다가 내가 널 제때 도와주지 못할 수도 있어.”
“진짜로 모른다니까 그러네? 야, 막말로 뭐 의뢰할 때마다 꼬치꼬치 캐묻는 브로커한테 의뢰를 맡기고 싶겠어? 이 업계에선 침묵이 곧 신뢰라고! 알지도 못하면서 진짜…….”
“자자 두 사람 다 그렇게 목소리 높이지 마시고. 좀 진정합시다 진정.”
두 사람 사이로 류태현이 끼어들며 과열된 분위기를 식혔다. 탁 트인 옥상은 당연히 소리도 멀리 퍼져나간다. 조금만 언성을 높여도 아래를 지나다니는 경비원에게 들킬지 몰랐다.
“하여튼 겨울동맹인가? 거기에 대해선 수호 형이 뭔가 방책이 있다는 거잖아? 그럼 일단 그 일은 수호 형한테 맡길게. 그보다 당장 당면한 문제부터 해결하자고.”
“당면한 문제?”
이미 당면한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던 게 아닌가. 안수호가 의아해하며 되묻자 류태현이 멋쩍은 표정으로 답했다.
“사실 그, 샤오메이 씨 숨겨주고 있는 거 어제 긱사 사감님한테 걸렸어.”
“뭐?”
“네?”
안수호와 샤오메이의 탄성이 겹친다. 둘 다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
“나도 어디서 들켰는지는 모르겠는데. 아까 오후에 수업 끝나고 호출 있어서 가보니까 넌지시 말씀하시더라. 혹시 방에 여친이라도 숨겨놨냐고. 당연히 발뺌하긴 했는데 완전 확신하고 계셔서, 당장 들이닥치신다길래 그냥 이실직고하고 인정했어.”
“여자친구 숨겨놨다고?”
“설마. 그냥 적당히 밝힐 수 있는 거만 밝혔지. 곤란한 사람이 있어서 여차저차하다가 도와주게 됐다고. 다행히 평소 행실이 좋아서 그런가 별 말 안 하시고 믿어주시더라.”
제 입으로 자기 행실이 좋다고 말하는 것도 웃긴 일이었으나 류태현에겐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었다. 류태현은 아카데미 안에서나 밖에서나 그림으로 그린듯한 모범생으로 통했으니까.
“그치만 어쨌든 혼숙은 안 된다고. 이번 주말 안에 내보내라고 하시더라고. 그래서 샤오메이 씨가 내 방에서 머무를 수 있는 건 앞으로 사흘이야.”
“즉 당면한 문제라는 건…….”
“주거 문제지.”
류태현이 샤오메이를 굳이 자신의 방에 지내게 한 건 아카데미의 보안성 때문이었다. 제아무리 공안이나 겨울동맹이 그녀를 노린다 해도 국내 1위의 아카데미 부지 한복판에서 난리를 칠 수는 없을 테니까.
그러나 샤오메이가 밖으로 나간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이번 사태가 일단락될 때까지 길게 머무를 수 있고, 가능하면 보안성이 철저한 곳. 그런 장소를 찾지 못하면 샤오메이 씨의 안전이 위험해.”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런 장소가 어디 흔히 있겠는가. 비록 사건이 터질 때마다 뚫리는 게 그린하우스의 보안이긴 하나 그 객관적인 수준은 어지간한 군부대에 필적했다. 비슷한 보안성을 지닌 거처를 찾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겠지.
그 사실을 직감했기에 류태현이나 샤오메이나 표정은 어둡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있어. 그린하우스에 필적하는 보안성에, 장기간 체류할 수 있는 장소가.”
안수호의 말에 두 사람이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그게 사실이야 형?”
“사실이야. 예전에 예원이가 여명단한테 쫓길 때 사용했던 안전가옥이 하나 있거든. 한성그룹 소유이긴 하지만 실질적인 사용권은 내 상사인 민채령이 가지고 있어. 잘만 부탁하면 사용할 수 있을지도 몰라.”
“보안성은 확실한 거야?”
샤오메이의 의심하는 듯한 물음에 안수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높게 둘러진 담장에 수많은 CCTV. 두꺼운 강철 대문과 견고하게 지어진 건물 외벽. 지하에는 벙커는 물론이고 비상용 탈출로까지 마련되어 있었다. 보안 수준은 그린하우스와 동등, 혹은 그 이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겠지.
“그래봤자 실력 좋은 암살자가 작정하고 침입하려들면 뚫리겠지만, 적어도 내가 아는 장소 중에선 가장 안전한 곳이야. 그리고 설령 뚫린다 해도 내가 같이 있으면 어지간한 암살자는 쓰러뜨릴 수 있겠지.”
“같이, 라니? 당신이 나랑 같이 있어 준다고?”
의아해하는 샤오메이를 보며 안수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기실 대화 내내 그녀에게 냉정하게 대하긴 했으나 안수호도 샤오메이의 사정에 일말의 책임은 느끼고 있었다. 류태현처럼 곤란한 이를 외면하지 못한다 수준까진 아니지만, 자신이 초래한 일로 애먼 사람이 죽으면 꿈자리가 찝찝할 테니까.
“태초의 은은 돌려줄 수 없지만 최소한의 책임은 져야지. 이번 사태가 끝날 때까지 내가 당신 옆에 붙어서 최대한 당신을 지켜줄게.”
안수호의 선언에 샤오메이가 말문이 턱 막히며 눈을 크게 떴다. 곧 그녀가 시선을 옆으로 내리깔며 볼멘소리를 툭 던졌다.
“…………참나. 누가 그런다고 고마워할 줄 알아? 아티펙트 도둑놈 주제에…….”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 목소리에선 다소 놀란듯한, 그리고 고마워하는 기색이 언뜻언뜻 보였다. 안수호가 피식 웃으면서 그녀에게 답했다.
“너무 기대는 하지 마. 안전가옥을 쓸 수 있을지 없을지 아직 확정된 건 없으니까. 뭐,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니 어지간하면 들어주겠지만…….”
“그래? 형 상사분이 형을 되게 아끼시나 봐?”
“……뭐 그런 셈이지.”
대충 어물쩍 둘러대며 안수호가 비릿하게 웃었다. 민채령이 자신을 아낀다니. 웃기지도 않는 소리였다.
‘그래도 설마 거절이야 하겠어?’
두 사람의 사이는 결코 좋다 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가능한한 서로가 서로를 돕고자 하는 비즈니스적 관계였다. 민채령에게 정말 부득이한 사정이 있지 않는 이상에야 자신의 부탁이 거절당할 리는 없겠지.
안수호는 그렇게 자신했다.
그러나.
“안 돼.”
“아니 왜 그러십니까 팀장님. 제가 어려운 부탁하는 거 아니잖아요? 거 비어있는 방 하나만 내주면 되는 일인데”
“안 돼. 안 내줘. 절대 안 내줄 거야. 그러니까 포기해.”
다음날 아침. 안수호는 근 2주 만의 출근이 무색하게 이야기를 꺼내고 3초 만에 거절당했다. 제대로 된 이유조차 듣지 못한 채.
이에 납득할 수 없던 안수호가 그녀에게 반문했고.
“도대체 왜 안 된다는 겁니까? 예전엔 잘만 사용하게 해줬잖아요. 뭐 저 나간 사이에 거기 꿀단지라도 숨겨두셨습니까?”
“…….”
그야말로 정곡을 찔린 민채령이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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