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0화 〉 169. 흑룡회에서(3)
* * *
“생각해둔 방안이 있으시다고요?”
“예. 급하게 짜낸 거긴 하지만요.”
“어떤 방안이죠?”
설아현의 질문에 안수호는 자신의 등 뒤에 있는 회장실 문을 바라보았다.
조금 전, 예카테리나는 안내를 마친 뒤 곧바로 방 바깥으로 나갔다. 아마 지금쯤 문 밖에서 대기하고 있을 터.
‘설마 들리진 않겠지.’
예카테리나는 일반인. 초인만큼 뛰어난 청각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렇지만 둘 사이에 있는 건 고작해야 벽 한 장. 혹시라도 소리가 새어나갈 걸 경계한다면 할 말과 못할 말을 가려야 했다. 회귀라든가 미래라든가 하는 말들.
“괜찮아요. 이 방의 방음 대책은 완벽하니까. 바깥에 누가 있든 절대 엿들을 수 없어요.”
그때 설아현이 그의 마음속을 다 꿰뚫어보듯 말했다. 괜히 무안해진 안수호가 멋쩍게 웃으며 말을 이어간다.
“그렇다면야 뭐……. 그럼 이번 사태에 대해 제가 생각한 방안에 대해 말씀드리죠. 일단 그 전에 전제부터 짚고 넘어가야 하는데…….”
“전제요?”
“예. 저랑 아현 씨는 지금까지 겨울동맹이 아티펙트 거래 대금을 지불한 걸 전제로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사실 아직 대금 지불을 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태초의 은 거래는 중국 당위원 측이나 겨울동맹 측이나 신중에 신중을 가한 거래였다. 물건 운반에도 샤오메이라는 실력 좋은 브로커를 썼으니, 당연히 대금 지불에도 그만한 정성을 들였을 터.
허나 이 경우 물건이 제대로 운반되지 않았으니 대금 지불 또한 중간에 멈췄을 가능성이 있었다. 겨울동맹 입장에선 자기네 사람도 아닌 브로커의 실수로 물건을 잃게 되었는데 굳이 대금을 지불해줄 이유가 없으니까.
“만약 겨울동맹이 아직 대금 지불을 하지 않았다면 굳이 제게서 태초의 은을 빼앗는 데에 혈안이 될 필요는 없습니다. 사실상 손해본 게 없으니까요. 물론 그들한테 무슨 일이 있어도 태초의 은이 필요한 이유가 있다면 다르겠지만…….”
태초의 은은 뛰어난 성능을 지녔긴 하나 결국 무기의 일종이었다. 대체재는 얼마든지 있었다.
“하지만 그 경우에는 중국 쪽에서 수호 씨를 잡으려 들지 않을까요? 수호 씨가 물건을 가로채서 받을 돈을 못 받았으니까.”
“겨울동맹이 절 노리는 것보단 낫죠. 제아무리 그쪽 동네 공안이니 정보부니 하는 사람들이 무섭다곤 해도 외국 땅에서 자기네 나라에서처럼 날뛰진 못할 거 아닙니까?”
“그래요? 영화 같은 거 보면 공안이 막 부산에서 총격전도 하고 그러던데……?”
“그거야 영화니까요.”
그러는 이 세상도 일단은 소설이었으나, 안수호는 굳이 뒷말은 입에 담지 않았다. 그가 이어서 말했다.
“방금 말한 것들은 어디까지나 희망사항이고. 겨울동맹이 이미 30억이나 되는 돈을 날려서 눈에 불을 켜고 제게서 태초의 은을 받아내려고 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얜 이미 제 오른손에 정착해서 빼주고 싶어도 빼줄 수가 없으니…….”
“아티펙트의 귀속을 푸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어요.”
“예. 그래서 그 경우에는 겨울동맹 측에서 강압적인 수단으로 나오겠죠. 폭력을 동반한 협박, 최악의 경우는 암살까지.”
“상대는 국내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S급 길드예요. 게다가 그 뒤에 버티고 있는 건 국내 2위의 재벌가 여일그룹이고요. 그들이 수호 씨의 적으로 돌아선다면 상당히 힘들 거예요.”
“그거야 그렇지만…….”
안수호가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탈리스만에 샛별의 숨소리, 서리정령의 증표에 태초의 은까지. 참 징하게도 모아댔구나 하며.
“……뭐 힘들어봐야 청부업자 고용해서 절 죽이려드는 게 끝이겠죠. 까짓 거 배째라 하고 싸우면 그만 아닐까요?”
“네?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세요?”
“말이라고 하는데요? 막말로 제가 어지간한 암살자한테 당할 수준은 아니잖아요?”
지난 석 달 동안 안수호의 무력은 눈에 띄게 강해졌다. 강하늘의 스킬을 제외하더라도, 본신의 힘과 각양각색의 아티펙트가 조합된 그 강함은 A급 초인에 준했다.
‘어쩌면 그 이상일지도 모르고.’
그간에는 샛별의 숨소리의 지속시간 때문에 전투지속력이 떨어진다 스스로 평했지만, 그것도 이번에 태초의 은을 얻으며 이제 옛말이 되었다.
탈리스만태초의 은 조합은 그야말로 완벽 그 이상.
탈리스만에 과부하가 오지 않는 이상 특임대 1개 소대에 준하는 무력을 지속해서 휘두를 수 있었다.
심지어 그의 오른팔에 붙어있는 실비는 24시간 깨어있기에 불시의 암살에 대한 대비책도 어느 정도는 되었다. 안수호가 괜히 자신만만한 태도를 보이는 게 아니었다.
‘물론 이래도 소위 말하는 진짜들이 오면 힘들겠지만…….’
적어도 더 이상 맥없이 당하지는 않으리라. 본신의 강함이 아닌 아이템빨로 기고만장한 모습이 본인 스스로도 아니꼽긴 했으나, 그 또한 결국 안수호가 가진 힘이요 능력이란 사실엔 변함이 없었다.
“게다가 아현 씨. 겨울동맹 쪽에서 그렇게 쉽게 불법적인 수단을 동원하진 못할 거예요. 보는 눈이 많으니까요.”
“보는 눈이라고 하면…….”
“아무리 제가 기생괴수의 피해자라곤 해도 특임대를 상대로 그만한 무력시위를 벌인 건 사실이에요. 그런데 그런 저를 경찰이 무턱대고 놓아줬을 리가 없잖아요?”
“아.”
거기까지 말하자 설아현이 이제야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적어도 감시의 눈 한둘 정도는 붙어있겠죠. 겨울동맹도 그 정도는 파악하고 있을 테고요. 그런 저를 불법적으로 협박하거나 암살하려 한다? 할 수야 있겠지만 여간 피곤한 일이 아닐 겁니다.”
가령 안수호에 대한 암살이 실패로 돌아갔다 가정해보자.
안수호는 당연히 해당 암살자를 경찰에 넘길 것이다. 경찰은 암살자를 심문하며 그 배후를 캐내려 할 것이고, 그 과정에서 겨울동맹이나 여일그룹의 꼬리가 밟힐 가능성은 결코 0이 아니다. 거기에 더해 중국측과의 은밀한 뒷거래에 대해 들킬 가능성도.
물론 그 과정에서 겨울동맹, 혹은 여일그룹이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것이다. 온갖 수단과 연줄을 동원해서 수사를 흐지부지되게 하겠지.
그러나 어쨌든 어느 정도의 위험을 부담해야 한다는 것만은 사실이었다.
“그렇지만 수호 씨……. 암살이 오든 말든 다 때려잡고 신고하면 된다라는 건 너무 무대뽀 아닌가요?”
허나 설아현이 보기엔 불안하기 그지없는 방안이었다. 그녀가 표하는 우려에 안수호가 싱긋 웃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이건 어디까지나 최악의 경우에 그렇다는 거니까. 애초에 겨울동맹이 강압적인 수단을 사용하지 않게끔 설득하면 되는 일이잖아요?”
“설득에 필요한 재료는 있으신가요?”
“재료야 얼마든지 있죠. 이 머릿속에요. 저는 회귀자니까.”
사실은 빙의자지만. 이런저런 잡지식을 잔뜩 알고 있다는 건 어차피 거기서 거기였다. 설아현이 흥미로운 눈으로 바라보자 안수호가 짧게 덧붙였다.
“비록 30억에 해당하는 현물은 없지만 그만한 가치를 지니는 지식이라면 있어요. 다 쓰기 나름이긴 하지만.”
정 안 되면 성유진의 비밀을 들춰내며 그를 역으로 협박하는 수도 있었다. 물론 그 경우 성유진과 완전히 척을 지게 되겠지만, 어차피 그는 원작에서도 빌런이었으니 그리 달라질 것도 없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애초에 이번 일에서 겨울동맹이나 중국 쪽이 책임을 물을 상대는 제가 아니에요. 물건 운반을 잘못한 브로커 샤오메이죠. 그린하우스며 흑룡회며 한성그룹이며 이래저래 복잡하게 얽힌 저보다는 태생부터가 음지 출신인 브로커 쪽이 훨씬 만만하니. 아마 원망의 화살이 향한다면 먼저 그쪽으로 향하지 않을까요?”
“…………와. 수호 씨 되게 잔인하게 말씀하시네요. 그 브로커한테서 물건을 가로챈 게 수호 씨면서.”
“여명단한테 뺏기는 것보단 제가 가져가는 게 낫잖아요. 대의를 위한 어쩔 수 없는 희생이죠.”
안수호의 말에 설아현은 반쯤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미래에서 온 회귀자. 안수호가 말한 ‘대의를 위한 작은 희생’이란 그녀에게 이미 너무나도 익숙한 개념이었다.
“일단 제가 생각한 건 여기까집니다. 어떠세요? 이 정도면 그래도 나름…….”
“으음, 나름 길게 말씀하시긴 했는데 결국 다 낙관적인 예측에 기반하거나 불확실한 방법들뿐. 명확한 타개책이랄 건 없네요.”
“윽.”
설아현의 신랄한 평가에 안수호가 앓는 소리를 냈다. 안수호 입장에서는 나름대로 고민해서 꺼낸 궁여지책들이었으나, 회귀자이자 한 길드의 리더로서 산전수전 다 겪은 설아현이 보기엔 썩 만족스럽지 않았다.
“……그럼 혹시 아현 씨께선 뭔가 확실한 타개책이 있으신가요?”
“아직은 없어요. 그렇지만 지금부터 만들어낼 순 있죠.”
설아현의 자신만만한 말. 안수호가 고개를 갸웃하자 그녀가 제 가슴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무리 문제가 어려워도 답안지만 보면 쉽게 풀 수 있잖아요. 제 초능력이 뭔지 벌써 잊으신 건 아니죠?”
“아.”
그제야 안수호는 설아현의 말을 이해했다.
설아현의 초능력은 미래시.
통상적으로는 수초에서 1분 정도의 미래를 내다보는 능력이지만 특정 조건을 만족하는 몇몇 경우에 한해 먼 미래를 내다볼 수도 있다.
가령 다른 사람과 신체를 접촉한 상태로 능력을 발동하면 자신과 그 사람이 관련된 먼 미래를 무작위로 관측할 수 있었다. 당장 안수호만 해도 첫 만남에서 이 방법으로 설아현의 신뢰를 얻어냈었다.
“근데 그 방법으로 볼 수 있는 미래는 랜덤 아닙니까?”
“랜덤이니까 원하는 미래가 나올 때까지 몇 번이고 보면 되죠. 수호 씨랑 처음 만났을 때야 뭐, 한 번에 원하는 미래가 나와서 그만둔 거지만 애초에 이 능력이 횟수 제한이 있거나 하진 않으니까요. 많이 쓰면 피곤하긴 하겠지만…….”
그래도 수십 회 정도는 거뜬하다며. 설아현이 가슴을 쭉 피며 자신만만하게 외쳤다.
‘이른바 미래 가챠라는 거군.’
한 번 가챠를 돌릴 때마다 랜덤한 시점의 장면이 무작위로 펼쳐진다. 그 장면은 두 사람이 평범하게 밥을 먹는 장면일 수도 있고, 지금 두 사람이 원하는 이번 사태 해결의 핵심이 되는 미래일 수도 있다.
미래에서 힌트를 얻어 현재의 대책을 짠다니 타임 패러독스라든가 머릿속이 복잡해졌지만, 안수호는 굳이 깊게 생각하려 하지 않았다.
“그럼, 볼게요…!”
어째서인지 묘하게 긴장된 얼굴로 설아현이 안수호의 손을 맞잡았다. 신체 접촉만 필요한 거면 적당히 손가락만 대도 될 텐데, 굳이 손가락 하나하나를 깍지 끼며.
안수호가 너스레로 그 사실을 지적하려던 순간, 설아현의 눈에 붉은 기운이 파직! 튀어 오르고.
직후. 그녀의 눈앞에 언제인지 모를 미래의 장면이 펼쳐졌다.
펼쳐진 풍경은 차가운 지하주차장.
바닥이나 기둥에 쩌적 금이 가있는 걸 보니 한 차례 전투가 벌어진 뒤인 모양이었다.
설아현의 시야가 왼쪽으로 돌아갔다. 그녀는 지금 미래의 자신의 시야를 빌려 미래를 엿보고 있다. 즉, 그 시선의 이동은 미래의 그녀가 고개를 돌린 탓이었다.
“…….”
그곳에는 창백하게 질린 표정의 여성이 덜덜 떨고 있었다.
불꽃처럼 붉은 머리카락과 마찬가지로 붉은 눈동자를 지닌 여성.
설아현은 어디서 본 얼굴이다 싶어 잠시 고민했고, 이내 그녀가 한여름의 동생 한겨울이란 걸 떠올렸다. 분명 아카데미 1학년생이라 했던가. 예전에 어쩌다 한 번 본 기억이 있었다.
‘근데 왜 이 사람이……?’
여기 있는 거지. 그렇게 생각한 순간 다시금 시야가 돌아간다. 이번에는 오른편으로.
“이럴 수가…….”
그러자 그곳에는 한겨울의 언니 한여름이 있었다. 그녀 또한 얼굴이 창백하게 질린 건 마찬가지였다. 이마에서 흐르다 만 한 줄기 피는 그녀 역시 전투에 참여했음을 단적으로 나타내고 있었다.
척 봐도 보통 상황은 아니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설아현은 그제야 자신의 시야가 조금씩 흔들리고 있다는 걸 느꼈다. 마치 술에 취한 것처럼. 비틀거리는 시야가 다시 가운데로 돌아오더니 이내 아래로 내려가려 한다.
‘그러고 보니.’
한겨울과 한여름 둘 다 아래쪽 정면을 바라보고 있지 않았던가. 도대체 그 방향에 뭐가 있길래.
그 의문은 이어지는 장면에 곧바로 바람 앞의 촛불처럼 사라졌다.
‘어?’
피로 얼룩진 주차장 기둥. 그 아래에는 안수호가 고개를 푹 숙인 채 기대어 쓰러져 있었다.
척 봐도 심각해 보이는 부상. 온몸에는 멀쩡한 곳이 없었고 심지어 오른팔은 어깨 근처에서 잘렸는지 뜯겨 나갔는지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수호 씨? 괜찮……아요?”
설아현의 귓가에 그녀 자신의 목소리가 들렸다. 현재의 그녀가 아닌, 미래의 그녀가 발한 목소리.
그 목소리는 이루 말할 수 없이 떨리고 있었다. 한겨울의 사시나무처럼.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없다.
그녀가 엿볼 수 있는 남은 시간 동안, 안수호는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쓰러져 있었다. 꼭 죽은 시체처럼. 그러다 이내 밝은 빛이 터져나온다 싶더니 미래의 장면이 끝났다.
“…….”
설아현은 미래시가 끝나고도 한참동안 멍하니 허공을 응시했다. 자신이 방금 본 광경이 사실인지, 그야 미래시로 보았으니 곧 다가올 미래임이 자명했으나, 눈으로 본 광경을 머리가 따라가지 못하고 있었다.
“……아현 씨?”
그 심상치 않은 모습에 안수호가 물었다. 설아현이 그와 맞잡고 있던 손에 힘을 꽈악 주었다.
“수호 씨……. 우리 큰일 난 거 같아요.”
그녀의 눈동자에 진한 불안감이 스멀스멀 차올랐다.
***
“으아아아아아! 젠장! 젠장! 젠자아아아아아앙!!!!”
어두운 실험실에 노인의 노성이 울려 퍼졌다.
실험실이란 공간은 본래 어둡기는커녕 덕지덕지 붙은 조명으로 밝아야 정상이다. 허나 그 누가 그 광경을 본다 한들 결코 이상함을 품지 않을 것이다.
그곳은 실험실은 실험실이나 견실한 이미지의 실험실이 아닌, 만화영화에서 나쁜 과학자가 사악한 계획을 세우는 느낌의, 칙칙하고 어두운 실험실이었기에.
“또 실패다! 또! 또! 또! 또오오오오오오!!!!”
그 어둠의 실험실 한복판에서, 연구소장 나주용은 시뻘개진 얼굴로 연심 고함을 질러대고 있었다. 주위에 서성이던 몇 안 되는 조수들이 그의 눈치를 살피다 슬금슬금 자리를 피한다.
“허억. 허억. 허억. 허억.”
그렇게 얼마나 고함을 질러댔을까. 겨우 진정된 나주용이 눈앞의 카메라를 바라봤다. 실험 기록용 영상을 녹화하기 위한 카메라.
“…………실험번호 173번. 실험 결과 실패. 원인은 실험 대상의 신체 강도 부족으로 인한 능력 정착 실패로 생각됨. 이상.”
뿌드드득. 나주용이 분한 듯 주먹을 말아 쥐었다. 그럴 만도 했다. 이 나라에서는 인체 실험에 필요한 실험체를 구하는 것부터가 하늘의 별 따기였는데, 벌써 그런 실험을 100번도 넘게 실패하고 있었으니.
“실험이 잘 안 풀리는 모양입니다.”
그때 들려온 나주용의 심기를 건드리는 물음.
나주용은 감히 누가 자신에게 저런 식으로 비꼬는 듯이 물어보나 싶었다. 그러나 그가 고개를 돌린 순간, 그는 끓어오르려던 분노를 어떻게든 삭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너무 소리는 지르지 말아주세요. 주변 연구원들이 다 겁먹지 않습니까.”
“……성유진 이사님.”
그곳에 나타난 건 겨울동맹의 서브마스터이자 여일그룹의 이사 중 한 명인 성유진이었다.
“지나가다 잠깐 들렀습니다. 실험 경과는 어떻습니까 나주용 소장님?”
“……보시는 대로 별로 진전은 없습니다. 거의 30회 넘게 계속 같은 이유로 실패하고 있죠.”
“분명 신체 강도 부족……이라고 하셨죠?”
현재 나주용이 진행하고 있는 실험은 다중능력 실험. 한 사람의 몸에 둘 이상의 초능력을 이식하는 실험이었다.
모든 초인은 기본적으로 하나의 초능력만을 가질 수 있다. 탈리스만을 포함한 아티펙트로 두 번째 능력 비슷한 걸 얻을 수는 있지만 그 능력의 본질은 어디까지나 외부, 초인이 내부적으로 품을 수 있는 능력은 어디까지나 한 가지.
그것은 재능이나 자질의 여부를 떠나 초인의 몸에 설정된 일종의 한계였다. 그리고 나주용이 번번이 막히는 지점도 바로 그 부분이었다.
나주용을 필두로 한 여일의 다중능력 연구는 어느 정도 성과를 올리긴 했다. 초인으로부터 능력을 추출, 이를 모종의 방법으로 저장 및 운반하는 것까지는 기술을 확보했으니까.
그러나 문제는 추출한 능력의 정착이었다. 앞서 말했듯 초인의 신체에는 일종의 한계가 설정되어 있어서 결코 둘 이상의 초능력을 품지 못했다.
마치 그래선 안 된다는 법칙이라도 정해져 있는 것처럼 단 하나의 예외도 없이.
그것이 지난 30여 번의 실험이 번번이 실패한 이유였다. 그런 나주용의 설명에 성유진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초인의 몸에 설정된 한계라……. 흥미로운 가설이긴 합니다만, 이미 반례가 버젓이 존재하지 않습니까? 채령 선배만 해도 그렇고. 저번에 그 그린하우스 학생만 해도”
“그 둘은 ‘요람’에서 온갖 편법을 동원해서 억지로 이뤄낸 기적 같은 샘플입니다. 그마저도 둘 다 완벽한 다중능력자는 아니죠. 실험에 참고는 할 수 있을지언정 같은 방법으로 다중능력자를 만드는 건 이제는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태초의 은이 필요했던 거로군요.”
초인의 몸은 하나의 초능력밖에 담지 못한다. 그것이 초인의 한계다.
그렇다면 신체 자체를 강화하는 것을 통해 그 한계를 억지로 열어젖힌다면?
“맞습니다. 당초에야 여러 후보군들 중 하나였지만 이제는 아니죠. 태초의 은을 통한 신체강화. 그 효과가 어느 정도인지 이번 사건을 통해 단편적으로 알아낼 수 있었으니까요.”
태초의 은을 통한 초인 강화 계획. 당초에는 가능성만 있다 뿐인 계획이었으나 이번 네버랜드 사건을 보며 나주용은 확신했다.
태초의 은의 막강한 힘을 초인의 신체에 완벽하게 이식하는 데에 성공한다면, 한 초인의 몸으로 두 개의 초능력을 품게 하는 것 또한 가능할 것이라고.
“그래서 이사님. 회수 계획은 어떻게 되고 있습니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소장님.”
나주용은 하루라도 빨리 실험을 성공시키고 싶었다. 그 열망이 진하게 묻어나오는 질문에 성유진이 비릿하게 웃으며 답했다.
“……계획은 이미 착착 진행되고 있으니까요.”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