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7화 〉 166. 그럼 그렇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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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수호의 삶은 늘 다사다난했다. 그러나 최근 며칠간은 그 어느 때와 비교해 봐도 유독 그 정도가 심했다.
중간고사 직전 강하늘 납치 사건부터 시작해 기사의 무덤 공략, 한겨울과의 대련, 경비대 회식, 태초의 은 사건, 그리고 열흘간의 구치소 생활에 이르기까지.
거기에 화룡점정으로 이세계 출신 정령 루엘과의 만남이 더해지자 안수호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사건 하나가 끝난다 싶으면 새로운 사건이 찾아오는 일의 연속. 생각을 정리할 새도 없이 몰아치듯 지나간 약 3주간의 시간에 그는 알게 모르게 지쳐 있었다.
마음 같아선 한 며칠 정도,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푹 쉬고 싶다고.
고생 했어 안수호. 이래저래 힘들 텐데 당분간 출근하지 말고 집에서 푹 쉬렴.
그런 그의 염원이 닿은 것일까, 때마침 민채령에게서 그런 연락이 도착했다.
민채령이 자신의 능력과 인맥을 십분 발휘한 덕에 안수호는 무사히 풀려날 수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민채령이라도 그만한 사건을 완전히 숨길 순 없는 노릇.
안수호가 체포된 그날 밤, 모든 뉴스 채널과 언론사는 앞다투어 해당 사건을 보도했다. 국내 최대 규모 놀이공원에서 일어난 초인들 간의 전투. 그리고 그 진압을 위해 출동한 특임대에게 덤빈 의문의 은색 괴수에 대해서도.
물론 안수호의 신상이 대대적으로 노출된 건 아니었지만, 알만한 사람들은 알음알음 사건의 진상을 전해 들었다. 안수호라는 이름까진 모르더라도 ‘용의자가 아카데미 경비대 사람이라더라.’ 정도의 소문은 상당히 널리 퍼진 상태.
때문에 민채령은 사건이 잠잠해질 때까지 휴식 겸 자숙의 의미로 안수호에게 근신에 가까운 휴가를 부여했다. 마침 그 또한 쉬고 싶었기에 잘 된 일이었다.
그리하여.
안수호가 루엘을 만나고 이틀 뒤인 5월 7일 목요일.
모처럼의 휴일이건만 안수호는 출근하던 버릇 때문에 그날도 일찍 일어났다. 시간으로는 갓 오전 8시를 넘긴 시점.
“끄응…….”
분면 푹 잤음에도 불구하고 묘하게 찌뿌둥한 어깨에 안수호가 쭈욱 기지개를 켰다.
“응?”
그때 안수호의 시야 구석에서 무언가 빠르게 움직였다. 그가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렸다.
그러자.
부스럭.
침대 옆 바닥에 커다란 거미 한 마리가 뽈뽈대며 기어 다니고 있었다. 직후 안수호의 얼굴이 하얗게 질린다.
“으, 으아아아아악?!”
다 큰 남자가 고작 거미 한 마리 가지고 무슨 소란인가. 그렇게 생각하기에는 거미의 몸집이 커다래도 너무 커다랬다. 족히 소형견 정도는 될법한 사이즈. 몸집이 워낙 커다래서 그런가 그 그로테스크한 생김새가 유독 더 돋보였다.
부스럭?
주변을 쏘다니던 거미가 우뚝 멈추며 안수호를 올려다봤다. 절대 평범한 거미는 아니다. 평범한 거미가 아니라면 괴수일 터. 안수호가 다급하게 주먹을 말아 쥐었다.
주인님? 왜 그러세요?
“응?”
그러나 다음 순간 익숙한 목소리가 거미에게서 들려왔다.
“……실비?”
맞아요. 저예요.
거미가 앞다리를 들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러자 징그럽게 생긴 배 부분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안수호가 질색하며 고개를 돌렸으나, 실비는 그런 것도 모르고 앙증맞게 다리를 흔들어댔다.
“너 나한테서 떨어질 수도 있었어?”
네. 떨어질 수. 있어요. 해보니까. 되던데요?
“근데 왜 하필 그렇게 징그러운 모습이야?”
가장 효율적인 모습이에요.
“그야 효율은 있겠지만…….”
문제는 징그러워도 너무 징그럽게 생겼다는 점이었다. 단순히 다리만 8개 달린 매끈한 형태였다면 그나마 나았겠지만, 실비가 취한 모습은 현실의 거미를 그대로 확대해놓은 모습이었다. 형태를 갖추는 데에 안수호의 머릿속 지식을 차용했기 때문이었다.
제가 따로 움직일 수 있으면. 주인님한테도 도움이 될 거예요. 그래서 연습하고 있었어요.
“그건 고맙지만 기왕이면 좀 덜 징그러운 모습으로 부탁해…….”
덜. 징그러운?
실비는 아직 ‘징그럽다’라는 개념을 이해하지 못했다. 실비 입장에선 알 수 없는 이유로 효율성과 안정성을 떨어뜨리라는 그의 요구가 부당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안수호의 명령이었기에 무조건 들어야 한다는 생각도 들었다. 징그럽지 않게. 그 이해할 수 없는 명령을 이해하기 위해 실비가 안수호의 오른손으로 돌아갔다. 물론 거미 형태를 해제한 채로.
‘징그럽다, 라는 게 어떤 감정인지 잘 모르겠어요.’
‘그렇지만 징그럽다, 라는 건 싫다, 라는 의미일 거예요.’
‘싫다의 반대는 좋다, 예요.’
‘그럼 징그럽지 않은 모습이란 건. 주인님이 좋아하는 모습?’
안수호의 기억을 엿보며 이런저런 사색에 잠긴 실비.
알겠어요. 다음번엔. 주인님이 좋아하는 모습으로. 해볼게요.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실비가 이제 알겠다며 삐죽 튀어나온 촉수를 좌우로 흔들었다. 실비가 느끼는 뿌듯함이나 기대감 따위의 감정들이 안수호의 머릿속으로 흐릿하게 흘러들어왔다.
‘그러고 보니 서리정령은 여전히 말이 없네.’
루엘이 모처럼 정령친화력을 올려주었건만, 목걸이에 담긴 서리정령은 이틀째 묵묵부답이었다. 안수호는 혹시나 싶은 마음에 내면에 집중해보았지만, 들려오는 목소리는 없었다.
“실비. 내 목에 걸린 정령 이름이 뭐랬지?”
카멜리아. 예요.
“혹시 걔가 지금도 뭐라 말하고 있는데 내가 못 듣고 있는 건 아니지?”
아니에요. 저번에 카페에서부터. 지금까지. 한 마디도 안 하고 있어요.
할 말이 있을 때마다 거리낌 없이 말을 걸어오는 실비와 달리, 서리정령은 지난 이틀 동안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루엘은 그런 서리정령을 보고 단단히 삐졌다고 했다. 딱 어울리는 표현이었다.
“……카멜리아라고 했나? 그동안 멋대로 노예처럼 부려먹은 건 사과할게. 그래도 기왕 함께하게 됐는데, 이제부터라도 친하게 지내보자고. 응?”
혹시나 싶은 마음에 그렇게 말해보지만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그야말로 서리정령이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차가운 태도.
안수호는 정령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고작 하루 이틀 걸려서 해결될 일이 아님을 직감했다. 그가 낙담 섞인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주인님. 저 배고파요.
그때 실비가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안수호의 낙담에 눈치를 볼 법도 한데 전혀 그런 기색이 없었다. 눈치라든가, 기분을 읽는다든가 하는 일은 아직 실비에게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 자.”
안수호가 탈리스만을 발동하자 주위의 마력이 모아들기 시작했다. 실비가 와아, 하고 기뻐하며 그의 손가락에 착 달라붙었다. 그런 실비의 모습에 안수호는 자기도 아침이나 먹어야지 싶었다.
그때.
띠리리리리리.
그의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려댔다. 이른 아침부터 누구인가 하고 확인해보니 설아현이었다.
“아현 씨?”
안녕하세요 수호 씨. 이른 아침부터 죄송해요. 혹시 통화 가능하세요?
“네. 괜찮아요. 어차피 오늘 출근 안 했거든요. 이미 소식을 들으셨을 수도 있는데, 한 열흘 전에 놀이공원에서…….”
기생괴수 사건 말씀하시는 거죠? 이미 들었어요. 건너건너 어디 아카데미 경비대원이 괴수한테 기생당했다 들었는데 딱 보니까 수호 씨더라고요. 찍힌 사진에 마스크로 가리고 있긴 했지만 바로 알아보겠던데요.
“눈썰미가 좋으시네요.”
몇 번이나 만났는데 못 알아보는 게 이상하죠. 아, 몸은 좀 괜찮으세요? 기생한 괴수는 잘 떼어냈나요?
“그게 말이죠…….”
안수호는 설아현에게 그간의 사정을 설명했다.
사실 그의 몸에 달라붙은 건 기생괴수가 아니라 태초의 은이라는 아티펙트였다는 것.
중국 쪽 브로커와 겨울동맹이 놀이공원에서 이를 밀거래하려 했다는 것.
그 거래에 여명단이 난입해 아티펙트를 가로채려 했다는 것.
그리고 그가 중간에 끼어들어 태초의 은을 성공적으로 회수했다는 것까지.
이번 사건의 뒤에 그런 사정이 숨어 있던 거군요. 이제야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이해가 되네요.
안수호는 소설 속 등장인물인 그녀에게 밝힐 수 있는 모든 정보를 밝혔다. 그가 그만큼 그녀를 믿고 있다는 방증이었다.
다만, 그럼에도 설아현으로선 조금 아쉬운 마음이 들 수밖에 없었다.
기왕이면 미리 다 설명해주셨으면 좋았을 텐데. 물론 수호 씨한테도 사정이 있었겠지만요…….
설아현은 안수호가 회귀자라 착각하고 있다. 덕분에 그녀는 안수호를 자신의 유일한 이해자라며 각별히 여기고 있었고, 안수호 또한 그러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때문에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이번 일에 있어 그녀의 도움을 필요로 해 협력을 구했으면서도, 관련 사정을 전부 밝히지 않은 안수호가 야속했다.
“미안해요. 일이 이렇게까지 꼬일 줄은 몰랐거든요. 다 끝난 다음에 천천히 말씀드리면 될 거라 생각했어요.”
혹시 절 못 믿으시는 건 아니죠?
“설마요. 제가 왜 아현 씨를 못 믿겠어요.”
안수호는 즉답했지만 설아현의 머릿속에는 이미 자그마한 불안감이 샘솟고 있었다. 안수호 또한 전화기 너머에서 그런 기색을 느꼈다.
“아현 씨. 아현 씨는 절 100% 신뢰하시나요?”
100%……는 아니지만 상당히 신뢰하고 있죠. 수호 씨가 저처럼 회귀자인 것도 있고, 또 벌써 몇 번이나 절 도와주셨으니까요.
“저도 마찬가지예요. 저번에 하늘이가 납치됐을 때나 이번처럼. 아현 씨는 제가 도움을 구할 때마다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셨잖아요. 그런데도 이렇게, 아현 씨의 신뢰를 배신하듯 행동해서 죄송해요. 다신 이런 일 없도록, 앞으로는 아현 씨한테 숨기는 거 하나 없이 전부 말씀드릴게요.”
네?! 저, 전부요?!
안수호의 말에 설아현이 흠칫 놀라며 얼굴을 붉혔다. 숨기는 것 하나 없이 전부 밝히겠다고. 그 말에 무심코 예전에 관측했던 안수호와의 미래를 떠올려버렸기 때문이다.
‘헤윽♡! 미, 미안해애. 아니, 죄송해여 선생니힘♡ 아혀니, 아현이 이러케 반성하고 이쓰니까하…….’
설아현의 뇌리에 그날 미래 예지로 보았던 야시시한 장면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동시에 그녀의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
‘숨기는 거 하나 없이 전부 밝힌다는 건 그러니까……. 그때 본 미래처럼 그렇고 그런 성적 취향이라든가, 그런 것도 전부 나한테 오, 오픈한다는 건가……?’
드디어! 라는 기대감와 아직은 이르지 않냐는 우려가 그녀의 머릿속을 양분했다. 그러나 결국은 우려가 기대감을 이겼다.
저, 전부……는 아직 좀 이르지 않을까요! 고, 고고공적인 일은 그렇다 쳐도! 서로의 프라이버시라든가? 말 못할 사정 같은 게 있을 수도 있는 거니까……!
“……예?”
당연하지만 안수호는 그런 의미로 말한 게 아니었다. 그저 다음에 협력을 구할 때엔 관련 사정을 먼저 다 밝히겠노라고 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한 번 망상의 늪에 빠진 설아현의 정신은 좀처럼 정상 영역으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그 이후로도 설아현은 한참 동안 횡설수설하며 말을 더듬어댔다. 보다못한 안수호가 조심스럽게 설아현에게 물었다.
“그, 아현 씨? 그래서 오늘 저한테 왜 전화하셨다고 했죠?”
아아아 맞다! 죄송해요! 제가 그만 원래 용건을 잊고 딴소리만 하고 있었네요!
그제야 진정한 설아현이 본래 용건을 말하기 시작했다.
사실 얼마 전에 겨울동맹 성유진 헌터가 개인적으로 절 찾아왔거든요.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그 기생괴수 사건을 이야기하는데. 뭔가 의미심장한 눈치더라고요.
“의미심장하다면?”
꼭 절 떠보는 것 같았어요. 그때는 왜 그런가 싶었는데, 수호 씨한테 뒷이야기를 들으니까 알겠더라고요. 아무래도 수호 씨가 의도적으로 태초의 은을 가로채려 했고, 그 과정에 저희 흑룡회가 협력한 게 아닌가 의심하는 것 같아요. 여명단한테 습격당하던 겨울동맹 거래자를 구해준 게 저희였잖아요.
설아현의 추리는 제법 그럴듯했다. 겨울동맹 역시 기생괴수 피해자가 경비대 사람이라는 소식 정도는 입수했을 테고, 어쩌면 그 정체가 안수호라는 것마저 알아냈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본래 샤오메이와 거래하려던 한가람이 습격당했을 때,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흑룡회 헌터들이 나타나 그를 구해주지 않았는가.
그냥 보면 따로따로 일어난 사건이었지만 흑룡회와 안수호는 이미 한 차례 협력했던 사이. 성유진 입장에선 그런 둘이 합심해서 태초의 은을 가로채려 했다고 충분히 의심해볼 상황이었다.
그래서 그 일과 관련해 의논하는 자리를 마련하고 싶어서 연락드렸어요. 혹시 시간 되시나요?
“시간이라면 언제를 말씀하시는 거죠?”
최대한 빨리요. 가능하면 오늘 당장이라도 만났으면 해요.
“그럼 오늘 바로 가죠. 어차피 휴가라 할 일도 없었으니까요. 지금 바로 서울로 올라가겠습니다.”
성유진이 의심하기 시작했다면 머지않아 귀찮은 일이 벌어지게 될 지도 몰랐다. 안수호는 최대한 빨리 대책을 논해야 한다 생각했다.
“지금 출발하면 점심 즈음에는 흑룡회 본사에 도착할 겁니다. 그때 뵙죠.”
네. 도착하면 연락주세요.
전화를 끊은 안수호가 곧바로 나갈 채비를 했다. 분주하게 준비하는 그의 얼굴에는 그럼 그렇지, 하는 감정이 진하게 떠올라 있었다.
아무리 그가 지쳤다고 한들 이 악의적인 세상이 그를 가만히 내버려둘 리가 없었으니까.
충분히 예상 가능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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