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6화 〉 165. 삶과 우주. 그리고 모든 것을 아우르는 궁극적인 대전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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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우주, 그리고 모든 것을 아우르는 궁극적인 대전제.
그 실로 거창한 표어를 마주한 안수호는 도대체 루엘이 무슨 말을 꺼내려는 건가 싶었다. 거창해도 너무 거창했으니까. 꼭 유명한 철학서의 서두 같은 느낌의 문장이라고.
“신은 죽었다. 고로 이 우주에 더 이상 신은 존재하지 않아.”
그렇게 생각하고 있자 아니나 다를까, 루엘은 웬만한 사람이라면 다 아는 니체의 격언을 꺼내들었다.
신이 죽었노라고. 그것이 삶과 우주, 그리고 세상 모든 것을 아우르는 궁극적인 대전제라고.
참 많은 걸 생각하게 해주는 멋드러진 말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지금 철학적 담론을 나누고 있는 게 아니었다. 그렇기에 안수호는 루엘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고, 이내 고개를 저으며 그럴 리가 없다고 부정했다.
“뭔 소리야 그건. 신이 죽었다니? 멀쩡히 살아있잖아. 설마 내가 모르는 사이에 쾌락천마 그놈이 죽기라도 했다는 건가?”
“네가 말하는 쾌락천마가 지금 이 세상을 관리하고 있는 자를 말하는 거라면……. 안타깝게도 놈은 신이 아니야. 그저 관리자지.”
“관리자?”
안수호는 아리송했다. 평소 종교적 담론과 연이 없던 그는 신에 대한 지식이라 해봐야 소설 따위에 나온 것으로 한정되었다. 그리고 그가 읽던 소설에는 지금 루엘의 말처럼, 신이라는 존재에 대해 관리자라며 냉소적으로 낮춰 부르는 작품도 얼마든지 있었다.
그러나 그건 그저 표현의 차이일 뿐이다. 관리자라는 초라한 명칭을 달고 있다 한들 신은 신. 초월적인 권능과 기적을 부리며 저 하늘 위에 군림하는 자가 신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허나 루엘은 그 존재를 두고 신이 아니라며 부정했다.
“쾌락천마는 신이 아니야. 신이라면 전지전능해야 하는데 그들은 전능하지도 전지하지도 않으니까. 그건 이 세상뿐 아니라 다른 세상들도 마찬가지야. 어느 세상이든 신이라 불리는 존재는 있지만 전지전능한 ‘진짜 신’은 없어. 있는 건 그저 정체모를 누군가로부터 수많은 차원들의 관리를 일임받은 관리자들뿐.”
“……네 말은 그럼 그 정체모를 누군가가 신이라는 건가?”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만 진실은 아무도 몰라. 맨 처음 수많은 차원을 만들고 관리자를 임명한 존재가 누구인지, 지금 어떤 상태인지는 아무도 모르거든. 관리자들조차 말이야.”
태초에 전지전능한 누군가가 있었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 누군가가 정녕 누구인지는 그 누구도 알지 못한다. 관측된 사실이 없다.
그리고 존재는 관측에 의해 결정된다.
고로 신은 없다.
혹은 있었으나 죽었다.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그것이 루엘의 논리요, 그녀가 말하는 세상 모든 것을 아우르는 대전제였다.
“흐음.”
그 사실 앞에서 안수호는 생각에 잠겼다.
수많은 세상과 수많은 신이 존재한다. 그 사실은 이미 아라엘에게 들어 알고 있던 내용이었다. 새롭게 알게 된 건 그들이 신이 아닌 관리자요, 그런 관리자들을 임명한 전지전능한 ‘진짜 신’이 존재한다는 것 정도.
허나 안수호와는 별로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스케일이 커도 너무 큰 이야기였으니까.
다만 아예 수확이 없는 건 아니었다. 조금 전 루엘의 이야기 속에서 안수호는 그간 심증만 가지고 있던 추측에 대한 확신을 얻어낼 수 있었다.
‘쾌락천마는 전지전능하지 않다.’
자신을 이 세상에 끌고 온 그 가증스러운 신은, 실은 신조차 아닌 한낱 관리자에 불과했던 놈은 그의 예상대로 전지하지도 전능하지도 않았다. 며칠 전 천사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 짐작하고 있던 사실이지만, 루엘 덕분에 짐작을 확신으로 바꿀 수 있었다.
제아무리 안수호를 저 위에서 거만하게 내려다보고 있다 한들, 쾌락천마도 결국 안수호와 마찬가지로 거대한 시스템에 종속된 존재였다고. 그 사실을 알게 된 것만으로도 안수호로선 큰 수확이었다.
“……왜 이리 반응이 덤덤해? 안 놀라워? 신기하지 않냐? 신이라든가 관리자라든가 다 처음 들어보는 이야기일 거 아니야?”
“대충 짐작하고 있었거든.”
“그래?”
사실 이미 아라엘한테서 들은 내용이었기에 덤덤했던 것이지만, 그걸 곧이곧대로 말할 수는 없었다. 혹시라도 다른 천사가 그 말을 들었다간 아라엘의 소심한 배신이 그들에게 탄로나고 말 테니까.
“하긴. 대충 보니 판타지 소설 같은 거 잔뜩 읽어본 눈치던데 그럼 익숙할만하지. 다중차원이나 관리자 같은 건 나름 널리 퍼진 설정이니까.”
“쾌락천마처럼 자기 세상을 소설로 쓰는 경우가 꽤 있나 봐?”
“많지는 않지만 드물지도 않지. 관리자라는 것들은 기본적으로 관심에 목마른 새끼들이거든. ‘내가 관리한 세상이 이렇게 예쁘고 재미있어요!’하고 보여주고 싶어 안달이 난 놈들이라니까.”
“꼭 철부지 어린애 같은 이미지군.”
“별로 다르지도 않아. 걔네들은 죄다 부모 없이 혼자 자라나니까. 제대로 교육을 못 받아서 성격이 개차반인 경우가 대부분이지. 이쪽 관리자만 봐도 답 나오잖아?”
“하긴, 내 경우도 고작 소설에 욕 몇 마디 했다고 끌려온 거였으니까.”
그야말로 치기어린 어린애의 투정 그 자체라고. 안수호가 너털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루엘이 피식 웃으며 담배를 물었다.
“끌려올만했네. 관리자들은 자기 세상에 대한 애착이 엄청 강해서, 예전에는 그런 일이 왕왕 있다 그러더라. 지금은 금지됐지만.”
그 말대로 과거와 달리 지금은 지성체의 차원간 이동이 금지되어 있었다. 그러나 쾌락천마를 포함한 몇몇 관리자는 그런 금기 따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금기라고 해봐야 강제성이라곤 하나 없는 구두 약속에 불과했으니 들키지만 않으면 그만이라 생각했다.
“음?”
그때, 문득 든 의문에 안수호가 루엘에게 물었다.
“그런데 나야 그렇다 쳐도 넌 왜 이 세상으로 납치당한 거지? 나처럼 인터넷에서 놈하고 싸워댄 것도 아닐 텐데 말이야.”
“나?”
안수호의 물음에 루엘이 의자 등받이에 몸을 깊숙이 기댔다. 멍하니 허공을 올려다보던 그녀가 이내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내 경우는 너처럼 납치된 건 아니야. 굳이 따지자면 휘말린 거지.”
“휘말렸다고?”
“내가 지내던 숲에는 ‘엘더 트렌트’라고 하는 나무 형태 몬스터가 자생하고 있었는데, 관리자가 그놈들한테 눈독을 들였는지 숲의 공간을 통째로 잘라내서 이쪽 세상의 던전으로 끌어다 쓰더라고. 그때 미처 빠져나가지 못하고 휘말려서 이쪽 세상에 넘어오게 된 거지.”
다른 세상의 공간이 통째로 던전으로 사용된 건 기사의 무덤과 비슷했지만 루엘의 사정은 조금 달랐다. 빌헬름이라는 기사가 주 목적이었던 기사의 무덤과 달리, 루엘의 경우는 문자 그대로 휘말려든 피해자였으니.
“그 관리자놈도 아마 깜짝 놀랐을 거야. 만만한 몬스터만 좀 훔치려 했는데 졸지에 반신급 정령이 함께 딸려왔으니까. 아마 나 때문에 골치 좀 아팠을걸? 관리자라 해도 세상에 직접 개입하는 데에는 ‘한도’가 존재하는데, 난 그 한도를 넘은 존재라 어떻게 못하거든.”
루엘은 스스로를 뽐내듯 가슴을 쭈욱 펴며 말했다.
루엘은 관리자를 신이 아니라며 폄하했지만 그건 그녀 개인의 의견이었다. 그녀의 생각이 어찌 되었든 쾌락천마를 위시한 관리자들은 그들이 관리하는 세상의 신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루엘은 그런 신조차 섣불리 건드릴 수 없는 최고위 정령.
“후후.”
루엘은 그런 자신의 위용을 보며 안수호가 감탄하길 바랐으나, 정작 안수호의 정신은 다른 곳에 팔려 있었다.
‘좀 이상한데.’
아라엘과 루엘 덕에 안수호는 그가 속한 세상이, 나아가서 수많은 세상을 아우르는 거대한 차원 구조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얼추 알 수 있었다. 그렇기에 비로소 그 위화감을 깨달을 수 있었다.
“……너무 나대는 거 아닌가?”
“뭐? 나한테 한 소리야?”
루엘이 미간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그러자 안수호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쾌락천마말이야. 이상하잖아. 다른 세상에도 관리자가 버젓이 존재하는데 도대체 무슨 깡으로 그렇게 들쑤시고 다니는 거야?”
빌헬름의 경우는 그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빌헬름은 오버랭크 던전의 보스였으니까.
쾌락천마 스스로 그런 강한 존재를 만들어내는 게 불가능해서 부득이하게 다른 세상에서 납치해왔다. 그렇게 생각하면 그나마 동기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루엘의 경우는 달랐다.
엘더 트렌트. 그 괴수에 대해서는 안수호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의문이었다.
‘엘더 트렌트는 A급 괴수야. 그런데 명색이 관리자란 놈이 고작 A급 괴수를 만들지 못해서 다른 차원을 들쑤시고 훔쳐온다고?’
아라엘은 말했다. 쾌락천마는 빌헬름을 몰래 납치해오려 했다고. 그러나 라미엘이라는 천사 때문에 들켜버리고 말았다고. 그때문에 지금 천계에 비상이 걸려 아주 난리도 아니라고.
그 말은 즉 다른 차원의 존재를 납치해오는 것이 쾌락천마에게도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니란 소리였다.
헌데 왜 쾌락천마는 자기 집 냉장고 뒤지듯 다른 차원을 들쑤시고 다니는가.
“……글쎄. 그 관리자 놈이 무슨 생각인지는 나도 몰라. 뭐, 추측이라면 몇 가지 해볼 수 있겠지만…….”
“예를 들어서?”
“다른 차원의 관리자에게 들키지 않을 자신이 있든가. 혹은 그 쾌락천마라는 놈의 신격이 높아서 하위 관리자들의 불만 따위 무마할 수 있다든가. 어쩌면 그저 상상 이상으로 안하무인해서 멋대로 날뛰고 있는 걸지도…….”
그 부분은 루엘도 추측밖에 할 수 없었다. 아무리 루엘이 반신급 정령이라 해도 결국 반신에 불과했으며, 하물며 이곳은 그녀가 본래 살던 차원도 아니었으니까.
“신격이니 하위 관리자니 하는 걸 보면 관리자들 사이에도 계급 같은 게 있나봐?”
“맞아. 딱 정해진 체계가 아니라 힘의 논리에 가깝긴 하지만.”
“그럼 쾌락천마는 그중에서도 상당히 높은 관리자인 건가?”
“하는 짓거리를 보면 낮은 위치는 아니겠지. 그렇지만 요즘 쩔쩔매고 있는 꼴을 보면 엄청 상위 관리자도 아닐 거야.”
본래 쾌락천마는 루엘에 대한 감시를 결코 소홀히 하지 않았다. 반신급 정령이라는 불청객은 쾌락천마에게 있어서 여간 성가신 존재가 아니었으니까.
그 빌헬름조차 무력은 강했을지언정 신격은 거의 없는 것이라 다름없었기에 쾌락천마에게 양껏 농락당하다 죽었다. 그러나 루엘의 경우는 달랐다. 비록 반신에 불과하다 해도 루엘은 쾌락천마에게 직접 위해를 가할 수 있는, 보다 직접적인 위험 요소였으니.
그렇다보니 루엘에 대한 감시가 소홀해진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최근 며칠 사이, 루엘은 자신을 지켜보는 감시의 눈이 사라졌음을 알아차렸다.
“놈이 쩔쩔매고 있다고? 그걸 네가 어떻게 알지?”
“날 감시하던 눈이 사라졌거든. 아마 여기저기 들쑤시다 다른 관리자한테 제대로 걸려서 나한테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는 거겠지.”
루엘의 추측은 정확했다. 안수호가 그날 아라엘에게 들은 그대로였다.
그러나 안수호는 긍정하지 않았다. 한낱 빙의자에 불과한 그가 천계의 사정을 알고 있는 건 이상한 일이었으니.
“안수호라 그랬나? 너는 원래 세상으로 돌아가는 게 목적이지?”
“응. 일단 그렇지.”
“그럼 틈날 때마다 기도라도 해. 지금 냄새를 맡은 관리자가 쾌락천마가 범한 금기를 확실하게 밝혀내면 다른 관리자들도 가만히 있진 않을 테니까. 어쩌면 그중에 네가 온 세상의 관리자도 있어서 무사히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르지.”
그 관리자가 쾌락천마보다 약하면 말짱 꽝이지만 말이야. 그렇게 덧붙인 루엘이 짓궂은 웃음을 낄낄 흘려댔다. 루엘에게 있어 안수호의 사정 따위 그저 남의 일에 지나지 않았다.
“넌 원래 세상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 건가?”
“딱히 상관없어. 내가 살던 세상도 좋지만 이쪽 세상도 나름 마음에 들거든. 특히 커피랑 담배 종류가 다양한 게. 내가 살던 곳은 커피는 없고 담배는 하나같이 고약한 것들뿐이었거든.”
반신의 신격에 걸맞은 태평함이었다. 안수호는 그 태평함이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제아무리 이쪽 세상이 더 살기 좋다 해도 고향이 그리운 마음 정돈 있을 텐데.
“그러고 보니…….”
그때 안수호의 뇌리에 한 가지 의문이 스쳐 지나갔다.
“좀 전에 나한테 ‘너는’ 원래 세상으로 돌아가는 게 목적이냐고 물었지? 그럼 네가 만났다던 빙의자는 안 그랬다는 건가?”
“어. 나처럼 이쪽 세상을 엄청 마음에 들어하던 놈이었지.”
그 말에 안수호는 루엘이 만난 빙의자가 적어도 강하늘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강하늘은 안수호와 마찬가지로, 어쩌면 그보다 더더욱 원래 세상으로 돌아가는 걸 갈망하고 있었으니까.
“혹시 그 빙의자에 대해 말해줄 수 있나?”
“나도 아는 건 별로 없어. 가게에 가끔 와서 종종 만나긴 하는데 자기 이야긴 도통 안 하는 놈이거든.”
“조금이라도 괜찮아.”
“그렇다면야 뭐…….”
루엘이 생각을 정리하듯 잠시 뜸을 들였다. 건성으로 문 전자담배 옆으로 허연 연기가 스멀스멀 새어나왔다.
“일단 이름은 몰라. 슬럼가에서 일하는 청부업자인데 남들한텐 ‘마사장’이라 불린다 하더라고? 드워프처럼 땅딸막한 키에 다부진 체형을 한 초인인데 혹시 알아?”
“……아니. 전혀.”
마사장이라는 이름도, 그 특징도 죄다 처음 들어보는 것들이었다. 안수호는 루엘이 말한 마사장이 자신과 마찬가지로 원작에 등장하지 않았던 캐릭터임을 직감했다.
“하는 일은 뭐……. 일단 돈 되는 일은 다 한다곤 하는데 주요 분야는 물건 판매라더라. 본인 말로는 풍선껌부터 전차 엔진까지 부탁만 하면 죄다 구해다 준다던데?”
역시 이번에도 짚이는 구석이 없었다. 안수호는 그 외 다른 정보는 없느냐 물었지만 루엘이 아는 건 딱 거기까지였다.
“근데 마사장에 대해선 왜 묻는 거야? 말했잖아. 그 녀석은 이쪽 세상에 머무르고 싶어 하는 쪽이라고.”
“목적은 달라도 사정을 아는 사람끼리 협력할 수도 있으니까. 한 사람이 귀환하면 다른 사람도 무조건 함께 귀환해야 하는 상황이 아닌 이상 대립하게 될 일은 없을 테니.”
“하긴. 안 그래도 힘든 목표인데 동료는 한 사람이라도 많은 편이 좋겠지. 아무리 생각해도 그 쾌락천마라는 놈이 널 곱게 집에 보내줄 것 같진 않거든.”
“나도 알아. 게다가 나도 곱게 집으로 돌아가기만 할 생각은 없거든.”
“곱게 안 돌아가면 어쩔 건데?”
“갈 땐 가더라도 쾌락천마 그 자식한테 한 방 제대로 먹여주지 않으면 성이 안 찰 것 같아서.”
루엘이 풋 웃으며 진한 연기를 뱉었다. 반신인 그녀가 보기엔 가소롭기 그지없는 말이었다. 그러나 가소롭기 그지없기에 오히려 흥미로운 말이기도 했다.
“재미있네 그거! 신에게 덤비는 필멸자라! 원래 살던 세상 생각나서 좀 그리운걸!”
그렇게 외친 루엘이 안수호의 손을 홱 낚아챘다. 그가 당황한 찰나 따스한 기운이 루엘에게서 안수호에게로 흘러들어가기 시작했다.
“이건……?”
“내 힘으로 너의 정령친화력을 조금 높여줬어. 그동안 목에 걸고 있는 그 서리정령의 목소리를 전혀 들을 수 없었지? 아마 이제는 들을 수 있을 거야.”
네 당찬 포부를 봐서 특별히 서비스해주는 거라고.
루엘의 말에 안수호는 실비와 대화할 때처럼 내면으로 의식을 집중했다. 그러나 들려오는 목소리는 없었다.
“……하나도 안 들리는데?”
“그 아이가 삐져도 단단히 삐진 모양이네. 그야 자기 계약 상대를 죽이고 멋대로 노예처럼 부려댔으니 당연한 일이지만.”
“그럼 어떡하지?”
“그거야 네가 알아서 할 일이지. 다음번에 올 땐 그 아이랑 잘 풀고 와. 그럼 믹스커피말고 제대로 된 커피를 대접해줄 테니까.”
그렇게 덧붙인 루엘이 안수호를 일으켜세웠다. 자기도 퇴근하고 싶다고. 시간도 늦었으니 오늘은 이만 돌아가라며.
안수호는 아직 묻고 싶은 게 몇 가지 남았지만 순순히 그 축객령에 따랐다. 루엘이 그를 도와주는 건 순전히 그녀의 선의, 내지는 호기심에 기반한 일이었다. 고로 마냥 안수호 자신의 입장만 강요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오늘만 날인 것도 아니었고.
‘루엘은 쾌락천마도 함부로 어찌 못한다고 했으니까. 만나려면 언제든지 만날 수 있겠지.’
쾌락천마 입장에선 열불이 뻗칠 일이었다. 안 그래도 성가신 안수호가 조용히 숨어지내던 반신급 정령과 만나버리고 말았으니.
기실 오늘의 만남은 천사 라미엘의 설계였으나 쾌락천마는 그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고로 그녀는 둘의 만남을 그저 재수 없는 우연이라 생각하며, 애먼 천사들에게 화풀이나 해댈 게 뻔했다.
그야말로 루엘의 말마따나, 쾌락천마는 전지하지도 전능하지도 않은 한낱 관리자에 불과했다. 때문에 부하의 배신조차 알아차리지 못했고, 심지어 그녀가 관리하는 이 세상마저 안수호나 루엘 같은 이물질들이 끼어든 탓에 조금씩 그녀의 통제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그럼 잘 가셔.”
안수호를 배웅하던 루엘은 그런 현 상황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예지력이라고도 할 수 없는 애매한 직감이었지만 그녀는 분명하게 단언할 수 있었다.
지금 이 순간, 무언가 거대한 흐름이 시작되려 하고 있노라고.
‘흥미진진하네. 지루할 틈이 없는 것도 원래 세상보다 맘에 든다니까.’
안수호를 보낸 루엘은 가게를 마저 정리하고 조명을 껐다. 깜깜한 골목길에서 유일하게 빛나던 그녀의 카페가 다른 가게들과 마찬가지로 한밤중의 어둠 속에 완연하게 녹아들었다.
“……정말. 지루할 틈이 없다니까.”
직후, 루엘은 그 어둠 속에 녹아든 또 다른 불청객의 존재를 알아차렸다. 그녀의 시선이 카페 바깥에 서있는 가느다란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흐릿한 달빛을 받아 녹색으로 빛나는 갑주.
등 뒤에 매고 있는 고풍스러운 디자인의 활.
금이 간 투구 아래로 흘러내린 까만 머리카락.
그리고 그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범상치 않은 전사의 기운까지.
“오늘따라 특이한 손님이 많네.”
영업시간은 진즉에 끝났는데 도대체 퇴근은 언제 하냐며. 마음에도 없는 불만을 입에 올리며 루엘이 손으로 들어오라 손짓했다.
아인 디트리히.
빌헬름의 사방기사 중 유일한 생존자이자, 상관의 복수를 위해 신의 아성에 도전하려는 처량한 도망자를 향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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