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5화 〉 154. 태초의 은(1)
* * *
안수호는 위험하다. 고로 죽일 수 있을 때 죽여야 한다.
아이기스가 안수호의 제안을 거절한 것은 그러한 이유에서였으나, 꼭 그 이유만 있는 건 아니었다. 안수호의 위험도와 별개로, 그는 안수호가 자신에게 건넨 제안 자체가 거짓일 거라 의심했다.
본래 태초의 은 거래는 철저하게 비밀리에 이뤄진 거래였다. 뒷세계 전체를 아우르는 정보망을 지닌 여명단조차 그 첩보를 입수하는 데에 얼마나 공을 들였던가.
헌데 그 정보를 조직도 아니고 한낱 개인이 입수해 거래에 끼어든다? 그게 가당키나 한 일인가.
고로 안수호 또한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어딘가 조직 소속이리라. 아이기스는 그렇게 생각했고,그렇기에 안수호의 제안이 거짓일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안수호가 조직의 명령을 받는 입장인 이상, 자기 멋대로 태초의 은을 파괴하거나 다른 이에게 넘길 순 없을 테니까.
‘어렵게 빼돌린 특급 아티펙트를 그렇게 쉽게 포기할 리가 없지. 고로 거래는 거짓말. 수틀리면 부수겠다는 협박도 거짓말이다. 보나마나 협박으로 시간이나 벌려는 수작이겠지.’
비록 전제 조건은 틀렸어도 아이기스는 안수호의 목적이 특임대가 올 때까지 시간을 버는 것임을 단번에 간파했다. 명색이 여명단 암살팀인데 그정도 눈치는 당연히 있었다.
그렇기에, 아이기스는 안수호의 제안에 휘둘리지 않고 곧바로 공격을 감행했다.
쐐애애애액!!
12장의 반사필드가 날카로운 파공성과 함께 안수호에게 날아들었다. 어떠한 전조도 없던 부지불식간의 공격.
피슛!
그러나 안수호라고 마냥 긴장을 풀고 있던 건 아니었다. 게다가 그는 현재 샛별의 숨소리의 효과로 4배속으로 가속된 상태.
그는 전후좌우에서 날아드는 열둘의 공격을 거의 완벽하게 피해냈다. 미처 피하지 못한 한 장이 그의 허리를 스쳤지만, 아주 얇은 피부 한 장을 베고 지나가는 데에 그쳤다.
“……지금 이게 뭐하자는 거지?”
애써 당혹감을 감추며, 안수호가 침착하게 물었다. 그러나 아이기스는 대답 대신 주먹을 앞세웠다. 그것이 곧 대답이었다.
“헷. 교섭 결렬이군. 얼른 죽이고 빼앗으면 된다. 뭐 그런 거지?”
큐브가 험상궂은 웃음과 함께 양손에 정육면체 모양의 발광체를 생성했다. 김주연과 강준구도 각각 전투 태세를 취했다.
여명단은 상명하복이 확실한 조직. 그렇기에 가장 상급자인 아이기스의 결정에 그 누구도 토를 달지 않았다.
“내 제안이 마음에 들지 않았나? 니들이 원하는 건 이 아티펙트뿐일 텐데?”
“……원래는 그랬지. 그렇지만 너는 살려서 보내기엔 지나치게 수상하다. 다른 둘은 몰라도 너만은 조직의 미래를 위해서 이 자리에서 죽여야겠어.”
“그게 뭔 시발…….”
고작 자신 따위가 여명단의 위협이 될 거라니. 원작에 나왔던 수많은 강자들을 기억하는 안수호로선 결코 동의할 수 없는 말이었다. 그러나 아이기스의 태도는 확고했다. 노골적으로 피어오르는 살기는 둘 사이에 더 이상 협상의 여지가 없음을 나타내고 있었다.
“……형. 지금 도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한편, 류태현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뒷거래니 아티펙트니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저 샤오메이가 위기에 처한 것 같아 구해주고자 했을 뿐이다.
그런데 대뜸 아이기스니 큐브니 강준구니 새로운 적들이 우후죽순 나타나질 않나. 안수호는 또 갑자기 이상한 유리병을 꺼내들더니 의미심장하게 거래 운운하지를 않나. 그런데 상대는 또 그걸 거절하질 않나.
“지금 설명하긴 힘들고. 나중에 다 설명해줄게.”
“까딱 잘못하면 나중이 없을 것 같은데?”
복잡하게 돌아가는 현 상황을 류태현은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다만 한 가지, 지금 자신이 더럽게 귀찮고 위험한 상황에 처했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상황에 안수호가 어떤 식으로든 엮여 있다는 것도.
“형도 참 가는 곳마다 사건을 몰고 다니는구나.”
그럼에도 류태현의 태도는 태연자약했다. 아니, 오히려 즐거워하는 것 같은 모습도 보였다. 두 주먹을 꽈악 말아쥔 그가 전신의 근육을 쥐어짜며 웃었다.
“형은 아까처럼 저 방패남 좀 맡아줘. 나머지 셋은 내가 상대할 테니까.”
“너 혼자서 되겠어?”
“안 될 건 없지. 상대가 둘이든 셋이든 넷이던 어차피…….”
콰앙!
류태현이 있는 힘껏 땅을 밟았다. 한 차례 지축이 크게 울리며 묵직한 진동이 사방으로 퍼졌다.
그 가운데에 선 류태현의 몸에서 무형의 기운이 피어올랐다. 탈리스만에 의해 그의 체내에 축적된 마력. 그것이 온몸을 가득 채우다 못해 눈에 보일 정도의 농도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끝까지 가면 내가 다 이기거든.”
자신만만한 선언. 그와 동시에 피어오르는 강렬한 기세.
그 자리에 상대의 강함도 알아보지 못하는 머저리는 없었다. 강준구, 김주연, 큐브, 심지어 아이기스조차 전보다 더욱 진해진 류태현의 기운에 긴장감을 꿀꺽 삼켰다.
“그래. 너만 믿는다.”
객관적으로 현재 시점의 류태현이 저들을 상대로 승리하는 건 어렵다. 안수호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류태현을 믿었다. 류태현이라는 남자를 믿어보고자 했다.
엑스트라로 빙의당해 갖은 고생만 해오던 자신과 달리 그는 이 세상의 주인공이었으니까.
타앗!
안수호와 류태현이 동시에 지면을 박찼다. 직후 큐브의 입에서 흥분을 주체하지 못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화끈하게 날려주지!”
키이이이잉!!
큐브의 양손 위에 떠오른 큐브 모양의 에너지 탄환. 그것이 X, Y, Z축 세 방향에서 각각 삼등분 되어 27개의 자그마한 탄환으로 변했다. 양손을 합친 탄환의 숫자는 도합 54.
스팟! 파바바바바바방!
이윽고 자그마한 폭죽이 터지는 소리와 함께 그 쉰넷의 탄환이 일제히 발사되었다. 동시에 안수호의 탈리스만이 맹렬한 빛을 발한다.
쩌적.
귓가를 간질이는 자그마한 파열음. 그러나 안수호는 그 작은 소음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투화아아악!!
안수호의 오른손에서 수십 개의 흑탄이 뿜어졌다. 파랑과 검정의 탄환이 허공에서 어지러이 교차하며, 사방에서 거센 폭발을 일으켰다.
그 폭발 사이를 헤집으며 류태현이 큐브의 지척까지 다다랐다.
‘이 남자는 딱 봐도 원거리 타입이야. 그럼 근접 전투는 약하겠지.’
누구나 예상할 수 있던 간단한 사실. 그렇기에 이미 충분한 대비가 되어 있었다.
스팟!
류태현이 가까이 접근하자 그의 좌우에서 김주연과 강준구가 각각 나이프를 휘두르며 그를 막아섰다.
서로가 서로의 사각을 보완해주는 완벽한 연계. 피할 수 있는 방향은 없었다.
그렇기에.
콰득! 콰드득!
류태현은 피하는 대신 공격을 막았다. 아니, 정확히는 잡았다. 그의 양손이 좌우에서 짓쳐드는 칼날들을 우악스럽게 쥐었다. 한 줄기 핏물이 피슛! 튀어 오른다.
“에?”
“어?”
그러나 그뿐.
두 사람의 나이프는 류태현의 피부를 갈랐으나 딱 거기까지였다. 극한까지 강화된 류태현의 근육은 그 이상 칼날이 침범하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
“이런 미친”
그 말도 안 되는 광경에 큐브가 놀라기도 전에 류태현의 발길질이 꽂혔다. 가까스로 막아내긴 했으나 양팔의 뼈가 부러진 듯한 격통에 큐브가 격한 신음을 토해냈다.
“으아아아아!”
“죽어어어!!”
그로부터 반 박자 늦게 강준구와 김주연이 재차 공격했다. 그러나 류태현은 재빠르게 몸을 숙이며 재차 큐브에게 달려들었다. 거머리처럼 달라붙는 류태현을 보며 큐브가 질린 기색으로 에너지 탄환을 생성한다.
퍼벙! 퍼버버버버벙!!
거센 폭발음이 연속해서 울리고 사방에 자욱한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캉! 카앙! 카가가가강!
한편 안수호와 아이기스의 싸움은 전과 마찬가지로 일전일퇴를 반복했다.
안수호가 아이기스의 방어를 뛰어넘는 범위와 횟수로 반사필드의 빈틈을 공략하면, 그 틈을 노린 아이기스가 묵직한 일격을 카운터로 먹였다. 한 번의 공방을 주고받을 때마다 두 사람의 몸엔 크고 작은 부상이 착실하게 쌓여가고 있었다.
일견 막상막하로 보이는 싸움.
그러나 실상은 안수호가 약간 불리했다. 온전히 S급에 준하는 신체능력을 지닌 아이기스와 달리 안수호는 유독 신체 내구 부분에서 크게 뒤쳐졌다. 덕분에 같은 빈도로 상처를 주고받아도 안수호 쪽이 더욱 부담이 심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덜컥.
“크읏!?”
달려들던 안수호는 돌연 자신의 무릎이 무거워진 걸 느꼈다. 샛별의 숨소리의 효과가 끝났다고. 그렇게 생각한 순간 아이기스의 주먹이 그에게 날아들었다.
파앙!
그 주먹에 닿기 직전 가까스로 샛별의 숨소리를 다시 한 번 발동한다. 동시에 시야에 떠오르는 시스템 메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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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샛별의 숨소리’를 발동합니다(3/3). 신체의 움직임이 3분간 2배의 속도로 가속됩니다. ]
[ ‘샛별의 숨소리’의 모든 사용 횟수를 소모하였습니다. 금일 자정이 지날 때까지 발동 효과의 사용이 제한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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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어먹을……!’
안수호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그의 눈빛에 차츰 다급한 기색이 떠오른다.
안수호의 능력치는 민첩 특화형. 덕분에 강하늘의 능력치까지 빌린 현재 그의 민첩 패러매터는 A+에 달했다. 거기에 샛별의 숨소리의 가속 효과까지 더해지면 그의 속도는 일시적으로나마 평범한 S급 초인을 뛰어넘는 영역까지 다다를 수 있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일시적인 것.
안수호의 속도는 2배속 상태에서도 아이기스와 엇비슷했다. 아이기스 또한 안수호처럼 속도에 특화된 초인이었기 때문. 고로 배속 효과가 끝나는 순간 안수호는 일방적으로 밀리게 될 수밖에 없다.
‘망할, 특임대는 도대체 언제 오는 거야!’
3대 1로 싸우는 류태현에게 도움을 바랄 수는 없다. 고로 그가 믿을 구석은 오직 강력한 초인을 대상으로 한 경찰의 초인진압조직, ‘대초인특임대’밖에 없었다. 수십 명 가량의 부대원 전체가 A급에 준하는 그들이 온다면 제아무리 암살팀이라 해도 물러날 수밖에 없을 터.
‘먼저 출동한 경찰이 궤멸당했으니 분명 지원 요청이 들어갔을 거야. 문제는 특임대가 올 때까지 몇 분이나 남았다는 건데…….’
조금 전 정지민 경위가 특임대 급파 요청을 한 것이 약 10분 전. 그리고 특임대의 평균 출동 소요 시간은 15에서 20분.
고로 안수호는 최대 10분을 더 버텨야 했다. 그러나 그에겐 더 이상 아이기스를 붙잡아둘 수단이 없었다. 본래는 태초의 은을 빌미로 거래를 걸어 어떻게든 시간을 벌어볼 심산이었지만, 그 시도는 수포로 돌아가버리고 말았으니.
눈이 돌아갈 정도로 어지러운 공방을 주고 받으며, 안수호는 끊임없이 생각했다. 어떻게든 시간을 끌 방법이 있을 거라고.
앞으로 1분이라도. 10초라도. 혹은 1초라도.
아이기스를 상대로 이기는 게 불가능한 이상 이 교착 상태를 가능한한 오래 끌어가야 살아남을 수 있었으나.
‘젠장. 아무리 생각해도 방법이 없어.’
탈리스만, 샛별의 숨소리, 그리고 서리정령의 증표까지.
그는 가지고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 싸우고 있었다. 그 외에 코트 자락 안에 진압용 테이저 건 따위가 있긴 했지만, 고작 그런 게 아이기스에게 통할 리가 없었다.
‘차라리 태초의 은을 사용한다면…….’
잠시 그런 생각이 들었으나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비록 특급 아티펙트이긴 하나 태초의 은은 그런 편리한 아티펙트가 아니었으니.
앞서 그가 몸에 두르고 있는 다른 아티펙트와 달리, 태초의 은의 효과는 아주 심플했다. 액체 상태에서 자유자재로 형상을 바꾸며 다양한 형태를 취하는 무기. 그것이 특급 아티펙트 태초의 은의 정체였다.
물론 등급이 특급이니만큼 무기로서의 성능은 월등했다. 그러나 문제는 다루기가 더럽게 어렵다는 점이었다. 태초의 은을 사용하려면 차분한 환경에서 태초의 은과 교감하여 정신적 연결을 이뤄낸 뒤 차근차근 형상 변화를 연습해야 한다. 당연히 이런 급박한 전투 상황 속에서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설령 기적적으로 태초의 은을 다뤄낸다 해도 아이기스를 상대로는 속수무책이었다. 그 성능이 아무리 뛰어나다 한들, 물리적인 형태를 지니고 있는 무기는 그의 반사필드 앞에서 무용지물이 되어버리니까.
‘……이젠 정말 앰플을 터뜨리고 도망치는 것 밖에 방법이 없겠는데.’
여명단의 목적은 태초의 은. 고로 액체 상태인 태초의 은을 사방으로 흩뿌린 뒤 도망치면 자신을 쫓는 것보다 그걸 수습하는 걸 우선하리라. 막강한 아티펙트가 여명단 손에 넘어가는 건 안타까운 일이었으나 일단 살고 봐야 하지 않겠는가.
“…….”
안수호가 류태현 쪽으로 흘긋 시선을 던졌다. 그는 숫제 웃음까지 지으며 3대 1로 훌륭하게 싸워내고 있었으나, 그 몸에는 어느새 자잘한 상처가 상당히 늘어나 있었다. 그를 상대하는 세 사람이 점차 류태현의 무지막지한 신체능력에 적응하기 시작한 결과였다.
‘더 지체했다간 나든 류태현이든 둘 중 한 명이 당해버릴 거야. 그 뒤에 도망치려 했다간 늦어. 도망친다면 지금이다.’
그렇게 생각한 안수호가 있는 힘껏 탈리스만을 발동했다. 광역 공격으로 아이기스를 잠시 물러나게 한 뒤, 태초의 은을 터뜨리고 도망칠 생각이었다.
그러나.
쩌적!
그 순간 다시 한 번 자그마한 파열음이 그의 귓가를 간질였다.
쩌적! 쩌저적!
파열음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당황한 안수호가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소리의 근원은 그의 품 안이었다. 그가 품에서 태초의 은을 꺼내들자, 안쪽에 든 액체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요동치며 안쪽에서 앰플을 부수려 하고 있었다.
“음?”
그 이상 현상에 함께 싸우던 아이기스조차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쉴 틈 없이 공방을 주고받던 두 사람 사이에 아주 잠깐 정적이 내려앉는다.
그 순간.
파캉!
안쪽에서 요동치던 태초의 은이 마침내 앰플을 부수고 바깥으로 튀어나왔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