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8화 〉 147. 좁혀오는 그림자(2)
* * *
“……여명단 암살팀. 놈들이 지금 여기 와있어.”
그 말에 안수호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
여명단.
한국과 일본, 중국 등 동아시아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그 반정부 테러단체는 기본적으로 수직적인 조직 체계를 가지고 있다.
가장 위에는 여명단의 단장이. 그 아래에는 본부장 및 각 지부별 지부장들이. 한 지부의 장 아래에는 평균 서넛 정도의 간부가 있고 그 아래는 일반 및 견습 단원이 이어진다.
다만 이따금 지예원이 속했던 ‘첩보부’처럼 수직적인 계급 체계에서 벗어난 집단이 존재하긴 했다. 그리고 암살팀은 그러한 특수 집단 중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이들이었다.
그들은 여명단의 리더인 단장 직속의 부하들이다. 그 임무는 팀 이름에서 알 수 있듯 단장이 지정한 인물의 암살.
그들은 단장의 명령만 있다면 누구든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암살했다. 유명 헌터나 고위 정치인은 물론이요, 심지어 같은 암살팀 멤버조차 예외가 아니었다.
그런 만큼 팀원 개개인의 무력도 하나같이 출중해서, 여명단의 내부 사정을 아는 이에게 여명단 최강의 무력집단이 누구냐 물으면 열에 아홉은 암살팀을 꼽는다.
헌데.
‘암살팀이 나타났다고? 왜?’
암살팀은 후반부에야 나와야 할 놈들이 아니던가.
그렇게 생각한 안수호는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왜’ 따위의 질문은 무의미했다. 원작 전개는 진즉에 뒤틀린 지 오래요, 그렇기에 참고는 하되 맹신하지는 말아야 하는 것이었기에.
꼬옥.
안수호는 지예원을 더욱 꽉 안았다. 그러자 그녀의 몸에 퍼지던 잔경련이 조금씩 줄기 시작했다. 그가 지예원이 그랬듯 그녀의 귓가에 대고 작게 물었다.
“아직 근처에 있어?”
“……아니. 지금은 없어. 좀 전에 관중석 안쪽으로 들어갔어.”
지예원이 그에게서 몸을 떨어뜨렸다. 행인들이 보기엔 기나긴 애정행각이 이제야 끝난 것으로 보였으나, 정작 당사자 둘의 표정은 얼음장처럼 굳어 있었다.
“지예……. 지원아. 놈이 누군지 알고 있는 거야?”
“응. 아는 건 코드네임밖에 없긴 하지만…….”
“코드네임이 뭔데?”
암살팀은 최신화에서 한창 구성원이 밝혀지던 집단. 따라서 안수호조차 모든 구성원을 알고 있진 않았다. 즉 방금 지예원이 본 암살팀이 그가 알고 있는 인물인지 아닌지가 관건이었다.
“……아이기스.”
“아이기스?”
그 말에 안수호의 얼굴에 잠시 화색이 돌았다. 아이기스는 그가 알고 있는 암살팀이었기에.
그러나 곧바로 표정이 다시 어두워진다. 아는 녀석이면 뭣하나. 암살팀이 지금 여기 나타났다는 것부터가 이미 위기상황인데.
‘설마 우연히 여기 나타났다든가. 아니, 우연일 리가 없지. 우연히 암살팀하고 이렇게 딱 마주친다고? 지랄하지 말라 그래.’
우연이 아니라면 필연이요, 필연이라면 필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안수호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당장 떠오르는 원인은 두 가지. 바로 샤오메이와 미야였다. 둘 다 원작에서 여명단의 습격을 받았던 이들이니 아이기스의 목표가 그 둘 중 한 명이라면 얼추 말이 되었다. 아니, 당장 그 외의 가능성은 생각할 수 없었다.
‘만약 아이기스의 목표가 샤오메이라면 골치 아파져. 잘못하단 태초의 은이 여명단 손에 넘어가게 될지도 몰라. 게다가 놈이 샤오메이를 노리고 이곳에 왔다는 건 즉 거래장소가 놀이공원이라는 걸 파악했다는 소리야.’
여명단이 샤오메이에 대해 알아내기 위해선 필연적으로 한가람을 습격해 정보를 캐내야 한다.
그래서 안수호는 한가람 쪽에 미리 수를 써뒀다. 그는 설아현에게 넌지시 그의 습격 예정 사실을 알렸다. 지금쯤이면 설아현이나 그 부하들이 한가람을 감시하고 있으리라. 어쩌면 이미 여명단의 자객과 싸우고 있을 지도 모르고.
허나 만약 아이기스가 샤오메이를 노리고 이곳에 온 거라면 둘 중 하나였다. 설아현이 한가람 습격을 막아내는 데에 실패했거나, 혹은 다른 경로로 샤오메이에 대해 여명단이 알아냈거나.
둘 다 성가시다 못해 위험한 상황. 그렇다면 최대한 빨리 행동해야 했다.
“그 아이기스라는 녀석의 인상착의 좀 말해줄래?”
“……키 180 정도에 갈색 머리 서양인. 셔츠에 정장바지 차림이고 오른쪽 팔뚝에 문신이 있어.”
“지금은 관중석 안쪽에 있다 그랬지?”
“나갔으면 반대편으로 나갔을 거야. 계속 보고 있는데 적어도 우리 쪽으로 나오진 않았어.”
‘샤오메이가 목표인데 굳이 관중석에 몸을 숨길 필요는 없을 텐데. 그렇다면 미야가 목적인 건가? 아니면 뭔가 다른 걸 노리고…….’
그때 안수호의 뇌리에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하늘이는? 왜 아직도 안 오는 거지?”
“어?”
그가 시계를 확인했다. 강하늘이 화장실에 간지 벌써 30분 가까이 지났다. 아무리 화장실이 붐빈다 해도 이렇게까지 늦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설마……!’
안수호가 다급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스마트폰을 빼든 그가 곧바로 강하늘에게 전화를 걸었다.
뚜루루루루루.
한참동안 이어지는 신호음. 안수호의 등줄기를 따라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뇌리에 스친 불길한 예감이 점점 그 덩치를 불려가기 시작한다.
그때.
뚜루루루루. 뚝.
마침내 신호음이 끊기고 누군가 전화를 받았다. 안수호가 다급하게 외쳤다.
“하늘아?! 너 괜찮아? 지금 어디에 있”
오빠 뒤에 있는데요?
“오빠 뒤에 있는데요?”
전화기에서 들린 소리와 등 뒤에서 들린 목소리가 겹쳤다. 안수호가 망연자실한 얼굴로 고개를 돌리자, 강하늘이 한가롭게 전화를 받고 있었다. 한 손에는 반쯤 먹은 츄러스를 든 채.
“하아아아아.”
안수호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내 그가 핀잔하듯 그녀에게 묻는다.
“왜 이렇게 늦은 거야.”
“화장실이 워낙 붐벼서 좀 멀리 다녀왔거든요. 근데 처음 와보는 곳이라 길을 잃어가지고 좀 헤매다보니 늦었네요.”
“……손에 그건 뭔데?”
“이건 그, 냄새가 너무 좋아서 그만…….”
강하늘이 얼굴을 살짝 붉히며 츄러스를 아삭 베어물었다. 오물오물 움직이는 뺨에 안수호의 무릎에서 힘이 탁 풀렸다.
“하아아. 어쨌든 무사해서 다행이다…….”
“무사? 혹시 무슨 일 있었어요?”
“그게 말이지…….”
안수호는 강하늘에게 암살팀 멤버 아이기스에 관한 이야기를 해줬다. 물론 지예원이 바로 옆에 있기에 원작 내용에 관해서는 최대한 언급을 피하며 개괄적인 내용만 전달했다.
“……그럼 서둘러야 하는 거 아니에요? 그 사람이 우리보다 먼저 샤오메이를 만나면…….”
“서두르고 싶어도 샤오메이 쪽에서 모습을 드러내야 뭐라도 할 수 있어. 게다가 아직 녀석이 왜 나타났는지, 목적이 뭔지도 정확히 모르고.”
“일단 예ㅇ……지원 언니는 어디 숨어있어야 하는 거 아니에요? 만약 그 암살팀 사람이 언니 얼굴을 알고 있으면…….”
“이젠 그것도 어려워. 나 말고는 암살팀 얼굴을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이 없잖아. 아이기스야 인상착의를 알려줬다고 해도 놈들이 꼭 단독 행동만 하라는 법은 없으니까.”
“……다른 멤버도 같이 와있을 가능성이 있다는 거네요.”
“맞아. 나라고 암살팀 얼굴을 전부 아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아는 얼굴은 미리 경고해줄 수 있어. 그리고 놈들이 내 얼굴을 알고 있다 해도, 머리색도 바꾸고 모자에 마스크까지 썼는데 단번에 알아보긴 어려울 거야.”
지예원은 안수호에게서 떨어질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애초에 오늘 여기 따라온 것만 해도 그가 걱정되기 때문이었는데, 암살팀이 활보하고 있는 와중에 그에게서 떨어지려고 할 리가 없었다.
다만 상대방이 걱정되는 건 안수호도 마찬가지였다. 어디 그뿐인가, 강하늘도 지예원이 걱정되었다.
설령 상대와 오고가며 마주칠 때야 그녀를 알아보지 못 한다 쳐도, 만에 하나 전투가 발생하기라도 했다간 안수호의 곁에 있는 그녀에게도 단번에 이목이 쏠릴 것이다. 어쩌면 그 과정에서 그녀의 정체를 꿰뚫어보는 이가 나올 수도 있다.
암살팀을 알아보려면 지예원이 곁에 있어야 한다. 그러나 지예원이 그의 곁에 있으면 그들 또한 지예원을 알아볼 수 있다. 양쪽이 막힌 딜레마였다.
‘……그래도 굳이 따지면 지예원이 내게서 떨어지는 편이 나아. 전투가 무조건 벌어진다는 보장도 없고. 만약 암살팀이 둘 이상이라면 지예원을 지킬 수 있다고 장담하지 못해.’
암살팀은 원작 후반에 등장하는 세력이니만큼 개개인의 무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그렇지만 연심의 벚꽃 스킬 효과로 강하늘의 능력치를 빌린다면 한 명까지는 어떻게든 상대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승리를 장담할 순 없었고, 하물며 암살팀이 둘 이상이면 속수무책으로 당할 것이다.
‘하다못해 이쪽의 전력이 좀 더 두터웠다면 안심할 수 있을 텐데…….’
안수호가 그런 고민에 빠진 순간이었다.
“어, 수호 형?”
등 뒤에서 들린 익숙한 목소리.
세 사람이 고개를 돌리자 마침 류태현 일행이 이쪽으로 오던 참이었다. 몇몇은 무대에 정신이 팔린 것으로 보아 아마 미야의 공연을 보러 온 모양.
“형도 공연 보러 왔을 줄은 몰랐네. 미리 연락 좀 할 걸 그랬나?”
류태현은 자신이 안수호의 데이트를 방해하게 된 것인가 싶어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안수호의 귀에는 그의 말이 전혀 들리지 않았다.
‘찾았다.’
안수호의 고민을 해결해줄 답. 암살팀에 비해 부실한 그들의 전력을 보충해줄 열쇠가 바로 눈앞에 있었다. 류태현은 말할 것도 없었으며 하성민, 나은솔, 성아라도 각각 1학년 랭킹 4, 5, 8위에 해당하는 강자들이었다. 류진&류설 남매가 비교적 쳐지긴 하나 그들조차도 탑 20 안에는 들었다.
이들과 함께라면 만에 하나 암살팀이 지예원을 알아보고 서넛씩 덤벼든다 해도 능히 그녀를 지켜낼 수 있으리라.
“형?”
안수호의 얼굴에 뜻밖의 화색이 돌자 류태현이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 그를 향해 안수호가 말했다.
“태현아. 우리 오후엔 같이 행동할래?”
“……네?”
그 예상치 못한 제안에 류태현이 말을 놓기로 한 것조차 잊은 채 반문했다.
***
한편 그 시각. 강북구 어딘가의 어느 골목길.
“끄으으으으…….”
“거 가만히 좀 있어라. 괜히 억지로 움직이면 뼈 나간다니까? 이거이거 범죄자 새끼 아니랄까봐 말귀를 못 알아처먹네?”
흑룡회 소속 A급 헌터 조광일은 비열한 인상의 청년을 깔아뭉갠 채 그의 팔을 뒤로 꺾고 있었다. 그 곁에선 같은 흑룡회 소속 헌터 김요한이 설아현에게 전화로 보고하고 있었다.
“예 회주님. 회주님께서 말씀하신 여명단원은 제압 완료했습니다. 예. 한가람 헌터는 무사합니다.”
요한의 시선이 넌지시 한가람에게 향했다. 그는 앞 범퍼가 잔뜩 찌그러진 자신의 차를 내려다보며 한탄하면서도, 갑작스레 나타난 두 흑룡회 헌터를 미심쩍은 눈으로 흘기고 있었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당장 상황부터가 네버랜드로 향하던 길에 대뜸 여명단원인 다나카 진이 그를 습격하더니, 마찬가지로 대뜸 흑룡회 소속 헌터 둘이 나타나 그를 제압한 상황이었으니까.
그가 보기엔 다나카 진도 다나카 진이지만 그 이상으로 조광일이나 김요한 역시 수상하긴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서로 면식은 있었지만 조광일과 김요한은 한가람의 질문에 일절 답하지 않은 채 자기들 할 일만 했다.
“저기요 김요한 헌터. 도대체 이 남자가 절 습격한다는 걸 어떻게 안 겁니까? 그보다 여명단원이라니, 설마 이 남자가 여명단이라는”
“놈의 정체말입니까? 그건 아직 모르겠습니다. 입을 꾹 다물고 말을 안 해서요. 그렇지만 곧 경찰이 도착하면 데이터베이스 조회로 알아낼 수 있을 겁니다. 놈이 데이터베이스에 등록되어 있다면 말이죠.”
“조광일 헌터. 당신도 뭔가 아는 게 있다면 말을 좀 해주십시”
“야이 새꺄 내가 가만히 있으랬지! 니 한 번만 더 움직여봐라! 여명단 상대로는 과잉진압이고 뭐고 없어! 알아!?”
“…….”
시종일관 자신을 무시하는 두 사람의 태도에 한가람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속에서 화가 스멀스멀 올라왔지만 그럼에도 겉으로 표현하지 않는 것은 일단 두 사람이 그의 생명의 은인이기 때문이었다.
만약 두 사람이 없었다면 자긴 지금쯤 저기 누워 있는 저 사내에게 꼼짝없이 당했겠지.
그렇게 생각하면 두 사람에게 고마워해야 함이 마땅하나, 둘의 태도는 그런 고마움마저 싹 날려버릴 정도였다. 답답한 마음에 한가람이 보닛에 걸터앉은 채 담배를 한 대 물었다.
그 순간.
“내 이럴 줄 알았다.”
머리 위에서 들린 새로운 목소리에 세 사람이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높게 솟은 전봇대 위에서 한 남성이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저 보라니까? 다나카 저 쪽바리 새끼 저거 일처리 더럽게 못한다고 내가 그랬지? 어떻게 B급 초인 한 명 상대를 못해서 저지랄났다냐?”
“너무 뭐라 하진 마라. 보니까 3대 1이었던 거 같은데.”
요한의 얼굴에 의문이 스쳤다. 전봇대 위에는 분명 한 사람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분의 목소리가 들렸기에.
‘아니, 한 사람 더 있다.’
요한의 눈동자가 날카롭게 빛났다. 그의 감각이 전봇대 옆에 일렁이는 투명한 ‘무언가’를 포착해냈다. 그의 손끝에서 파지직! 하고 샛노란 전류가 튀었다.
“……회주님. 들개 두 마리가 추가로 붙었습니다. 잠시 전화 끊겠습니다.”
쿠웅. 쿵.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전봇대에서 사내가 뛰어내렸다. 한 번의 커다란 착지음과 한 번의 자그마한 착지음.
“준구야. 저놈 한 말 들었냐? 들개란다 들개. 네가 개새끼인 건 또 어떻게 기가 막히게 알아봤데? 눈에 보이지도 않을 텐데.”
“개새끼는 너겠지. 여자에 미쳐서 하루가 멀다하고 골방에서 좆방망이질만 존나게 해대는 새끼가.”
“쓰읍. 영웅호걸 모르냐 영웅호걸?”
“영웅호색이겠지. 좀 알고 쳐말해라 등신아.”
눈에 보이는 적 하나와 눈에 보이지 않는 적 하나. 김요한이 양손에서 전류를 튀기며 자세를 잡았다. 담배를 물었던 한가람도 트렁크에서 무기를 꺼내들었고, 조광일 또한 제압해두었던 다나카 진의 발목을 비틀어 분질러버린 뒤 자리에서 일어섰다.
“딱 보니 저 쪽바리 새끼는 못 싸울 거 같고. 그럼 2대 3이네? 어떻게 우리 영웅호걸께서 힘 좀 쓰셔야겠는데? 자신은 있으신가?”
“두말하면 잔소리지.”
사내가 오른손을 펼치자 그 위에서 푸른색 정육면체 모양의 에너지가 천천히 회전했다. 사내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걸린다.
“끽해야 A급 둘에 B급 하나. 낙승이야 낙승.”
다음 순간, 골목길에 다시 한 번 거센 굉음이 울려 퍼졌다.
* * *